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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발굴|현대·북한 막후채널 고바야시 게이지 증언

“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 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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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1월 말, 나는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김용순 비서 회견은 2월 초에 이루어졌다. 김비서는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비서 겸 정치위원후보이고, 최고인민회의(국회)의 외교위원장에 취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견은 만수대 의사당 위원장실에서 이루어졌다. 김비서가 “이번은 기자회견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희망해, 예정된 약 4시간 중 처음 2시간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머지 시간은 회견을 하기로 했다. 김비서가 우선 세계정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먼저, 미·북 관계. 북한은 매우 열심히 미국과의 접근을 원하고 있으나, 미국이 북한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단지 핵개발에 관해서다. 핵문제만 해결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며, 돈도 내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국가의 안전 면에서는 미국과의 화해가 불가결하지만 북한의 긴급 과제인 경제재건과 관련해 미국의 원조는 기대하기 어렵다.

일·북 관계. 가네마루씨가 정치력을 잃어버리고 다나베(田邊) 전 사회당 비서장이 은퇴한 당시로서는 일본의 정치가 중에 진정으로 일·북 관계의 타개에 몰두하려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은 국교가 회복하지 않으면 일전 한푼도 내놓지 않을 나라다. 일·북 국교회복에는 지금까지의 경과로 볼 때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급한 북한의 경제재건에는 도음이 될 것 같지 않다.

따라서 북한이 진심으로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면, 한국과 협력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중국의 경제개발에는 외자도입이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알고 보면 재외 화교자본이 8할을 차지하고 있다. 북한처럼 리스크가 큰 나라에 보통의 나라는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조국이기 때문에 이윤을 고려하지 않고 투자하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사정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북한에는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민정권이 탄생한 지금이 교류를 촉진할 절호의 기회다.’

대화는 2시간 이상 계속됐고 다음에 기자회견에 들어갔다. 회견중에 김비서는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반도의 분단, 통일에 일본이 책임질 이유는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않았다면, 분단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민에게 입힌 한없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잘못을 빌고, 보상하고, 그리고 통일에 대해서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에 대해 “신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KCIA)의 해체,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 어떠한 민주화 정책을 실시할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비서는, 내가 북한에 체재하는 동안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했으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귀국 후, 곧 서울의 김영삼 대통령당선자에게 편지를 썼다. 김비서와 대화한 내용을 자세히 전하면서 북한이 김대통령의 취임연설에 주목하고 있으니 북한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삼가고 통일로 나아가도록 제안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적었다.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연설에는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 미국과 일본이 중요한 우방국이지만 동포의 나라 북한은 그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이 한 구절은, 그 후 북한이 핵개발의혹을 둘러싸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의 탈퇴성명을 발표해 남북관계가 극도로 긴장되었을 때, 한국 국민 일부가 ‘김영삼정권은 북한에 대해 너무 무르다’는 비판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나는 남북관계의 긴장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김용순 비서에게 편지(참고2)를 썼다. 북한의 반응은 평양에서 돌아오는 지인들로부터 전달받아, 김비서가 내 편지를 읽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북·미 대립이 심각해져 사태는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북·미의 대립은 1994년 6월, 미대통령 특사로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의 조정으로 해결 조짐을 보였다. 카터 전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남북한 최고수뇌회담 개최를 수락한 김일성 주석은, 그 이유 중 하나로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연설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만일 김일성 수석이 회담예정일 2주 전에 급사하지 않고 예정대로 남북수뇌회담이 열렸다면 남북 관계는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은 보답을 받지 못한 채 끝났다. 운이 없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북한에 15만t 식량 지원 성사

북한의 식량부족이 표면화하고, 북한 정부도 그 사실을 인정해 각국으로부터 식량원조를 받기 시작했던 95년 7월, 나는 아사히신문을 퇴사해 규슈(九州)국제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 후쿠오카의 내 아파트로 도쿄를 경유해 북한에서 팩스가 날아왔다.

“우리(북한) 식량지원문제로, 남조선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베이징에 주재하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사무실과 접촉했지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에게 우리(북한)의 진심을 알려, 교섭상대를 보내도록 부탁해 주지 않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김대통령에게 직접 연결되는 팩스번호를 알고 있어 내가 보내는 팩스는 측근의 체크 없이 곧바로 대통령의 손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 온 팩스가 김용순 비서로의 의뢰이며 내용도 틀림없음을 확인한 뒤, 김영삼 대통령 쪽에 사정을 설명하고 “책임자를 베이징에 파견했으면 좋겠다”는 팩스를 보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장을 베이징에 파견, 북한에 15만t의 쌀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서울을 방문해 대통령 관저에서 식사를 하다가 나는 김대통령에게서 여러 가지 불평을 들었다.

“한국은 북한에 식량원조로 쌀을 보냈습니다. 일본처럼 묵은 쌀을 보낸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제일 좋은 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쌀을 보내주면 한국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겠다는 베이징에서의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남북대화를 진전시키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나는 96년 1월말, 김용순 비서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용은 “남북관계를 개선할 용의가 있다면 그 신호로 김영삼 정권에 대한 비난을 1개월이라도 좋으니까 멈추어 주었으면 한다. 한국은 그것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책이다” 등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오지 않았다. 나는 무력감에 휩싸였으며, 중개역할에 피로를 느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무렵 김용순 비서에게 내 편지가 전달되는 시스템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하급 지도원(과장급)이 상부에 보고하는 서류를 제멋대로 선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금강산 개발사업에 개입하다

현대가 내게 중개를 의뢰 해온 것은 더 이상 중개자로서 내가 할 일은 끝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정부간 교섭이 불가능하다면 민간이 대신할 수 없을까 하는 기대에 나는 중개를 승낙했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편지를 띄우고 반년 이상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나는 재차 요시다 사장에게 중개를 의뢰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서 북한으로부터 “교섭을 하고 싶다”는 회답이 왔다.

현대 일행과 평양에 동행했을 때, 이 문제를 담당했던 황이라는 지도원에게 “왜 연락이 늦어졌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편지를 책상 속에 넣어 둔 채 비서에게 전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서류는 상부에 보고하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의 습성 때문에 교섭이 반 년 이상이나 늦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겨우 교섭이 개시됐지만 실제 양자가 얼굴을 마주하기까지는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현대가 내게 팩스와 전화를 보내면 그것을 요시다 사장이 평양에 전달했고, 북측의 응답은 역코스로 내가 현대에 전달했다. 요시다 사장은 그 사이 수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왕래가 수십 차례 있은 후 98년 1월 말, 드디어 2월3일부터 싱가포르에서 첫 회합을 갖기로 했다. 여행준비를 하고 호텔까지 예약했으나 이틀 전 갑자기 취소됐다. 원인은 현대측에 있었다.

현대그룹은 그때까지 명예회장의 차남 몽구씨가 그룹회장으로 모든 것을 관리했다. 그런데 정명예회장은 북한과의 교섭에 앞서 삼남 몽헌씨를 그룹회장으로 승격시켜 2인회장제를 시행하고 몽구씨는 국내관계, 몽헌씨는 해외를 맡도록 지시했다. 양 그룹 사이에 북한을 ‘해외’로 볼 것인가 ‘국내’로 볼 것인가를 놓고 이견이 발생했던 것 같다.

이미 북한과 거래를 하고 있던 몽구씨쪽 간부가 북한측에 “몽헌그룹과의 교섭은 현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팩스를 보냈다. 그 때문에 현대의 속사정을 모르는 북한측이 서둘러 회합을 취소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명예회장이 “북한과의 교섭 책임자는 몽헌으로 한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금방 해결됐지만 이로 인해 첫 회합은 예정보다 2주 정도 늦어진 2월15일 베이징에서 열리게 되었다.

나는 중개인 자격으로 이 회합에 참가했다. 북한측은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김용순 위원장)의 송호경 부위원장이, 현대측은 정몽헌 회장이 대표로 나왔다. 베이징 호텔을 예방한 나에게 송부위원장은 “선생님이 지금까지 공화국을 위해 수고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정중하게 사의(謝意)를 표명했다. 이 모임을 계기로 교섭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 후 교섭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현대측으로부터, 또 교섭에 참가한 요시다 사장 등으로부터 받은 보고에 따르면, 정명예회장의 집념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열의가 수많은 난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우선 교섭 초기, 북측은 개발을 허가하는 전제조건으로 ‘쌀 100만t 원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명예회장이 “쌀 100만t을 즉시 보내는 것은 어렵지만 옥수수라면 우리 농장에 5만t이 남아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보낼 수 있다”라고 대답해 교섭은 단숨에 궤도에 올랐다. 북한은 그 후에도 생고무, 비료 등을 요구했고 현대측은 ‘정부가 허가를 내리면’이라는 조건으로 가능한 한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교섭이 진행되고 문제 해결단계로 접근하자 정명예회장 일행은 계약에 사인을 하기 위한 일정 조정에 들어갔다. 그 조정단계에 또 난관에 부딪혔다.

앞서도 말했듯이 정명예회장은 “판문점을 통해 가고 싶다”고 요구했다. 이 문제는 정명예회장이 “소를 보낸다”는 묘안을 내 해결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측이 “소를 태워 오는 트럭을 갖고 싶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는 자동차는 군용으로 전용되기 때문에 기증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권이 발족, 나의 오랜 친구인 강인덕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이 통일원장관으로 발탁됐기 때문에 강장관에게 이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 공관에는 연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동문제연구소에 몇 번이고 전화를 하고 팩스도 보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돼 버렸다. 바로 그 전부터 중국 동북부에서 광우병이 유행, 한국측이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역병으로 북한도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북한에 들어간 트럭은 그 병원체를 갖고 돌아올 위험성이 있으므로, 북한에 놓고 와야만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현대측은 드디어 낙착을 보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와 같은 한국측 보도에 이번에는 북한이 “남조선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도 않는 병이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며 심하게 반발, 한때 교섭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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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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