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쌀알 동동 뜨는 뽀얀 술 냄새는 이웃을 부르고

  •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입력2003-09-29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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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계를 돌리 때는 긴장해야 하고 한번에 일을 해치우게 된다.
    • 그에 비해 홀태는 논 가운데 혼자 앉아 벼를 두어 단 베어다 털고, 누가 오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하는 평화가 있다.
    쌀알 동동 뜨는 뽀얀 술 냄새는 이웃을 부르고

    감을 깎아 처마 밑에 매다니 창밖이 훤하다.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 동안 사시던 충주 무너미 돌집에서. 선생님은 온몸으로, 그리고 글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 가르침을 받은 이가 얼마나 많겠나.

    부고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선생님 상여를 뒤따르는 이들이 산길 굽이굽이 이어졌다. 유언에 따라, 선생님은 동네 할아버지 돌아가시듯, 그렇게 뒷산에 묻히셨다. 선생님 묻힌 곳을 남정네들이 발로 꾹꾹 다지는 걸 보며 산을 내려왔다.

    선생님을 만나 뵌 지 십여 년. 그동안 나는 꽤 바뀌었다. 서울에서 산골로. 도시 선생님에서 시골 아낙네로. 이렇게 살게 되기까지 선생님 가르침이 컸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글을 시작해 보겠다.

    1996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부부, 초등학교 1학년 큰애, 갓난아기까지. 우리 식구는 이오덕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갔다. 과천 아파트에 들어서니 곳곳에 책이 쌓여 있다. 세배 드리려 하니, 선생님은 굳이 맞절을 하셨다. 잠시 덕담을 나누고, 우리 사정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시골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 시골 학교가 아이 교육에 어떨지, 그 말씀을 드렸다. 그때 선생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셨다. “도시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솔직히 그때 나는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편이 느닷없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짓고 살자고 하는데, 한마디로 딱 자를 배짱도 없고, 그렇다고 진짜 시골 가서 살 자신도 없었다. 처음 든 생각은, 무얼 먹고 사나? 농사가 돈이 안 될 거야 환하게 내다보이고. 다음으론 내가 어떻게 농사일을 하나? 약골에 허리 병까지 있어 밥상도 제대로 못 드는데 어찌 시골 일을 하나? 밤잠 설치며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런데 선생님 한 말씀에 두려움으로 뿌옇게 가렸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도시에 연연하지 말고 한번 살아보는 거야. 그해 우리 식구는 서울을 떠날 수 있었다.

    그 뒤 온 식구가 다시 한번 선생님을 찾아 뵌 적이 있다. 이번에는 충주 무너미 돌집으로. 큰애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하는 사이, 그러니까 이월 말로 기억한다. 이 때도 삶의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었다. 큰애가 중학교를 다녀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나? 막상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하니, 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인 듯 두려웠다. 선생님께 여쭈자 “중학교에서 배울 게 있습니까?” 하셨다.

    이렇게 삶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는 선생님을 찾았고. 그때 선생님은 두려움에서 풀려날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셨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곤 한다.

    그때 내가 두려워하던 것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 만든 허깨비라는 것. 두려움에서 풀려나고 보니 알겠다. 선생님은 내가 허깨비에 갇혀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셨다. 두려움에서 풀려나 어떤 길을 가든 그건 내 자신의 몫이다.

    올 봄부터 ‘신동아’에 글을 쓰게 되었다. ‘신동아’에는 이오덕 선생님 글이 연재되고 있었다. 이제 ‘신동아’에 글을 쓰면, 선생님 앞에 내 모든 걸 드러내는 자리가 되겠구나. 글은 작가나 특수한 사람만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거라는 가르침. 이 가르침이 있었기에 글을 쓸 엄두를 낼 수 있었지만, 바로 선생님 코앞에서 글을 쓰게 될 줄이야.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려니,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한다. 사람이 사는 데는 어려운 일, 좋은 일이 서로 뒤섞여있기 마련인데. 글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우리 식구가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속내를 글로 어찌 표현하나? 그렇다면 글을 쓰며 내가 하고픈 말이 한마디로 무엇인가? 이걸 묻고 또 묻곤 했다.

    이번 호에 글을 쓰며 정리되는 한마디는 이렇다. 길지 않지만 몇 년을 산골서 살아보니, 이곳은 돈은 없지만 생명은 있다. 만일 돈이 아닌 참다운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라면 살아볼 만하지 않겠나. 내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선생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두려움에서 풀려나게 도와주셨다. 농촌 현실이 녹록하지는 않지만, 나도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자.

    가을 하면 시월. 천고마비의 계절. 농사하는 사람에게는 일년에 가장 바쁘면서도 뿌듯한 가을걷이의 계절이다. 농사란 본디 똑같은 해가 있을 수 없다.

    올해는 어떤가. 유월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이 글을 쓰는 구월 초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비가 안 오고 해가 난 날을 손꼽을 만큼. ‘올해 같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논밭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곳곳에 쭉정이들. 비에 키만 웃자란 곡식이 넘어지고. 어째 벌레들은 더 극성인지, 성한 곡식이 별로 없다. 해마다 한두 번 고비는 있었지. 지독한 가뭄, 놀라운 태풍, 쏟아지는 비…. 그걸 견디고 이겨내 가을걷이를 하곤 했다. 올해도 그렇게 될까?

    자연이 해마다 다르듯, 그에 맞춰 일하는 사람 손길도 달라진다. 우리 가을걷이 모습은 해마다 많이 바뀌었다.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 밭에서 트랙터가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 논을 트랙터가 가는데, 하던 일손이 저절로 멈춰지고 입이 헤 벌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보았다.

    엄청난 힘. 유연한 기계 놀림. 논을 갈면서 논바닥을 편편하게 하는 써레질까지 한번에 해 내는 실력. 우와. 멋지다. 중국 무술 영화에서 주인공이 활약하듯. 게다가 이건 실제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 훌륭한 기계를 쓰지 않기로 했다. 되도록 자급해 보자고 각오를 했기에. 대신 경운기를 마련해 남편이 손수 논을 갈고, 고무래로 일일이 밀었다.

    그해 가을 그러니까 첫 가을걷이를 앞두고. 논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 가니 마음이 뿌듯했다. 우리는 나락 타작을 콤바인으로 하기로 했다. 논에 나락이 가득 찬 걸 보고 편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선 거다. 콤바인을 가지신 마을 반장님에게 일찌감치 부탁을 하고. 콩이야 팥이야 다른 가을걷이를 했다. 가을걷이가 웬만큼 끝나가도, 논에 서 있는 나락이 벨 때가 지나도 콤바인은 들어올 줄 몰랐다. 몇 번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 집 논에 나락이 우리보다 더 빨리 익었는데도, 못 털고 있을 만큼 콤바인은 바빴다.

    홀태가 주는 평화

    드디어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우리 사정을 봐 줘 어렵사리 시간을 잡은 거다. 해가 다 져 가는 저녁에. 콤바인은 불을 켜고 일을 했다. 콤바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멀거니 구경하고. 나락은 논에 서 있던 그대로 순식간에 기계로 빨려 들어가 알곡이 되어 포대에 담겨졌다. 정말 순식간에.

    이듬해 가을걷이 때 우리는 콤바인을 쓰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몸 편하자고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나.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찌 타작을 하나. 남편은 발로 돌려서 하는 탈곡기, 그걸 구해보자 한다. 발탈곡기는 마침 마을 아저씨 창고에 있었다. 아저씨는 그걸 아무 대가 없이 꺼내 주셨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걸 받아 썼다.

    발탈곡기로 타작을 하려면, 먼저 낫으로 벼를 베어 묶어 세우고 나락이 어느 정도 마른 뒤 발탈곡기를 돌려 털어야 한다. 낫으로 벼를 베는데 남편은 타닥타닥 리듬악기 같은 소리를 내며 앞으로 쭉쭉 나갔다. 낫질을 해서는 손가락 사이에 한 움큼씩 끼워 모아, 끈 위에 한번은 오른쪽으로 기울게, 다음에는 왼쪽으로 기울게, 그렇게 놓으란다. 나중에 탈곡할 때 손에 한 움큼씩 잡히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걸 뒤따라가며 하는데, 내 낫질 소리는 띄엄띄엄 나고, 한 단 만드는 데 한참 걸린다. 그래도 자꾸 해 봐야지. 그렇게 벼를 다 베어 논 한 쪽에 두 줄로 세워놓았다.

    드디어 우리 힘으로 탈곡을 하는 시간.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큰애는 볏단을 날라다 주고, 나는 한 줌씩 모아 탈곡하는 남편에게 대주고. 남편은 볏단을 탈곡기에 넣는다. 큰애는 한 사람 몫을 하고. 작은애는 일하는 곁에서 뛰어 놀다 잔심부름하고. 온 식구가 가을 햇살을 받으며 신나게 일을 했다. 올벼 논에서 한나절하고. 찰벼(찹쌀벼) 논에서 하루 하고. 이렇게 논마다 알곡이 적당히 익었을 때 날을 받아 제때 털어 거두었다. 내 몸으로 일하는 뿌듯함. 우리가 바라던 게 바로 이게 아닌가.

    쌀알 동동 뜨는 뽀얀 술 냄새는 이웃을 부르고

    필자가 논에서 홀태로 타작을 하고 있다. 이웃집 어린애도 해보고 싶다 한다.

    한데, 콤바인으로 타작할 때와 달리, 알곡 사이에 검불도 많고, 이삭이 모가지째 꺾여 들어온 것도 있다. 저 가운데 알곡을 추려내야 방아를 찧을 수 있다는데. 산 넘어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는 집을 짓고 있었다. 남편은 일꾼들과 함께 일을 하다 바람이 불면 나락을 바람에 날려 한두 포대 고르고. 바람이 자면 다시 목수 일을 하고. 그렇게 알곡을 추려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바람이 정말 중요해. 바람이 없으면 어찌 농사할까?”

    그 이듬해 한 발 더 나아가 홀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발탈곡기도 처음 본 나는 홀태를 듣도 보도 못했지. 쇠붙이로 만든 참빗처럼 생긴 홀태. 머리 빗질하듯 빗살 사이에 이삭을 넣고 잡아당기면 알곡이 떨어진다. 박물관 같은 데 가면 있지. 근데 그 골동품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먹을거리는 홀태로 타작을 해 보았다. 내친김에 남편은 나무로 절구를 만들어, 겨우내 그 절구에 방아를 쪘다. 그 날 먹을 만큼씩. 그 쌀이 담긴 바가지를 받아 밥을 지어 먹었다. 못자리하면서부터 쌀이 될 때까지 고요하게 자란 벼. 쌀이 살아있는 생명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어떤 쌀을 먹어왔나!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건조기, 정미소의 엄청난 기계소리가 들어있는 쌀이었지. 늘 정신없다 그러며 살아왔는데…. 우리 쌀은 이런 나를 치유해 주지 않겠나. 우리 쌀 속에 담긴 고요함이 내 몸을 바꾸어 주리라.

    생각을 바꾸면, 그래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 길이 있다. 이따금 홀태로 타작하는 사람을 만난다. 기계가 들어가기 힘든 논을 가진 할머니는 혼자서 하루에 한 마지기를 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우리 이웃이 홀태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시나브로 하면, 누구 손길 빌리지 않아도, 자기 먹을거리는 거둘 수 있다.

    처녀 농군은 논 가운데 홀로 앉아 시나브로 털고. 어린아이도 위험할 게 없으니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오면 논에서 함께 일하며 논다. 일하다 논둑에 앉아 먹는 새참은 또 얼마나 맛난가. 물론 콤바인이 들어오면 몇 시간이면 끝낼 일을 한 달 넘어 한다. 일의 흐름이 이러니 논마다 벼를 골고루 심는다. 가장 일찍 익는 검은 쌀부터 늦게 익는 찰벼까지. 일이 밀리거나 겹치지 않도록.

    콤바인은 기계 사정에 맞춰야 한다. 빠르고 몸은 편하지만 가을걷이하는 아무 느낌이 없다. 발탈곡기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지만 가을걷이가 일이 되어 버린다. 낫으로 벨 때는 몇 날이고 벼를 베야 한다. 기계를 돌릴 때는 긴장해야 하고 한번에 일을 해치우게 된다. 거기에 견주면 홀태는 논 가운데 혼자 앉아 벼를 두어 단 베어다가 털고. 다시 베어다가 털고. 누가 오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하고. 평화가 있다. 도시에서 살던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은 소중하다.

    아, 이게 바로 우리 술이구나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금상첨화.’ 쌀로 빚은 술. 목도 축이고, 참도 되고. 지나가는 이웃이 있으면 한잔 권하고 그러면 덕담을 주고받고. 올 가을 타작 때는 쌀알이 동동 뜨는 동동주를 빚어 참을 할까. 이런 소리를 하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시골 생활 몇 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였던 술 빚는 법을 올 봄에 터득한 데다, 쌀광에 누룩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시골로 내려오니 막걸리 마실 자리가 있다. 농사와 막걸리. 어울리지 않는가. 그래 언젠가 술 빚는 걸 배우리라. 농사한 밀과 쌀이 있으니 술을 빚으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몇 년을 흘려 보냈다. 한번도 술 빚는 근처에 가보지 않아 정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올 봄 일을 저질러 보기로 했다. 마음을 먹으니, 도서관에 좋은 책이 눈에 띄고, 시어머니가 오신단다. 술을 빚으려면 누룩이 있어야지. 누룩을 사러 갔더니 술 약, 그러니까 가루 이스트를 꼭 넣으란다. 나는 이스트를 넣고 술을 빚고 싶지 않았다. 그래 책에 나온 대로 술약 대신 엿기름을 넣고 술을 빚어보았다. 어머님 말씀이 보통 술 약을 넣고 빚으면 사흘이면 술이 오른단다.

    사흘 만에 한 잔 떠서 맛을 보니, 이건 시큼한 식혜지, 술이 아니다. 술 항아리에서 공기방울이 퐁하고 올라와 터지기는 하는데. 어떡하나. 윗술을 한 번 더 안치고, 궁금해서 들여다본다. 아침에 눈 뜨면 궁금해 한 잔 떠다가 맛을 보는데 하루가 다르게 술맛이 돈다. 일주일쯤 지나니 술이 되었다.

    하면 되는구나. 밀 남은 걸로 누룩을 디뎠다. 아무래도 사온 누룩은 찜찜하다. 장도 사온 메주로 담그면 어디 제 맛이 나나. 방앗간에 가서 밀을 거칠게 빻아 온 뒤 체에 내려 고운 가루는 밀가루로 먹고. 위에 남는 거친 가루를 되직하게 반죽하여, 발로 꾹꾹 밟은 뒤, 가운데는 발뒤꿈치로 쑥 눌러 누룩다운 누룩을 디뎠다. 볏짚 사이에 누룩을 켜켜로 안쳐 띄우니 잘 뜬다.

    이제 진짜 술을 빚어 보자. 내 손맛으로. 고두밥을 해, 누룩에 엿기름을 넣고, 다시 술을 빚으니 아, 이게 바로 우리 술이구나. 농사한 걸로 손수 빚은 내 손 맛의 술이다. 항아리에서 쌀알이 동동 뜨는 술을 한잔 퍼 올리면 뽀얀 술에서 퍼지는 냄새. 사서 먹는 막걸리와 달리 맛이 깨끗하다. 그리고 먹은 뒤 든든함이란. 쌀 한 되, 밀 한 되로 몇날 며칠을 먹을 수 있고, 먹은 뒤 거북함이 없다. 심지어 맛을 본다고 아침 밥 전에 한잔 마셔도 좋을 만큼. 집에 술이 익으면 그 냄새에 이웃들이 찾아온다. 그러니 이웃들과 한잔 나누는 기쁨까지 있다.

    술을 빚으며 오랜 숙제 하나가 덤으로 풀렸다. 지금까지 밀농사를 해, 방아를 찧을 수 없어 껍질째 빻아먹었는데. 그러니 점성이 생기지 않아 빵을 구울 때나 국수반죽을 할 때는 우리 밀가루를 사서 먹곤 했다. 그때마다 어떻게 이걸 풀어야 하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 보았지. 한데 밀 껍질은 누룩을 디디고, 고운 가루는 밀가루로 먹으니 됐다. 이제 밀가루도 자급이 된 거다.

    햇밀을 거둔 뒤 누룩을 디뎌놓았다. 누룩은 한여름 복(伏) 중에 디딘다. 그러니까 누룩은 밀에 한여름의 더운 기운을 담은 거다. 술을 빚는 데 꼭 있어야 하는 다른 한 가지. 엿기름. 엿기름은 한겨울에 길러야 제 맛이 난다. 밀이나 겉보리에 싹을 길러 한겨울 찬 기운에 얼면서 마르도록. 엿기름은 그러니까 한겨울의 기운을 담은 거다. 술을 빚기 좋은 철은 봄가을이다. 자연의 온도에서 술이 잘 되는 때. 봄은 모내기철이요, 가을은 타작철이다. 쌀농사 하면서, 한여름의 기운인 누룩과 한겨울의 기운인 엿기름 두 가지 조화로 술을 빚고. 그 술을 마시던 우리 어른들. 그걸 이어받으련다. 이제 준비는 되었으니 벼가 익어 타작할 날을 기다린다.

    무서리 세 번에 된서리

    자고 나면 찬 기운이 다가와 어느새 무서리가 살짝 내리니 한로(寒露)라. 무서리 세 번에 된서리 온단다. 고추 깻잎 같은 여름작물은 무서리만 와도 홀딱 데쳐진 듯 시들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봄에 뻐꾹새 울음소리가 일손을 재촉하듯 가을이 되면 무서리가 일손을 재촉한다. 산에는 구절초 하얀 꽃 드문드문 피어나고, 길가에 쑥부쟁이 보라꽃 무리지어 흔들리고, 양지바른 곳에 산국이 노랗고 조그만 꽃봉오리 터트린다.

    논에 서 있는 나락은 베어지기 기다리고, 밭에 서 있는 콩팥은 바람에도 꼬투리가 벌어진다. 부지런히 나락 베어 털고, 콩나물콩, 메주콩, 팥을 쪄서(베어) 도리깨로 털고. 그것들을 다시 해에 말리며 바람 불 때 검불을 날려보내고 알곡을 추려야 한다. 들깨도 베어 털어야지, 고구마도 캐야지. 온 들판 여기저기 일손을 재촉한다.

    아무리 가을걷이 바빠도 한로에서 상강(霜降)까지 겨울농사 제때다. 이때 심어야 겨울이 오기 전에 뿌리를 내려 추위를 이긴다. 밀 보리 심을 곳은 미리 넉넉히 거름하여 밭 장만한 뒤 심고, 마늘씨도 하나하나 골라 마늘밭에 놓아야 한다. 마늘 심는 걸 ‘놓는다’ 하는데 정말 마늘 한 쪽을 땅속에 놓는다. 이들 겨울 작물들은 늦가을인 한로에 심어져 겨울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봄이 오면 무럭무럭 자라겠지.

    가을걷이에 겨울 농사까지 바쁘게 돌아가지만, 무서리 다가오니 그 전에 반찬거리도 갈무리해야 한다. 깻잎 따서 저장하고, 고구마 줄기, 토란대 손질하여 말리고, 애호박, 가지 썰어 말린다. 고추밭에 가서 잎 따고 풋고추 따서 저장한다. 바람 불고 난 다음날 아침에는 산에 올라 밤도 주워야지. 심은 대로 거둬들여 널어 말리고 처마 밑에 매다니, 가을마당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는다.

    아침 일찍 산에 가고, 낮에는 들일하고, 밤에는 감 깎고, 나물 다듬고 낮밤 없이 흘러가는데, 무서리 내린 뒤라 불을 때야 잠을 자지. 이맘때를 생각해 지난 겨울 땔감을 넉넉히 마련해, 땔감이 남아 있으니 다행이다. 묵은 땔감이 있어도 새 땔감을 해와야지. 아이들도 들며나며 잔가지 하나라도 해온다.

    아이들도 집안에 있지 못하고 어른 따라 들판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옥수수 꺾고, 고구마 줄기, 들깨 잎 따고 대추 밤 줍는 일은 아이들이 잘 한다. 어른들이 바쁘게 몰아치느라 비설거지, 짐승 돌보기를 깜빡하면, 어느새 아이들이 빈자리를 메우곤 한다.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손으로 고구마 캐어 식구들 한 끼 밥상을 차릴 수 있다. 그 순간 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자기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해냈다는 당당함이다. 이럴 때 아이들을 자식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로 받아들이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첫 월급을 타면서야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 생각하지 않았나. 사람은 자기 먹을거리를 해내는 만큼 스스로 서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해 내는 걸 지켜보며 ‘아이들에게 일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무가 아닌 권리 말이다.

    집에서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끼니를 챙긴다. 오늘 점심에는 뭐 해 먹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옥수수 따오고. 반찬거리를 챙긴다. 학교 다닐 때는 다 차려놓은 밥상에 끌려오듯 앉아 먹었다면 이제는 자기들이 먼저 나선다. 큰애 말이 전에는 배고프면 간식을 찾았는데 이제는 밥 먹을 준비를 하게 된단다.

    하룻밤 새 들판이 바뀌는 상강

    오늘도 김치를 담그자 하니 식구들 모두 힘을 모은다. 큰애는 자기 밭 부추를 잘라 손질해놓고. 작은애는 마늘을 다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고구마 줄기도 넣자며 고구마 줄기를 따다 내 옆에서 썰고. 남편은 무 다듬어 씻고. 그러다 보면 김치 버무릴 때 ‘아, 한 입’ 맛을 본다.

    상강이 다가오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하루 밤 새 들판이 바뀐다. 푸르던 잎들이 홀딱 데쳐진 듯 누렇게 바뀐다. 산에 칡 잎은 사그라지고, 나뭇잎은 단풍이 든다. 들에 여름작물들도 모두 지고 여름풀마저 사라지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 자리에 겨울풀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맘때면 한로에 심은 밀 보리도 뾰족이 싹이 올라온다.

    된서리 올 무렵이 되면, 새콩 꼬투리 햇살을 받아 톡톡 터지는 소리 들리고, 겨울 잠 자는 뱀, 땅속으로 숨어들겠지. 파리 모기 사라지고, 무당벌레 따스한 곳을 찾아 사람 사는 집으로 기어든다. 따뜻한 옷 꺼내 입고 따뜻한 차가 좋다. 금방 캔 생강에, 나무에서 빨갛게 마른 대추 따다 차를 끓이고. 산국 꽃차도 좋다.

    된서리 오기에 앞서 해야 할 일도 많다. 고구마 캐고, 생강 캐고. 산국 꽃 따서 차 만들고. 내년 봄에 먹을 상추, 시금치도 심어야지. 바쁜 일이 얼추 추려지고 나면 논에 널린 볏단도 추슬러 묶어 가지런히 쌓거나 논에 썰어 넣어야 한다. 이맘때 차를 타고 지나다 아직 들에 서 있는 나락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이러니 그 주인은 어떨꼬. 저러다 이삭이 꺾이면 어쩌나. 오죽하면 저리 놔두고 있을까?

    밭 가을걷이는 어느 정도 되었는가? 아직 밭에 남아 있는 검은콩(서리태), 늦팥, 메밀, 수수 거두어들이고. 베어놓은 들깨도 털어 알곡을 추려야 한다. 얼음 얼기에 앞서 모두 거둬들여야지. 거두어들이는 대로 가을 햇살에 말리고 가을바람에 날려서 하나하나 갈무리한다.

    된서리 내리면, 푸른 뽕잎을 따 저장한다. 다른 나뭇잎은 져도, 뽕나무 잎은 된서리 맞아도 아직 푸른 기운을 간직하고 있을 때 따다 먹는다. 이것도 된서리 두어 번 오면 다 지고 만다. 온 식구 긴 장대 들고 감을 따러 간다. 땡감은 깎아 처마 밑에 매다니, 파리 벌이 없으니 곶감 말리기 좋은 철이다. 감을 깎아 주렁주렁 매달면, 가을마당이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껍질째 씹히는 달작한 감또개

    잘 익은 감은 저절로 홍시 되게 갈무리하니 겨울이 기다려진다. 우리네 농촌 가을에 감만한 게 또 있을꼬. 시골집 둘레, 마을 둘레에 뿌리내리고 자라, 사람 손길이 따로 가지 않아도 영글곤 하지. 가을이 되어 홍시 빠지면 주워 먹고, 깎아 매달아 곶감 만들어 겨우내 두고두고 먹어, 아이들 먹고 감기 예방하고, 일하다 힘에 부칠 때 먹으면 힘이 난다. 넉넉하면 천에 감물 들이고, 식초도 만드니 버릴 게 없다.

    그 가운데 감또개는 새로운 맛이다. 곶감 깎을 만하지 못한 땡감을 껍질째 납작하게 썰어 채반에 말린 게 감또개다. 잘 말려, 항아리에 담아 장독대에 놓는다. 홍시 먼저 먹고, 곶감도 떨어진 한겨울. 뭔가 궁금하면 항아리 열고 두어 개. 김장 김치 꺼내려 나갔다가 한두 개. 그렇게 꺼내 먹으면 껍질째 씹히는 달작한 맛이 좋다.

    이 소중한 감나무가 우리 동네는 별로 없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래 ‘풍요 속의 빈곤’이라 안타까워하는데. 해마다 감나무를 새로 심곤 했지만 두 그루만 살아남았다. 그래서 멀리 원정을 다니며 감을 따왔다. 금산도 가고, 영동도 가고. 어디든 감 따가라는 곳만 있으면 가서 따온다. 그러다 지난해는 동네 산에 저절로 자라는 감나무를 찾아 감을 따다 먹었다. 올해는 감나무에 감이 별로 안 열렸다. 올 여름 비에 토마토 수박이 안 되었는데, 가을에 감도 없으면 어쩌나.

    가을 해는 어찌나 쏜살같이 떨어지는지. 일하다 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어깨 움츠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찬바람이 집안으로 파고드니 문종이, 도배, 구들 청소, 겨울 날 준비를 시작한다. 날이 차지면서 땔감 챙기고, 김장 생각이 난다. 밭에 김장거리는 잘 자라나. 무는 제법 굵어지고, 배추는 속이 차는가. 들여다보러 갔다가 하나 둘 맛을 본다. 양파 모는 제대로 자랐나, 곧 있으면 본밭에 심어야 하는데.

    가을걷이한 들판에 푸릇푸릇 올라오는 겨울 작물들. 자연의 땅에는 빈 밭이 없다. 가을걷이 끝내고 빈 듯 보이는 밭에, 냉이 달래 광대나물 월동초가 찬 기운에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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