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린다 김의 6시간 인생고백

린다金 6시간 육성고백

  • 조성식·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0-10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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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다 김(48). 5월 한달 내내 대한민국을 ‘부적절하게’ 뒤흔들어 놓은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다. 애초에 ‘린다 김 스캔들’은 문민정부 시절 백두사업 등 방위력 증강사업 사업자 선정과정에 그녀가 군·정·관계 고위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냈는지 의혹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곧이어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 주고받은 일련의 연서(戀書)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이 전장관 등 고위 인사들과 린다 김 사이에 과연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느냐의 여부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그동안 모든 언론은 린다 김을 ‘잡기 위해’ 밤낮 없이 그녀의 논현동 집 앞에 진을 치고 보냈다.

    사실 ‘신동아’는 이번 사건이 본격화하기 훨씬 전인 3월부터 한국군 방위력 증강사업과 관련해 린다 김을 추적해오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과 탐문이 계속되던 중에 이번 사건이 터졌고, 린다 김은 결국 6월호 마감이 임박한 5월15일 저녁 시사월간지로는 처음으로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린다 김은 “나는 ‘신동아’의 애독자이고, ‘신동아’라면 내 얘기를 가감없이 전달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5일 오후 3시 반경 ‘신동아’ 취재진은 논현동 린다 김의 자택 대문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을 ‘극적으로’ 따돌리고, 그녀가 국내 변호사 선임문제로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하는 데까지 동행했다. 인터뷰는 본사 출판사진부장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얼굴이 널리 알려진 린다 김의 사정상 공개된 장소에서의 인터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단 1분의 휴식도 없이 6시간 동안 꼬박 진행됐다. 인터뷰 도중에 “저녁식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재진의 제의에 린다 김은 “나도 프로고 당신들도 프로다. 프로라면 일부터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거절했다. ‘신동아’는 여성으로서 치명적일 수 있는 ‘부적절한 관계’ 부분이 포함돼 있는 이번 사건의 성격상 남녀 기자가 한 팀을 이뤄 인터뷰를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남녀 두 기자는 무기도입 과정의 로비에 얽힌 내막, 린다 김의 개인적인 성장사 등 서로 관점을 달리해서 린다 김에 접근했다. 이 인터뷰의 1, 2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 1부 백두사업 로비의 진실 ]

    린다 김은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며 양해를 구했다. 방석을 깔고 앉은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들며 취재진의 ‘공격’을 맞을 채비를 마쳤다. 실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거리에서 린다 김을 차에 태우고 기자들의 추격을 따돌릴 때의 긴장과 흥분 때문인지 다들 약간 들뜬 표정이었다. 인터뷰 장소의 제공자인 사진기자가 찬물을 내왔다.



    ―요즘 건강은 어떻습니까?

    “내가 원래 저혈압이예요. 잘 먹지도 않고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혈압이 더 내려간 것 같아요.”

    린다 김에 대한 세간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백두·금강사업을 비롯한 국방부의 무기도입사업이 그녀의 ‘부당한 로비’에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 98년 10월 군검찰과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이후 김씨가 관여한 무기관련사업들은 하나같이 의혹의 대상이 됐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녀는 98년 수사 당시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검찰은 그녀를 기소중지 처리했다. 그녀가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 3월. 검찰은 4월28일 그녀를 군사기밀보호법위반 및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두 번째는 시중에 ‘부적절한 관계’라는 유행어를 낳은 린다 김과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스캔들 의혹이다. 마치 때를 기다리던 하이에나의 습격처럼 그녀의 기소 직후 세상을 덮친 이 스캔들은 ‘린다 김 사건’의 본질을 순식간에 뒤바꿀 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이 ‘핑크빛’ 무대에 등장했지만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은 사람은 단연 이양호 전국방부장관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담은 편지 공개로 시작된 이전장관과 린다 김의 스캔들은 이전장관이 일부 언론을 통해 “두 차례 관계를 가졌다”고 시인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린다 김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자신은 결코 ‘몸 로비’를 한 적이 없다는 것. 진실은 무엇일까.

    ―백두·금강사업엔 언제부터 뛰어들었습니까.

    “이게 언제부터 백두·금강입니까. 아주 오래된 사업입니다. 로랠사(현 록히드 마틴사의 전신. 금강사업의 사업자로 선정)가 이 사업에 처음 뛰어든 게 쌍8년도였어요. 그런데 한국에선 일이 진행이 안 됩니다. 장관들이 뒤에 말이 나올까봐 자기 재임기간 중 결재를 안 하는 겁니다. 거기다 개각이 너무 잦으니 뭘 제대로 해볼 수도 없지요.

    일 좀 할 만하면 장관이 바뀌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의 ROC(성능요구서)대로라면 당시로선 기가 막힌 신형이었는데 10년이 지나면서 구형이 돼 버려요. 백두도 그래서 문제가 된 겁니다. 88년 만든 ROC를 10년 뒤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대로 적용합니다. 지금 586으로 가는데 과거 286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말썽이 생기지요. 내가 ‘이걸로 안됩니다. 바꿔야 합니다’고 얘기해줘도 안 듣습니다.”

    자주국방과 미국

    린다 김의 얘기를 들으려면 먼저 백두·금강사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지 않고선 그녀의 스캔들에 대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녀는 국제 무기중개업계에서 한국인 여성으로선 드물게 거물급 로비스트로 통하고 있다.

    백두사업(관련기사 116페이지 참조)은 통신정보를 감청하는 정찰기를 도입하는 사업이다. 총 2439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사업이 시작된 것은 6공 후반기인 91년 6월. ‘백두’라는 명칭은 휴전선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북한 전역의 통신정보를 정찰기로 감청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95년 1월에야 도입방식이 결정됐는데 그 골자는 항공기와 탑재 장비를 패키지로 구입한다는 것. 사업자 선정작업에 들어간 것은 그해 11월. 린다 김과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이 만나는 횟수가 부쩍 는 것은 이듬해 초부터였다. 그해 6월 국방부는 린다 김이 로비스트로 나선 미국 레이시온사의 호커 800XP와 E시스템사의 원격조정 감시체계(RCSS)를 각각 백두사업의 기종과 감청장비로 선정했다.

    백두사업이 감청정보수집에 관한 사업이라면 금강사업은 영상정보수집를 위한 사업이다. 대략 휴전선 일대에서 금강산에 이르는 지역을 촬영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금강사업이라는 암호로 불렸다. 백두사업과 더불어 91년부터 추진됐으며 96년 3월 공개입찰에서 미국의 로랠사가 2억7000만 달러를 제시, 사업자로 선정됐다. 린다 김은 로랠사의 로비스트로도 활약했다.

    ―백두·금강사업에 도입되는 무기로 미국 비행기와 장비가 결정된 데 대해 자주국방화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그런 말들을 하지요. 왜 꼭 미국 것을 선택해야 하냐고. 그렇지만 비행기만 띄우면 자주국방이 됩니까. 그 위에 떠 있는 인공위성과 연결돼야지. 기본적으로 한국군의 작전 개념은 한·미연합작전이에요. 미군이 쓰는 무기와 연계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주국방은 이제 시작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정보나 시스템은 미국이 안 주고 있어요. 왜 값이 더 비싼 미국 것을 사냐고 묻는데 참 답답합니다. 눈앞의 가격만 놓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나중에 무기 시스템 호환에 문제가 생겨 빚어질 손실액을 생각해야죠. 한국의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시 모 특수정보부대는 백두사업 추진을 반대했죠.

    “그 부대장으로 온 P장군은 기무사 대령 출신으로 비행기의 ‘비’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난 그런 사람이 별을 달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무기구매에 대해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부대장으로 부임해온 겁니다. 그 사람이 국방부에 백두사업에 대해 좋지 않게 보고했어요. 그래서 백두사업이 몇 차례 감사 받은 것 아닙니까. 내가 관련 회의까지 참석해 설명을 해줬어요. 그런데도 안되더라구요. 경쟁자들의 투서도 영향을 끼쳤지요.”

    ―군 안팎에서 백두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여론이 강하지 않습니까.

    “내가 돈 벌려면 장비 값을 올리면 돼요. 맘만 먹으면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기종 선택과 가격 결정, 다 잘 됐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몰라 그러는데 미국정부가 보증하는 해외판매방식(FMS)이기 때문에 그렇게 논란이 될 일이 아니에요.”

    린다 김은 자신이 로비해 성사시켰던 사업이라 그런지 백두사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선 무척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김씨는 “백두, 금강(사업자 선정이)이 끝나면 사고가 날 것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비행기(기종 선정)와 시스템(장비 운용) 선정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데 따로따로 해왔기 때문에 사업진행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업자 선정과정에 경쟁자가 너무 많았던 점도 뒷날 잡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었다. 실제로 린다 김은 사업자 선정이 끝난 후 경쟁업자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소장 내용은 내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로비를 해 결과적으로 자신이 입찰을 받지 못했으므로 손해배상을 받아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미국 판사는 ‘빨간 셔츠와 노란 셔츠가 있다고 치자. 디자인은 똑같은데 고객이 노란색이 좋아서 그걸 구입했다고 빨간 셔츠 파는 사람이 노란 셔츠 판매자를 고소할 수 있느냐. 부당한 요구다’며 소송을 기각했어요. 꼭 소송을 할 생각이라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해야지 왜 저한테 하는지 모르겠어요.”

    ―경쟁에서 탈락한 업체들쪽에선 린다 김 이부당한 방법으로 로비를 했다고 비난합니다.

    “어찌 보면 여성이 갖는 이점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렇지만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 참 답답합니다. 내가 남자라면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할 겁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안 만나주면 차를 가로막아서라도 만나야죠. 모 수석비서관이 안 만나줄 때 밖에서 5시간이나 기다렸다가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의를 보이면 미안해서라도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라’고 말하게 돼 있어요.”

    ―여성으로서 무기중개 로비스트를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난 프로젝트를 보면 스터디부터 해요. 시작하는 단계에서 ‘난 졌다’고 자기최면을 걸어요. 일단 졌다는 자세로 출발하면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무기중개업은) 정말 여성에게 권유하고 싶은 일이에요. 남자들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여성들은 섬세하거든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요. 그런데 남자들은 늘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려요. 그러다 끝판에 일을 망치죠. 1%의 변수로 일의 성패가 갈리는 게 무기중개업입니다.”

    린다 김은 한국 정부의 무기구매사업에 대한 인식과 추진방식에 불만이 많다. 그녀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무기구매방식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즉흥적이며 게다가 억지까지 쓴다.

    “한국측이 요구하는 ROC에 따르면 세상에 그렇게 좋은 무기는 없어요. 내가 한국 정부에 얘기해줬어요. ‘이건 불가능한 장비’라고 말이죠. 어떻게 360도를 돌면서 모든 각도에서 물체를 다 찍을 수 있는 레이더 장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억지를 써요.”

    린다 김에게 유쾌하지 않을 질문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앉아 있다. 배가 고플 만도 한데 오로지 인터뷰에만 집중하고 있다. 바로 이런 태도가 그녀가 그토록 강조하는 프로 근성일까. 기자의 목구멍에서는 아까부터 ‘이양호’라는 이름 석자가 꾸물꾸물 넘어오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잔일 터.

    ―당시 기무사는 린다 김과 이양호 국방부장관과의 관계를 추적했습니다. 이장관은 최근 언론에 “두 번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털어놓았는데요.

    “제가 그 양반과 자려고 맘먹었다면 왜 두 번만 잤겠습니까. 아, 그렇지 않아요? 남자들이 원하는 게 뭔지 다 알잖아요. 한 번 갖고 나면 흥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그래 놓고 편지는 또 뭡니까. 대개의 남자들은 관계 후엔 관심이 없어지지 않나요?(그녀는 자신의 말에 이해를 구하듯 기자의 눈을 잠시 응시했다. 기자는 그녀의 말이 맞는 것도 같고 안 맞는 것도 같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업상 수많은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 어느 특정인과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지.”

    ―이양호씨도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직후 내게 전화해 왔어요. 미안하다고. 중앙일보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건 참 도대체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어이가 없더라고요. 화를 크게 냈어요. 어떻게 한 나라의 장관을 지낸 사람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이씨 말이 중앙일보가 ‘이것(성관계) 만 인정하면 언론이 잠잠해질 것이다.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믿고 두 번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집에 가 생각하니 자기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전화를 걸어 ‘내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진실을 밝혀라’고 말한 겁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 번 감옥을 경험해본 사람은 다시 갇히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고 그래요. 이씨는 다시 감옥에 가는 일이 생기는 것보다 차라리 집에 가 무릎 꿇는 쪽을 택한 겁니다. 그 사람은 언론 노이로제에 걸려 있어요.

    “바보인지, 순진한 건지”

    ―이양호씨가 뭔가 구린 구석이 있어서 그것을 덮기 위해, 말하자면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 그런 주장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잘은 모르지만 이씨는 돈을 받거나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돈 욕심이 없고 순수한 측면이 있어요. 기자들한테 말린 것 같다고 그러더라구요.”

    ―이씨는 언론을 통해 “린다 김에게 이용당했다. 질이 나쁜 여자다”며 악담을 했는데요.

    “당시 내가 몇 년 전 헤어졌던 남자와 재결합한 일을 두고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양호씨에게 ‘오해’를 줄 만한 언행을 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고선….

    “오해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양반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실제로 좋은 분이에요. 무척 따랐고 나중엔 삼촌이라고 불렀죠. 이번에 그 분에게 아쉽고 실망한 부분은 사건이 터지고나서 저에 대해 좋게 평가한 K전의원과 달리 당당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점입니다.”

    ―이양호씨는 “린다 김은 다른 방법으로 로비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은 자기 삶에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한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나는 그걸 가볍게 받아들였고. 사업자 선정이 끝난 뒤 2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어요. 사업이 끝나고 나서 자기한테 전화 한 통 없으니 화가 났을 겁니다. 전화번호 바꾼 것이 또 오해를 샀을 테고. 일을 진행할 땐 그렇게 자주 연락하다가 딱 연락이 끊기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사실 우리가 도청으로 걸렸기 때문에 일절 전화를 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장관은 내가 헤어졌던 사람과 재결합한 일을 알고 나선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을 수 있냐’고 화를 냈어요. 오해할 만도 한 게 재결합 시기가 백두가 끝난 직후였거든요.”

    이양호씨와 린다 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언론을 통해 공개된 편지. 김씨가 이씨에게 보낸 편지엔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다음의 구절이 눈길을 끈다.

    ‘경솔했던 제 행동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과 신앙심으로 우러나는 약간의 죄의식과 또다른 한편으로는 정직한 감정의 표현이란 결코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복잡한 모순에 싸여 조금은 산란함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지금 세간의 관심사는 이양호씨와 주고받은 편지인 듯합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 편지가 공개됐다고 생각합니까?

    “1년 전 자기 이름을 한상만이라고 밝힌 50대 남자가 이양호씨를 찾아왔답니다. 자신을 FBI다, 뭐다 그런 식으로 기관원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편지들을 보여주더래요. 그러면서 자기한테 미국 변호사 비용으로 12만∼15만 달러 정도만 주면 편지뿐 아니라 ‘권병호 문제(무기중개상인 권병호씨는 96년 대우중공업으로부터 3억원을 건네 받아 그중 1억5000만원을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까지 모두 해결해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 은행계좌까지 알려줬대요.

    이양호씨는 무척 순진한 분입니다. 투명할 정도로 순수해요. 그런데 너무 그렇다 보니 남의 말을 잘 믿는 경향이 있어요. 올 3월 한국에 들어와 만났을 때 이씨가 그 사람 얘기를 꺼내면서 ‘한 번 그렇게 해볼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아이구, 무슨 말씀이세요. 뭐 그런 기관원이 다 있고, 무슨 변호사 비용이 12만, 15만달러나 해요. 다 거짓말이에요. 사기꾼 같은 사람한테 속지 마세요. 또 그런 사신(私信)이 법적으로 걸릴 게 뭐가 있어요. 특히 미국같이 사생활 보호가 잘되는 나라에서요’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금진호 전의원도 찾아갔더군요. 그런데 금씨는 ‘무슨 소리냐’며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해요.”

    무기중개상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린다 김은 그 한상만이라는 인물을 무척 벼르고 있었다. 한씨 스스로 ‘교포 사회에서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하기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해보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일 끝내고 미국에 들어가면 그 인간부터 찾아낼 것”이라고 ‘전의’를 다졌다.

    ―그렇다면 한상만이라는 사람이 편지를 훔쳐간 건가요? 혹시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로비스트가 흘렸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나는 그렇게 꼼꼼한 성격이 아니에요. 편지가 오면 나중에 답장 쓸 것은 비서한테 맡기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들은 그냥 책상 서랍에 넣어둬요. 이번에 공개된 편지 중에서 내가 이양호씨에게 보낸 것은 일종의 초안이에요. 일단 한 번 쭈욱 적어 내려갔다가 오자도 있고 글씨도 예쁘지 않아 다른 편지지에 옮겨 적어서 보내곤 했거든요. 그 중에서 먼저 (연습 삼아) 썼던 것이 밖으로 새나간 거지요. 그렇지만 (상황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아닐 거라고 확신해요. 10년 가까이 함께 일한 사람들인데, 그런 식으로 나를 곤경에 몰아넣진 않았을 거예요.

    편지를 유출시킨 게 혹시 로비스트였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는 해요. 금강사업 때의 경쟁자였는데, 96년 사업자 선정이 결정된 후 나를 찾아와 “(입찰에서) 지는 순간 죽고 싶더라”고 자기 감정을 토로하더군요. 그 모습이 안돼 보여서, 또 너무 많은 적을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사업에 약간의 도움을 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LA 월셔가에 있는 내 사무실을 몇 번 방문한 한 적이 있어요. 그렇긴 해도 증거가 없이 함부로 말할 순 없겠지요.”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린다 김은 자신이 업무를 처리하는 근거지가 세 곳 있다고 말했다. IMCL 본사는 영국 팜바로우에 있고, 한국에는 IMCL지사가 있으며, LA에 있는 것은 개인 사무실이라는 것.

    사적인 감정 그때 잘랐어야

    ―하여튼 그런 민감한 내용의 편지들은 받으면 즉시 태워 버리거나 금고처럼 보안이 유지되는 곳에 보관할 법도 한데….

    “난 감출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출장 갔다 와서 비서에게 ‘나중에 답장 쓸 테니 갖고 있으라’고 맡기기도 했죠.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운 내용의 편지들을 뭐 하려고 감춥니까? 이양호씨는 정말 순정파예요. 첫 편지를 받았을 때 무척 감동을 받았어요. 내가 비행기를 타는 시각에 맞춰 쓴 듯한 편지였어요. ‘린다, 지금쯤 당신은 비행기 트랙을 오르고 있겠지. 잠시 후면 당신이 탄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대강 그런 내용이었는데, 요즘처럼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세상에 아직 이런 분이 다 있구나 싶어 내심 놀랐어요. ‘유정’이나 ‘무정’, 그런 옛 소설에나 나올 법한 아주 유니크하고 낭만적인 표현 아니에요?”

    ―이양호씨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특별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린다 김이 이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경솔했던 제 행동’이라는 표현은 일반인들에게 오해를 줄 만한 표현이지 않습니까. 이씨에게 오해를 줄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습니까.

    “사실 이 양반이 제게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딱 잘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비즈니스는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저도 참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아첨인지도 모르죠. 비즈니스 때문에. 그런데 이씨의 편지를 보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어요. 너무 순수한 감정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그 나이에 그렇게 순수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해 놀랍고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빙빙 돌려쓰다 보니 그런 표현이 나온 겁니다.”

    ―여자로서 그런 경우 처신하기가 쉽지 않지요?

    “이양호씨는 업무가 끝난 후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오곤 했어요. 와서 함께 식사도 하고. 아마 수십 번은 드나들었을 겁니다. 관계를 가진 게 사실이라면 두 번만 했겠습니까. 남자쪽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친구 사이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30% 정도 이런 고민을 안고 사업을 하죠. 딱 자르지도 못하고 난처하죠. 그런데 이런 걸 잘 요리하는 게 프로입니다. 상대 남자가 재미없는 얘기를 잔뜩 늘어놓아도 ‘재미있네요’ 하고 보조를 맞춰주면서…. 삼촌이라는 표현이 왜 나오는 줄 아세요. 가장 친한 사람에게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건 더 이상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막기 위해서입니다. 한번 관계를 맺고 나면 남자들은 ‘넌 내 거야’라고 생각하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일을 하기 힘들어져요. 강한 요구를 하지 못하게 되죠.”

    ―호텔방에서 밤에 몇 시간씩 남자를 만나는 것은 한국적 정서에서 보면 오해를 살 만하지요.

    “내가 묵는 스위트룸은 안방 리빙룸 회의실 등 세 문을 거쳐야 침실로 갈 수 있습니다. 내가 바보입니까. 막말로 엔조이하려면 젊은 남자와 하지(린다 김씨는 웃으며 ‘이런 건 쓰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외국 비즈니스계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일입니다. 내 인생의 반은 한국에서, 반은 외국에서 보냈어요. 그나마 한국에선 사회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호텔방을 오피스룸으로 사용해왔어요. 나와 만나는 분들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참모총장과 커피숍에 앉아 얘기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눈이 있는데. 무슨 마약 거래합니까.”

    ―경부고속철 사건으로 로비스트의 행태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호기춘이가 무슨 로비스트입니까. 내가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게 그런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겁니다. 그건 로비가 아닙니다. 브로커 짓이지. 미국에선 로비의 개념이 정착돼 있는데 한국에선 그렇지 않아요. (제품을) 잘 설명하는 것이 로비입니다. 그게 한국에선 안 통해요. 개선해야 합니다. 합법적인 로비관행을 정착시키는 일이 시급해요. 필요하면 대통령도 로비스트를 만나 설명을 들어야 해요. 로비스트가 자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경우도 많아요. 판매회사로부터 수수료를 올려 받아 그중 일부를 자기네 나라 정부에 갖다주는 겁니다. 일종의 리베이트인데 이를 활용해 이익을 보는 나라도 많아요.”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린다 김은 군관계자들로부터 군사기밀을 빼내는 한편 백두사업 실무자들에게 뇌물을 건넸다.

    ―권기대씨(예비역 준장·백두사업 총괄지휘)와 이화수 대령(백두·금강사업 주미사업실장)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권기대씨에게 100만원, 200만원씩 용돈으로 쓰라고 준 것은 우리 회사(IMCL 한국지사) 사장 지시로 결제한 돈입니다. 어쨌든 내 책임입니다. 그런데 사업자 선정이 다 끝난 다음에 돈(뇌물) 주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주려면 그 전에 주지. 내가 권씨에게 준 500만원은 부인한테 선물 사주라고 준 겁니다. 아마 무슨 날이었는데 지금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당시 저는 뇌물을 줄 처지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권씨가 10년 된 ROC를 신형으로 바꾸기 위해 내게 부탁할 처지였어요. ROC를 신형으로 바꾸는 것은 중개인의 역할이거든요. 어차피 딜은 오버된 상황이거든요. 장사 한두 번 합니까. 만약 뇌물이라면 몇 억을 줬겠지, 그렇게 작은 돈을 줬겠어요. 500만원씩 두 번 준 것밖에 없어요. 이화수 대령은 미국 간 것 때문에 다른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당한 겁니다. 그 자리가 서로 가려고 하는 자리거든요. 이대령에게 나중에 들었는데, 나와 관련된 혐의사실 중엔 기무사에서 하도 난리를 쳐 어쩔 수 없이 거짓자백을 한 부분이 있다고 그래요.”

    ―기무사 내사기록에 백두사업 실무자인 이화수 대령과 관계를 가졌다는 대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대령이 린다 김씨의 호텔방에서 새벽에 나간 일을 두고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실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당시 나는 미국에서 잠깐 들어왔었고 미국에 있는 이대령은 한국으로 출장 나와 있었어요. 마침 미국에서 놀러 나온 여자친구를 포함해 5명이 함께 호텔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어요. 나는 술을 거의 못 마시지만. 아마 그 일을 가지고 그러는가 봐요.”

    린다 김은 백두사업과 관련해선 미국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선정사업에선 이스라엘 무기를 들여오기 위해 애를 썼다. 이 또한 이양호씨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서 물의를 빚었다.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 선정 때는 이스라엘 회사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는데요.

    “이스라엘 것으로 꼭 하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 무기의 테크놀로지를 보고 감탄했어요. 그 나라의 장비를 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위스에도 그 장비를 팔았는데 스위스 정부가 보증을 서줄 정도로 훌륭한 장비였습니다. 스위스의 그 험한 산악지대에서도 문제가 없다면 우리나라 동부전선은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런데 전자전 장비는 이스라엘 것이 선정되지 않았죠.

    “처음에 됐다가 나중에 프랑스 톰슨사로 바뀌었죠. 우리가 빠져준 겁니다.”

    ―빠져줬다는 말은 뭔가 말못할 사정이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때 다 얘기하지요. 우리가 진 게 아닙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린다 김의 말투가 격해졌다. 담배 연기를 훅 내뿜는다. 저 기세대로라면 담배 한 갑이 곧 동이 날 듯싶다. 뭔가 중대한 얘기가 나올 듯도 싶은데 린다 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96년 10월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의 구속을 두고 그가 무기도입사업을 둘러싼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맞아요. 그 얘긴 밤 새워도 다 못해요.”

    린다 김은 동부전선 전자전장비 선정 경쟁 당시 영향력을 행사한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군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A씨는 프랑스제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B씨는 독일제를 각각 후원했다고 한다.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은 린다 김이 나선 이스라엘 장비를 선호했다. 그 때문인지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는 처음엔 이스라엘 장비로 결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양호 국방부장관이 96년 10월 수뢰죄로 구속된 후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재선정을 위한 심사과정에 이스라엘 장비는 아예 후보에서 제외됐다.

    ―99년 초 군검찰 관계자가 미국 LA에 가 린다 김을 조사한 일이 있죠?

    “예.”

    ―주로 어떤 부분에 대해 조사했습니까.

    “뭐 백두사업에 대해서였죠. 자술서도 썼어요.”

    ―이양호씨와의 관계에 대해선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무슨 죄가 됩니까. 정말 백두사업에 대해선 TV토론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과 한판 붙고 싶어요. 무기 문제만 갖고. 자신 있어요.”

    ―군검찰 관계자가 기무사가 확보했던 통화감청자료를 내보이며 불법로비 여부를 확인하자 린다 김이 “왜 나하고 가장 많이 통화했던 사람의 기록은 빠져 있냐”고 오히려 역공을 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상이 바로 김현철씨라는 소문이 파다한데요.

    “김현철요? 저나 잘 하라고 그래요. 지가 무기에 대해 뭘 안다고. 현철이가 무기와 뭔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걔한테 도움 받을 일이 뭐 있습니까. 권영해 손에 놀아나는 어린애였는데.”

    ―그럼 누구를 가리킨 겁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엄청 많은데, 나와 통화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왜 몇몇 특정인들과의 통화내용만 문제 삼느냐고 따진 겁니다. 이것, 표적수사 아니냐고.”

    “YS와 현철이, 다 알지요”

    린다 김은 어쩌면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에 대해 여유있게 맞받아쳤다.

    ―시중엔 린다 김은 김현철씨와 잘 알고 YS와도 만났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YS와 현철이 다 알지요. 현철이는 어렸을 때도 봤어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로비스트란 사람들 많이 만나는 것 아닙니까.”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과정에 기무사가 통화감청을 하고 사진촬영을 하는 등 뒷조사하는 걸 알았습니까.

    “그럼요. 임재문씨(당시 기무사령관)를 보고 눈치를 때려잡았지요. 이 얘긴 더 안 할게요. 내 재판이 남아 있으니.”

    린다 김은 또 한 차례 뭔가를 얘기하려다 그만두었다. 기자가 보충설명을 요구하자 “나중에 내 재판이 깨끗이 끝나면 군비리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라며 눈길을 돌렸다.

    ―96년 입국하면서 30억원을 들여와 그중 일부는 논현동 집 구입에 썼다면서요.

    “기무사가 하도 호텔 전화를 도청하고, 호텔 음식도 지겨워 집을 하나 샀어요. 당시 달러 환율이 올라 싸게 마련할 수 있었죠. 새집은 아니고. 100% 수리했어요.”

    ―나머지 돈은 어떻게 썼습니까. 그중 일부가 로비자금으로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집 구입과 수리에 10억원 이상 들었어요. 나머지 돈은 영국에 있는 IMCL 본사로 입금했어요. 로비에 돈을 쓰려면 그 정도만 쓰겠습니까. 쓰려면 확실히 쓰지. 우리도 빠져나갈 구멍 다 만들어놓고 로비합니다. 왜 한국에서 그런 멍청한 짓을 합니까. 우리는 인맥으로 로비합니다. 하루 이틀에 가꿔진 인맥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뇌물이나 쓰는 건 어설픈 에이전트나 하는 짓이에요.”

    린다 김의 인맥은 어느 정도일까. 김씨는 그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의 말을 통해 어림짐작해볼 뿐이다.

    “80년대초까지는 이후락 박종규씨를 통하면 안 되는 게 없었어요. 두 사람과 통하면 전두환씨와 통하고 전두환씨와 통하면 노태우씨와 통하고 노태우씨를 통하면 YS까지 통하는 것 아닙니까.”

    ―당시 기무사의 통화감청 자료에 따르면 린다 김이 비서에게 “그 늙은이에게 1000만원 더 갖다 주라”고 말했다는데 그 ‘늙은이’가 황명수 의원이라면서요? ‘내일신문’에 그런 내용이 났습니다.

    “난 누구에 대해서든 앞에선 존대하고 뒤에선 함부로 부르는 그런 짓 하지 않아요. 황명수,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이 일 저 일 다 관련돼 있잖아요. 그 사람이 뭐 나만 도와줬나요.”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황의원이 린다 김 로비에 깊이 관련됐다는데요. 이양호 국방부장관에게 몇 차례 전화로 “린다 김을 잘 도와주라”고 말한 사실도 있지요?

    “황의원이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어요. 사람이 좋다보니 여기 저기 나서서 그렇지. 그런데 이제 그런 얘기할 때는 제발 젊은 남자 좀 붙여줘요, 기왕이면. 탤런트 박신양 같은. 노인네들 말고.”

    “기왕이면 젊은 남자 붙여줘요”

    이런 얘기를 할 때 린다 김은 무척 쾌활한 표정이었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장난기마저 보였다.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98년 군검찰 수사 당시엔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다가 지난 3월 귀국한 배경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불구속을 약속 받고 들어온 게 아니냐는….

    “미국으로 달아난 게 아니라 내가 미국에 돌아간 뒤 일이 터진 겁니다. 서울에서 직원들이 연락을 했는데 기무사가 들이닥쳤다고 하더라구요. 이번에 들어온 것은 다른 뜻은 없어요. 내가 자신 있으니까. 내가 무슨 국가에 누를 끼친 것도 아니고. 훌륭하게 딜을 성사시켰잖아요. 한 번 따져보자는 거죠. 잘못되면 처벌받겠다는 거죠.”

    ―98년 수사 땐 조사를 피한 것 아닙니까.

    “피한 게 아니에요. 그냥 미국에 있었어요. 조사 받으러 들어오라는 얘기도 없었어요. 어쨌든 나까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우리 직원을 돌봅니까. 이번에 들어온 건 시기와 상관없는 것이에요. 선거 때니 조용하겠지, 하는 생각은 했지만요.”

    ―린다 김의 LA 사무실에 북한인이 드나들어 CIA가 조사했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겁니까.

    “(무기중개업계에서) 나한테 밀린 몇몇 사람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요. 재수사하라고 압력을 넣는 거죠.”

    린다 김은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를 하다가 올해 초 대우 아도니스골프장과 관련해 구설수에 올랐던 무기중개상 조풍언씨가 화제에 올랐다. 김씨에 따르면 조씨가 한때 그의 밑에서 에이전트 일을 보며 자신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이다.

    김씨는 조씨에게 포파이사업(공대지미사일)을 연결시켜주는 등 도움을 줬는데 조씨가 정권이 바뀐 뒤 자신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김씨에 따르면 조씨는 미국에서 김대중 대통령 부부와의 친분을 공공연히 과시하며 실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 린다 김은 자신에 대한 음해성 소문의 진원지로 조씨를 의심하고 있다. 한번은 두 사람이 크게 다퉜다고 한다. 김씨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내세우는 조씨에게 “권력이 천년 만년 가냐”고 몰아치자 조씨는 “너는 20년 동안 권세 누렸지 않느냐”고 맞받았다는 것.

    ―이양호씨가 보낸 편지를 보면 연애 감정을 담은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전자전 사업에 관한 내용까지 있던데요.

    “이스라엘 테크놀로지를 보고 감동 받았어요. 세운 지 50, 60년도 안 된 나라에서 어떻게 그런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지. 이스라엘이 내놓지 않는 무기가 있었어요. 미국을 통해 파는 것이에요. 그걸 이양호 장관에게 알려줬지요. 미사일이 기가 막힌 게 있다, 그런 정보를 줬더니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에게 얘기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얘기를 편지에 쓴 거예요.”

    ―이양호씨를 두고 역대 어느 국방부장관보다 자주국방, 특히 정보 자주화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옆에서 보니 어떻던가요.

    “사실이에요. 자주국방 의지가 어느 장관보다 강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이용당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어느 장비를 들여오면 100% 기술이전이 가능하냐, 어떤 미사일이 좋으냐며 갖가지 정보를 뽑아달라고 요구하곤 했어요. 당시 이스라엘을 드나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알아요? 총을 든 군인들이 입·출국할 때마다 일일이 검색을 다 하는데, 아주 살벌했죠. 제가 무슨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현지에 가 그런 정보를 빼왔겠습니까. 그런 일을 하도록 저를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국가관이었어요.”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를 운용할 부대가 몇 년 이상 놀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선정은 됐지만 아직 개발이 안 된 장비니 놀고 있을 수밖에요.”

    린다 김은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 사업에서 자신이 로비한 이스라엘 장비가 탈락한 데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산악이 많은 나라인 스위스 정부에서 인정했을 정도면 동부전선에서 사용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했다.

    ―백두사업 때도 처음엔 이스라엘 장비를 밀었지요?

    “검토했던 건 맞아요. 장비 자체는 이스라엘 것이 좋았거든요. 그러나 장비의 안전성 면에서 미국 것이 안전하다고 최종 판단했습니다.”

    ―당시 기무사령관이었던 임재문씨는 언론을 통해 “린다 김의 로비에 의해 무기가 결정됐다”고 말했는데요.

    “임재문이 무기에 대해 뭘 안다고? 임재문과 TV에서 공개토론하라면 하겠습니다. 다 만들지도 않은 장비를 가지고 지금 어떻게 평가를 합니까. 국방부도 얼마 전 ‘백두사업은 아무 하자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발표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무기에 대해 뭘 안다고….”

    백두사업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린다 김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일에 관해선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에 비하면 이양호씨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그녀에게 참을 만한 것으로 보였다.

    ―이양호씨는 “사기꾼 같은 여자한테 철저히 이용당했다”라고 말했는데 린다 김에게 연정을 담은 편지도 보낸 그가 왜 이제와 그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지요. 그 양반한테 ‘그럼 왜 당신은 그런 악녀를 사랑했냐’고 묻고 싶어요. 저와 좋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 중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또 있나요. 유독 그 양반만 그래요. 어쩌면 정말 나를 사랑했었나봐요.”

    린다 김은 인터뷰 내내 캐리어우먼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내비쳤다. 또한 유난히 프로 정신을 강조했다.

    “내가 한평생 바친 캐리어에 금이 가게 만든 데 대해 분노를 느낍니다. 무기체계에 관해 가장 실력 있다는 사람, 나와보라고 그래요.

    나를 안 지 가장 오래된 정종택씨가 한 얘기가 있어요. 우리 같은 여자는 중성이라고. 남자에 관심 없고 일에 승부를 걸지요. 한 번 딜이 붙으면 아침에 일어나면 머릿속에 스케줄이 확정돼 있어요. 선잠을 자는 거지요.”

    린 다 김에게는 남다른 ‘감정이입의 재능’이 있는 듯 싶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내것처럼 느끼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아마도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그 사람에게 ‘저 여성이 나를 특별한 정성으로 배려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공개된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봐도 린다 김이 정·관계 인사들을 대할 때 공적 관계보다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여왔음을 알 수 있다. 솔직하고 개방적인 자세, 직관을 중시하는 태도, 재빠른 감정포착, ‘치고 빠질 줄’ 아는 능수능란한 화술이 그 뒷받침이 됐을 것이다.

    ―린다 김은 비즈니스를 풀어 가는 방식 자체가 ‘정(情)’, ‘관계’ 중심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무슨 원칙 같은 게 있습니까.

    “내 스승님(중동 출신의 세계적 무기중개상 아드난 카쇼기를 지칭)이 한 분 계세요. 나는 그 분의 모든 것을 존경해요. 그런데 딱 하나 싫은 게 있다면, 이용가치가 없을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 냉혹함이예요. 난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는 ‘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필요할 때만 잘하고 아니면 말고, 난 그걸 거꾸로 합니다.

    내가 한국에서 출국하려고 비행기 좌석에 앉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뭔 줄 아세요? (인사 챙길 사람들) 리스트를 작성하는 거예요. 제1번이 구정권의 실세였다가 지금은 외로운 처지가 된 분들이에요.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 때 L씨, 노태우 정권 때 누구, YS 때 누구 하는 식으로…. 맨 마지막이 지금 정권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지요. 난 그렇게 하는 게 비즈니스하는 처세로서 옳고, 또 도리라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런 방식이 효과가 있지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50%는 비즈니스적인 고려이고, 나머지 50%는 말 그대로 ‘내게 인간적으로 너무너무 잘 해주신 분들이니 당연히 인사해야지’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넓은 것 같지만 그 동네라는 게 어차피 거기서 거기예요. 말이 무척 빨리 돌죠. ‘린다 김이 정권 실세 누구누구만 챙기고 옛 지인들은 다 외면하더라’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는 겁니다. 옛 분들 챙겨 보세요, “네가 어떻게 해서 나를 위해 넥타이라도 하나 사들고 올 생각을 다 했니, 네 마음이 더 소중하다” 하시며 무척 기뻐하세요. 바로 그런 게 중요한 거지요.”

    “누구든 이길 수 있다”

    이쯤에서 그는 자신이 오늘의 국제적인 로비스트로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 온갖 고생을 겪어왔는지, 그런 자신을 ‘몸 로비나 하는 아마추어’로 보도한 언론의 태도에 얼마나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지를 재삼재사 강조했다.

    “나는 여자로서 가장 꽃다운 나이인 20대부터 40대 후반의 지금까지 오직 일만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반평생을 (비행기 타고 다니느라) 하늘에서 보낸 겁니다. 밤에 인보이스가 들어오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무조건 비행기 타고 나가요. 표를 못 구한다, 시간이 너무 늦다, 빠르다, 그런 건 나한테 통하지 않아요. 제 때에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서 7시간씩 대기한 적도 있어요.

    그러니 (지금의 이런 상황이) 얼마나 슬픈 일이예요!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나 했겠어요? 난 정말 자신 있어요. 어느 누가 경쟁 상대가 된다 해도, 그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인맥을 갖고 있다 해도 난 얼마든지 타고 올라가 이길 자신이 있다구요. 다 와보라고 해요. 난 누구든 이길 수 있어요.”

    이런 말도 했다.

    “비즈니스에서 뒤처진 사람은 1%의 틈새를 엿봅니다. 한 쪽에서 ‘이제 다 됐다’는 생각에서 샴페인부터 터뜨리며, 구두(口頭)로 했던 약속보다 가격을 올린다던가 하는 식으로 바이어의 뒷통수를 칠 때가 역전의 기회인 겁니다. 아주 작은 틈만 있으면 결과는 얼마든지 뒤엎을 수 있어요. 그래서 로비스트는 돈이 내 손에 딱 떨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성공했다’며 잘난 체 할 수가 없어요.”

    ―모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던데, 책을 내려는 것도 그런 부분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입니까?

    “그래요. 내가 여고 2, 3학년 시절부터 스물서너 살까지 겪었던 삶의 질곡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에요. 그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죠. 이미 그 때 나는 여자들이 평생 바라는 것들, 사랑, 보석, 자동차, 집, 상류생활, 연예계 경험까지를 두루 다해 봤어요. 그렇게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내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겁니다.”

    이 대목에서부터 린다 김은 자신의 인생 역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시대를 왔다갔다 하면서 펼쳐진 이야기는 말 그대로 한 편의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는 사람이 정말 있긴 있구나’하는 생각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여기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을 시대순으로 재배열했다. 한 가지 먼저 밝혀둘 것은,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린다 김이 서울로 올라온 시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는 점이다. 린다 김 자신은 중학교 때 옮겼다고 했지만, 고향 친구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서울로 전학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린다 김의 얘기에서도 ‘전학’ 시점과 관련해서는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남모를 사연이 있는 듯도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린다 김이 진술한 그대로의 인생사(史)를 가감없이 기록한다. 빼어난 미모, 총명한 두뇌, 남다른 야망을 가졌던 한 시골 소녀가 서울, 일본, 미국을 거쳐 마침내 세계를 주름잡는 무기중개상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였어요. 극장에 가서 신성일이 주연한 ‘초연’이라는 영화를 몰래 보다가 수학 선생님께 들켰어요. 그게 주말이었는데 그 다음 월요일 학교에 가려니까 그렇게 싫더라구요. 학교에 가면 얼마나 꾸중을 들을까 싶어서 아예 가방을 메고 뒷산으로 올라가 버렸죠.

    그런데 제 친구한테서 얘기를 들었다며 평소에 날 좋아하던 남학생이 쫓아왔어요. 같이 물가 바위 위에 앉아 꾸중들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 밑에서 바로 그 수학선생님이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영화 보다가 걸렸지요, 한 술 더 떠서 학교도 안 가고 남학생이랑 노닥거렸다는 소리까지 듣게 됐지요. 정말 (학교를) 못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린다 김은 서울에 유학 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난 여기 학교를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다, 잘못하면 정학을 당할 지도 모른다, 서울로 올라갈 작정이니 편의를 봐달라….”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린다 김은 상동여중을 다니며 친구 자취방에 얹혀 산다. 처음에는 펄쩍 뛰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학비를 부쳐주었다고 한다.

    연예계 데뷔는 아모레 모델

    ―여고 시절부터 시작된 삶의 질곡이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중학교 졸업 후 숙명여고에 입학했어요. 거기를 2학년까지 다녔을 때 운명의 ‘그 사람’을 만났어요.”

    린다 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던 고향 사람이 있었다. 그녀와 열 살쯤 차이가 나는 그 사람은 서른 살 전후한 그 시절에 이미 권부(權府)에 가까이 가 있었다. 린다 김은 그 사람이 후에 ‘떠오르는 태양’ ‘황태자’가 됐다는 표현을 썼다. 아무튼 그 ‘아저씨’는 린다 김을 무척 귀여워해 간혹 불러다가 간식도 사주고 고민도 들어주었다. 문제의 청평유원지로 린다 김을 데려간 것도 그 ‘아저씨’였다.

    “남학생, 여학생, 그리고 어른들이 다 함께 놀러 갔는데, 거기에 아저씨 친구였던 그 사람도 왔어요. 다들 싸갖고 온 도시락이 고만고만했는데 그 사람 것만 마치 궁중음식 같았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했지요. 귀공자 타입에, 잘 생겼다기보다는 귀여운 편이었고, 말이 없었어요. 하긴 말이 없기로는 ‘아저씨’도 마찬가지였지요. 하여튼 다 놀고나서 서울로 돌아가는데, 그 때 거기에 온 어른들은 다 자기 차가 있었거든요. 나는 그 사람 차를 타게 됐어요.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 거지요.”

    ‘그 남자’는 보통 가문의 남성이 아니었다. 대단한 갑부 집안의 2세였다. 기자가 “10대 재벌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냐”고 물었더니 린다 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관계가 깊어지자 그 사람이 제 어려운 처지를 알고는 집을 한 채 마련해줬어요. 차도 사 줬고, 그 차를 몰 기사도 고용해줬어요. 뚝섬에 가서 승마도 많이 했어요. 보석이며 옷도 전부 최고급으로 해주고, 인천 올림푸스 호텔에서 슬로진에 함박스텍도 먹고…. 돈으로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했어요.”

    얘기 중 린다 김은 무심하게 “마침 그 사람한테서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이 여기 있네” 하며 손을 내밀었다. 장난감 구슬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무려 13캐럿. 모조품이 아니라면 수억 원은 가볍게 넘어설 만한 크기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꿈같은 나날인데도 린다 김의 생활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처음 말과는 달리 그 사람이 기혼남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또 고등학생 신분에 사실상의 동거를 한다는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소문 때문에라도 계속 전학을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여고 졸업도 흐지부지돼 버렸다.

    “아무리 사랑해도 맺어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당연히 그 사람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그 사람 아버지인 ‘회장님’은 계속 헤어질 것을 종용하고. 상황이 힘든 만큼 저도 방황을 많이 했어요. 사랑도 엉망, 공부도 엉망. 나쁜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지요.”

    ―가수로 데뷔한 것도 비슷한 때였겠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제 연예계 데뷔를 굳이 따지자면 가수로서가 아니었어요. 모델이었지요. 아마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한참 방황하던 때였을 거예요. 명동 거리를 걷는데 누가 다가와 ‘얘기 좀 하자’ 그러더라구요. 마주 앉았더니 대뜸 ‘화장품 모델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얼떨결에 태평양 아모레 제1호 모델이 됐어요. 그게 여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까 1973∼74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영화도 찍을 뻔했어요. 신상옥 감독님을 알게 됐는데 저보고 영화 한 번 해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한 편을 절반쯤까지 찍었는데 권부(權府)쪽 아저씨의 압력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사실은 그 분도 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겁니다.”

    ―친구 사이가 연적이 됐겠군요?

    “결국은 그렇게 됐어요. 어느 날인가 애인을 만나기로 해서 막 뛰어가고 있는데 명동성당 부근에서 그 아저씨랑 딱 마주쳤어요. 난 급하다고, 빨리 가야 한다고 그러는데 아저씨는 ‘지금 듣지 않으면 네가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을 얘기해주겠다’면서 계속 붙잡는 거예요. 나는 그래도 급하다면서 팔꿈치로 아저씨 명치를 쳐가며 빠져나왔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첫사랑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려 했던 것 같아요. 아저씨 입장에서도 친구 일이라 함부로 말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분도 날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결국 나로 인해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말았어요. 둘 다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 지금도 담을 쌓고서 서로 모른 체 하면서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가수가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원래 노래를 좋아해요. 살던 집 앞에 유니버설 레코드사가 있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가정집인 줄 알았는데 유명 가수들이 자주 드나들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죠. 어느날 우연히 유니버설 사장님 차를 잠깐 얻어 타게 됐어요. 내가 ‘그 집에는 왜 그렇게 가수들이 많이 드나드느냐’고 물었더니, 거기가 레코드사라는 거예요. 그러냐고, 나도 노래를 참 좋아한다니까 사장이 날 유심히 살펴보더군요. 그리곤 ‘내일 와서 노래 한번 불러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음 날 거길 찾아가 기타 반주에 맞춰 팝송을 불렀고,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즉석에서 ‘넌 가수를 해야 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바로 전속계약을 했어요. 날더러 ‘얼굴, 몸매, 노래가 다 되는 가수’라며 좋아하셨지요.”

    하지만 실력과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린다 김의 가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가요 전문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진필홍 씨에게 발탁돼 KBS 전속가수로 활동할 기회까지 잡았지만 ‘애인’이 한사코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싫어할까봐 화장품 모델로 선 것도 극구 감춰왔던 린다 김이었다.

    “그 사람이 방송국에 자꾸 압력을 넣는 거예요. 그 가수 출연시키지 말라고요. 그런 이유 말고도 방송국에선 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이것저것 많이 떠돌았어요. 이제 스물 갓 넘은 여자가 기사 딸린 로얄 살롱을 타지 않나, 도요타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니지 않나(둘 다 ‘애인’이 린다 김에게 사준 차였다), 항상 검은 선글라스에 보디가드까지 2명씩 달고 다녔으니…. 하여튼 그렇게 영화는 영화대로, 가수 활동도 그것대로 다 안되고 보니 참 허탈했습니다.”

    ‘회장님’의 돈을 거절하다

    ―그래서 애인과는 어떻게 정리가 됐습니까?

    “내가 스스로 떠났어요.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그대로 가다간 그 사람 인생이 완전히 잘못될 것 같았어요. 아버지 눈 밖에 나면 끝장인데, 내가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런 사태가 일어나게 해선 안되지 않겠어요?

    어느날 회장님이 나를 직접 부르시더군요. 갔더니 상당히 많은 돈을 주시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어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죠. 하나는 내가 목숨 걸고 하는 사랑을 돈 따위와 맞바꿀 수 없다는 자존심, 또 하나는 ‘나한테 돈 몇 푼 집어주는 걸로 당신들 마음 편해지는 꼴은 못보겠다’는 독한 마음 같은 거였어요.

    그 사람은 계속 내게 조금만 기다려라, 어떤 방법으로든 책임을 지겠다고 매달렸어요. 그런데 난 포기가 상당히 빠른 사람이거든요. 내 성격이 상당히 양면적인데 아주 외향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구도 많이 안 사귀고, 어디 나가기도 싫어할 만큼 지극히 내향적이에요. 그러니까 외곬이지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니까. 이 사람하곤 안 된다 깨달은 만큼 결단을 내릴 수 밖에요.”

    ‘회장님의 돈을 거절한’ 그녀의 행동이 당시 상류사회에서 상당한 화제거리가 됐던가 보다. 그 시절 린다 김은 ‘애인’과 함께 고위 인사들이 참여하는 파티며 모임에 자주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정권 이후 국내 정계를 주름잡아온 인물 대다수와 안면을 텄다.

    그 때 쌓은 몇몇 인사들과의 친분은 린다 김이 로비스트 생활을 시작하고 지금의 명성을 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당시 그녀를 알던 사람들은 린다 김이 회장의 돈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어린애가 참 당차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린다 김은 그 때 보여준 강단 있는 모습 때문에 ‘어르신’들이 자신을 더 눈여겨본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에는 대단한 미인이셨던가 봅니다.

    “지금보다는 아무래도 나았죠. 이 얼굴은 좀 손을 댄 거거든요. 예뻐지려고 수술한 게 아니라 교통사고가 나면서 눈 위며 입술 안쪽부터 귀까지 찢어져 어쩔 수가 없었어요. 외모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게 눈이에요. 예전에는 지금보다 쌍꺼풀이 더 크고 자연스러웠어요. 코뼈도 왼쪽으로 약간 튀어나왔는데, 당시 의술로는 치료가 쉽지 않아 그대로 놔뒀어요.”

    린다 김은 사고를 당하던 당시 ‘첫사랑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사고가 나자 각기 다른 곳으로 후송됐는데, 자신은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사고난 시기가 언제냐고 묻자 입을 다물었다. 그저 짤막하게 ‘다시 만났을 때’라는 대답만 했다.

    린다 김 입에서 나온 ‘첫사랑’에 대한 정보를 모아 보았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재벌 2세, 일본 유학, 귀염성 있는 얼굴, 반듯한 매너, 린다 김보다 10살 정도 많은 나이, 방송국에 압력을 넣을 정도의 권력, 주량 맥주 한 잔, 교통사고…. 언뜻 얼굴 하나가 잡힐 듯도 했다.

    ―75년쯤 일본으로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됐어요. 국내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 신상옥 감독에게 여권을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정말 얼마 안 있어 비자와 여권을 건네주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 때 받은 게 연예인 취업비자였나봐요. 그러니까 내가 미8군 보컬이었다느니 무용수 출신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나 있겠지요. 이번 일 끝나고 미국 가면 신감독한테 물어봐야겠어요.

    일본으로 가기로 한 건 거기에 내가 ‘어머니처럼 모시던 분’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일본에서 학원 같은 데를 다니면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어요. 그런데 그 분(애인)이 거기까지 자꾸 찾아오는 거예요. 일본 유학생활을 한 사람이라 현지 사정에 밝거든요. 그럼 난 규슈로 피하고, 어디로 도망가고…. 그렇게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결국 어머니와 의논해서 미국으로 가기로 했어요.”

    린다 김은 ‘어머니가 누구냐’는 질문에 ‘노 코멘트’라고 했다. 잘 알려진대로 린다 김에게는 인천에 거주하는 부모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린다 김은 어머니를 계모라 하고, 부모 쪽에서는 린다 김을 ‘분명 우리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어쩌면 일본의 그 ‘어머니’가 미스터리 해결의 열쇠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 중 최모 의원이 보낸 것을 살펴보면 말미에 “린다 어머니의 생애를 회상할 때 나는 린다에게 어떤 감동을 크게 받았소”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 언급된 어머니가 그 ‘일본 어머니’ 아닐까? 그리고 린다 김은 이렇듯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인 사람들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친밀도를 더욱 높여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국 생활을 어땠습니까?

    “미국으로 간 건 76년 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워싱턴에 정착했어요. 거기 한국 사람 수가 제일 적다고 어머니께서 추천하셨어요.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는데 솔직히 교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버클리도 다녔다던데.

    “워싱턴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그 때 룸메이트가 켈리라는 아랍계통 친구, 엘이라는 필리핀 고관 딸이었어요. 그 때 엘한테서 담배를 처음 배웠어요.

    셋 중에서는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켈리의 영어 실력이 제일 나았는데 그 친구가 얼마 안 있어 샌프란시스코 버클리로 전학을 간다는 거예요. 나도 너무 따라가고 싶었어요. 늘 비가 내리는 워싱턴 날씨가 너무 싫었거든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의, 매일 먹어야 하는 맛없는 햄버거, 한 마디로 우울했지요. 그냥 거기 있다간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았어요.

    문제는 전학갈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일단 영어가 안되니까 시험을 제대로 못 봐 버클리로 가져갈 성적표가 없었거든요. 결국 켈리 혼자만 샌프란시스코로 가고 전 켈리의 권유대로 랭귀지 스쿨에 등록했지요.

    랭귀지 스쿨에 제법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서울에서 ‘그 분’이 보낸 사람이 찾아왔어요. 어떻게 내 미국 거처를 알아낸 거지요. 비서실 직원이었는데 ‘그 분은 당신을 공부시키고 싶어 한다, 뭔가 도울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버클리에 가고 싶다, 그런데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어요. ‘알았다’며 간 남자에게서 며칠 후 전화가 왔어요. 다 됐으니 짐싸서 가라구요.”

    ―76년이라면 린다 김 나이가 만 23세였겠군요. 이전부터 “23세 때 세계적인 무기중개상인 아드난 카쇼기와 첫 만남을 가졌다”고 말해 왔는데 그 비화를 좀 들려 주시지요.

    “카쇼기와의 인연을 맺어 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도 한 방을 쓴 친구 켈리였어요. 카쇼기가 켈리의 삼촌뻘이 되더군요. 어느 날 켈리가 ‘뷰티풀 영 우먼(beautiful young woman) 12명을 모아야 한다’고 얘기하더군요. 카쇼기가 영국 런던에서 성대한 파티를 여는데, 거기서 일할 미국 여대생들을 찾는다는 거였어요. 그 12명에게는 런던행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왕복 티켓이 주어지고, 수고비도 엄청나다더군요. 저도 그 12명에 끼여 영국땅을 밟게 됐습니다.”

    파티는 런던 중심가 돌체스터 호텔을 통째로 빌려 사흘 밤낮으로 진행됐다. 비록 아시아의 소국이라곤 하지만 상류사회 매너를 익혔고, 값비싼 의상도 많이 갖고 있던 린다 김은 안내 역할을 맡았다.

    “헨리 키신저같은 유명 인사들, 아랍 왕족들이 바글바글했어요. 유명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식사시간이 돼 미국에서 건너간 우리 12명이 한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자꾸 시선이 느껴졌어요. 돌아봤죠. 대머리에 동그랗고 빛나는 눈, 바로 카쇼기였어요.

    카쇼기는 손짓해서 나를 부르더니 ‘파트 타임으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영어는 좀 늘었지만 여전히 공부와는 담쌓고 지내던 나로서는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지요. 부르면 달려가 제시한 기간만큼 일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카쇼기에게 왜 하필이면 나를 불렀냐고 했더니 ‘동양인이라 눈에 띄는 데다 당신 눈동자가 가장 반짝거렸다’고 하더군요. 세련된 옷차림도 한 몫 했던 것 같아요.”

    ―언제 어떻게 연락이 왔고 처음 맡은 업무는 무엇이었습니까.

    “첫 연락이 온 건 76년 6월이었습니다. 그 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가서 두 달 동안 심부름꾼 역할을 했어요. 타자 치고 서류가 완성되면 여기저기에 전달하는 것이 주 업무였습니다. 밤 새워 타자를 치긴 했지만 단어들이 어려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두 달이 거의 지난 다음에야 그게 비거리니, 미사일 종류, 비행 속도니 하는 군사용어들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 끝나면 미국에 돌아가서 학교 다니다가 다시 유럽으로 오고, 그렇게 왔다갔다하는 생활을 하다가 아예 카쇼기의 회사로 자리를 옮겼어요. 어깨 너머이긴 했지만 무기중개와 관련된 지식도 조금씩 습득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무기중개 일에 뛰어든 건 언제부터였습니까?

    “1981년이었어요. 카쇼기가 저를 부르더군요. 그러면서 ‘종규 박(박종규)을 아느냐’고 물어요. 저야 당연히 ‘안다’ 그랬지요. 카쇼기가 씩 웃으며 그래요. ‘그래, 모든 한국인이 다 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박종규씨가 워낙 유명인이었던만큼 내가 신문이나 잡지같은 걸 통해 그냥 이름 정도나 알고 있는 걸로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박씨는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었거든요.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안다’고 하자 카쇼기가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비행기 티켓만 주겠다. 지금 당장 한국에 가서 미스터 박을 데려오라.’

    나는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곧 짐을 꾸려 한국으로 갔지요. 박종규씨를 찾아가서 ‘아저씨, 나 좀 한번만 도와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박씨는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나는 ‘지금 생각 할 시간이 어디 있나. 빨리 가자. 빨리 가지 않으면 나 바보 된다’며 계속 졸랐어요. 다음 날 아침, 그 분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좋다, 가자.’

    막상 박씨를 대령하니 카쇼기의 눈이 휘둥그레져요. 설마 20대 어린 여자가 자기들이 1년 가까이 매달려도 대면할 수 없었던 박씨를 데려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거지요. 그렇게 해서 한국 관련 새 사업이 시작됐고, 저도 카쇼기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인 로비 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내 별명은 브레이크 없는 탱크

    ―그렇다면 로비스트로서의 첫 작품이 바로 한국 관련 사업이었던 셈인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성공했나요?

    “사업 시작과 함께 드디어 내 방이 생겼어요. 카쇼기 밑에 오래 있었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무기중개 일은 처음이라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비행기 부품을 하나하나 다 분해해가면서 공부에 몰두했어요.

    정말 미친 듯이 매달렸고, 그래서 결과도 좋으리라 예상했는데, 그만 무기 제작사의 잘못으로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만 겁니다. ‘각하’까지 보고 계신 앞에서 시험 비행에 실패한 거예요. 그 때의 좌절감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1년동안 내 모든 것을 바쳤던 프로젝트가 그렇듯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다니…. 열흘 동안 상사병 난 여자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겨우 몸을 추스려 출근하니 카쇼기가 ‘이번 실패는 네 잘못이 아니다, 제조사 잘못이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 주더군요.

    심기일전해서 아랍 쪽에서 큰 건 하나를 맡았어요. 초년 로비스트인 나를 업체에서 믿어준 거죠. 아랍 쪽은 지역특성상 왕족을 상대하지 않으면 비즈니스가 안돼요. 너무 큰 건이라 긴장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탱크처럼 밀어붙였어요. 그렇게 2년 6개월을 밀고 당긴 끝에 드디어 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최초의 내 단독 프로젝트였어요. 그렇게 크게 한 건 하고 나니까 다시 우리나라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코리안이다, 코리안인데 사막만 누비고 다닐 수 있느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상대하는 국가가 다양한데 나라마다 각기 어떤 특성 같은 게 있지 않아요?

    “그렇죠. 미국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예요. 한국은 앞에서 말한대로 정이나 인맥 같은 걸 중시하고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는 실력이 최고예요.”

    ―로비스트로서 다양한 협상 기법을 구사할텐데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어떤 겁니까?

    “굳이 말하자면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거죠. 프리젠테이션에 들어가면 대개 장군들이 죽 진을 치고 앉아서 여러 가지 곤란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기기에 대해서 아무리 완벽하게 학습한 로비스트라도 한두 가지쯤은 모르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지요. 잘못해서 그런 약점을 잡히게 되면 거래도 성사되기 힘들 뿐더러 시간도 무한정 지체됩니다.

    나는 그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서 조금 독특한 방법을 써요. 소개할 기기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는 건 기본이고, ‘골드 카드’를 하나씩 준비하는 거지요. 이 프로젝트 또는 기기 도입에 있어 아주 핵심적인 사항, 그러나 장군들이 소홀하게 넘어갈 가능성이 아주 큰 부분을 콕 짚어내 아예 내 쪽에서 먼저 질문을 던져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 질문을 받기 전에 제가 먼저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폭풍이 불 때는 프레쿼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참석자들은 당황합니다. 프레쿼터는 비행기에서 사진을 내려 찍는 렌즈와 관련이 있는 건데, 그와 관련된 작업을 할 때에는 맑은 날만 생각했을 뿐 비가 오거나 폭풍이 치고 심한 안개가 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지 않거든요.”

    “마음이 안 가면 몸도 안 움직인다”

    ―일단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생활이 어떻게 바뀝니까.

    “24시간 대기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미디움룸이 있는 현지 호텔 스위트룸(침실, 거실, 식당 겸 회의실로 3등분 돼 있는 방)을 사무실 삼아서 아침 6시부터 한밤중까지 그 일만 생각합니다. 끝없는 비행기 여행이 이어지는데, 이상한 건 세계 어디를 가건 그 나라 시간으로 오전 6시면 눈이 딱 떠진다는 거예요. 그만큼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가정사도 좀 밝혀 주시지요.

    “79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안 맞는 점이 있어 이혼했어요. 80년대에 브라질 교포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열애에 빠졌습니다. 몇 년 후 성격 차이로 헤어졌는데 4년 전에 재결합했어요. 지금은 산타바바라 집에서 남편, 두 딸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연예계 데뷔를 꿈꾸는 딸이 있다던데….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대학교 2학년생인 큰 아이는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어요. 키도 커서 모델을 하고 싶은가본데 제 아빠나 나는 반대예요. 대신 보석 디자이너를 권하고 있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미적 감각이 뛰어난 편이거든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부부라면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정보들을 서로 나눠 갖게 마련 아닙니까? 남편은 내가, 마음이 가지 않으면 몸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지나치리만큼 예민해요. 마음이 가지 않는데 몸만 움직인다면 그게 바로 창녀가 아니고 뭡니까? 남편은 내가 결코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격려해 줄 밖에요.”

    인터뷰가 끝났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시작한 인터뷰였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에 다가서고 있었다. 베란다 밖에는 시커먼 어둠이 사위를 조이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린다 김은 여러 차례 웃음을 터뜨리는 등 시종 쾌활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정색을 하고 공박하기도 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린다 김이 물었다. “어떠세요, 저에 대한 느낌이. 생각했던 그대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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