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우체국 말단서 CEO까지… KTF 이경준 사장의 도전 인생

“‘찬물 대접’ 20년 그래도 버텼다”

  • 성기영 주간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4-09-02 23: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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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농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남다른 재능과 끈기로 오늘에 이른 사람. “고생 자랑할 것 없다, 미래가 중요할 뿐”이라는 55세 ‘청년’의 소탈한 자기고백.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산 적이 없는 사람이오. 학창시절 걸식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닐 때도 그랬고, 젊은 나이에 해외연수 떠날 때도 그랬고…. 고생할 때 찍어놓은 사진이 어디 한두 장뿐이겠어요? 그런데 그 때 찍은 사진을 여태껏 한번도 들춰본 적이 없어요.”

    지난 8월2일, 가입자 1000만명이 넘는 이동통신업체 KTF 대표이사직에 취임한 이경준(李敬俊·55) 사장을 붙잡고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부와의 통신요금 인하 갈등, 데이터 분야 매출 확대, KT아이컴 합병 문제 등 수많은 현안을 앞에 두고 있는 KTF 최고경영자를 앉혀놓고 사장 개인의 ‘과거’나 캐고 있을 만큼 한가한 입장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사장에게 옛 사연을 물은 건, 사장 선임 직후 기자의 책상 위로 보내온 이사장의 이력서가 워낙 ‘독특했기’ 때문이다. 감추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감춰도 좋으니 들려줄 수 있는 데까지만 들려달라고 계속 졸랐다.

    이사장의 최종학력은 방송통신대 졸업이다. 나중에 산업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우글거리는 거대 통신회사 사장으로는 뭔가 격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게다가 체신부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 기술고시를 통해 사무관에 임용되기는 했으나 변변한 끈이 없어 평생 ‘온탕’보다는 ‘냉탕’을 전전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물이다. 최고경영자에까지 오른 그의 성공 스토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마주앉자 이경준 사장은 무뚝뚝한 인상답지 않게 자신의 과거사를 속 시원히 풀어놓았다. ‘왕년에 고생 안해본 사람 있냐’면서 입을 닫고 있던 그가 ‘과거’를 묻자 단도직입적인 질문에도 주저함 없이 껄껄대며 답변을 이어갔다. 화술이나 말투도 외교적이거나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 떨어지고 나면 눈물만 나옵디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유학왔지만,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는 아버지와 한 이불 덮고 자본 적이 없어요. 저녁마다 자취방에서 훌쩍거리며 눈물 찍어내는 게 일이었죠, 뭐.”



    김제군 봉남국민학교를 졸업한 소년 이경준은 서울로 유학해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국민학교라야 한 학년에 2개 반이 전부이던 전형적인 시골학교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실력을 보여준 이경준을 인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기는 아깝다는 것이 주변 어른들의 판단이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가끔씩 학비나 놓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던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가족 곁을 영원히 떠났다.

    이사장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장남의 군복무 기간 내내 아랫목에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묻어둘 정도로 그를 끔찍이 아꼈다. 어머니의 정성과 극진함은 독일 연수 시절에도 계속됐다. 말하자면 어머니에게 이사장은, 아무때나 불쑥 찾아와도 따뜻한 밥을 대접해야 하는 ‘영원한 손님’이었던 셈이다. 어머니는 십수년 전, 막내아들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운명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없는 살림에 가장마저 없어진 마당에 고교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방과후면 그가 공부를 가르쳐주곤 했던 ‘제자뻘’ 되는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생이 됐지만 그는 꼴 베고 피 뽑는 농사꾼으로 살아야 했다.

    “정오쯤 되면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호남선 열차가 ‘빽’하고 기적을 울리며 달려갑니다. ‘아, 저걸 타고 한번 튀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은 드는데, 방법은 막막하고….”

    막연하기만 한 서울행을 포기한 이경준은 무조건 공부를 시작했다. 밤낮 없이 20일을 바짝 매달려 공부한 끝에 김제고등학교에 수석 합격했다. 고교 시절, 공부는 여전히 잘했지만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급기야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는 학교 수업을 통째로 빼먹고 3개월 동안 전국을 떠도는 무전여행에 나섰다. 무전취식에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 떠돌이생활의 연속이었다. 연탄도 나르고 벽돌도 찍었다.

    “천호동 연탄공장에 취직해서 먹고 자고 할 때였어요. 왕십리로, 청량리로, 리어카 배달을 하다보면 해는 지고, 배는 고프고…. 열흘 일하고 받은 돈으로 남대문에서 국수 두 그릇 사먹으니 빈털터리가 되더군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할 일이 없어’ 군 입대를 결심했다. 허송세월하며 영장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시간이라도 아끼는 게 낫겠다’ 싶어 아예 입영 신청서를 밀어넣은 것.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또다시 빈둥거리는 일상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뒤적이다 조그맣게 난 모집광고를 보게 된다. 1주일에 한번쯤 시골 이장댁으로 배달되던 ‘서울신문’이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던 시절, 이경준의 눈길을 끌어당긴 광고는 체신부에서 낸 ‘무선기술기원보’ 모집공고였다.

    “무선이 뭔지, 기술이 뭔지 알 게 뭡니까. 그런데 아, 시험과목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영어, 국사, 윤리…. 대부분 고등학교 때 배운 것들이더라고. 안 될 것 있나 싶어 무작정 시험장으로 갔죠.”

    한국통신(KT), 한통프리텔(KTF), 한통엠닷컴 등 국내 굴지의 통신기업을 거치며 최고경영자(CEO)에까지 오른 이경준 사장과 통신분야와의 첫 인연은 이렇듯 다소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무선기술기원보’가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 채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사장이 처음 발령받은 곳은 군산우체국 무선분국. 당시 무선분국의 역할은 주로 군산 앞바다에 퍼져있는 어청도, 선유도 등의 섬들과 무선 연락을 담당하고 군산항에 드나드는 선박들과의 무선통신을 중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배운 과목만 믿고 갓 입사한 스무 살 말단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아. 전기도 안 들어오는 동네에 사는 놈이 무전기를 취급한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처음 출근해서는 할 일도 없었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그냥 아침저녁으로 죽도록 청소만 한 거지, 뭐.”

    “병역면제? 싫소이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자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아예 도서 근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마침 선유도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결혼을 이유로 육지로 나오게 되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겠다고 한 것. 당시 군산우체국 무선분국은 선유도, 어청도, 위도 등 세 군데 섬에 무선통신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온종일 하는 일이라야 하루 세 번 각각 1시간씩 무선통신을 중계해주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장의 표현대로라면 ‘섬에 처박혀 하염없이 술이나 먹고 빈둥거리는 일’이 업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다시 그렇게 1년이 훌쩍 갔다.

    1975년 봄.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식이 날아왔다. 병역면제 통보.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뜬 데다 7남매의 장남으로 가족 부양 의무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경준은 이런 희소식을 들고 그를 찾아온 마을 이장을 향해 화를 버럭 냈다. ‘팔다리도 멀쩡한데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따진 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후 입영영장이 나왔다. 그는 좋아라 하고 입대했다.

    그렇다고 이사장이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나 몰라라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집 장남으로서 의무를 다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박봉은 고스란히 집안 건사하는 일에 들어갔다. 여동생들 짝을 먼저 찾아주느라 정작 본인은 서른이 넘어서야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여동생 셋을 전부 시집보낸 다음 총각 신세를 면하려 했는데, 주위에서 하도 말려 셋째 여동생보다 딱 한 달 먼저 결혼식을 올렸어요.”

    이사장에게는 장성한 두 자녀가 있다. “그럼 지금 내외분만 사시느냐”고 묻자 “두 분은 무슨…, 혼자 살지” 하고 말을 받았다. 남편으로서는 빵점이니 혼자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농(弄)이었다.

    3년 후 제대한 이사장은 옛 직장으로 돌아갔다. 선유도에서 신시도로 섬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3년 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사장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선유도 시절에 하루종일 술과 씨름했다면 신시도에서는 책과 씨름한 것. 무슨 목표를 세워놓고 하는 공부도 아니었다. 그저 한 달치 월급을 몽땅 털어 전주 시내 서점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사들였다. 그러고는 종이가 해질 때까지 밑줄을 그어가며 독학을 했다. 정치학·경제학·행정학·회계학…. 게다가 1주일에 한 번씩 들어오는 배편을 통해서 영자신문을 구독하는 오기도 부렸다.

    “그야말로 무식하게 공부한 거지. 행정고시니 뭐니 목표를 정한 것도 아니고 그냥 무조건 파고든 거요. 요점 정리하는 데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자 이경준은 무조건 당시 총무처 고시과로 전화를 했다.

    “뭐, 시험 볼만한 것 좀 없겠습니까?”

    “어느 분야에 응시하려고 하시는데요?”

    “아무거나요.”

    “12월말에 무슨 시험이 있습니까. 내년 초 서울신문에 일괄적으로 공고가 나갈 겁니다.”

    총무처 담당자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는 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육지 한번 안 나가고 온통 책과 씨름한 결과 치고는 허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칼을 갈아놓고는 무도 잘라보지 못한 채 또다시 시간만 허송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1년 만에 육지에 나갔다 우연히 들른 군산우체국에서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서류 한 장을 발견한 것. 서류에는 ‘당국(當局)에는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구절 하나만 달랑 적혀 있었다. 독일 정부 초청 현지 연수 프로그램에 추천할 만한 어학능력을 가진 당사자가 없어 상부에 막 보고문서를 올리려던 참이었다. 이경준은 우체국 직원을 붙잡고 억지를 부리다시피 한끝에 겨우 독일 연수 프로그램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터라 최종 선발자 5명에 들 수 있었다. ‘정보통신 전문가’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1975~76년 독일 우정성에서 연수를 받은 이사장은 귀국 후 체신공무원 연수원 교관으로 임용됐다. 남들을 가르치다 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당시 막 문을 연 방송통신대에 입학했다. 낮에는 통신기술을 가르치고 밤에는 방통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말단 직급으로는 도무지 ‘앞이 안 보여’ 기술고시 준비도 했다. 한편에서는 가르치고, 또 한편에서는 배우고. 당시 1년 동안 편안하게 누워 잠을 청해본 날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경준 사장의 인생은 이처럼 통신 전문가들이 걸어온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러나 시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왔다. ‘가방 속에는 태권도복과 담뱃갑밖에 없던’ 고교 시절에도 졸업 성적은 전교 1, 2등을 다퉜다. 1991년 전공을 바꿔 다시 방송통신대에 다니면서 3개 시험을 동시에 준비하는 ‘무모함’을 보였다. 방통대 졸업시험, 연세대 산업대학원 입학시험, 기술사 자격시험. 결과는 성공이었다. 기술고시 합격에 이어 마흔이 넘은 나이에 기술사 자격증까지 거머쥔 것이다. 최근까지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2개 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방통대 출신의 이경준 사장에게는 인맥이란 것이 없었다. 기술고시 합격으로 사무관에 임용된 뒤에도 인사철만 되면 외곽을 빙빙 돌았다. 직장에서 인맥 쌓기도 쉽지 않았다. 1∼2년만 근무하면 다시 짐을 싸야 했다.

    “이건 뭐,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남들 10년 걸리는 서기관 승진에도 저는 13년이 걸렸어요. 전화국에서는 분국(分局)으로만 돌아다녔죠. 본사가 광화문에 있던 시절인데 전 도무지 한강을 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정통 기술관료 출신의 이경준 사장이 민간기업 엔지니어로 변신한 것은 체신부에 들어간 지 20년이 훨씬 넘은 1988년, 한국통신 사업개발단 기술부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직장생활이 ‘풀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 이후 이사장은 한국통신에서 10여 년간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ISDN) 개발사업추진단과 초고속통신추진본부 등을 총괄하면서 인터넷의 대중화와 통신네트워크 운용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체신부장관 표창 등 갖가지 포상도 받았다. 부가가치통신망(VAN) 활성화와 PC 1000만대 보급사업 추진으로 정보화 기반을 구축한 것도 이사장의 공적으로 꼽힌다.

    이사장은 1997년말 PCS사업을 개시한 한통프리텔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한통프리텔은 법인 설립이 늦어 PCS 3개사의 조기 상용화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사장은 기술부문장을 맡아 PCS 전국망 조기 구축에 진력했다. 그 결과 이통업계에서는 최단기간인 1년여 만에 전국 기지국 및 중계기 설치를 완료,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로도 주파수변환 무선중계기술 등 첨단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하고 현장에 적용, 이동전화망의 품질개선에 기여했다.

    한통프리텔과 한통엠닷컴이 합병을 추진하던 당시에는 양사 네트워크 부문을 오가며 통합의 가장 큰 걸림돌이던 망(網)통합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통합 성과는 KTF가 2001년 정보통신부 주관 이동전화 품질평가에서 사상 최초로 선발사업자를 제치고 종합 1위를 차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 이번 KTF 사장 선임에 있어 KT 기획조정실장을 맡고 있던 이사장은 유력한 후보가 아니었다. 사장 후보로 거론되던 3∼4명 중 ‘가능성’이 가장 낮았다. 이상철 정보통신부 장관과 그 뒤를 이어 KT 사장이 된 KTF 이용경 사장과의 느슨한 인연이 화제가 되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사장은 이장관이나 KT 이용경 사장이 그렇듯 ‘경기고-서울대’ 하는 식의 학맥 앞에는 명함도 못 내밀 처지였다. 이사장의 KTF 사령탑 입성을 두고 ‘전격적’이라는 평가가 나도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이사장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속시원한 답변을 내놓았다.

    “맞아요. 갑자기 결정된 거지. 이용경 사장이 갑자기 KT 사장으로 가는 바람에 공석이 생겼잖아요. 정관 상 외부 영입은 절차가 너무 복잡하니까 내부에서 고르기로 한 거죠. KTF가 추구하는 가치 중에는 ‘스피드 경영’이 있어요. KT 쪽에서 맡느냐, KTF에서 맡느냐만 결정하면 될 일이었지요.”

    좀 그럴듯한 대답을 해주어도 좋으련만, 점퍼 차림의 이 소탈한 최고경영자는 그럴 생각이 영 없는 듯했다. CEO 인터뷰를 하면 대개 인터뷰 당사자는 ‘그럴듯한’ 이야기만 하고 배석한 임원이 주석을 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사장의 경우는 반대였다. 이사장이 시시콜콜 설명을 하면 홍보담당 임원이 ‘주워담는’ 식이다. 밑바닥에서 출발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답게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보였다.

    바닥에서 출발해 대성한 이들에게 꼭 던지는 질문이 있다. 직장생활하면서 최종 목표를 어디에 두고 일했냐는 것이다. 대부분은 최고경영자라거나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확고한 목표가 없이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솟아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장은 달랐다.

    “처음에는 마흔까지만 하고 그만둔 뒤 개인사업을 할 생각이었어요. 봉급도 많지 않고 미래도 안 보이니 공무원들이라면 그런 생각 한두 번쯤은 다 해보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연수니 교육이니 하는 기회가 자꾸 생기는 거예요. 결국 실천에 옮기지 못했죠. 때를 놓친 거예요.”

    겸손의 표현만은 아닌 듯싶었다. 이사장의 초·중반 직장 경력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이사장이 남다른 집념과 끈기의 소유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한번 정한 목표는 꼭 달성하고야마는 뚝심이 돋보였다. 그러나 결코 서두르거나 과정을 뛰어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턱대고 서두르기보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빠르다는 게 이사장의 생각이다.

    그의 사장 임기는 내년 3월말까지다. 그러나 이사로서의 임기는 2005년. 결국 내년 3월말 주총에서 대표이사 재신임을 받아야 하는 셈이다. 이사장은 “이젠 경영자로 평가받아야 하는데 옛날 이야기만 한 것 같다”며 머쓱해 했다. 그러면서, 이젠 자수성가한 인물보다는 유능한 CEO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쳤다.

    마지막으로, 서해 외딴 섬 무선분국 말단직원에서 대한민국 굴지의 이동통신사 최고경영인이 된 그에게 “본인의 리더십은 어떤 유형에 속할 것 같으냐”며 지장(智將), 용장(勇將), 덕장(德將), 이렇게 세 가지 보기를 제시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나는 졸병 출신이요, 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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