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세운 기반 점검하고 저력 폭발시킬 시점
무죄 판결에도 검찰 상고, 사법 리스크 발 묶여
탄핵 국면… 해외 출장도 국가 리더로 보일까 자제
어려운 여건 속 색깔 내기 위한 행보 이어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월 3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스1]](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d3/d8/ea/67d3d8ea0e60d2738276.jpg)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월 3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이건희 선대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1987년 11월 19일 사망한 후 삼성전자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그러곤 6년 후인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임원진을 불러놓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일류 기업이 되려면 양(量) 위주에서 질(質) 위주의 경영으로 변해야 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변화를 요구한 그 선언이다. 후대의 삼성전자 사람들은 이를 비로소 이 회장이 자기만의 색깔을 내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다고 평가한다.
현직인 이재용 회장도 그런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는 이 선대회장이 2020년 10월 25일 사망 후 실질적인 회사 경영권을 넘겨받은 이후, 내년이 되면 6년째가 된다. 공식적 회장 직함은 2022년 10월에 받았지만, 이미 그는 그 이전부터 경영의 열쇠를 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으로선 약속의 6년을 이제 1년 앞둔 올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 색깔을 내기 직전, 그간 세워온 기반을 점검하고 저력을 폭발시킬 준비에 착수해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은 여의치 않다.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사법 리스크는 올해 종지부를 찍을 기회가 마련됐지만 검찰의 상고로 불발됐다. 현직 대통령이 탄핵 소추되는 등 회사 바깥에서 발생한 각종 변수도 운신의 폭을 좁혔다. 위기에 몰린 반도체 사업은 절치부심하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세계시장은 매일 급변하는 격랑의 시대다. 이 회장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목소리는 회사 안팎에서 빗발치지만, 그는 이에 응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이는 실정이다.
이재용 움츠러들게 만든 檢 수사와 재판
이 회장의 두문불출은 올해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는 평가도 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설 연휴 등을 활용해 사업 현장을 살폈지만, 올해는 다르다. 이 회장이 올해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인 건 1월 3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 인사회’가 유일하다. 1월 말 설 연휴도 2월 3일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을 앞뒀다는 이유로 공식 일정 없이 조용히 보냈다. 이 회장이 2월 독일 뮌헨을 찾았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도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이 회장이 해외로 출장을 갈 때 이용하는 대한항공 전세기 5편 중 하나가 독일 뮌헨을 갔다 온 기록이 있는데, 이 회장은 이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재계는 이 회장을 움츠러들게 한 가장 큰 요인으로 약 9년간 이어진 검찰의 수사와 법원 재판을 가장 많이 지적한다. 이 회장은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한 이후 올해까지 9년째 사법 리스크에 묶여 있다. 사법 리스크는 다른 것보다도 이 회장이 현장 경영 관련 일정을 잡을 때 제약을 준다는 점에서 큰 족쇄다.
국내외 경영 현장을 방문하려 할 때 일정이 수사, 재판 날짜와 겹칠 것 같으면 그건 그대로 진행하기가 어렵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재판 출석이 어렵게 되거나 해외로 반드시 출장을 가야 할 때는 법원에 반드시 허락을 구해야 했다. 2021년 1월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 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207일간 수감 생활을 한 일도 있다. 마지막 고비로 남은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이 최근 대법원으로 넘어가면서 사법 리스크는 10년을 채울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회장은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과 관련해 2017년 1월 피의자로 처음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았고 2020년 기소됐다. 검찰이 이 회장에게 적용한 혐의는 자본시장법 위반 등 무려 19개였다. 이 회장이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며 경영권 승계와 삼성그룹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식 시세를 조종했고, 이 과정에서 제일모직의 자회사였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에 관여했다는 것이 검찰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검찰이 적용한 19개 혐의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이 회장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상고하면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도록 했다. 검찰의 상고는 이 회장의 발목을 오랜 기간 묶은 사법 리스크가 연장되는 것을 의미해, 재계와 법조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오랜 기간 지속된 사법 리스크는 이 회장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켰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2023년 11월 17일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 1심 마지막 공판에서 이 회장이 최후진술의 기회를 얻어 약 10분간 쏟아낸 발언이 이를 미루어 짐작게 했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해 추진된 것이지만, 외부에선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느꼈다”고 토로했다. 때론 “합병에 대한 합리적인 결정을 위해 외국 경영자, 주요 주주들, 투자기관 관계자들과 나눈 대화들마저 전혀 다른 의미로 오해되는 것을 보며 너무 안타까웠고 허무하기까지 했다”고도 말했다.
기업 총수로서 선의의 판단 아래 내린 경영 행보도, 검찰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범죄가 될 수 있음을, 그 결단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자기 성찰’에 가까웠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 회장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때 더욱 신중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피해와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판단되면, 가지 않는 쪽을 택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업 경영은 때로 과감한 도전과 혁신에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재계에선 널리 통용되는 순리와도 같다. 하지만 지금의 이 회장에겐 이런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늘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기업 총수 한 명의 경영 전반에 알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평가된다.
회사 안팎에서 이재용과 젠슨 황 만남에 촉각 곤두세워
현직 대통령의 탄핵소추도 이 회장의 발을 묶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탄핵 정국은 회사 바깥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 이 회장의 방향 선택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의 해외 출장은 아무래도 탄핵 정국이 마무리된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령, 이 회장이 인공지능(AI) 등 기술 경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미국 또는 중국을 방문해 정계 인사들과 회동했을 경우, 마치 공석이 된 국가의 리더 역할을 자처한 것으로 인식될 여지가 있다. 이 회장은 이를 우려하고 있어 당장 외국행 비행기에 오르진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본래 재계는 이 회장이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의 항소심 선고가 나오면, 그 직후 해외 출장을 통해 본인의 경영 색깔을 낼 것으로 많이 전망하고 있었다. 지난해 2월 이 회장이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 1심 선고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바로 다음 날 아랍에미리트(UAE)로 출국한 바 있어 이 전망에는 더욱 무게가 실렸다. 항소심 선고 후에는 이 회장이 수사와 재판으로 인해 해외 출장에 제약을 받을 일이 없어질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 사건이 대법원으로 넘어갈 경우에도, 대법원 상고심은 피고인의 재판 출석을 강제하지 않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변론 기일을 열지도 않기 때문에 이 회장으로선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경영 현안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었다.
회사 안팎에선 이 회장이 반드시 해외로 나가 회사가 겪는 위기의 실마리를 풀어줄 것이란 기대도 컸다. 특히 반도체 업계에선 이 회장이 미국으로 날아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만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할 빅테크 기업들을 확보하는 일이 당면 과제이기에, 내부에선 이 회장과 황 CEO의 만남을 바라는 목소리가 더욱 커진 것으로도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HBM3E 12단 제품에 대해 엔비디아로부터 공급 허가를 받기 위한 퀄테스트(품질 검증)를 진행하고 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지지부진해졌다. 차후 HBM4를 개발해 시장에 내놓고 잘 팔기 위해선 세계 HBM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큰손’ 고객 엔비디아와 관계를 긴밀하고 굳건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어, 삼성전자는 이 퀄테스트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회장이 엔비디아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황 CEO를 만나 회사의 HBM 제품에 대한 정보를 직접 전달하고 HBM을 넘어 더 넓은 협력관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퀄테스트 과정에선 전영현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부회장)과 삼성전자의 일부 개발 담당자들이 황 CEO 등 엔비디아의 수뇌부 일부와 몇 차례 만나 제품에 대한 보완점과 개발 방향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지는데, 업계에선 결국 최종 납품을 성사하기 위해선 이 회장이 반드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하지만 사법 리스크의 연장과 돌발 변수로 나타난 탄핵 정국으로 이 회장이 황 CEO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 날아갈 가능성은 지금 매우 희박해 보인다.
서초 사옥서 ‘삼자 회동’…“美 상황 확인한 듯”
![2월 4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AI 인프라 프로젝트 ‘스타게이트’를 추진하고 있는 미국 오픈 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왼쪽),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과 3자 회동을 했다. [뉴스1]](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d3/d9/1f/67d3d91f07ced2738276.jpg)
2월 4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AI 인프라 프로젝트 ‘스타게이트’를 추진하고 있는 미국 오픈 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왼쪽),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과 3자 회동을 했다. [뉴스1]
이에 따라 올트먼과 손 회장이 이 회장에게 스타게이트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등의 협력 또는 투자를 제의했을 것이란 분석이 뒤따랐지만, 일각에선 그보단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급변하고 있는 미국 시장 상황을 확인하는 데 대화의 초점이 더 맞춰졌을 것이란 분석에도 힘이 실린다. 미국으로 직접 움직이기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서 그간 쌓아온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 때마침 우리나라를 찾은 올트먼, 손 회장을 회사로 초대해 알고자 하는 정보를 얻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 회장은 최근 휴머노이드 로봇 사업에 회사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판단하고 여러 경로로 힘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회사가 최근 로봇 플랫폼 전문기업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하고 ‘미래로봇추진단’을 신설, 오준호 카이스트 명예교수를 단장으로 영입한 일련의 과정 배경엔 이 회장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10월 분사설에 관심이 없다며 명확히 선을 그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 대한 지속적 투자와 재기에 대해 곧 열의를 표면화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강자로 군림해 온 메모리 사업에서 1위 자리가 다소 위태로워졌지만, 파운드리에서 활로를 열면 삼성 반도체의 업황은 단번에 뒤집힐 것으로 보고 있어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다소 뒤처졌지만, 여전히 삼성은 메모리에서 선두권에 있고 여기에 비메모리 대표 격인 파운드리까지 잡으면 반도체 시장에선 모든 것을 다 거머쥐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