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쓴웃음의 철학자 몽테뉴, 지적 허세를 날려버리다

  •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입력2004-09-13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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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 읽기는 못 견디게 재미있다. 자신조차 제물로 삼는 속시원한 조롱과 야유. 그 속에 철학이 있고, 잘난 체할 줄 모르는 회의주의자의 강렬한 진실이 있다.
    아내는 프랑스 영화를 볼 때마다 잔다. 그러면 나는 열심히 깨운다. 영화를 보는 게 목적인지 아내를 깨우는 게 목적인지 모를 정도다. 아내는 몰려드는 잠을 쫓으려 무척 노력하나 여의치 않다. 영화를 보는 도중 몇 번이나 일어나 커피도 마시고 세수까지 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아내를 앉혀놓고 몇번씩 당부도 한다. 영화평론가들 말처럼 대단한 예술영화다, 감독의 사상이 어떻고 시대적 배경이 어떻고 연기는 어떻고 등등. 아내 역시 그 전날에는 영화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잠도 푹 잔다. 그럼에도 영화가 시작되면 영락없이 존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아내에게 화가 난다. 영화평론가들이 말하듯 당신은 싸구려 할리우드 영화에 눈이 멀었다며 쏘아붙인다.

    어디 영화뿐인가. 프랑스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사상도, 철학도 마찬가지다. 좋은 책, 좋은 작품이라고 권하면 5분이 채 안돼 잠이 든다. 연애 시절 같이 읽은 실존주의 책부터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내 아내에게는 그저 수면제에 불과하다.

    그런 내 아내를 독자들이 경멸해도 할 수 없다. 어쨌건 나는 최근에 와서야 아내에게 그런 짓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니 나 자신, 아내에게 수면제 역할만 하는 프랑스 현대문화가 지겨워졌다. 역시 저질인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인지. 확실한 것은 몇년 전 시골에서 살고부터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에 빠진 것은 아니다. 단지 프랑스니 하는 식으로 어떤 나라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또한 예술영화니 작가영화니 하는 구별도 두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아내가 잠을 자면 그냥 내버려둔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혼자 씩 웃는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시골에 와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싫어졌다. 십몇년 전, 우리나라에 포스트모더니즘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번역도 하고 글도 썼으나 이젠 시들하다. 출판사에서 푸코에 대한 책을 써달라는 청탁이 와도 내키지 않는다.

    대신 그동안 책꽂이 구석에 처박아둔 고전들을 찾게 됐다. 그 중에서도 (역시 프랑스인이지만) 몽테뉴(1533~92)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프랑스의 그 누구보다 좋다. 아, 이런 프랑스인도 있구나 하며 새삼 감탄한다. 이제 비로소 아내와 함께, 졸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재료를 발견했다. 역시 나이 탓, 쉰이 넘은 탓인가, 신경림의 시처럼.

    수필의 시조라는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수상록)’는 자기 탐구 또는 고백록이다. 무엇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적 무능력까지 솔직히 고백한다. 우리에게 이런 수필이 있었던가. 여하튼 정직한 몽테뉴를 읽는 것은 즐겁다. 더구나 500년 전 사람이 쓴 고백 아닌가.

    그는 판사이자 귀족이며 영주고 시장이었다. 지금 철학자들은 그를 동료로 보지 않는 듯하지만 그는 평생 자신을 철학자라 생각했다. 철학사에 그의 이름이 없어도 좋다. 아니, 그는 역사가이자 문명비판가이고 사상가다. 그는 서양의 식민지 침략을 비판했고 기독교를 조롱했으며 서양 철학을 우스개로 만들었다. 그의 비판과 조롱, 야유는 지금 봐도 즐겁다. 책읽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이 정도는 돼야 고전이다.

    언행일치는 황금률인가

    프랑스 보르도 부근 시골에서 찾은 몽테뉴의 서재는 좁은 3층탑에 있다. 3층이 서재인데, 매우 작은 책상 하나와 의자, 그리고 네 벽을 둘러싼 1000여 권의 책으로 빽빽하다. 천장 들보에는 읽은 책에서 고른 경구가 여럿 쓰여 있는데 그중에는 테렌티우스의 “내가 인간이라면 인간과 관련된 것은 어느 것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시골 분들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대부분 좋은 분들이지만 간혹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해하려 노력하고 함께 술자리도 가지지만 몇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미워한다. 그러나 민중과 함께 사는 것은 나에게 매 순간 고통이다. 나는 민중을 위해 어떤 일도 할 것이나, 상점 점원과 함께 살기보다는 매달 반을 감옥에서 사는 쪽을 택하겠다.”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증오함은 모럴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민중과 함께 살 수는 없다. 어쩌면 이는 모순이리라. 언행의 불일치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스탕달이 ‘앙리 브류랄의 생애’에서 말한 위 구절에 동의한다. 비록 마음 한 구석은 쓰라리지만 웃는다. 그게 인간이고 인생이라고 쓴웃음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당장 그런 인간이 어떻게 모럴을 운운하는가 하고 반박할 것이다. 언행일치를 초등학교부터 배운 우리 독자들이니 당연한 반박이다. 그러나 정직해지자. 민중을 사랑한다면서 민중과 함께 살기란 어렵다.

    물론 나도 이전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민중 운운하면서도 민중과는 다르게 사는 것을 인정한다.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시골 분들에게 르네상스 운운할 수 없다. 더욱이 민중적 시각 운운하면서도 이 글을 노동자나 농민이 읽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민중적 빈센트’를 운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빈센트 반 고흐를 잘 모른다. 내가 쓴 책은 많이 팔려야 몇천권이다. 사천만 국민 중에 몇 천명만이 그 책을 읽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내용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어떤 글을 쓰는 경우에도 무슨 자기만의 관점이 있는 듯 과장하지만 사실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에세’를 좋아한다. 특히 맨 앞에 나오는 ‘독자에게’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구절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독자여,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런 시시한 주제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함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 안녕.”

    그러나 이것으로 끝낼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책 속 구절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영광을 공격하는 사람들조차 그 책의 표지에는 자기 이름을 적길 희망한다. 영광을 경멸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삼고 있다.” “무능하고 세상에 유익하지 않은 저작자들은 게으른 자나 부랑자의 경우와 같이, 어떤 법률의 규제가 가해져야 하리라. 사람들은 나를 비롯한 몇 저작자들을 우리 민중의 손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높은 경지에 선 고고한 입장이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 같은 눈높이에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이어 자신도 동류라며 스스로를 비웃는 것이다. 타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자신을 비웃는다. 이 겹눈이 몽테뉴 웃음의 진수다. 그래서 서글프다. 언제나 쓴웃음이 난다. 그런 이유로 스탕달과 함께 몽테뉴를 읽는다.

    사상사나 철학사에 몽테뉴는 등장하지 않는다. 에세라고 불리는 수필을 시작한 사람으로 문학사에서 그를 다루지만, 몽테뉴를 수필가라 부르는 사람도 없다. 그에 대한 가장 흔한 호칭은 모럴리스트다. 모럴리스트를 뭐라 번역할까? 도덕주의자? 천만의 말씀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모럴리스트란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 휴머니스트, 특히 회의론의 영향을 받은 17~18세기의 철학적 작가들로서, 몽테뉴와 같은 반합리주의, 반체계주의, 반형이상학주의자를 말한다. 그 공통의 관심은 인간을 특히 감정이나 정서 상에서 자기인식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을 약화된다. 아니 과도한 지성이나 정신을 경계한다. 어쩌면 모럴리스트란 차라리 감정주의자라 번역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불충분하다. 무엇보다 모럴리스트의 특징은 그 웃음에 있다. 따라서 ‘웃는 모럴리스트’란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웃지 않는 모럴리스트도 있으므로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예컨대 파스칼이나 알랭 같은 좀 고리타분한 도덕선생 스타일의 모럴리스트도 있다. 그러나 나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알랭의 ‘인생론’보다 몽테뉴의 ‘에세’가 좋다.

    우리에게는 그런 모럴리스트가 없다. 억지로 찾는다면 김형석, 안병욱, 이어령, 김동길, 이태규 등과 같은 사람들을 꼽을 수 있으나, 그들에겐 웃음이 없다. 최근의 사람들, 박노자나 강준만에게도 웃음은 없다. 그들 역시 도덕선생이다.

    몽테뉴처럼 웃는 모럴리스트는 도덕 선생이 아니다. 도덕선생과 다른 점은 자기동일성이 없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선지 우리의 모럴리스트는 언제나 언행일치를 전제한다.

    그러나 몽테뉴는 그런 달관의 웃음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약함, 어리석음과 천박함을 비웃으면서도 스스로 약하고 천박하며 어리석음을 숨기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모순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모순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웃음이 쓴웃음이라는 것이다. 모럴리스트는 그 모순된 자기 모습을 잘 알고 그를 쓴웃음으로 나타낸다.

    모든 웃음이 모럴리스트의 웃음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베르그송이 ‘웃음’에서 분석한 것은 모리엘이나 돈키호테의 희극적 웃음이다. 그 웃음에도 인간의 약함, 어리석음과 천박함에 대한 통찰이 있으나, 자신 또한 그렇다는 것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즉 ‘안전한 웃음’이다. 이솝우화의 웃음이 대표적인 예다. ‘도덕적 웃음’이다.

    정치만화나 시사풍자에서의 웃음도 그렇다. 그것들은, 약하고 착한 서민은 악덕 정치인을 비웃을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상호간 역할 교대란 없다는 안전성에 기초한 만큼 비열한 측면도 있고, 또 악덕인을 웃음으로 넘겨야만 그들을 능가한다는 심리적 계산도 깔려있어 사실 좀 서글프다. 채플린의 웃음도 마찬가지다.

    웃는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도 그렇다. 라블레의 희극에 나오는 홍소나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처절한 웃음도 같다. 임제를 비롯한 선승의 폭풍 같은 웃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웃음은 높은 경지에서 내려다보는 달관의 웃음이다.

    그러나 모럴리스트는 자신도 어리석고 추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웃음은 쓴웃음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추악함을 비웃는 것이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추악함을 비웃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경지의 달관이 아니라 낮은 경지의 현실인식, 더 정직하게 말하면 자기 꼴을 알고 웃는 것이다.

    이는 악마적 웃음과도 다르다. 우리에게도 몇 번이나 영화로 소개된 라크로의 ‘위험한 관계’는 악마처럼 머리가 좋은(그리고 그밖에는 할 일이 없는) 귀족 남녀들의, 간계로 얽히고 설킨 인간 심리의 변방을 보여주어 웃게 만든다. 그러나 금방 싫증이 난다.

    그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진실한 사랑이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뿐 아니라 흔히 여성은 자신을 유혹하는 남성을 거부하면서도 그 유혹에 넘어가는 성욕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예컨대 모파상의 소설은 그런 묘사로 우리를 웃긴다.

    웃음에는 형이상학적인 웃음도 있다. 막스 브로트는 그 친구인 카프카의 웃음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카프카의 웃음은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웃음이다. 극단의 절망에 이른 자의 웃음이다. 담당 의사가 모르핀 주사 놓기를 거부하자 카프카는 말한다. “나를 죽이시오, 아니면 당신은 살인자요.”

    모럴리스트의 웃음은 그렇게 순수하지도 심각하지도 않다. 우아하지도 저속하지도 않다. 고급도 저급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그런 웃음이 등장하는 곳은 화려한 사교장이다. 근대 유럽의 경우 무도회나 카페 같은 곳이다. 그곳은 언제나 웃음이 흘러 넘친다. 그곳에는 ‘안전한 웃음’도 없고 ‘최후에 웃는 자’도 없다.

    그런 웃음의 대표 선수는 라 로슈푸코와 라 브뤼예르다. 그들은 인간의 추악한 자기애를 한껏 비웃는다. 라 로슈푸코는 “연애를 하지 않은 여자는 있으나, 단 한 번밖에 연애를 하지 않은 여자는 없다”느니 “행복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보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라 브뤼예르는 더욱 비관적이다. 그래서 예컨대 다음처럼 말한다. “인간이 무정하고 배은망덕하며 부정하고 잔인하며 자기만을 사랑하고 남을 잊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화 내지 말라.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의 천성이다. 그것을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돌이 떨어진다고, 불이 타오른다고 화를 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몽테뉴는 그들보다 웃음의 범위가 넓고도 깊다. 그러나 파스칼이 경멸한 천박함도 가득하다. 예컨대 “피타고라스의 며느리는 말했다. 여자가 남자와 잘 때 옷과 함께 부끄러움도 벗어야 한다, 그리고 옷을 입을 때 부끄러움도 다시 입어야 한다고.” “디오게네스는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며 말했다. ‘나처럼 배를 문질러 배가 부르도록 하면 좋지요’라고.”

    알베르티의 ‘가족론’에 제시된 전인상은 도시국가가 융성한 시절의 이념이었다. 그후 공화정이 무너지고 군주정이 대두됨에 따라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궁정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궁정인’이 카스틸리오네(1478~1529)의 ‘궁정인’에 의해 제시된다.

    19명의 귀족 신사와 4명의 귀부인이 나흘밤 동안 나누는 정담으로 구성된 4권의 이 책은, 궁정인은 귀족 출신으로 신사에 필요한 교육·행동·체육·무용·음악·회화·복장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또 현모양처로서의 부인상이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알베르티가 말한 전인적 교양은 궁정인 양성을 위한 전문적 지식으로 변한다.

    이를 비판한 사람이 몽테뉴다. 그는 이미 현학이 된 그리스어나 라틴어 공부를 버리고 자기 나라의 속어에 눈을 돌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나 사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몽테뉴의 ‘에세’는 자기와 관련한 모든 것의 탐구다. 그를 상징하는 크세쥬(Que sais-je)란 말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오한 사색의 결론이 아니라 회의주의적 사색의 이정표에 불과하다. 그 성과는 자유로운 정신이다. 회의주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회의의 결과 어떤 확실성을 자유롭게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몽테뉴의 그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그렇게 필요하고 그렇게 올바른 생식행위를 부끄러움 없이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진지하고 건전한 얘기에서 배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고 묻는다. “책에서도 인간에서도, 그 가면을 벗겨내지 않으면 안된다.”

    “되도록 자세히 나를 살펴보고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지만 내 안에서 발견되는 허약함은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하기 힘들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다.”

    바로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를 읽는 것은 나를 읽는 것이다. 따라서 즐겁다. “참으로 인간은 놀랄 만큼 덧없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존재다. 인간에 대해 영원히 변치 않는 판단을 내리기란 어렵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한 진리 탐구를 계속한다. 이 경우 철학은 쓸데없다. “우리들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농부들의 행동이나 말이 진정한 철학의 가르침에 들어맞는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농부는 신의 은총이나 권위 또는 모범 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인간의 전형이다.

    인간의 지식은 모두 상대적이나 ‘상대적 진리’는 존재한다. 그것은 어떻게 찾아지는가? 몽테뉴의 답은 명쾌하다. ‘서로 대화하라.’ 이는 번잡하고 복잡한 철학적 논의와는 참으로 거리가 먼 것이다. “책을 통한 공부는 활기 없고 무기력하므로 우리의 정신에 단번에 자극을 주지 못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단련시켜준다.” 이렇게 책을 부정하기에 그를 읽는 것이 더욱 즐겁다.

    ‘에세’ 제3권 제8장에는 대화에 대한 설명이 있다. 첫째, 자존심을 내세워 대화 자체를 망쳐서는 안되고, 둘째 대화 상대의 지위나 겉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몽테뉴가 농부와의 대화를 가장 즐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리 탐구를 위해서는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 사물의 본성이나 원인 또는 이유를 찾기보다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마녀재판이 횡행한 현실을 비판한 사람은 몽테뉴뿐이었다. “인간을 죽이려면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생명은 이런 초자연적이고 터무니없는 사건의 담보로 삼기에는 너무나 실재적이고 실질적이다.”

    그는 스토아학파가 인생과 사회에 존재하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며, 인간성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는 태도도 터무니없다고 본다. 특히 스토아학파가 육체와 쾌락을 거부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 본질에 따라 생명을 열심히 섬긴다.’ “우리의 병폐 중에서 가장 야만적인 것은 우리의 생명을 멸시하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몽테뉴는 기독교적 구원의 전제가 되는 죄나 원죄 따위는 철저히 배제하고 천당도 지옥도 무시한다. “천사로 변신하려다가 짐승이 된다. 높이 날아오르는 대신 푹 쓰러진다. 그 초월적 사상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높다란 낭떠러지처럼 나를 오싹하게 한다.” “우리의 학문들 중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학문이 나에게는 가장 저속해 보인다.” 1676년 ‘에세’는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올라 1939년까지 이어진다.

    또 몽테뉴는 “개혁만큼 국가를 짓누르는 것은 없다. 단순한 변화만으로도 부정과 폭정을 구체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보수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자행된 대학살을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그를 보수주의자라 할 수는 없다.

    생트뵈브가 말했듯이 ‘인간인 것, 이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 삶의 기본은 회의주의다. 바로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하는 사상과 사색의 이정표다. 그의 사상은 언제나 현재진형형이다. 스토아학파를 벗어나, 정신과 육체의 다양한 존재방식에 대한 인식을 거쳐, 정신과 육체의 해방과 자유의 발걸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고정된 사상이 아니다.

    ‘에세’는 명확하고 테두리가 분명한 기승전결의 논리를 요구하거나 매사에 결론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잡다하고 통일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몽테뉴 사상의 특징인 다양성과 유연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중요한 능력은 다양한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삶의 방식에만 달라붙어 매달리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영혼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가진 영혼이다.

    설령 내 마음에 드는 틀 속에 나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 허용된다 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나 자신을 끼워넣고 싶은 틀은 하나도 없다. 인생은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며 다양한 운동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복종하고 자신의 경향에만 사로 잡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비틀어보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자신의 노예가 될 뿐이다.”

    몽테뉴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자신도 세계인이라고 한다. “나는 모든 인간을 내 동포로 생각한다. … 국민으로서의 결속을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결속보다 하위에 둔다. 나는 태어난 고장의 감미로운 공기에 매달릴 생각이 없다. … 자연은 우리를 자유롭고 속박되지 않은 존재로서 이 세상에 낳았는데, 우리들 스스로 자신을 어떤 좁은 지역에다 가두어놓는다.”

    그래서 그는 죽기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낸다. “우리가 전염병을 옮겨주어 신세계의 쇠퇴와 파멸을 크게 앞당긴 것은 아닌지, 나는 걱정이다.” “그들은 신기한 것, 미지의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리고 우리의 거짓된 우정과 성실함에 속아 허를 찔린 민족이다. … 그런데도 우리는 반대로 그들의 무지와 미숙함을 이용해, 우리의 풍습을 본보기 삼아서, 그들을 배신과 음탕과 탐욕에, 그밖의 온갖 몰인정과 잔인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중세인은 인간을 죄인이요 타락하기 쉬운 존재라 본다. 반면 르네상스인은 인간의 결점을 들춰내기보다는 칭송하거나 비난할만한 인간의 행위, 고상하거나 탐욕적인 것, 귀감이 될만하거나 조롱할만한 것을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둔다. 즉 인간의 구체적 행동을 그 세세한 본성과 정황에 비추어 평가하는 태도, 그 도덕성을 구체적인 사례로 고려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지적 풍요에 대해 16세기 일부 유럽인들은 비이성적인 혼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한 논의 속에서 몽테뉴는 중재자로 나선다. 그는 보편적 판단의 중지를 권고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인간세계에 대한 풍부한 전망을 축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경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복잡다단한 행위와 동기를 관찰하고 사색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인간사에는 낯선 것이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몽테뉴는 자연에 대한 이론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정신이나 자기기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축한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문화상대주의를 전제한다.

    1570~80년대에 저술한 몽테뉴의 ‘에세’는 인문주의 철학의 완성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일상 습관에 대해서도 짓궂으리만큼 솔직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원죄를 고백시킨다며 가슴을 드러내게 한 뒤 때리는 습관은 야만으로 본다. 가장과 허식, 과장된 행동과 위선적인 자학을 배격하며 자신의 생활체험과 정신자세를 꾸밈없이 그려가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는 정신활동을 육체적 변화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또한 육체적 경험에 대한 경멸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사용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심지어 자신의 성체험을 기록하면서 당시 사회적 관습인 과도한 절제를 개탄한다. “나는 감히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하리라고 다짐해왔는 바 공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라도 혐오한다.”

    1618~48년 벌어진 30년전쟁은 종교개혁파와 가톨릭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킨다. 지적인 논쟁은 사라지고 칼과 화약 외에 다른 대안이란 없어 보였다. 각자는 자기 교리만이 확실한 진리이며 적의 교리는 어리석거나 사악하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다. 여기서 종교적 진리의 추종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믿음 자체를 열렬히 믿는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17세기 바로크 예술은 과장과 환상으로 뒤범벅이 된다.

    이러한 시대에 불확실성과 애매함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사는 인문주의자들은 배척당한다. 회의주의에 대한 불만으로 사람들은 개연적 학설이나 교의에 대한 추구를 중단하고, 이단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을 키워가며 결국은 믿음 자체를 위한 믿음으로 나아갔다.

    17세기 데카르트의 시대에 오면 몽테뉴가 개탄한 과도한 절제가 지배적인 사회관습으로 자리잡는다. 데카르트는 정신활동을 특히 이성적 계산, 직관적 관념, 지적 숙고, 감각 자료 등으로 말할 뿐 몽테뉴의 솔직함이나 편안함은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말한다.

    몽테뉴는 육체와 감정에 대한 책임, 그리고 육체와 감정에 휩싸여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간다움의 일부로 수용한다. 의지적인 정신적 활동으로부터 육체적인 물질적 과정을 구분해서는 안된다. 육체적 기능 중에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체면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경험을 전체적으로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야 한다.

    반면 감성을 이성으로부터 분리하여 윤리도피주의에 빠진 이성주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감정을 육체적 인과 과정의 결과로 취급함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감정을 분리하고, 감정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면제시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한 것에 대해서만 이성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는 태도다. 그 결과 17세기에는 사회적 수준에서 토론과 상상의 자유가 위축된 반면, 사고나 행동에서 개인적 체면과 개인적 차원을 강조하는 새로운 태도가 자리잡는다.

    데카르트는 철학자들에게 민족학·역사학·시학 등의 연구를 단념하고 기하학·역학·인식론 등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연구를 권고했다. 이를 통해 종래의 실천적 철학이 추상적 철학으로 변모하게 된다.

    다시 강조한다. 인문주의는 인문학이 아니다. 몽테뉴를 비롯한 16세기 인문주의는 수사적이며 특수하고(사례별 구체적), 지역적(비합리적)이면서 일시적인 지식에 대한 관심을 그 본질로 한다. 그러나 이는 17세기에 와서 논리적·보편적(추상적)·일반적(합리적)·초시간적인 지식으로 변하여 인문주의는 사라진다.

    첫째, 르네상스에서 수사학이 존중되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으나, 그 단독이 아닌 논리학과 함께 중시되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17세기에 오면 수사는 고대의 소피스트처럼 저질 논증을 고상한 척 만드는 기술이라고 비판받게 된다.

    둘째, 르네상스는 물론 중세에서 철학은 오늘의 영미 법률가처럼 사례 분석을 중시하는 특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오면 선과 정의도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따른다고 가정하게 된다. 파스칼은 사례 윤리학 자체를 부정했다.

    셋째, 르네상스는 민족학·지리학·역사학 등의 지역적인 것을 중시했으나, 17세기에 오면 그러한 지역성을 넘어 서로를 연결하는 추상적·일반적 관념과 원리를 찾는 합리성의 추구가 중심을 형성한다.

    넷째, 르네상스에는 시의성을 존중해 과학이 아닌 법학에 그 작업 모델을 두었다. 법학은 실천적 합리성과 시의성 사이의 고리를 밝힘으로써 지역적 다양성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특수한 적절함 및 구두 추론의 수사학적 위기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17세기에 오면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의 근저에 놓인 영속적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 결과 르네상스에서 중시된 임상의학과 사법절차, 사례윤리학과 수사학, 토픽학과 시학은 17세기엔 무시돼 철학과 인문학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 즉 실천적 활동과 목자적 활동 대신 이론중심적 학자라는 계층이 생겨나 추상적이고 초시간적인 방법에 집중한다. 자연뿐만이 아니라 도덕도 추상적·초시간적·일반적·보편적인 이론에 끼워 맞춰진다.

    르네상스까지 법의 실제 집행은 관습법 전통이 면면이 이어온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방법에 의했으나, 17세기들어 발전한 이론법학은 점차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게 됐다. 그 단적인 예가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1625)이다. 실제 통용되는 법의 일반적 규칙을 유클리드 공리에 상응하는 하나의 체계로 재편한 그는 당시 법률가뿐 아니라 데카르트를 비롯한 지식인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력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정치학에서도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비롯한 새로운 일반이론이 수립되었다. 르네상스의 마키아벨리는 투키디데스처럼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적 분석을 정치학의 기본으로 삼았다. 즉 어떤 정치체제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속에 작용하는 양상 그대로를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1640년대 이후 정치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견지에서 시민이나 백성 개인을 원자나 입자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후 정치학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정치적 충성심을 설명하는 작업에 치중하게 됐다.

    신학의 경우 르네상스는 물론 중세에도 바티칸의 통제는 상당히 약했다. 똑같은 지동설이 17세기의 갈릴레오(1564~1642)에게는 금지되었으나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1473~1543)에게는 허용됐다. 즉 교회는 학문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러나 17세기 초엽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로써 가톨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성주의와 결합해 도그마로 경직된다.

    1650년경 종교전쟁이 진정되면서 봉건제는 끝나고 국민국가시대가 열린다. 새로운 사회관계의 요구라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계급사회가 형성된다. 여기서 계급이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사회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20세기까지 유지된다.

    실증주의 부활 가져온 세계대전

    그 사이 르네상스적 전통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최근 몇 번이나 영화화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는 데카르트적인 이성적 계산인을 악당으로 묘사한다. 그런 전통은 디킨스·도스토예프스키·제임스·울프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낭만적 전통은 이성주의와 절연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동전의 뒷면에 불과했다. 즉 이성주의의 이원론을 전제로 이성주의의 정반대편으로 기운 것에 불과한 것이다.

    르네상스적 전통은 19세기말 프로이트에 의해 몽테뉴의 솔직함이 재현되면서 부활했다. 프로이트는 사회 지도자들의 삶 속에 억압된 성욕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기쁨을 느꼈다. 이는 이성과 감성, 사고와 느낌을 분리해 에로스를 억압한 근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예술에서도 생명을 존중하는 누보 아트가 등장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재결합, 에로스와 감정의 존중, 효과적인 국제기구의 창설, 전통적인 계급·인종·성차별 철폐, 과학의 다원성 용인, 철학적 원리주의와 확실성 추구의 포기 등과 깊이 연관돼 있다. 철학에서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으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부활은 실패하고 이성주의·추상주의·형식주의로의 회귀가 진행됐다. 역사적인 것, 구체적인 것, 심리적인 것을 멀리하는 대신 형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논리적인 것을 여전히 선호한 것이다. 이는 실증주의의 부활로 나타났다. 철학의 라이헨바흐나 카르나프 또는 러셀이 그렇다. 모더니즘 예술도 보편적 설계원리의 기하학적 추구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 민족주의에서 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떠들썩한 관념적 구호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930년 이후 닥친 세계적 불황 속에서 중용의 자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는, 전쟁중의 이데올로기적 수사학이 공산주의에 맞서는 이데올로기적 수사학으로 대체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미 1950년대에 인간 대 자연, 정신적 활동 대 물질적 운동, 인간의 합리성 대 감정적 행동 등을 재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으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 때문이다. 생태학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주장했고,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인간행동의 감정적 원인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인문주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몽테뉴의 회의와 관용의 실천철학은 17세기에 수학적, 논리적 엄밀성에만 헌신하는 이론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와 뉴턴의 체계철학으로 바뀐다. 이는 18세기 기술공학 발전의 토대가 되나 19~20세기에는 인간적으로는 쓰디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이 본격 제기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나 이미 2세기 전의 블레이크·실러, 20세기 초엽의 듀이·비트겐슈타인·후세를·하이데거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서양 기술공학 따라잡기에 사력을 다하는 가운데 당시 서양에서 제기된 비판은 한갓 학문적 유행으로만 소개되었을 뿐 역사를 고뇌하는 철학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런 만큼 우리는 그 비판의 뿌리를 그야말로 ‘뿌리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즉 몽테뉴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 연재에서 내가 시오노 나나미를 비판한 것이 다분히 반일감정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책을 번역한 적이 있으며 일본에 많은 친구도 두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인 중 홋타 요시에가 있다. 그가 쓴 책 가운데서도 나는 특히 ‘몽테뉴’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 나나미의 책만큼 팔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시에는 젊은 시절 진보적 문학인이었으나, 나이 50줄에 접어든 후부터 죽기까지 30여 년 동안 고야나 몽테뉴 등의 평전을 쓰는 작업에 몰두했다. 너무 방대한 탓에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는 고야 평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집약적인 몽테뉴 평전(전3권)이 나는 더 좋다. 물론 내겐 그 세 권도 길다.

    고야 평전을 쓴 50대의 요시에가 책의 주인공처럼 아직 열정적이라면, 몽테뉴에 천착한 70대의 요시에는 은거한 몽테뉴처럼 조용히 회의와 관용을 주장한다. 글이란 모름지기 작가가 그 글을 쓴 나이쯤에 읽어야 제대로 이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도 나는 몽테뉴의 글이 좋다. 여하튼 나는 무조건의 반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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