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丁 世 鉉<br>●1945년 만주生 ●1971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79년 통일원 공산권연구관 ●1982년 서울대 정치학 박사 ●1983년 통일원 남북대화 운영부장●1991년 민족통일연구원 부원장●1993년 청와대 통일비서관 (95년 3차 남북 쌀회담 대표)●1996년 민족통일연구원 원장●1998년 통일부 차관(베이징 남북당국자 회담 수석대표)●2001년 국가정보원장 통일특보●2002년 통일부 장관(7~11차 남북 장관급회담 수석대표)
북한이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일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북한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날 온종일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만약 북한이 신형 미사일이라도 공개한다면 8월 말 6자회담으로 어렵사리 조성되어가던 대화 무드는 또 한 차례 난관에 부딪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터뷰 시간인 오후 4시가 되도록 북한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오늘 어떠셨어요? 저도 마음이 좀 부산했습니다만.
“아이구, 잘 넘어갔지요. 일단 지금까지는 그래요. 정말 요즘은 하루하루를 긴장하면서 살고 있어요.”
-날이 저물기 전까지는 계속 북한쪽 동향을 지켜보셔야겠네요.
“어두워진 뒤에 또 뭐가 나올지 몰라요. 일단 8시 뉴스까지는 봐야 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김정일 답방 무산 아쉬워
기자가 정장관을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인 1994년 7월경,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정상회담이 무산된 뒤였다.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이던 정장관은 서울 무교동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소주잔을 앞에 놓고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무위로 돌아간 것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이어서 김일성 주석이 답방을 했다면 서울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설을 쏟아냈었다. “김 주석은 서울 거리에서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수백만 인파를 기대했을 것이다” “우리 내부에선 통일을 열망하는 진보세력과 6·25전쟁을 경험한 반공 보수세력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을 것이다” 등의 말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자리에 앉은 후 10년 전 얘기를 꺼내자 정장관은 “그 때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오늘의 남북관계는 많이 달라진 모습일 텐데…. 2000년 6월15일에 약속한 대로 김정일 위원장이 적절한 시점에 서울을 방문했더라도 상황은 또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하며 또 아쉬워했다.
이번 인터뷰는 9월초에 방송된 한 TV 프로그램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일본 방송사가 제작한 이 프로그램에서 정장관은 자신이 북한문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에 대해 “6·25 피란 시절에 보았던 장면들이 잠재의식에 남아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고 술회했다. 이 말이 인상 깊었던 기자는 인터뷰를 제의했고, 정장관은 “현안 문제가 아닌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정부가 겪는 어려움과 고민을 말하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조건으로 응했다. 하지만 현안 문제를 완전히 배제한 인터뷰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약속이다. 정장관도 그 점은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
-역사상 처음으로 6자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 핵문제가 국제무대의 주된 의제가 되었습니다. 주무부처인 외교통상부에 비해 남북대화가 주된 업무인 통일부는 요즘 상대적으로 한가한 것 아닙니까?
“6자회담은 핵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회담이니까 대표 창구를 외교부로 하는 건 당연해요. 통일부는 지금 남북대화 채널이 잘 작동되고 있으니까…. 핵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국제공조와 남북대화의 투 트랙(two track)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6자회담에서 우리가 핵문제의 당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남북대화 또한 한계가 있으니까 두 가지가 서로 보완관계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6자회담에도 통일부에서 대표가 나가 있습니다. 한미일 고위 정책협의회에도 우리 부 국장급이 계속 나갔고…. 그 쪽 상황을 바로바로 남북대화에 반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