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일본과 중국 수필의 백미

‘마쿠라노소시’ ‘내가 사랑하는 삶-幽夢影·幽夢續影 ’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5-10-14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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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것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데 내놓기 싫다. 남들 없는 곳에서 혼자만 그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본디 성정이 쩨쩨한 탓인지 나는 그렇다. 혼자 품에 끼고 남이 볼세라 몰래 킥킥거리며 읽는 책 두 권을 꺼내놓으려고 한다. 나름대로 큰맘을 먹은 것이다. 하나는 350년 전에, 다른 하나는 1000년 전에 씌어진 책이다. 앞의 책은 청나라 초기와 말기에 산 두 사람이 쓴 걸 합본한 것이고, 뒤의 것은 일본의 한 궁녀가 지은 책이다. ‘내가 사랑하는 삶-幽夢影·幽夢續影’ ‘마쿠라노소시’가 그것이다. 가히 수필문학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이 책들을 읽는 내내 아름다운 우리말로 공들여 옮긴 두 번역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삶-幽夢影·幽夢續影’은 저자가 두 사람이다. 청나라 초기의 문장가 장조(張潮)와 말기의 문장가 주석수(朱錫綏)가 그들이다. 두 사람의 책을 한 권에 합본한 이 책은 잠언 형식의 짧은 글들로 구성된 청언소품집(淸言小品集)이다. 주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취를 다루는데, 삶에 두루 통하는 이치를 추구하되 도락이 주는 기쁨을 외면하지 않는다. 균형과 조화를 꾀하며 나아가는 문장은 거침이 없다.

    그렇다고 수다스럽지도 않다.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당시에 난만하게 퍼져 있는 지저분한 풍속을 비판하는 데 통렬하고, 자연에서 심미감을 자극하는 걸 포착하는 데 날렵하다. 입신양명을 꿈꾸고 오지랖 넓히며 세간의 일에 분주하게 간섭하기보다는 한걸음 물러나 앉은 자리에서 몸과 마음의 고요를 구하고 다독이는 자의 한정(閒靜)이 문장에 배어 있다. 책 제목도 ‘숨어 사는 이의 꿈 그림자’라고 하지 않는가!

    촌철살인, 금과옥조



    꽃에 대해 품평할 때 지은이의 청신한 인격에서 뿜어나오는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그의 문장은 자연스러워서 대숲에 바람이 이는 것과 같고, 계곡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흘러가는 것과 같다.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는 사람을 그윽하게 하며, 국화는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은 사람을 담백하게 한다. 봄 해당화는 사람을 요염하게 하고, 모란은 사람을 호방하게 하며, 파초와 대나무는 사람을 운치 있게 하고, 가을 해당화는 사람을 어여쁘게 한다. 소나무는 사람을 빼어나게 하고, 오동은 사람을 해맑게 하며, 버들은 사람에게 느낌을 갖게끔 한다.”

    읽는 이의 눌리고 접힌 마음을 펴주는 것은 그 문장이 삼(麻)에서 삼베(布)가 나오듯 어디 한군데 옹색하거나 억지스러운 데가 없는 까닭이다. 널리 섭렵하여 두루 통하는 식견과 핵심을 꿰뚫는 날카로움이 조화를 이루니, 사물의 요점을 새기는 데 촌철살인이 따로 없다.

    “다정한 사람은 반드시 여색을 좋아하지만,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모두 다정한 것은 아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은 반드시 운명이 기박한데, 운명이 기박한 사람이 전부 얼굴이 예쁜 것은 아니다”라는 대목을 읽을 때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옳거니, 다정한 인격이 여색을 탐하는 허물도 가려주는가 보다 하고 무릎을 치는 것이다. 그 옛날에도 가족은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면서 또한 떨쳐낼 수 없는 사슬이었나 보다. 지은이는 “아내와 자식은 자못 사람을 얽매이게 하기에 족하다. 그래서 나는 화정 임포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는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이야기를 선망한다”고 적고 있다. 가족을 위해 제 꿈과 이상을 접어야 하는 오늘의 가장이나 옛 가장은 그 매인 삶의 부자유와 고달픈 처지에서 다를 바가 없다.

    어느 쪽을 펴고 읽어도 금과옥조 아닌 데가 없다. 글이 막히고 생각이 정체될 때 나는 이 책을 읽는다. 벌써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먼저 글쓴이들의 청신한(요즘 말로 하면 쿨하다!) 인격에 편벽된 내 인격은 일격을 당하고, 붉은 꽃과 같은 단심(丹心)이 내비치는 그 문장의 신묘함에 기가 죽는다. 쓰는 일에 얼마나 더 정진해야 이러한 경지에 오를까?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이 연못 밑바닥을 뚫어도 물은 흔적이 없다 한다. 내 문장은 빗자루만 들어도 먼지가 사방에 날리고, 연못 근처에만 갔을 뿐인데 맑은 물이 소용돌이쳐 흙탕물이 되고 만다.

    ‘새벽에 헤어지는 법’

    ‘마쿠라노소시’는 침초자(枕草子), 즉 ‘베갯머리 서책’이란 뜻이다. 11세기 초기에 일본 궁중에서 상궁을 지낸 세이쇼나곤이 지은 책이다. 일본 고전수필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마쿠라노소시’는 ‘겐지 이야기’와 더불어 헤이안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세이쇼나곤은 지방 수령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혼인해서 아이를 한 명 낳은 뒤 10년쯤 뒤에 이혼을 한다. 그 무렵 천황의 비(妃)인 데이시의 상궁으로 궁에 들어가 993년부터 1000년까지 7년간 천황비를 가까이에서 보필한다. 그 기간에 데이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보고 겪은 것을 글로 옮겼다.

    글의 소재는 주로 궁궐에서 치러진 궁중 행사나 귀족사회의 이모저모, 풍류적인 것들, 그리고 자연이다. 문장에는 시적 정취가 물씬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탐미적인 데가 있지만, 한편으로 매우 날카롭게 타인의 버릇과 취향의 품격을 논하고, 풍속에 대한 비판에도 거침이 없다. ‘새벽에 헤어지는 법’은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남의 눈을 피해 밤에만 만나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불륜인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돌아가는 남자가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고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적는다. 남자는 정말 헤어지기 싫다는 듯 느릿느릿 일어나고 여자의 재촉을 받은 뒤에야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못내 아쉬운 듯 마지못한 듯 나와야 한다. 여운을 남기는 게 예(禮)고 정(情)이다. 그런데 대개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남자들은 서둘러 일어나 부산스럽게 옷매무새를 챙기고 도망치듯 나온다. 밤을 보낸 여자네 집에서 새벽에 나올 때 여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허둥대는 남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사리분별의 투명함

    ‘썰렁 그 자체’라는 글에서 흥 깨는 여러 경우를 두루 언급하는 가운데 “약속한 남자를 기다릴 때, 밤이 이슥해지고 가만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시종에게 이름을 묻게 했는데 전혀 뜻하지 않은 남자가 찾아온 것이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실망”스럽다고 말한다. ‘설렘’에서는 “약속한 남자를 기다리는 밤은 빗소리나 바람 소리에도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쓰고, ‘밉살스러움’에서는 “다른 사람 몰래 오는 사람을 알아보고 눈치 없이 짖는 개도 얄밉다.… 남의 눈을 피한답시고 허둥지둥 들어오다가 물건에 부딪혀서 소리를 내는 사람도 얄밉다”고 쓴다.

    사랑에 대해 솔직하며 거침없고, 게다가 주변을 두루 감싸는 너그러움과 순간마다 발휘되는 재치와 익살스러움도 돋보인다. 이를테면 ‘남을 험담하는 즐거움’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험담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정말 몰상식한 사람이다. 어떻게 남의 험담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제 일은 제쳐두고 남의 결점을 늘어놓으며 마구 비난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라고 쓴다. 글을 읽으며 먼저 글쓴이의 솔직한 인품에 매혹되어 자꾸 책 속으로 빨려든다.

    가을에는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이렇듯 글은 더할 수 없이 투명한데, 그 투명함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적 투명함이며 사리분별의 투명함이다. 아울러 그 투명함은 섬세한 관찰과 감각적인 표현들, 격조 높은 품격에 두루 통용된다.



    “피부가 검고 못생겼으며 가발 쓴 여자와 수염투성이에 말라빠진 남자가 낮에 동침하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도대체 무슨 볼 것이 있다고 대낮에 동침을 할까.”

    ‘꼴불견’이란 글의 한 구절이다. 본래의 글이 깊은 맛이 있는데다 번역도 뛰어나고 책의 편집이나 장정도 훌륭한 책이라 펼칠 때마다 기분이 좋다. 옆에 두고 여러 번 읽고 난 뒤 그 향기가 오래 가서 몇 권을 더 사서 아는 이들에게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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