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괄시받는 국민가요 '뽕짝'의 마력

  • 송기철·대중음악 평론가

    입력2006-09-07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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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대표’ 대중음악 트로트. 왜색이라 천시받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고 부르는 노래다. 10대 댄스음악마저 ‘뽕 기운’이 빠지면 히트하기 힘들다는데. 나이 먹을수록 좋아지고 같이 부르면 더 흥나는 ‘뽕짝’의 정서, 트로트의 흡입력. 》
    ‘뽕짝’ ‘도롯또’.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어 온 트로트 음악에 대한 별칭들이다. 트로트는 분명 한국 대중음악이 안고 있는 ‘애물단지’다. ‘전통음악’이라는 규정을 쉽게 할 수도 없고(그러자니 반대 또한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일제강점기의 잔재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생명력이 참으로 질기다.

    우리 앞에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쉽게 인정하기는 싫고, 무시하자니 입 속을 뱅뱅 맴도는 트로트.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1994년, 영국 펭귄 북스가 발행한 ‘THE ROUGH GUIDE- WORLD MUSIC’을 읽다보면 웃지 못할 대목과 만나게 된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들을 정리해 놓은 이 책의 한국 편에는 국악, 사물놀이, 민중음악(포크) 등과 함께 ‘퐁착 록(PONCHAK ROCK)’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은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6년 동안 받으면서 언어, 역사, 문화가 심각하게 훼손됐다. 토로또(TOROTTO: 트로트)는 일제강점기가 남긴 유산이며, 일본의 엔카와 동등한 것이다”인데, 이와 함께 이미자, 조용필, 김수철, 이선희 같은 가수들을 ‘퐁착 록’ 뮤지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 대중음악 ‘퐁착 록’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읽는 순간엔 불쾌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비교적 한국 대중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음악평론가 가와카미 히데오와 폴 피셔(Paul Fisher) 두 사람이 쓴 이 글은 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보다 객관적인 관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는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트로트의 ‘제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그 본질과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리라 믿는 것이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지난 4·13 총선 때 큰 각광을 받았던 ‘테크노 여전사’ 이정현의 노래 ‘바꿔(최준영 작곡)’. 그런데 이 노래를 유심히 듣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곡의 리듬은 ‘쿵짝 쿵짝’거리는 이른바 ‘뽕짝 리듬’이다. 테크노 여전사의 노래가 ‘무늬’만 테크노였던 것. 이것은 비단 이정현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가요계를 살펴보면 댄스뮤직, 발라드 구분 없이 소위 ‘뽕 기운’이 담긴 곡들이 강세를 띠고 있고, 또 그래야만 히트한다는 일종의 공식 아닌 공식이 되어 있다. 언제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걸까.

    ‘뽕 기운’이 담겨야 히트한다?

    1996년, 가요계에는 의미 있는 히트곡이 하나 나왔다. 영턱스 클럽의 ‘정(윤일상 작곡)’. 10대 댄스 그룹이 트로트 요소를 가미한 노래를 부르며, 단숨에 인기정상에 올랐던 것이다. 트로트를 직접 경험한 세대가 아님에도 이들 노래에 담겨있는 은근한 뽕 기운에 여러 세대가 취했다. 아무튼 이 노래의 빅히트 후, 가요계에는 트로트적 요소를 가미한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러한 방식에 일가견을 가진 윤일상, 최준영 등은 지금 현재 가요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대중가요는 일단 사람들이 처음 들었을 때 귀에 쏙 들어와야 한다. 라디오나 TV에서 나오는 노래를 온 신경을 집중해 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흘러나오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들을 뿐이다. 그래서 쉽게 기억되는 몇 마디가 필수적이다. 바로 그 ‘몇 마디’를 친숙한 트로트 풍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은 그 노래에서 친근함을 느끼고, 쉽게 외워 따라 부르게 된다.

    그런 이유로 가요에서 이른바 뽕 기운은 곡 구성에 필수요소가 됐다. 결국 어린 세대들이 즐겨 듣고 부르는 음악 속에도 우리 스스로 짐짓 외면하고 폄해왔던 트로트의 생명력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신세대들조차 트로트를 ‘몸’으로 느낄 줄 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트로트는 젊은 세대들로부터 ‘피부에 와 닿는’ 인기를 누리지 못했을 뿐 상당히 오랜 기간 우리 곁에 있어 온 음악이다. 장르 구분이 힘든 가요계에서 트로트만큼 장르적 생명력을 꾸준히 유지해 온 음악도 드물다. 요즘 청소년들 역시 트로트음악의 영향권에서 성장해왔다는 의미다.

    지난 90년대 가요계는 댄스음악이 패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IMF구제금융 사태를 겪으면서도 댄스뮤직은 쇠퇴하지 않고 살아남아, 이제는 그 자생력을 일정 정도 확보한 상황이다. ‘국적불명’ ‘지나친 10대 위주 음악’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우리 입맛에 딱 맞는 ‘토종 아닌 토종’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90년대 중반 이후 불붙기 시작한 댄스뮤직과 트로트의 퓨전 현상이 기여한 바 크다. ‘한국형 댄스뮤직’이라는 새로운 음악형태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 우리 10대, 20대들은 트로트에 거부감보다 친근함을 갖기에 이르렀다.

    가요계가 이렇게 변하는 동안 30대 중반 이하 세대의 마음속에도 트로트 정서가 구체적으로 자리잡아갔다. 트로트의 위력은 각종 모임자리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필자 역시 군 복무 시절 그런 경험이 많다. 회식 말미에 이르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트로트 메들리가 시작됐다. 주로 경쾌한 노래들이 이어졌는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제 20대 초반인 젊은 군인들이 웬만한 곡들은 가사부터 리듬까지 줄줄 꿰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다수 회식자리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 절정은 트로트가 장식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트로트 노래들이 일종의 ‘귀 가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노래방 열풍도 트로트의 생명력 유지에 큰 공헌을 했다. 1990년대, 노래방이 큰 인기를 끌면서 그에 초점을 맞춘 단순하고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이 양산됐다. ‘노래방에서 떠야 노래가 뜬다’는 논리 속에 이런 현상은 가요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기도 했다. “노래방에서 내 노래를 불러도 80점을 못 넘었다”는 가수 신승훈의 말처럼 이 알쏭달쏭한 기계는 ‘전 국민의 가수화’를 촉진시켰다.

    이 노래방 열풍은 젊은 세대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기성세대들도 모임 뒤끝이면 너나없이 노래방을 찾아 목청을 돋웠다. 넥타이를 머리에 맨 직장인들은 너나없이 “역시 뽕짝이 최고야!”를 외쳐댔다.

    젊은 세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양강 처녀’는 졸지에 ‘국민 가요’가 됐고, 각종 경기장에서는 ‘비 내리는 호남선’이 응원가로 변모해 울려퍼졌다. 김수희는 ‘애모’를 부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편승엽의 ‘찬찬찬’은 1990년대 중반 가요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우리가 지금 듣고, 노래하고 있는 트로트는 서양에서 발생한 것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이름이 ‘폭스 트롯(fox trot)’인 이 음악은 1910년대 초반 미국에서 발생했던 춤의 한 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온 뒤에 경쾌했던 박자도 느리게 변했고 노래 자체가 애조를 띠게 됐다. 이러한 일본풍 트로트를 ‘엔카’라고 부르게 됐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에도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본래 엔카는 일본이 급속도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던 메이지 시절, 정부와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거리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 쯤부터 정치성은 사라지고 이별, 비, 항구, 욕망, 상심, 그리움 등을 소재로 삼는 지극히 대중적인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엔카는 서양음악과 일본 특유의 정서가 혼합된 일본 최초의 대중음악이었으며, 오늘날에는 ‘일본의 영혼’ ‘일본만의 독특한 발라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엔카 원조’ 고가 마사오의 고백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트로트는 확실히 일본 음악이다. 그러나 트로트의 뿌리에 대한 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음악평론가 겸 작사가인 김지평은 자신의 저서 ‘한국 가요 정신사’에서 ‘엔카의 원조’ 고가 마사오가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스스로가 “한국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을 근거로 삼아 트로트 왜색론을 반박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우리의 농악, 타령 등에서도 트로트리듬이 발견된다. 왜색가요 주장은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몇몇 인사에게만 존재하는 유령”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면 가요에 왜색이 담겨 있음을 지적한 황병기 교수는 “일본 고유의 미야코 부시 음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요나누키 단음계를 사용한 일본 가요 스타일을 한국 작곡가들이 그대로 모방하면서 왜색 가요의 조류가 형성됐다”면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로 “민요가 아닌 새로운 대중음악이 필요해진 개화기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아 주체적인 대중음악을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아직도 왜색가요가 끈질기게 불리는 것은 그 식민지적 풍화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 준다”며 우려의 뜻을 표하고 있다.

    위의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트로트 음악의 ‘왜색논란’은 이 장르의 태생적 약점인 듯하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자발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 것을 무차별적으로 이식받았다는 데서 오는 거부감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유입된 외국 음악 가운데 오직 ‘왜색노래’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영미 교수는 ‘한국 대중 가요사’에서 “트로트가 왜색이라면 광복 후의 양식들은 ‘양색(洋色)’이다. 대중가요의 양색성은 지적하지 않은 채 왜색성만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 대중가요들의 양색성, 미국 대중문화 의존성을 가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이제 트로트 양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완전히 ‘토착화’되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해체 조짐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왜색성으로 인한 이식 문화적 효과를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이 교수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트로트는 이제 쇠퇴의 길에 들어선 듯 보인다. 그러나 오랜 세월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된 그 정서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나이가 들수록 트로트가 좋아진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트로트 속에 우리 정서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정서란 본능적으로 외부에 표출되기 쉬운 감정을 뜻한다. 10대들이 즐겨 듣는 댄스곡 속에서도 굳건하게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가. 정서의 세습, 더 나아가선 세뇌에 가까운 ‘뽕짝’의 무서운 생명력에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트로트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그 선호도가 연령과 거의 정비례하는 음악이다. 왜 “30대 중반은 넘어야 트로트의 참맛을 알게 된다”고 하는 걸까.

    50대 이상은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트로트에 익숙하다. 그들의 어린 시절, 내지는 젊은 시절을 상징하는 트로트는 이제 익숙함을 넘어 어떤 ‘향수’로까지 탈바꿈한 듯하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50대 이하, 4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연령층이 트로트음악을 선호하는 현상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독특하다. 50대보다는 ‘덜’ 어른이고, 그렇다고 30대 중반 이하와는 다른 가치관을 지닌 ‘낀 세대’. 일제 강점기를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 잔재를 경험하며 자란 슬픈 세대다.

    이 연령층은 도시락보다는 ‘벤또’를, 계단보다는 ‘가이당’을, 머큐로크롬보다는 ‘아까징끼’라는 단어에 더 친숙함을 느낀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대상들이 어떤 소박한 추억이 되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단지 식민 시대의 잔재로만 몰아붙이기에는 웬지 모르게 정이 가고 심지어 ‘한국적’이다.

    물론 누구도 이들에게 그런 정서를 주입한 적은 없다. 그저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알게 모르게 받은 영향이 단절되지 않고 이들 세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일 뿐이다. 결국 낀 세대들에게도 트로트는 어려서부터 경험한 친밀한 정서의 노래이며, 가만히 듣고 있으면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음악인 것이다.

    사실 트로트에서 시대를 앞서나가는 엄청난 실험정신이라든지 뛰어난 음악적 양식미, 심오한 메시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단지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하고 오래 들어온 음악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그 효력이 더욱 강해지는 건 아닐까.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마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느낌. 그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에 팬을 끌어 모음에 있어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유리하게 작용한다. 트로트는 그런 장르 고유의 친화력이라는 가장 큰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90년대를 지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성인음악의 부재와 기능상실도 트로트가 어른들의 음악으로 입지를 굳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0대에 데뷔해, 20대가 되면 노장 소리를 듣고, 나이 서른이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가요계의 서글픈 현실 속에서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감성과 호흡할 수 있는 성인음악에 목말라 있다. 마땅히 들을 음악이 없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기형적 상황이 그들을 음반시장에서 내쫓고, 그 빈 공간을 트로트가 채우고 있는 셈이다.

    트로트를 외형적으로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꺾이는’ 창법이다. 트로트 가수들은 누구나 꺾임 창법을 구사한다. 꺾임은 트로트의 장르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애잔함을 표현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트로트는 꺾여야 제 맛이란 얘기도 있다. 자, 그렇다면 ‘음악 속의 꺾임’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전 세계 각 나라의 다양한 음악을 듣다보면 아주 신기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멀리 북유럽,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중남미, 중동, 동유럽 집시음악 등등 동서양을 막론한 여러 지역의 민속 음악 속에도 공통적으로 ‘꺾임’이 존재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아랍, 인도같이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타문화에 배타적 입장을 견지해온 지역일수록 꺾임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좀 달리 보면 서구 선진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꺾임이 퇴조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민요 속에도 ‘꺾임’은 존재한다. 트로트 속에 있는 전통의 골격을 추측케 한다.

    노래가 발휘하는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는 노랫말을 통한 메시지전달이다. 리듬과 멜로디도 음악의 구성요소지만, 노래가사는 궁극적으로 가수가 전달하고자하는 심상을 듣는 이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넣는다. 흔히 멜로디에 취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마음을 적셔주는 것이 바로 노랫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요를 들으며 간혹 “이건 꼭 내 얘기 같아”하는 혼잣말을 탄식처럼 내뱉기도 있다.

    몇 해전 큰 인기를 모았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는 노랫말의 위력을 절감하게 해준 명곡이다. “이슬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30대 초반인 필자는 도라지 위스키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낭만에 대하여, 더 나아가 ‘추억’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희망의 중심은 추억’이라는 어느 시 구절처럼 누구나 마음 속 한편에는 추억이 자리잡고 있다. 하물며 도라지 위스키 시절을 겪은 세대에게 이 노래가 어떤 감상을 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제 30을 넘겨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 40대들에게, 그 인생을 함축한 듯한 트로트 가사 한 구절은 소주의 첫 모금처럼 가슴을 싸하게 감싸 안는다.

    트로트의 노랫말을 살펴보면,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과 슬픈 이별, 인생에 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점 역시 앞서 언급한 엔카의 특징과 흡사하다. 그렇다고 속칭 신파조 가사들이 트로트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인기 있는 가요 노랫말 속에서도 비슷한 감성의 가사들이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10대 신세대 가수들의 노래에서.

    노래라는 것이 본래 사람 사는 모습을 담는 거고 더 나아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내 사랑을 몰라줘서 나는 너를 떠난다” 내지는 “너는 나를 망가뜨렸으니 너도 눈물 흘리게 될 거야” 식의 가사들에서는 젊은이답지 않은 진부함이 풀풀 풍겨 나온다. 이런 가사가 만연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트로트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트로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이 슬픈 멜로디다. 슬픈 느낌이 나는 이유는 역시 마이너(단조) 음계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사랑받았던 노래나, 지금도 인기 있는 곡들을 보면 가요, 팝 구분 없이 단조음계를 사용한 것이 많다.

    우리 민족이 단조 풍의 슬픈 노래를 선호하는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 우리의 역사와 민족성 때문일 것이다. 잦은 외침 탓에 갖은 고난을 겪으며 살아왔고, 때문에 저마다 가슴에 응어리진 사연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마디로 ‘한’이라 하지 않는가.

    농축된 한을 표현함에 있어 단조음계들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이 점은 멜로디가 중시되는 우리 국악을 살펴봐도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남도 민요, 서도 민요의 한서린 정조를 되새겨 보라. 역시 마이너 음계다.

    ‘황금의 레퍼토리’ 자랑하는 메들리

    트로트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메들리다. 이른바 ‘뽕짝 메들리’로 불리는 이 희한한 스타일의 음악은 트로트 보급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음반 구매자들이 메들리에서 느끼는 매력은 무엇일까.

    먼저 편리함을 꼽을 수 있다.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들은 ‘황금의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샹하이 트위스트’까지, 그야말로 대중이 선호하는 트로트 곡은 거의 다 들어 있다. 한 개의 테이프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러 곡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면 음반구매자에게 그보다 더 실속있고 기분 좋은 일도 없다. 물론 오리지널과 ‘가리지널(다른 가수가 리메이크한 것을 의미하는 속어)’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 다음으로는 가격의 저렴함을 꼽을 수 있다. 최근 가요 테이프의 가격이 보통 4000~5000 원대에 형성되는 것에 비해 트로트 테이프는 유명가수의 독집이라 해도 그리 비싸지 않다. 그중에서도 메들리 테이프들은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 보통 2000원대인데 이 가격은 일명 ‘길보드(불법 복제 음반)’ 테이프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렇듯 저렴한 가격 때문에 대부분의 트로트 테이프들은 불법음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별 판매량도 뚜렷이 구분된다. 도시보다는 시외, 농촌 지역의 판매량이 많다. 이 점은 음반을 구입하는 연령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트로트 메들리의 주소비자가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위에 언급한 ‘낀 세대론’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가격이 싼 만큼 이윤이 박할 것 같지만 메들리 테이프의 마진은 생각 외로 짭짤하다. 제작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녹음에 쓰이는 악기라고는 전자 오르간과 리듬박스가 전부이며, 가수 개런티 이외에는 특별히 추가되는 비용이 없다. 단, 녹음에 임하는 가수는 불러야 할 곡들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능수 능란하게 애드립을 구사할 수 있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신바람 이박사’ 이용석 씨도 메들리 가수 출신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 세대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전형적인 ‘디지털 세대’라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첨단전자제품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디지털 악기인 전자 오르간과 리듬박스로 만들어진 음악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뽕짝메들리는 일본에서 ‘새로운 음악’으로 평가받았고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음반관계자들의 얘기에 의하면 메들리만 놓고 봤을 때 우리나라엔 이박사에 못지 않은 재목들도 많다고 한다.

    메들리 테이프는 이렇듯 편리하고 값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메들리 장르 특유의 가벼운 느낌과 급조되는 제작방식 때문에 트로트는 경박하다는 인식에 일조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좋든 싫든 트로트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즐기고 있는 또 하나의 문화다. 그렇지만 아직도 온전한 제 자리를 찾았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트로트를 부르는 또 다른 용어들인 ‘뽕짝’, 그리고 ‘전통음악’이란 단어의 속내만 살펴봐도 그렇다.

    뽕짝이란 단어는 트로트를 하대하는 명칭이다. 그 저변에는 일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이 작용하고 있다. 만약 트로트가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것이라면. 그래도 우리의 반응이 지금과 같았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인정도, 부정도 하기 힘든 어중간한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뽕짝이냐 전통가요냐

    한편에선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한다. 누가 왜 그런 명칭을 부여했으며, 과연 우리 사회 대다수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이름인가. 그저 오래 됐다 해서 ‘전통’이란 호칭을 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끌어 안아야 할 ‘악습’들은 너무나 많다.

    흔히들 광복 후 우리 정치사가 분열과 부정으로 얼룩져 온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일제청산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들을 한다. 트로트도 마찬가지다. 광복 직후 더 활발한 논의와 명확한 장르적 규명이 이루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없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한국 대중음악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돼 있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트로트가 진정한 의미의 전통음악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젊은 세대가 즐길 수 있는 히트곡이 나와야 한다. 옛것일수록 거듭 새로워지는 과정이 없으면 발전도, 생명 유지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또 그런 히트곡이 나와야만 ‘트로트는 구식’이라는 일반적 생각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중반 편승엽의 ‘찬찬찬’ 이후 젊은이들이 즐길 수 있는 트로트의 흐름이 끊겼다고 보는데, 최근 불고 있는 이 박사 열풍은 트로트가 젊은 층에 파고들 수 있는 또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히트한 노래 한 곡으로 너무 오래 버티는 풍토도 개선돼야 할 것이다. 방송에서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도대체 저 노래가 언제적 건데…”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트로트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신곡 위주의 새 음반을 자주 발표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가수에게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젊은 층이 트로트를 선뜻 인정하지 않는 주요인 가운데 하나다.

    트로트를 ‘저급, 하층문화’의 일종으로 깔보는 일부의 시각도 개선되었으면 한다. 문화를 굳이 고급, 저급으로 나누어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야말로 설익은 엘리트의식이다. 다수가 즐기고 있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실체를 인정한 이후에야 발전적인 비판도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그 작업은 우리 스스로가 좀 더 솔직해지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즐겨 부르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트로트나 불러대는 구식’이라 생각할까 주저하고 꺼리는 마음. 때로는 좋아하는 걸 있는 그대로 좋다고 인정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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