2001년 1월호

빌 게이츠 위협하는 실리콘밸리의 사무라이

  • 박태견

    입력2005-05-11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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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브스’지 선정 세계 2위 갑부인 오라클사 래리 엘리슨 회장. 냉혹한 조직 관리와 정확한 미래 예측으로 거대 네트워크 제국을 건설했다. 스피드, 사치, 미인을 사랑하는 열정과 욕망의 승부사.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지금부터 4년여 전인 96년 10월 말의 일이다. 미국의 세계적 경영전문주간지 ‘포천’은 오라클사 회장인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과 마이크로소프트사(MS)의 빌 게이츠(Bill Gates) 회장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기사 제목은 ‘래리 엘리슨은 아합 선장이고 빌 게이츠는 모비 딕이다(Larry Ellison is Captain Ahab and Bill Gates is Moby Dick).’

    소설 ‘백경’에 나오는 두 주인공인 외발이 아합 선장과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의 사례를 들어 엘리슨과 게이츠 두 사람간의 숙명적 경쟁관계를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은 동시에 현재는 빌 게이츠가 그 누구도 넘기 힘들어 보이는 거대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으나, 조만간 집요하고 공격적인 엘리슨이 그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이츠 대 엘리슨, 15년 전쟁

    그로부터 4년 뒤인 2000년 11월, 미국의 또 다른 경영전문지 ‘포브스’는 해마다 관례에 따라 자체 집계하는 ‘올해의 미국 400대 부호 명단’을 발표했다. 그 결과 역시 1위는 MS의 빌 게이츠 회장(630 억달러), 그리고 2위가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회장(580억 달러)이었다. 1위와 2위의 격차는 불과 50억 달러. 외형상 엄청난 금액이기는 하나, 양측 주가가 몇 달러씩만 반대로 움직여도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근소한 차이였다.



    더 중요한 대목은 최근 오라클사는 욱일승천하는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는 반면, MS는 하향세로 반전됐다는 점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난 9월 25일 발표한 ‘세계 100대 기업‘ 랭킹에 따르면, 지난 99년 랭킹 1위를 차지했던 MS는 시가 총액이 3727억 달러를 기록해 5629억 달러를 기록한 제너럴 일렉트릭(GE)에 1위 자리를 내어주고 4위로 밀려났다. 반독점 관련 그룹해체 소송과 나스닥 주가 폭락에 따른 결과였다.

    반면에 오라클사는 2292억 달러로 12위를 차지했다. 오라클사의 전년도 랭킹은 81위. 한해 동안에자그만치 69위나 올라서는 경이로운 실적을 올린 것이다.

    4년 전 엘리슨과 게이츠 간의 대역전 가능성을 예고했던 ‘포천‘지는 이와 같은 결과에 기초해 지난 11월, 종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오라클사 래리 엘리슨 회장 관련 특집기사를 실었다. 커버스토리로 꾸며진 이번 기사의 제목은 ‘차기 세계 최대의 갑부(The Next Richest Man In the World)’.

    “지난 10여 년간 쉼 없이 계속돼온 두 사람의 게임은 이제 승부가 났다”는 의미였다. 집요한 아합 선장이 마침내 작살 한 자루로 거대한 백경 모비 딕을 잡게 됐다는 뜻이다. 이르면 내년쯤 역전이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것이 ‘포천’의 전망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상대적 쇠락이자 오라클이라는 새로운 최강자의 출현이다.

    엘리슨과 게이츠의 싸움은 정확히 지난 86년부터 시작됐다. 이 해 3월12일 오라클은 주당 15달러에 주식을 상장했다. 상장 첫날 종가는 20.75달러. 정확히 24시간 뒤인 3월13일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주당 21달러에 주식을 상장했다. 그러나 종가는 7달러. 첫 승부는 엘리슨의 승리였다. 그 후 15년간 마이크로소프트는 계속 오라클을 앞섰으나, 이제 마침내 대역전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스파이짓 불사하는 승부욕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하룻 밤 자고 나면 최대 갑부자리가 바뀌는 게 요즘 세계 재계 판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십 수 년간, 최소한 정보통신업계(IT)에선 마이크로소프트가 난공불락의 성이고, 따라서 최고갑부 자리는 빌 게이츠 몫이 될 것이라 여겨왔다. IT시대를 개막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신화가 워낙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이제 래리 엘리슨이 주도하는 새로운 신화가 쓰이고 있다.

    오라클 직원들은 평소 엘리슨 회장을 ‘사무라이’라 부른다. 외형적 이유는 그가 철저한 일본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엘리슨은 16세기 일본 교토의 고성을 그대로 본뜬 4000만 달러짜리 초호화 저택에 살고 있다. 소담한 일본 정원양식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그는 평상시 일본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다도와 검도를 즐긴다. 또한 그는 세계적인 일본 중세갑옷 및 투구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언론과 인터뷰 때에도 자택에서 편한 사무라이 복장으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엘리슨이 사무라이라 불리는 진짜 이유는 집요함 때문이다. 한번 목표한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쟁취하는 광기어린 집요함. 특히 그는 10여 년 전부터 ‘타도! 마이크로소프트’를 목표로, 한때에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리면서 집요한 공세를 펼쳐왔다. 이것이야말로 엘리슨을 사무라이라 불리게 하고 오늘날의 오라클을 이룩한 저력이다.

    엘리슨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얼마 전 세계 정보통신업계에서 화제가 된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워싱턴DC에 있는 로비회사 어소시에이션 포 컴페터티브 테크놀로지(ACT). 이 회사는 독점금지법 재판에서 미국 법무부와 싸우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지난 5월, ACT 사무실 부근에 유령회사 이름을 사용하는 한 사립탐정이 사무실을 임대해 들어왔다. 그는 며칠 뒤 직원을 시켜 ACT 건물 청소부들에게, 쓰레기를 가져다 주면 1200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며칠 뒤 청소부들이 이 사실을 ACT에 보고하면서 사건화됐다.

    6월 말, 문제의 사립탐정은 사설탐정기관인 인베스티게이티브 그룹 인터내셔널(IGI) 소속이며, 일을 시킨 배후 인물은 오라클사의 최고경영자 래리 엘리슨이란 사실이 언론의 추적 끝에 드러났다.

    이런 보도가 나가자 곧바로 마이크로소프트측은 오라클의 산업스파이 활동에 대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MS는 성명을 통해 “오라클이 독립적 이익단체나 정치후원 단체를 공격하는 것은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짓”이라며 “오라클은 MS에 비판적인 이익단체들을 후원해왔다”고 공격했다. MS는 또 “그 동안 오라클의 비열한 짓들에 비하면 이번에 알려진 사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오라클은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나 자유로운 의견 개진보다도 그들의 사업 목적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MS의 공세가 펼쳐지자 엘리슨은 곧 오라클사 본부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쇼어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IGI 직원을 고용한 사실을 깨끗이 시인했다.

    엘리슨은 “IGI에게 전국납세자동맹 등이 MS의 지원을 받는 단체인지를 파악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 불법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며 자신이 직접 쓰레기 뒤지기를 지시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이들 단체가 MS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마치 독립적인 지지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다”며 “사설 조사기관을 고용한 것은 MS의 반독점 위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이들 단체가 MS를 지원하는 연구자료를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반격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한 일은 숨겨진 사실을 찾아내 일반에 공개한 것으로,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버려진 물건은 버린 사람의 소유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라클의 행위는 산업스파이 행위의 일종임에 분명했고, 세간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미국산업안전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1000대 기업이 산업스파이로 인해 잃은 금액은 450억 달러. 일부에서는 1000억 달러로 추산할 만큼 미국에선 산업스파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지난 93년 소프트웨어 위조 사건을 조사하면서 한 경쟁사의 쓰레기를 뒤지도록 의뢰한 적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쪽에서 보면 ‘장군 멍군’ 식으로 오라클로부터 부메랑을 맞은 셈이다.

    이처럼 랭킹 1위를 차지하기 위한 실리콘밸리의 전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치열하기로 악명 높다. 특히 현재 소프트웨어 업계 1,2위를 다투고 있는 게이츠와 엘리슨은 애당초 사업 출범 당시부터 산업스파이 행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IT업계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사를 쓴 데이비드 A. 캐플런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가능케 한 초석인 컴퓨터 운용체계 MS-DOS는 개발자 빌 게이츠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종의 책략을 꾸민 기술 매수자 빌 게이츠의 ‘돈’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도 CP/M이라는 개리 킬달의 최초 운용체계를 본떠 시애틀의 한 컴퓨터 가게가 약간 변형한 복사판을 빌 게이츠가 사들여 MS-DOS로 둔갑시킨 것이다.

    오라클 성장의 어두운 이면도 마이크로소프트에 뒤지지 않는다. IBM이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순진하게 공개한 SQL(Structured English Query Language: 데이터 베이스 관리 시스템에 관한 기본 명령어)을 손쉽게 입수한 오라클은 그 아이디어를 감쪽같이 상업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오라클이라는 회사 이름도 엘리슨이 다른 회사에 근무할 때 동료들과 수행했던 한 프로젝트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쯤 되면 실리콘밸리의 역사는 가히 ‘모방과 가로채기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는 게 캐플런의 주장이다.

    그렇긴 해도 ‘산업스파이’라는 여론의 비난은 이제 세계 랭킹 1위 등극을 눈앞에 둔 오라클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던 듯싶다. 이에 엘리슨은 얼마 전 그룹 이미지 개선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엘리슨은 지난 11월29일 조 록하트 전 백악관 대변인(41)을 고위급 홍보담당 임원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오라클이 몇 년 내로 e비즈니스업계의 최고 선두주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며 “록하트는 실리콘밸리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안목과 경륜으로 오라클의 새 시대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조지타운대 후배인 록하트 전 대변인은 96년 클린턴 재선팀의 선거본부 대변인을 지냈으며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이 한창이던 98년 10월 백악관 대변인이 돼 올 10월 말까지 활약했다. 그는 ABC CNN 등의 방송기자로 잔뼈가 굵었으며 80년 지미 카터, 84년 월터 먼데일, 88년 마이클 듀카키스 등 역대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미국 내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프로 대변인을 회사 대변인으로 영입, 회사와 자신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관리해 나가겠다는 게 엘리슨의 생각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겨룬 오랜 전쟁에서 승리를 자신한 엘리슨이 이제 수성(守城)에 들어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어린아이들까지 알 정도지만, 오라클이란 이름은 아직 어른들에게도 그리 익숙하지 않다. 두 회사 모두 소프트웨어업체이긴 하나, 마이크로소프트가 개인 PC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 오라클은 기업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업 중심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라클은 현재 각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데이터를 관리하는 사업, 즉 DBMS(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를 핵심사업으로 삼고 있다.

    데이터베이스(DB)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모아둔 것을 말한다. 은행의 고객 자료나 백화점의 고객 명단, 도서관의 도서목록도 일종의 DB다. 그러나 DB는 원할 때 저장된 정보를 신속히 찾을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DBMS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요컨대 DBMS는 데이터베이스(DB)에 저장된 방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다. DBMS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정보 저장 창고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심부름꾼 같은 프로그램이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은 DBMS를 사용하고 있는데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각종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할 필요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면서 DBMS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점하다시피 한 컴퓨터 운영체계(OS)에 버금가는 중요 소프트웨어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 전세계 DBMS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라클사의 ‘오라클8i’이다. 세계 500대 기업의 절반 이상과 미중앙정보국(CIA) 등 세계 주요 공공기관이 오라클8i를 채택하고 있다. 국내시장도 마찬가지다. MS의 ‘SQL서버 2000’, IBM의 ‘DB2 유니버설 데이터베이스 버전(UDBv7)’ 등 경쟁제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오라클의 독점적 아성을 위협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인터넷 시대는 오라클의 시대

    이와 같은 오라클의 경쟁력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포스트-PC(PC 다음) 시대’에 대비한 엘리슨의 집요한 제품 개발 덕이다. MS가 PC를 기반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윈도 운영체계를 만들었다면, 오라클은 일찌감치 인터넷 서버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포스트-PC 시대에 핵심기술로 부상할 데이터베이스 분야에 승부를 걸었다.

    특히 최근 오라클의 가공할 상승세는 인터넷 전자상거래와 관계가 깊다. 전자상거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오라클의 데이터베이스 사업도 확장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전자상거래 중에서도 오라클이 강세를 보이는 분야는 기업간(B2B) 전자상거래. 기업 대 고객(B2C) 전자상거래는 수익성에 대한 의문으로 투자자가 줄고 있는 반면 B2B 사업은 2004년까지 1조4000억 달러의 방대한 시장이 형성되리라 예상되는 초고속 성장분야다. 오라클은 올 들어 산업별로 발표된 굵직굵직한 인터넷 공동구매 시장 설립에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로 참여했다.

    지난 2월 오라클은 제너럴모터스,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이 연간 1600억 달러 상당의 부품 구매를 인터넷으로 해결하기 위해 설립한 자동차 공동구매 시장에 참여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세브론이 주도하는 석유업계 B2B와 시어즈, 까르푸 등이 주축이 된 유통업계 B2B 시장에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참여키로 했다. 전문가들은 오라클이 아리바, i2, 커머스원 등 전문업체를 누르고 B2B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기업간 거래에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과 함께 기업의 일손을 덜어주는 통합 시스템 개발에서 앞서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모건스탠리, 리먼브라더스 등 월가의 투자자들이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등 정보통신주의 급락을 보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오라클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도 바로 전자상거래의 높은 성장성 때문이다.

    오라클의 엘리슨 회장은 ‘PC시대에서 인터넷시대로 전환’이라는 이 대목에 기초해 오래 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이츠를 이길 거라고 장담해왔다.

    “지금은 빌 게이츠의 PC시대가 아닌 정보화시대의 새벽이다. 정보화시대! 여기에 바로 우리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것은 사업을 바꾸고 문화를 바꿀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바꾸고, 의사소통 방법과 놀고 일하는 방식도 바꿀 것이다.”

    4년 전 엘리슨이 ‘포천’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예언이다. 지금은 상식이 되다시피 한 이야기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빌 게이츠의 PC시대 종언’을 단언할 정도로 배짱 좋은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오라클 정도는 경쟁상대로 여기지도 않을 정도로 ‘잘 나가던’ 빌 게이츠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도발적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승리의 여신은 엘리슨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지난 11월13일부터 닷새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지구촌 최대의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컴덱스2000/가을(Comdex 2000/Fall)’에서도 이 장면은 재연됐다. 게이츠는 강연에서 “무선인터넷과 각종 인터넷 기기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데스크톱 PC의 역할은 오히려 커질 것”이라고 역설한 반면, 엘리슨은 “이제는 PC에서 네트워크 컴퓨터로 전환하는 시대”라고 정면에서 게이츠에게 일침을 가했다.

    엘리슨은 일주일에 50시간만 일한다는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다. 대신 그는 5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도 틈이 날 때마다 4000만 달러짜리 초호화 자가용 비행기 걸프스트림V를 직접 몰거나, ‘사요나라’라고 이름붙인, 30m가 넘는 경주용 요트를 타고 폭풍우 치는 거친 바다에서 모험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광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부상도 잦아, 할리우드의 스턴트맨보다 더 자주 병원신세를 진다. 그는 서핑을 하다가 목이 부러지는가 하면, 오토바이 경주를 하다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결혼을 세 차례나 했을 정도로 플레이보이 기질도 강하다. 소비욕도 강해 4000만 달러짜리 저택에 살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사무실에 있는 그의 의자 값만 해도 7000달러에 이른다. 정치적 성향으로는 정보통신산업 육성에 적극적인 민주당을 지지, 선거철이면 공개리에 두둑한 후원금을 내놓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삶은 정력적으로 일하고 즐겁게 사는 ‘에너지’ 그 자체라는 게 실리콘밸리의 평가다. 일각에서는 그를 ‘실리콘밸리의 로맨티스트’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1944년 미혼모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친척집을 떠돌다 회계사의 양자로 들어갔다. 시카고대 공대에 진학한 그는 77년 소프트웨어회사의 프로그래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오라클’로 명명, 미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미국 주요 기관을 고객으로 만들었다. 이때 컴퓨터 붐을 타고 급성장한 IBM를 제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PC 중심의 소프트웨어 시장을 독점하자, 오라클도 미니컴퓨터를 위한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을 개발하면서 급신장했다. 지난 91년 한 차례 도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클린턴 정권 출범 후 정보통신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리슨은 제품 개발 및 마케팅 업무에 주력해왔다. 회사 내 경영은 업무최고책임자(COO)인 레이먼드 레인 사장에게 맡겼다. 그러다 보니 마이크로소프트 등 경쟁사보다 상대적으로 조직 분위기가 느슨하다는 평가를 받아왔고, 엘리슨의 조직 장악력도 경쟁사들에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99년 들어서부터는 회사경영도 직접 챙기고 있다. 세계 최대 기업다운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다.

    엘리슨의 경영개선 작업은 ‘웹경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스코, 델컴퓨터 등 웹경영에 탁월한 업체들에 크게 자극받은 엘리슨 회장은 인터넷을 통해 경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에 중점을 두었다. 99년 오라클은 본사와 70여 개국 지사의 실적을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를 단일화했다. 오라클은 또 전세계에 산재해 있던 서버 컴퓨터 2000여 개를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의 158개로 집중시켰다. 중앙 데이터베이스가 저장 관리중인 정보를 인터넷 클릭 한번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연평균 30% 이상 매출이 증가하는 최대 성장기업답지 않게 과감한 군살빼기를 단행해 2000여 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동시에 직원 성과 평가를 매출이 아닌 순익 기준으로 전환해 순익 비중을 높이는 데 치중했다. 잘 나갈 때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경영원칙에 충실한 조처였다.

    내부 경쟁자, 가차없이 숙청

    이 경영개선 작업이 성공을 거두면서 오라클은 지난해에만 10억 달러 가까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매출에 대한 순익비율도 31.4%로 늘어났다. 올해도 10억 달러 비용절감 목표를 거의 달성한 상태다.

    그는 장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내부 정적도 가차없이 숙청해 지난 7월 업무최고책임자이자 사장직을 맡고 있던 오라클사의 2인자 레이먼드 레인을 전격 해임했다. 오라클의 2인자였던 그가 최근 돌연 사임한 배경에 대해 미 정보통신업계에 정통한 인터넷뉴스사이트 시넷뉴스닷컴은 7월17일 ‘레인의 사임은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래리 엘리슨과 겨룬 파워게임에서 패배한 결과’라고 보도했다.

    시넷뉴스닷컴은 ‘인터넷사업에 대한 전략상의 의견 차이로 인한 두 사람의 갈등은 최소한 1년 반 이상 계속됐으며 레인이 엘리슨으로부터 더 이상 좌절감과 모멸감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만두게 됐다’고 전했다.

    레인이 96년 사장에 취임한 이후 오라클의 매출은 96년 42억 달러에서 지난해 88억 달러로 두 배 넘게 늘었다. 올해는 100억 달러를 넘을 전망이다. 이에 따라 레인은 회사를 위기로부터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인터넷사업 전략과 운영 방안을 놓고 엘리슨과 심각한 의견 대립을 보이다 해고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넷뉴스닷컴에 따르면, 엘리슨은 사장인 레인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고위층 회의를 주재하거나 중간 간부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레인이 참석한 회의에서 그의 발언을 무시하는 등 지난 1년 남짓 노골적 ‘이지메’를 가해왔다.

    이런 내부 숙청 과정은 불협화음도 야기했다. 지난 11월 부사장 게리 블룸은 사임 의사를 공식 발표했다. 올해 40세의 블룸은 17일 사임 이유에 대해 “오라클의 최고경영자(CEO)인 래리 엘리슨이 있는 한 내가 CEO가 될 기회는 희박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엘리슨의 친정체제 구축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 표출이었다. 시장 일각에서는 엘리슨의 과도한 친정체제 구축이 오라클의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실제로 주가도 출렁였다.

    그러나 엘리슨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도리어 조직정비 과정에 자신의 회사 내 보유 지분을 확대하는 공격성을 보였다. 엘리슨은 지난 9월 앞으로 3년간 연봉을 안 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라클 주주들의 합의로 결정된 엘리슨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에 따르면, 그는 오는 2003년 5월까지 받기로 했던 270만 달러의 연봉·보너스를 포기하며, 대신 당초 1360만주로 정해졌던 스톡옵션을 2000만주로 늘려 받기로 했다. 이런 결정은 오라클의 경영 체제를 엘리슨 중심으로 확고히 다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엘리슨으로서는 연봉을 받는 것보다 스톡옵션이 늘어나는 게 훨씬 이익이다. 스톡옵션 권리행사 가격이 13.75달러로 크게 낮기 때문이다. 이런 계약 변경으로 엘리슨은 최소한 10억 달러이상의 추가수익을 올리게 됐다.

    오라클사의 한 전직 임원은 최근 ‘포천’ 인터뷰에서 엘리슨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위대한 테크놀로지스트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위대한 경영자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위대한 지도자다.”

    다음 목표는 생명공학

    그의 말처럼 엘리슨은 분명 위대한 지도자다. 세계 최대 기업자리를 넘보는 오라클사의 최근 주가가 이를 웅변해준다. 문제는 앞으로 그가 오라클을 어디로 끌고 나갈 것인가에 있다. 이와 관련, 엘리슨은 지구상에 거대한 ‘오라클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표명하고 있다.

    엘리슨은 앞으로도 계속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에 기반을 둔 기업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고 밝힌다. 그는 기업 애플리케이션은 오라클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최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요컨대 지구상의 모든 기업들이 오라클의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토록 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있게 말한다.

    “우리 오라클은 거대하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할 만한 사이즈와 두뇌, 파워를 갖고 있다. 다른 어떤 소프트웨어 회사도 우리를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엘리슨은 이 정도의 성취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또 말한다.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내가 이스라엘에 소유하고 있는 바이오테크놀로지 기업인 쿼크(Quark)를 경영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떤 이는 말한다. 엘리슨의 다음 목표는 영원히 사는 방법을 알기 위한 생명공학 아니겠느냐고.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천하의 모든 부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진시황의 마지막 소원도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던가. 이를 위해 불로초를 찾으라고 동방으로 선남선녀 300명을 보내고 거대한 진시황릉을 마련했던 것이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정상을 눈앞에 둔 엘리슨. 그의 최종 목표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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