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용 : 좋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책을 통해 정리하긴 했지만 그리 체계적이진 못했어요. 더욱이 관련자료를 일일이 찾아보고 쓴 게 아니라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쓴 것이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 기회에 현대사 전문가와 함께 다시 과거를 돌아보면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겼으면 합니다.
박 : 책 앞쪽에서는 이승만 박사와 신탁통치 반대운동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평가와는 아주 다른 해석을 하셨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요.
강 : 광복후 이승만 박사가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저는 그분을 거의 광신도처럼 지지했어요. 그 무렵 이박사 반대파가 ‘이승만은 일제시대에 해외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사람이다’는 얘기를 많이 퍼뜨렸습니다(실제로 이승만은 1920년대에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것이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직에서 탄핵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저는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알기에 이박사는 신탁통치에 대해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박사처럼 단호하게 반대하진 않았어요. 그는 신탁통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겁니다.
지지세력 없는 이승만의 선택
박 : 신탁통치가 발표된 시점에는 이박사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강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45년 12월29일 밤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큰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어요.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으니까.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어요. 다들 아주 격해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어요. 송진우 선생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지만. 이박사는 그날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당시 그는 신탁통치에 대해 담화를 낸 일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나서서 뭘 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분의 정치적 판단으로는 신탁통치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박 : 이박사가 예컨대 비상국민회의나 남조선대표국민의원 같은 데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탁운동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말씀이죠?
강 : 제가 보건대 반탁운동이 고양되던 상황에서 누구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을 읽어보거나 면밀하게 검토한 사람이 없었어요. 방송만 들은 겁니다. 그저 다들 격해 있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부터 달라진 겁니다. 남로당과 좌익에서는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섰고, 온건세력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어요. 이들이 3상회의 결정안에 반대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에 어떻게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냐를 논의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를 해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해서 하자는 것이었어요. 김규식 박사 계열이나 안재홍씨, 그리고 한국민주당까지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매우 강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