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두메 앉은뱅이’로 사는 자유로움 갯메라고 부르는 사연

인제대 김열규 교수의 갯메마을 귀향

  • 입력2006-10-13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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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메라고 부르는 사연

    여기는 경상남도 고성(固城)군 하일(下一)면 송천(松川)리. 철옹성으로 굳은 고을 안의 천하 제일의 면, 하고도 송내 마을. 고성읍에서근 백리, 큰 재를 셋씩이나 넘은 끝장에 웅크린 바닷가 의 두메 마을이다.그야말로 ‘반해 반산(半海 半山)‘, 이를테면 반 은산의 품에 안기고 반은 바다에 다리 뻗고 있는 형국이라서 나는 즐겨, 우리 동네를 ‘갯메 마을‘이라고 부른다.말할것도 없이 개는 바닷가고 메는 산이다.

    서와북으로는줄줄이 태산 준령이 옹벽을 치고 섰다.동과 남은 한반도의 남녘 막바지, 한려수도의 물을 내다보고는 마을이 터를 잡 고 있다.훤히 트일 법도 한 바다 안에 서로 비집듯 섬들이 들어차 있으니, 지세(地勢)에 어두운 남들은 여기 웬 호수냐고 너스레를 떨 기 십상이다.

    그중에서도비교적 둥치가 큰 솔섬과 그 어깨를 짚고 조금 뒤로 물 러선자란이는 풍수설로는 안산(案山)이 스스로 철을 알아서 피면, 아! 이 정복(淨福)을 다 어쩌랴!

    진산(鎭山)은가로되, 좌이산이다.한자로는 도울 ‘佐‘에 귀 ‘耳‘ 를 겹쳐서 ‘좌이‘라고 쓰는 것이 사뭇 절묘하다.귀를 도움은 듣기 를돕는 것, 해서 노상 쫑긋거리고 삼삼히 열린 귀가 여기 있으니, 이로써산과 마을과 그리고 사람들이 두루 다 이순(耳順)의 마음을 누린다.



    어찌구태여 사람 소리 만이랴?바람소리, 물소리, 솔 소리, 새소 리그리고 그것들이 슬그머니 얼리고 얼려서 먼 물마루에서 설레다 가 마침내 밤 하늘에서 여리게 울림하는 소리의 속내를 다 알아들을 법한 귀를 진산으로 누리다니!

    온마을 안이래야 열두집이 고작, 야밤중, 잠결에 누군가가 기침을 해도그게 누구네의 누구인지 이내 알아차려지는 것은 좌이산 덕분 이다.

    두메 앉은뱅이

    옛말에‘두메 앉은뱅이‘란 게 있다.굳이 앉은뱅이가 아니라도 두 메에 묻혀 살다보면 세상 물정 모르기가 세상 나들이 않는 앉은뱅이 와 다를 게 없는 법.해서 나는 두메앉은뱅이를 자처하니 시간이며 절기의 변화를 굳이 시계로 재고 일력(日曆)으로 헤아릴 것이 없다.

    자란이 왼쪽, 물마루에 치우쳐서 해가 솟으면 봄이다.그러다가 어 느 겨를엔가 오른 쪽으로 훨씬 기울어 솟을라치면 이젠 영락없는 겨 울.사철이 그렇게 날고 들고 한다.

    하긴 해돋이 방위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철갈이 할 적마다 조금식 달 라지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여기로 옮겨와서의 일, 그런 식으 로 나는 차츰차츰 자연의 청맹과니 노릇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철은 그렇게 지각된 것인데, 그렇담 시간은?

    겨울한 철 빼고는, 호랑지빠귀가 불어대는 귀신 휘파람 소리의 여 운이낮게 깔리면 동트기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그러다가 새매의 날선울음이 귀창을 찢고 들면 정작으로 새벽이다.휘파람새의 연 가(戀歌)가 요사를 떨면 늦은 아침일 테고 파랑새가 창공 드높이 비 단깁을 찢어대면 한낮이려니 하다가도 물총새가 키들대면 이내 해 가질 것이다.여름이면 때맞추어서 반디가 개울 안에 불을 켤 것 이다.

    하지만 지척에 바다가 훤히 트인 마을이라 물때를 더 요긴하게 쳐야 한다.

    가룡(佳龍)곶머리,개구리 바위섬과 그 너머 마당여로 해서 물의 드나듦이 편하게 눈에 잡힌다.개구리가 등만 남기고 겨우 물에 뜨 면,‘큰 솟음‘이란 뜻의 대기(大起), 곧 한사리다.그러다가 길따 란마당여마저 몸체를 죄 드러내면 조금이다.이렇게 물에 밀리고 쓰리고 하면서 나의 시간은 오고 간다.

    그런데도이른 새벽 게으른 잠으로 이부자리 속에서 미적되고 있을 라 치면, 사리 물산이 낮은 으르릉댐으로 방안에까지 밀려든다.

    ‘우르륵 쏴! 우르륵 쏴!‘

    이렇게 바다는 나만의 커다란 자명종 아닌 ‘자명조(自鳴潮)‘다.

    아홉해 전, 비로소 고향이라고 찾아든 나에게일가 아주머니 한 분 이탄식을 했다.”자네가 그 아무갠가?꼭 문어새끼만 해서 떠났 는데 이제 머리가 허얘져서야 돌아왔구나!”

    그 한 마디의 묘미에 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젖먹이를겨우면할 만한 꼬마면, 맞아 정말 문어새끼 같았을 거 다”

    바닷가 사람들이고서야 비로소 사용할 만한 절묘한 비유법.

    문어새끼에 견주어져 마땅했을 어린것이 서리를 머리에 이고 돌아왔 다.

    그백발의문어가 물때 따라서 거동하고 말고를 정하는 것은 정한 이치, 이래서 자란만 물안이 온통 나의 물시계가 된다.

    새끼 문어의 귀향

    숭어떼는물때를 알아서 알 낳을 곳으로 찾아든다.만조 물살이 물골을일구면그걸 따라서 그들은 뭍으로 난 개울을 향해 밀려든 다. 바로 지척, 어둠에서 듣게 되는 그들의 동정은 정말이지 삽상 하다. 물살이 세게 밀리는 소리에 열려서 요동치는 고기떼의 기척 이라니, 한 순간 온 개펄이 발버둥칠 것 같은 기세다.

    그렇듯,문어새끼이던 나도 물때 맞추어서 더 늦기 전에 고향 물깃 에돌아와있기를 나는 바란다.하루 네 번 들고 나고 하는 물살 따라 내 살속 깊은 곳, 핏줄에서 나의 핏살이 돌아치는 것이 만져지 기를 바라고 싶다.

    하지만,온통바다로 그득한 창 앞에 놓인 책상머리, 일하다 말다 망연히내다보는 푸른 공간에다 대고 시간을 새겨서는 뭣하랴.다 만물때 맞추듯, 일어나서는 차 한 잔에 목 축일 수 있느면 그걸로 도 족하다.

    해서여기바닷가에서는 계절도 시간도 언제나 유족하다.그들은 서두름이 없고 그래서 그것들은 결코 토막나는 법이 없다.

    언젠가어느 맑은 해질녘, 물마루 가득, 시간이 그 사지를 펴고 누 운것은 본 적이 있다.그리고 또 어느 다사로운 봄의 한낮, 시간 이저깊은 곳 바다 및에서 지나간 경과들을 살금살금 길어올리는 것을 본 적도 있다.그리하여 시간이 길어올린 것들을 파도의 갈피 마다펴놓고는 들여다보는 그 짬에 내일은 갈피 사이사이에서 미리 얼굴을 내비치기도 하는 것이었다.

    뿐만이아니다. 시간은 자신이 길이만이 아니란 것을, 길이만큼의 넓이며 품이기도 하다는 것을 수평선 가득 펼쳐 보이기도 했다. 한데도 시간은 바다에서는 늘 쇄신이다.그리고 변혁이다.연속을 저버리지않고도 바다에서 시간은 새로이 새로이 전신(轉身) 또 전 신한다.

    신 새벽 갓밝이의 한 때, 수평선 끝에서 동이 튼다는 것, 여명이 밝 는다는것, 시간이 바다와 해를 더불어서 이룩해내는 그 장엄과 승 화는언제나, 매번 새로움의 시작이 된다. 거기 반복이란 티끌만큼 도없다.늘 새로운 것이 비롯하는 전기(轉機)로 바다의 갓밝이는 개벽(開闢)한다.

    그런데도승화와 장엄이 그렇듯이 바다의 시간은 부드러이 유연(柔軟)하고 또 아슬하게 유장하다.물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고 있노 라면정말이지시간의 말랑대는 속살이 만져진다.그건 관능적일 만큼 나긋나긋 속살댄다.

    토마스 만이 그의 ‘마의 산‘의 한 구석에서 ‘수평선을 마주 보고 걷 노라면 시간이 움직이지 않는‘고 한 것은 그럴싸한 일이다.

    초록과 파랑사이

    돌이켜 서울살이 근 40년.시계를 지켜보는 눈엔 언제나 핏발이 서 곤 했다.

    초침의 새김질이 나를 박살내면서 내달렸다.그건 꽃, 돌진하는 기 관차의 바퀴소리처럼 나를 깔아뭉갯다.

    시간을크게는 시간 단위, 작게는 분 단위로 토마글 치면 그것들은 혹은비트적대고 혹은 발악을 쳤다.그럴 때마다 나는 그 잘린 시 간의 토막들 사이 마다에서 마치 톱니바퀴 사이에 낀 듯해서는 몸을 뒤틀었다.그리곤 무섭게 할딱댔다.시간은 내게서 그저 할딱거림 이었다. 시간보다 내가 더 숨이 찼다.‘시간알러지‘로 나는 의식 (意識)의 천식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시간은 한 바다 가득이고 나는 그 광장 한 구 석에서슬밋슬밋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다.그야말로 무시(無詩), 무간(無間)의 천식을 앓아야 했다.

    시간이 보장하는자유, 그래서 나는 늘 시간에서 자유롭다.아니 시 간속에서 시간과 더불어서 나는 자유롭다.

    시간이며 시간 살이는 그렇다 치고 공간이며 공간 사리는 어떨까?

    초록과파랑 한 복판, 마을 뒤 쪽 그리고 양옆은 산이 에워싸고 앞 은 자란만(紫蘭灣) 바다가 둘러 있다.열두 집이 옹기종기 모여 앉 은작은 동네 안, 어디서나 파란 바다가 내다보이고 어디서나 산을 우러르게 된다.

    산자락에오금 박고 바다를 향해 기지개 켜는 마을, 그러고도 모자 라 양 곁에 물너울과 언덕을 끼고 있는 마을, 그래서 초록과 파랑의 한 가운데 둥지를 튼 동네면 자연이며 환경으로 더 무엇을 바라랴!

    바야흐로다급하게논란되곤 하는 ‘생태론의 시대‘, ‘생태 환경의 시대‘에 걸맞고도 남는 축복, 나는 초록 한가운데서 늘 합장하는 듯 이 산다.

    고성읍혹은사천 고항 또는 삼천포, 어디 할 것 없이 외지에서는 큰재를 넘어야 우리 마을에 다다른다.그중 가장 큰 고개가 중치 다.차가 숨가쁘게 여기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초행길이 아니라도 누구나 탄성을 지르기 마련이다.나는 이 중치 넘는 재미에 아직은 세상을 영영 등지지는 않고 있다.

    우리집 큰놈의 스승인 매우 이름 높은 미국인 철학자 한 분이 이 곳 을 찾아서 이 재를 넘는 순간, 난데없이 나를 보고 말했다.

    ”매우 명석한 분이십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무슨 농담을요?”라고 받자 그가 담담히 되받 았다.

    ”이찬란한 곳을 찍어서 정주(定住)할 자리로 정할 줄 아는 분이니 가요.”

    칭송을받은 것은 내가 아니다.중치에서 내다보는 바다의 풍광이 찬양된것이다.이 곳의 조망은 그만큼 절승이다.이 근처 한 대학에서서울로옮겨 간, 한 교수는 최근에 보낸 편지에다 적고 있 다.

    ‘여름 방학엔 선생님 계신 곳을 다시 찾을 겁니다.중치 넘을 것을 생각만 해도 미리 가슴이 떨립니다.‘

    찬양은 이로 그치지 않는다.모스크바에서 찾아온 러시아인 한국학 자는”고르바초프가 여기 연급되었다면 아마도 풀리기를 바라지 않 을 겁니다”라고 둘러 말햇다.때마침 고르비는 풍광 명미하기로 이 름난 흑해의 한 휴양지에서 정치적으로 화를 당하고 있엇던 것이다.

    이러니 경치로는 더 바랄 게 없다.

    정남향으로동네 곁에까지 바짝 다가서 있는 좌이산과 그에 이웃한 연봉에는산책하기 좋은 숲길이 얼기설기로 나 있다.춘란과 자란 이 자생하여 더러 노략질을 당하는 것을 멧돼지가 막아 주었으면 싶 지만녀석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다만, 이 산짐승들은 ”교수님 저 모롱이로는 가지 마이소.산돼지가 오줌을 하도 많이 눠서 지린 내가 진동하니까요.”

    이같이 촌로들의 파적 얘깃거리가 디는 걸로도 착한 이웃 사촌이다. 해서 여기 공간에는 아무데도 칸막이가 없다.금도 그어져 있지 않 다. 보이는 곳은 모두 온통 아무데나 그저 울안이다.사람에게만 그런건 아니다.겨울철 굶주림을 당한 노루가 겨울초(한겨울에도 잎새 푸른 채소의 일종) 밭에서 입가심하고 가면, 족제비는 사시 개 울가를 누빈다.

    겨울철 먹이가 귀해지면 나는 집안 뜰 여기저기다가 혹은 돼지 기름 덩이 혹은 땅콩, 혹은 수수해서 각기 그들 구미에 맞을 먹이를 내다 놓는다.사과며 배 따위 과일겁질도 한몫을 하는데, 접시에 담아서 내가는 것이니, 담장 위으 조촐한 상차림에는 새들 손님이 모여든 다.

    멧새에다박새며 오목눈이 그리고 직박구리 등은 겨울 내내 찾아드 는데, 더러 곤줄박이와 콩새마저 찾아들면 들 안은 느닷없이 새들의 잔치판이된다.물론 손님보다는 주인이 더 즐거우니 그들은 추호 도 부담스러워 할 것 없다.하긴 하라고 해도 할 그들도 아니니 이 래서 더욱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첫집들이 손님은 청솔모

    그들의아침상을차리고 나면 나는 으레 그들이 멀리 보이는 곳에 좌정하고는 마음으로라도 시중을 든다.그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먹기에 열중한다는게 그만 농(弄)을 부리고 익살을 떤다.

    그걸로 손님들의 보답은 늘 넉넉하다.하면서도 나는 늘 생각한다. 언제 바로 그들 밥상머리에서 주인이 시중 드는 날이 올까?그 궁 리속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다른 새는 몰라도 곤 줄박이에게는요행수가통할지도 모른다고 잔득 기대에 부풀곤 한 다.

    하긴 뜰안 출입이 잦은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이사 온 직후의 일, 삼층작은 서고의 창문을 청설모가 기웃댄 적이 있었다.유리창에 닿을 만큼, 가지를 뻗은 키 큰 느릅나무를 타고는 그가 찾아온 것이 다.두 발을 창살에 기대고 머리는 유리창에 들이박고는 방안을 한 참이나 두리번거렸는데, 그가 우리 집들이를 위한 첫손님인 것을 미 처일러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더욱 결과적으로는 진객을 문적박대 아닌, ‘창전박대‘한 거나 다를 게 없엇으니,

    ‘아유, 서울 살다가 왔다더니 마음 한 번 고약해!”

    청성모의이같은 푸념을 듣고는 온 산속 식솔들에게서 인심 날대로 난 거나 아닌지 지금도 궁금하다.

    한데 정말 말리고도 못다 말릴 불청객도 이따금 찾아든다.뒤뜰 예 쁜너덜돌담아래의 한 귀퉁이는 이를테면 나의 ‘정원 서실‘ 같은 곳.장대석 바닥에는 돌부처말고도 제법 그럴 듯한 석물들이 서 있 는데다느티나무 고목이며 소나무가 그늘을 던지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은사뭇 은근하나.해서 굵은 두 개의 나무 등걸 사이에다 그 물침낭을 매달아 놓고는 오수를 즐기곤 하는데, 웬걸 이따금 능구 렁이가기어들 줄이야.그것도 꿈에 나타나는 게 아니다.하지만 기왕 애기 능금나무가 곁을 지키고 있는 작은공간인 바에야 뱀은 아 마 나를 위해서라도 여기 바로 또 다른 에덴 동산 하나쯤 차리고 싶 었는지도 모른다.

    길짐승,날짐승, 네 발 짐승 할 것없이 수시로 드나드는 집 주인ㅇ 라고해도노상 그들과 이심전심 속내가 통하는 건 아니다.이사 온 지 두 해쯤 되엇을 적에 우연히 바닷가에 나갔다가 물고기들에게 차마못할 짓을 하고 말았다.물깃에 막 내려서는데, 돌모래 밭에 서수없이많은 복어들이 허이연 배를 뒤집고는 헐떡대고 있는 게 아닌가! 더러는퍼덕거리고도 있었다.아! 예삿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집작한 나는 닥치는 대로 복어를 잡아서는 물에다 던져 넣엇 다.한참을 그래사.땀깨나 흘렸다.

    남의 씨를 말리고도

    그렇게긴급 구호작전을 편 끝에 동네로 돌아온 나는 고로(古老)들 에게 사뭇 무공담(武功談)이랍시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용궁으로돌아간 복어들이 틀림없이 박씨 아닌 복을 물고 올 겁니 다.”

    이렇게 수선을 떠는 나에게 한 분이 말했다.

    ”그 참, 남의 씨를 말려 놓은 꼴에?”그리곤 한심한 듯, 혀를 연신 찼다. 맙소사! 그게 바로 복어가 산란하는 현장이었을 줄이야!복어는 슬 물을 긑을 물고 물깃에 다다라서는 알맞은 돌모래 바닥에다 알을 낳 는다고했다. 그런 다음 이내 밀물이 몰려들면 드걸 타고 바다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모처럼 목적지에 당도해서 돌모래밭의 산실에서 진통을 하고 있는 복어의 산모들을 모조리 바다로 내쫓는 망측한 짓을 저질렀다면서 그 노인은, ”뭣이 어째 목숨 살려준 값으로 복을 받기 바라다니, 나 원!” 다시금 혀를 찼다.

    그런 흉칙한 일이 잇고 한참 뒤, 내가 이 사건을 어느 신문 칼럼에 쓴것을본 그 방면 전문 학자들이 전화를 걸어 왔다.복어가 알 낳는 현장은 매우 귀해서 그들은 일부러 일본까지 가서는 보고 왔다 면서꼭 현장 안내를 해달라고 청햇다.물이 맑고 한적한, 은근한 돌 모래 으물깃만 골라서 산란을 하다 보니 현장을 목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그들은 덧붙였다.

    필경 남에게 멸문지하를 입히고 말았으니, 40여년 줄곧 인연을 끊다 시피했다가 고향이라고 돌아와서는 자연과 친하게 지낸다는 게 자 연 파괴를 저지른 것이다.그 뒤로 나는 그 즐겨먹어 마지 않던 복 어를안먹기로 작정했다.복어가 그 독으로 나를 해칠지도 모르 니, 그럴 수박에...

    생물들이 그리고 동물들이 내 집 드나들기를 저희 집인 듯하는 것과 마찬가지로나도산에 또는 바다에 가기를 내 집 드나들 듯한다. 거기울이 있을 턱이 없고 가름이 있을 리 만무하다.무시로 수시 로 드나든다.

    좌이산에서 흘러내린 간천(澗川)은 내가 ‘현류동(玄流洞)‘이라고 이 름 붙인곳, 물길 한 켠이 줄기줄기 검정 벼랑이기 때문이다.

    물을따라 오솔길을 오르면 풀서리 자갈에서 까치독사도 만나고 능 구렁이도만난다.봄철 이후는 물도 넉넉해서 가재며 장어 그리고 민물게가 지천이고 도롱뇽도 드물지 않다.다슬기를 먹고는 반디 가번성하다.더러 심심치 않게 족제비와 맞닥드리면 그걸로도 공 연히유쾌해진다.장어나 게를 잡아먹고 사는 건지 궁금하지만 그 에게 물어 볼 수가 없다.

    새벽일어나는 길로 여기서 흐르는 물부터 마신다.그리고 ㄴ세수 를 하는 것이지만, 여름엔 물론 멱도 감는다.

    그 다음, 뒷산 능선을 한참 타고가다가 우거진 솔밭에 아무렇게나 퍼질러앉는다. 겨울 빼고는 윗통을 벗고는 삼림욕을 하기 마련, 송진내와풀향기를 깊게 들이킨다.그 향으로도 마음이 차지 않으 면갈잎새를 엷은 흙까지 뒤집으며 산짐승처럼 발길로 세차게 헤집 는다.

    자유의 끝

    아! 그 순간 습한 흙내음과 갈잎 내음이 자욱하게 온몸을 감사고 든 다. 어찌그 뿐인가?이 향에 새들으 지저귐이 열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다시 또 바람에 설레는 나뭇잎들의 물살에 살갗이 젖는다.

    초록으로그득한 사각을 후각과 청각 그리고 드디어는 촉각가지 거 들고나서면,나의 온 감각은 삽시간에 푸드덕 날갯짓을 하다가는 이내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든 듯이 가라앉는다.그제서야 선연(鮮姸)한 자극이 아늑한 명묵(瞑默)과 쉬 더불을 수도 있는 곳, 거기가 바로 내 집 뒤, 아침 산속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로써 오관 육감이 통틀어서 산기운에 잠긴다.더불어 내가 풀어 진다. 긜곤 이어서 지워진다.풀어져 지워지고 삭아지는 것의 안 식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내가지워진자리에 더러는 가벼이 안개가 피고 더러는 잔 바람이 분다. 나는 안개도 되고 바람도 되어서 그 부는 바람 그 피어오르 는 안개를 느낀다.

    그리곤,그것이 장차, 무엇을 위한 연습이고 예감인가를 지레 알아 차리라고 내가 내게 타이른다.그것이 통하면 비로소 나는 나의 몸 둥이,나의살갗이 격리가 아니고 칸막이가 아닌 경지, 공간의 자 유, 공간을 더불은 나의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런끝에, 오랜 긑에 눈을 뜬다.하면, 정말이지 흙바닥에서부터 목숨기운이 나뭇진이 뿌리를 타고 오르듯 내 몸 안으로 차고 오른 다. 내게서도 나무가 자라고 봉우리가 뻗쳐오를 것 같은 느낌, 정 말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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