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中道의 길, MB의 길

  • 입력2009-08-01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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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고승(高僧) 원효대사는 중도(中道)란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 했다. 좌우의 극단을 떠나되 그렇다고 그저 가운데를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중도란 아무런 원칙도 없이 양쪽 주장을 들어보고, 거기 말도 옳고 저기 말도 옳으니 적당히 타협해서 중간이 좋겠다고 하는 게 아니다. 중도의 의미를 산술적 중심 으로 이해하는 데서 “무색투명한 중간지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죽도 밥도 아닌 떡밥”(한나라당 차명진 의원) 등의 소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중도의 중(中)은 단순히 가운데의 의미가 아니다. 과녁의 중심을 맞히는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중’이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중’이다. 따라서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은 어렵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 어떻게 그 과녁의 중심을 뚫을 것인지, 어느 정도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용인지를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은 위험하다. 좌우 양 극단으로부터 동시에 비난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강화론’을 내놓자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비난과 조롱을 쏟아낸 것은 중도가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를 보여준다. 예컨대 강경우파 논객인 조갑제씨는 “대통령이 가겠다는 길이 좌도 우도 아닌 그 중간선이라면 이는 우파의 핵심가치인 대한민국 헌법질서 수호를 포기하는 행위로서 탄핵감”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나는 이 또한 조씨가 중도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오히려 중도의 핵심가치다. 극우와 극좌의 선동으로부터 국가공동체의 최고가치인 헌법질서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중심을 잡는 중도의 역할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지켜내는 일은 우파의 독점적 가치가 아니다.

    우리의 짧은 현대사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많이 훼손한 쪽은 이른바 우파보수정권이었다. 4·19혁명을 부른 이승만 독재에서 10·26 비극을 초래한 박정희 유신독재, 민주항쟁에 굴복한 전두환 독재에 이르기까지 우파보수정권은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가치를 훼손했다. 물론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근대화의 역정(歷程)에 오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자칫 몰(沒)역사적일 수 있다.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반공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우선적 가치일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화의 물적 기반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반(反)민주 독재는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고통스러운 이행과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명백한 것은 다시 그 시대로 퇴행(退行)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굴곡 없는 역사는 없다. 굴곡진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질서를 절차와 내용 측면에서 충실하게 채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중도의 길이다.

    문제는 중도가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지난(至難)하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것이 정치적 수사(修辭)나 국면전환용 이벤트에 그친다면 아예 꺼내지 않으니만 못하다. 그 점에서 ‘진정한 우파의 길’부터 제대로 걸으라는 이회창 총재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다. 이 총재는 “그동안 인사나 정책에서 재벌과 부자, 성공한 사람, 강자의 편을 들어온 정권이 이제 서민정책을 펴겠다고 하고 중도의 길을 강화한다고 한다”며 “소외된 사회적 약자 등의 인간적 삶과 자유는 성공한 사람, 부자, 사회적 강자 못지않게 존중되고 보호돼야 한다. 이게 따뜻한 보수이고, 진정한 우파의 길”이라고 했다.

    이 총재의 말대로라면 이명박 정권은 그동안 ‘부자 정부’이고 ‘따뜻하지 못한 보수’였다는 얘기다. 이른바 좌파가 하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좌파와도 소통하는 중도를 해보겠다는 이 대통령에게 굳이 시비를 걸 일은 아니라고 본다. ‘따뜻한 보수원조’로서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 될 일이다.

    이 대통령은 6월2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좌우, 진보 보수라는 이념적 구분을 하는 게 아니냐. 사회적 통합이라는 것은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건강해지려면 중도가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지당한 말씀’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왜 집권 2년째 중반에 ‘중도강화론’을 다시 꺼내게 됐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이 우선돼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당시 ‘중도실용’을 표방했다. 그것은 이 대통령을 지지한 유권자 다수의 기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는 일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중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너무 쉽게 ‘구호’로 삼은 데 있지 않았나 싶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우파정권의 덫’에 걸려들었다. 여기서 ‘덫’이라 함은 자기규정에 따른 자기강화를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가 보수정권이라는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고, 진보정권 10년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유권자로 하여금 보수정권을 선택케 한 것 또한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선 과정에서야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대통령 취임사에서 ‘성장과 국민통합’을 강조한 만큼 적어도 합리적 진보에는 ‘좌파 딱지’를 붙이지 말아야 했다. 우파들은 좌파들이 우파에게 ‘극우 딱지’를 붙여 공격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좌파 딱지’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무기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난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한 결과는 당연히 좌파 배제의 정치로 나타났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의 대통령제 시스템과 당파적 충성도에 따라 공직을 임면하는 엽관제(獵官制)의 전통이 어느 정권이라고 달랐겠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중도실용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면 전 정권에서 임명돼 아직 임기가 남은 기관장들은 가능한 한 포용해야 했다. 정 내보내려면 정권이 바뀌면 임기제는 자동 소멸된다는 정도의 법 개정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법치가 힘을 받는다. 그러나 이 정부는 조급하고 거칠게 ‘좌파 청소’에 나섬으로써 중도실용과 통합의 이미지를 약화시켰다. 이 대통령이 다시 중도강화론을 말하면서 진보와의 소통을 추구한 것은, 좌파 배제가 촛불에 대한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강화된 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뼈아픈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성장과 경쟁, 효율을 우선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쨌든 다수 유권자가 경제 살리라고 대통령 뽑아주고 과반수 여당 만들어줬으니 그에 부응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지난 1년 반의 결과가 ‘부자를 위한 정부’라면 곤란하다. ‘부자 정부’는 첫 내각에서 그 이미지가 형성됐고, ‘부자 감세’에서 굳어졌다. 대통령은 감세의 혜택이 중산층과 서민 측에 더 크게 돌아갔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체감으로 확인시키지는 못했다. 더구나 감세에 의한 세수(稅收) 부족으로 증세가 불가피하다고 하니 “부자 감세하고 서민 증세하자는 것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1990년 이후 가장 크게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올해에는 그 차이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통계청이 지난해 한국 도시가구(1인 가구와 농가 제외)의 소득을 분석한 결과 소득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가 0.325로 2007년의 0.324보다 0.001포인트 높아졌다. 소득 상위 20% 가계의 평균소득을 하위 20% 가계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도 지난해 6.2배로 이 또한 1990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 원인을 이명박 정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빈부 양극화는 길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 짧게는 2004년 이후부터 심화되어 왔으니까.

    그러나 감세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에 효과적이라던 이 정부의 주장이 실질적인 효과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부자의 소비가 늘어나지도 않았고, 대기업이 투자를 늘리지도 않았다. 일자리는 되레 줄었다. 여기에 세수 부족으로 다시 증세를 해야 한다고 하니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감세였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서민을 보호하고 중산층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루는 길”이라고 했다. 이 역시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지당한 말씀’이 서민과 중산층의 피부에 와 닿으려면 구체적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올 하반기에 서민생활안정대책(6대 분야 15개 과제)에 2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것인데, 4대 강 살리기에 22조원을 투입하는 것이 과연 그토록 시급하고 적정한 것인지도 아울러 재검토해야 한다.

    대운하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4대 강 살리기 역시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는 아직 미흡하다. 강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환경전문가들의 비판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비판세력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그렇다.

    이명박 정부하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비판은 법치를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과 맞물려있다. 법치는 좌우, 보수 진보의 정부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달라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법과 원칙을 기계적으로 내세우는 법치만능주의로는 공안통치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법치는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소수자 및 약자의 헌법적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

    中道의 길, MB의 길
    전진우

    1949년 서울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한성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민주주의는 시대에 따라 그 성숙도를 달리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과거에 비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말한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최근 국제앰네스티의 조사관은 “한국의 인권상황이 지난해보다 악화되고 있다. 경찰력 남용과 표현 집회의 자유 침해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 조사관의 의견에 편견이 작용할 수 있고, 전체가 아닌 일부만 본 시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팎의 여러 사람이 그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 대통령은 8월 중 사회통합위원회를 출범시킨다고 한다.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중도강화론의 진정성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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