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움직임과 관련, 지금 한나라당에선 두 가지 음습한 설이 나돌고 있다. 한나라당의 ‘세대교체 실패설’이 바로 첫 번째 설이다. 지난 8월말 한나라당 중진의원 10여 명이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저녁회식을 했다. “당내 세대교체 바람에 맞서기 위한 조직적 응전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이들의 입장을 듣기 위해 일부 기자들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의원들은 의미 있는 얘기들은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보수 중진의원들의 특징 중 하나는 ‘기자들과 TV카메라 앞에서의 침묵’이다. 소장파가 중진 퇴진론의 군불을 때는 것을 보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모르는 척한다.
그러나 ‘언론을 상대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역량에선 소장파를 압도한다는 것이 보수 중진들의 자신감이다. 60세 이상 고령, 5·6공 출신은 영남권 중에서도 특히 대구·경북에서 비율이 크게 높다. 대구 국회의원들의 경우 11 명중 9명이 60세 이상이다. 경북도 16명 중 10명이 60세 이상이다. 민정당, 5·6공 관료출신도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퇴진론’의 표적이 될 만하다. 그러나 TK는 ‘무풍지대’다.
경북의 A의원. 고령에 다선, 민정계다. 경선 때 강재섭 후보를 밀어 최병렬대표와도 친하지 않다. 그러나 공천 받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는다. 도전자가 없기 때문이다. 경북의 B의원은 비리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공천에 절대 불리한 조건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B의원에게도 아직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의 현역의원 16명 중 물갈이가 되는 의원은 수뢰혐의가 확정된 김찬우 의원 한 명뿐일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지난 3년 간 ‘개혁’성향을 보이지 않은 C의원. 최근 개혁성향 재선의원 모임인 ‘국민우선연대’에 열심히 참여한다.
배후설 시초는 7월 최대표 발언
대구 의원들도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 ‘막강한 조직력’을 앞세워 철옹성을 구축해놓고 있다. 대구·경북 출신 전문가그룹이나 명망가는 많다. 그런데 왜 이들은 한나라당을 외면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 틀’이 신인에게 공정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경북 한 의원의 측근은 “어떤 공천 방식을 적용하더라도 대구·경북 현역 의원들은 막강한 조직력을 동원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것이다. 이들을 낙천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TK 의원들과 전국 각지 민정계 출신 의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 최근 있었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이 바로 그것이다. 경선에서 3등을 한 대구 출신 강재섭 의원 측근의 말. “대구·경북 의원들이 같은 지역 출신인 강후보 대신 앞다퉈 최병렬 대표를 돕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걸 보고도 못 막아서 안타까웠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지난 6월 한나라당 경선 막바지 무렵, 서청원 후보의 한 측근은 서후보에게 “제발 전화 한 통 좀 하시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 측근에 따르면 서후보는 최병렬 후보와 예측불허의 혼전을 겪고 있음에도 대구·경북 의원들에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끝내 걸지 않았다. 서후보는 “대구·경북은 우리 당 깃대만 꽂으면 국회의원 되는 곳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서후보의 고집이었다. 상당수 대구·경북 의원들은 이러한 서후보를 ‘전폭적으로 외면’했고, 이는 최대표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한 고위 당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후보는 대구·경북 의원들에게 빚진 게 전혀 없다. 서후보가 대표가 됐다면 그들이 편하게 국회의원이 또 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대표는 대구·경북 등 영남 의원들, 민정계 출신 중진들에게 경선 막판에 빚을 졌다. 최대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들 의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소장파는 대선후보 경선, 대표 경선 등 중요한 순간마다 늘 사분오열했다. 소장파 추진력에 대해 의심하는 눈길도 많다. 이런 점이 영남권 인물교체를 어렵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한나라당에선 세대교체론과 관련, ‘최병렬 대표의 소장파 배후조종설’도 나온다. 서청원 대표도 비슷한 견해를 ‘우먼타임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경선 전 최대표가 소장파 의원들과 개별 접촉해 ‘나를 밀면 당 개혁, 세대교체 문제 등에서 소장파의 입지를 최대한 배려하겠다’고 약속해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것이 배후조종설의 요지다.
소장파가 잠잠하던 때였던 7월2일 최대표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부패하고 부도덕한 사람, 반민주적인 사람, 나이 많은 형님, 기회주의적 세력이 우리와 동거해왔다. 우리가 이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주는 우를 범했다”고 말한 것이다. 흥미 있는 대목은 이날 최대표가 열거한 퇴진 대상은 두 달 뒤 소장파가 제시한 4가지 퇴진조건(비리혐의 연루자, 5·6공 정권 협력자, 고령자, 영남의 다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현재 세대교체론을 설파하는 소장파들 상당수는 최대표에 의해 주요 당직에 임명된 경우가 많다. 최대표는 2000년 총선 공천 때 중진 낙천을 주도한 윤여준 의원을 총선기획 담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9월3일 발탁했다. 최대표와 윤의원은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정무수석, 정무비서관으로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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