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붐, 월드컵, 이수현
일본 한류 열풍의 원인은 다양하다. 그 기저에는 1995년경부터 불어닥친 아시아 붐이 자리잡고 있다. 자국은 정체해 있는 데 반해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시아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행지로서 한국의 인기가 올라간 것도 한몫 했다. 버블 경제가 붕괴된 이후 일본 사무직 여성들은 여행지로 비용이 많이 드는 유럽보다 가까운 아시아를 선호했다. 그 중에서도 대만·서울·상하이가 ‘싸고, 가까운’ 여행지로 특히 인기를 끌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에서 한국음식 붐이 일어났다. 그전까지는 한국요리 하면 ‘야키니쿠(불고기)’가 전부였지만, 한국 관광이 유행하면서 다른 요리들도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한국요리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의 영향도 컸다. 공동 개최를 통해 한국에 관심이 없거나 못사는 나라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던 보통의 일본인도, 한국이 일본 못지않게 발전한 나라이고,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다고 인식하게 됐다. 게다가 월드컵 4강 진출과 IT(정보통신)산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일본인들 사이에 한국을 동경하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일이 잘될 때는 우연까지 한몫 거든다. 신주쿠 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도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일조했다.
일본에서는 요즘 젊은이와 청소년에 대해 ‘3무(無)’라고 표현한다. 무기력, 무관심, 그리고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감동을 가리킨다. 이수현씨의 의로운 죽음은 이러한 ‘3무’현상과 대조를 이루면서 일본사회를 감동시켰고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를 개선하기에 충분했다.
사전 전작제의 한계
일본 내 한류의 특징 중 하나는 유독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드라마의 질적 수준이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과 다른 제작방식의 영향이 크다. 일본의 민간 TV 방송은 1년에 네 차례, 13주마다 개편한다. 12주는 정규 방송을, 나머지 한 주는 특집방송을 내보낸다. 드라마도 이런 개편 주기에 맞춰 12부작(때로는 11부작)으로 제작되어 매주 한 번 방영된다.
일본은 전회분 촬영을 완전히 끝낸 다음 방영하는 사전 전작제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든다. 우리처럼 촬영장에서 매회 쪽대본을 받아 허둥지둥 촬영하고 편집하는 일이 없어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시청률이 높다고 방영 횟수를 고무줄처럼 늘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인기가 없다고 조기 종영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사전 전작제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험 요소가 많기 때문에 12부작이 넘는 작품은 만들지 않는다. ‘대장금’이나 ‘무인시대’처럼 50부, 100부작으로 기획되어 장기간 인기를 누리는 대작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 구조다.
또한 시청자의 반응을 적절히 반영해 내용을 수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본 드라마는 돌발적인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참신할 때도 있지만 불쾌한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네티즌이 결말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드라마 제작 중간 중간 시청자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편이다. 그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재미와 정서를 담은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 요인들이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는 토양을 마련했고, 특히 드라마가 줄줄이 성공을 거두는 발판이 됐다. 그러나 일본에서 한류 바람을 이토록 강하게 일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중년 여성의 힘이다.
F1 능가하는 일본 중년여성 파워
얼마 전 NHK 위성 TV의 토론 프로그램에 20대 초반의 일본 청년이 출연해 “한류는 정말 큰 문제”라고 말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서 밥도 해주지 않으며 집안 살림이 엉망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일본 중년여성들은 실제로 이런 가정이 속출할 정도로 한국 드라마에 열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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