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내부의 빈곤과 불평등이 전쟁을 야기한다는 홉스봄 교수의 논리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며 논쟁을 촉발시켰다. 김대통령은 발제문에서 “9·11사태 이후 전쟁의 패러다임이 급변하고 있다. 선전포고 없는 전쟁, 얼굴 없는 적과의 전쟁, 공격의 유형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제법의 규칙을 무시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볼모로 잡는 전쟁, 그리고 테러리즘이 21세기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강조했다.
테러리즘은 인류의 적이고 테러 행위에 대해 인류는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물리적인 응징만으로는 국제 테러리즘의 근본 원인을 치유할 수 없다. 구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테러리즘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국내 분쟁은 종교와 문화와 종족과 이념의 갈등에서 유래하는데, 이러한 갈등의 뿌리에는 빈곤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빈곤을 퇴치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 평화를 바랄 수 없다고 단정했다.
김대통령은 빈곤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인 빈부격차이고, 둘째는 정보화의 격차(digital divide)에 따른 빈곤 현상이다. 김대통령은 경제적인 빈부격차뿐만 아니라 정보화의 격차도 줄어들 때 세계는 지속적인 평화를 모색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김대통령의 견해에 동조했다. 특히 심포지엄이 끝난 후인 12월10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수상 연설문에서 “세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가간 그리고 국가 내부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핵심 요소”라고 강조함으로써 김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서 빈곤 문제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대가인 아마르티야 센(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김대통령의 주장에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빈곤과 불평등·기아 등 경제적 현상을 갖고 전쟁과 폭력을 인과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빈곤과 기아라는 변수로서 정치적인 폭력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경제적 환원주의의 우(愚)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설파했다.
센 교수는 여러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1840년대 아일랜드에서 감자기근이 들어 상당수의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농민폭동과 같은 정치적 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던 사실을 예로 들었다. 또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1942년 그가 태어난 인도의 벵갈지역에서는 영국 총독부에 대한 대규모 저항운동이 전개됐으나, 그해 벵갈지역은 대풍을 이뤄 경제적인 상황은 아주 양호했다고 밝혔다. 반대로 다음해인 1943년은 아주 심각한 기근현상이 나타났지만, 정치적인 폭력사태는 진정국면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같은 논리로 그는 빈곤이란 단일 변수만으론 아프간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이나 정치적 폭력은 빈곤이나 기근 같은 경제적 변수 이외의 변수도 촉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센 교수는 “전쟁의 원인을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서만 규명하려 하면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정한 이해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빈곤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 데도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센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빈곤은 전쟁의 원인’이라는 보편적 명제를 반박하는 것이라 참석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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