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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⑭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남자 후보 제치고 일찌감치 낙점, 여성의 당당한 승리!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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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5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것으로 추정된다.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고구려 백제에 비해 신라는 수도를 옮기는 천도가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안정된 사회였다는 점 또한 여왕이 나온 배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대내외 조건이 갖춰졌다 하더라도 선덕여왕의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똑똑했다는 점, 무엇보다 국인(國人)들이 추대했다는 점을 반드시 짚어야 한다고 조 박사는 강조한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선덕왕이 즉위했다. 휘는 덕만이다. 진평왕 장녀로서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똑똑했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국인(國人)이 덕만을 세웠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삼국사기’ 권5, 선덕왕 즉위년)

이 말을 풀어보면 아들이 없던 진평왕 사후에 국인들이 덕만을 추대해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조 박사는 여기서 특기할 만한 단어로 ‘국인’을 꼽는다. 국인이란 신라시대에 나름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조 박사는 여러 기록을 통해 국인의 의미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국인들이 그를 폐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인은) 왕위계승과 폐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나 세력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뤄보면 선덕여왕의 왕위계승에 관여한 국인들은 그녀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우리 역사의 여왕들’)



비록 성골 남자가 없어 선덕이 여왕이 되었으나, 왕이 여론을 무시하거나 집권세력의 분위기를 무시한 독자적 선택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생전에 진평왕은 딸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치조직 개혁과 정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폐위된 작은아버지 진지왕의 아들 용수(자신의 딸 천명의 남편이기도 함)를 불러들여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 관부인 내성사신에 임명했다. 혹시라도 범(凡) 왕족으로 기득권을 갖고 여왕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왕을 호위하는 경비부대인 사위부도 개편해 왕위계승에 반대할 세력을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반란세력에 대한 처벌도 가혹했다. 진평왕은 죽기 1년 전인 631년에 반란을 일으킨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난을 진압하면서 칠숙의 경우 무려 구족(九族)을 멸하는 연좌제를 단행해 반란의 싹을 잘라내려고 애썼다.

선덕여왕은 비교적 오래전에 왕위계승을 통고받았다. 진평왕이 선덕공주를 왕위계승자로 삼은 시기는 30대 초반인 612년 전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632년 50대 초반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대략 20년 동안 왕위 계승자의 지위를 갖고 산 셈이다. 21년 동안 진평왕은 딸에게 제왕의 자질을 키우도록 했을 테니 선덕왕은 ‘준비된 왕’이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연호를 고치는 자신감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은 ‘신라에서 여자를 일으켜 세워 왕위에 올렸으니 실로 난세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대놓고 욕을 했지만 신라 사람인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선덕공주는 자라며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추어 왕위를 이을 만했다’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삼국사기’는 아예 선덕여왕을 여왕이라 칭하지 않고 ‘선덕왕’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참조하면서도 민간에 유통하고 있던 사료나 설화들을 적극 모아 자료로 삼은 일연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으로 표기하고 있다(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이는 민간에서도 여왕의 즉위가 큰 관심사였음을 짐작케 한다.

즉위 원년 선덕여왕은 대신인 을제(乙祭)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아무래도 집권 초반기 순탄하지 않았을 즉위 과정에서 왕위 문제를 논의할 때 지도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 을제에게 국정을 맡겨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한 조치’(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로 추정된다.

전반기 정국 운영은 ‘삼국사기’를 토대로 할 경우 몇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즉위한 해에 각 도에 사신을 파견해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늙어 자식이 없는 사람,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을 구제했다.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제하는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재위 2년 되던 633년에는 전해의 가뭄을 이유로 그해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재위 3년 정월에는 깜짝 놀랄 만한 조치를 단행하는데, 다름 아닌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친 것이다. 아버지 진평왕의 국상기간이 끝나자 아버지 때부터 쓰던 ‘건복’이라는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이다. 이는 자신감의 표현이며 자신의 통치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전쟁도 많이 치렀다. 당시 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영토를 크게 넓혔다. 북한산비 창녕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등 우리가 국사 시간에 달달 외운 ‘진흥왕 순수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신라의 영토 확장에 자극받은 백제와 고구려는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두 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덕여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여왕은 재위 5년째인 636년 서남쪽 변경에 쳐들어온 백제 군사들을 물리쳤다. 재위 7년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한편 재위 8년 2월에 서울 외에 작은 도시를 두는 인구 분산책을 꾀했고 재위 9년에는 도당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선덕여왕의 최고 업적으로 첨성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첨성대가 여왕의 작품이라는 점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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