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루게릭병 치료비까지 모아 저개발국 어린이 후원”

탤런트 차인표의 멘토 ‘구두닦이’ 김정하 목사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2-04-20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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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게릭병 치료비까지 모아 저개발국 어린이 후원”
    “당신 수염은 뭐가 이렇게 빨리 자라요?”

    “나도 수염이 체면이라도 있어서 좀 천천히 자라주면 좋겠어. 왜, 철수세미로 싹싹 밀지 그래?”

    “그렇게 못 참겠으면 내 얼굴에도 수염 나라고 기도하세요. 내 얼굴에 수염 나면 나도 면도를 잘할 테니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한 교회 안에서는 매일 아침 ‘면도해주는 아내’와 ‘면도받는 남편’이 티격태격한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날, 갓 면도한 김정하(53) 목사의 얼굴은 파르라니 깎인 턱 덕분인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듯 보였다.

    6년 전 성남시에 교회를 개척한 김 목사를 찾아가게 된 건 TV를 보다가 우연히 듣게 된 탤런트 차인표 씨의 이야기에 귀가 번쩍 뜨였기 때문. 모 방송국 심야 토크쇼에 출연한 차 씨는 “내게 멘토가 한 분 계신데 그분에 비하면 나는 쓰레기다, 발끝도 못 따라간다”고 고백했다. ‘그분’이 바로 김 목사다. 아내인 탤런트 신애라 씨와 함께 해외 아동 49명을 후원하며 ‘나눔 천사’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연예계 대표 모범생 차 씨가 한 말이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를 위해 김 목사를 만나러 가던 날 서울에는 19년 만에 ‘4월의 봄눈’이 강풍과 함께 몰아쳤다. 신도 수가 10여 명에 불과한 개척교회는 단대동 대로변의 4층 건물에 있었다. 허름한 외관이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했다. 1층 당구장 옆의 비좁고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자 3층에 김 목사의 보금자리이자 교회가 보였다. 교회 한 편 주방을 겸한 곳으로 들어서자 휠체어에 앉은 김 목사가 환한 표정으로 기자 일행을 맞았다. 루게릭병에 따른 근육 위축으로 그는 팔,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었고, 언어장애까지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날 인터뷰는 김 목사의 말을 아내인 최미희(48) 씨가 통역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탤런트 차인표 씨가 텔레비전에서 존경과 찬사를 보낸 ‘그분’이 누군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차 씨와는 언제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2008년 한 NGO를 통해 알게 됐어요. 차 집사(차인표 씨)와 만나기 전 우연히 언론에서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NGO컴패션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두 명을 후원하기로 했거든요. 매달 7만 원씩 후원금을 내기 위해 구두닦이를 시작했지요. 마침 그 단체에서 차 집사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제 이야기를 듣고 NGO 집회 때 설교 겸 간증을 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렇게 서로 알게 됐지요.”

    ▼ 방송에서 차인표 씨가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님인데, NGO 행사에서 선물인 줄 알고 풍선 5개를 잡았다가 5명의 아동을 후원하게 돼 난감해했다’는 말씀을 했는데요.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차 집사와 인연이 닿기 전 그 NGO 후원의 밤 행사에 우리 교회 집사님 두 분과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최 측에서 풍선을 날리며 각자 하나씩만 잡으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집사님들이 풍선 안에 선물이 든 줄 알고 두 개씩 잡았지요. 저는 한 개만 잡았고요. 나중에 보니 풍선 속에 선물이 아니라 후원할 아이 사진이 한 장씩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걸 알고 집사님들이 풍선을 모두 저한테 떠넘겼지요. 그 얘기가 잘못 전달돼 제가 풍선 5개를 잡은 걸로 알려진 것 같습니다.”

    ▼ 아동 2명의 후원금을 벌기 위해 구두닦이까지 했는데, 새로 5명의 아이를 후원하게 됐으니 고민이 많았겠군요.

    “처음엔 당황스러웠지요. 앞서 두 아이를 후원하느라 신문 구독도 중지하고 우리 아이들이 마시던 우유도 끊었거든요. 후원금 보내고 나면 집에 쌀이 떨어져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제 어떡하나, 아이들 사진을 버릴 수도 없고…. 고민이 됐습니다. 목양실(목사 사무실)에 사진 5장을 나란히 붙여놓고 ‘하나님,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합니까?’하고 매일 기도했지요. 또랑또랑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니 하나님도 우리가 그들을 품어주길 바라시는 것 같아 후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풍선을 떠넘긴 두 분이 후원금은 좀 안 보태주시던가요.

    “두 분 다 연세가 60, 70대로 고령인데다 생활 형편도 몹시 어려워서 후원금을 보탤 여유가 없어요.”

    구두 닦는 목사님

    김 목사는 구두를 더 열심히 닦았다. 애초에 교회 건물 앞 대로변에 의자 하나와 손글씨로 쓴 ‘구두 닦습니다. 2000원 수익금 전액 불우아동 위해 사용’이라는 광고판 하나만 놓고 구두를 닦기 시작한 그는 이후 연락처를 넣은 홍보전단지를 만들어 주변 상가와 점포에 돌리며 구두 닦을 손님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과정에서 단골도 생겼다.

    ▼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을 텐데 왜 구두닦이를 택했나요?

    “밑천을 적게 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지요. 처음엔 우유나 신문을 배달할까, 아니면 폐지를 주워 모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배달은 새벽에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새벽예배를 드려야 하는 저로서는 할 도리가 없지요. 폐지는 동네에 폐지 줍는 할머니 생계를 빼앗는 일이라 안 되겠고…. 뭘 할까 고민하며 열심히 기도하던 어느 날 제 구두를 닦다가 ‘오른팔이 멀쩡하니 군대 고참들 구두 닦던 실력으로 이걸 해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루게릭병 치료비까지 모아 저개발국 어린이 후원”

    김정하 목사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기 전까지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저개발국 어린이들을 도왔다.

    ▼ 막상 닦아보니 힘들지는 않으시던가요?

    “군대 있을 때 제가 고참 워커를 진짜 잘 닦았거든요. 아프기 전에는 제 구두도 늘 직접 닦아 신어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손님이 많지 않았어요. 우리 교회 앞길이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보니 구두 신은 사람이 드물어요. 행인들이 다 등산화를 신고 있고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홍보전단지를 돌린 겁니다. 그러면서 고마운 분을 많이 만났습니다. 1만 원을 내고 거스름돈은 후원금으로 쓰라며 안 받는 분도 계셨고, 후원금을 보태주기 위해 일부러 구두 닦으러 오시는 분도 많았습니다.”

    ▼ 수익은 좀 남았습니까.

    “초기 투자비용이 2만 원밖에 안 들었거든요. 구두 닦는 동안 손님이 신을 슬리퍼와 제가 쓸 팔토시, 구두솔과 약을 산 비용이지요. 그 투자가 밑천이 돼서 지금 8명의 아이를 후원하고 있으니 엄청난 열매를 맺은 거 아닙니까. 지금도 먼 나라에서 그 열매들이 커가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 목사님 또한 어려운 형편인데,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이유는 뭡니까?

    “어릴 때 홀로 외롭게 자라서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갖고 싶었어요. 우리 부부에게 두 아이가 있지만 입양을 통해 아이 세 명을 더 키우고 싶었지요. 입양 기관에 전화해서 입양 의사를 밝혔더니 집 규모, 월 고정수입, 자산 같은 경제적인 부분과 양육 환경을 꼼꼼히 따지더군요. 결국 우리 형편이 안 돼 입양 자격을 얻을 수 없었고요. 그냥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기르면 될 줄 알았는데 실망이 컸습니다. 그때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NGO를 알게 된 거죠. 우리가 보내는 후원금으로 아이가 학교도 다니게 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되니 우리가 양육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 아이를 입양해 직접 키우는 것과 달리 곁에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데 아쉽지는 않은가요.

    “아이들이 자기 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며 그 나라의 환경과 문화에 맞게 성장하는 게 좋으니까 아쉽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8명의 아이를 교회 이름으로 후원하고 있는데 모두 사는 나라가 달라요. 가까운 곳은 1년에 서너 차례, 먼 곳은 1년에 두 차례 정도 편지로 왕래하지요.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받아보기도 합니다. 그걸 보면 뿌듯하고 대견한 느낌이 들고요.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아이들은 염소가 새끼를 낳았다, 엄마가 동생을 낳았다 같은 소소한 얘기를 편지에 적어 보냅니다. 저는 답장에 ‘너는 뭐가 됐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항상 아이의 미래 모습을 그리며 기도하는 내용을 담지요. 또 지금 한국의 계절은 어떻고, 추석 명절에는 뭘 한다는 식으로 한국 문화를 알려주려고 애를 써요.”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나요?

    “하나하나 다 소중해요. 콜롬비아의 사리크는 아주 예쁘게 생겨서 나중에 ‘미스 콜롬비아’가 되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케냐의 에릭은 지도자로 성장하길, 조엘은 장군, 제나보우는 법관이 되기를 바라지요. 사진으로 아이들 얼굴을 보면 떠오르는 느낌이 있는데 거기에 제 희망을 담아서 항상 ‘너는 뭐가 될 거야’라고 말해주지요.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기도입니다.”

    김 목사는 아이들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아내 최 씨를 재촉해 사진을 가져오게 했다. 최 씨가 아이들 사진 8장을 탁자에 펼쳐놓자 김 목사의 눈빛이 반짝하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사진 하나하나를 일일이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랑에 열을 올리는 그의 얼굴에는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중 사리크와 에릭은 차인표 씨가 김 목사를 위해 현지에 직접 가서 동영상을 찍어오기도 했다. 김 목사는 “차 집사가 동영상을 들고 우리 교회로 와서 함께 봤다. 화면에 비친 아이들 모습이 반갑고, 우리 부부를 위해 고생을 마다않고 먼 곳까지 다녀와준 차 집사 마음이 고마워서 동영상을 보는 내내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동영상을 본 뒤 흙벽 위에 함석지붕을 얹어놓은 에릭의 낡은 학교가 눈에 밟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보수공사비로 보냈다고 했다. 차 씨와 주위 사람들이 약값에 보태라며 내놓은 돈을 쓰지 않고 모아뒀던 것이다.

    8번째 삶의 고비

    ▼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은 언제 받았습니까?

    “2010년 10월에 받았어요. 처음엔 어깨가 아파서 오십견인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추 채우기와 젓가락질이 힘들어지고, 걸을 때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약간 끌리는 느낌이 들었지요. 병원에 갔더니 경추가 파열됐다고 하더군요. 그때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후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거예요.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받았을 때, 의사가 차트에 ‘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라고 쓰는 걸 봤습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이라고 나오더군요. 일명 루게릭병이요. 의사는 뇌 MRI 검사 결과 종양이 있으면 그것 때문일 수 있으니 좀 기다려보자고 합디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리 부부는 제발 뇌에 종양이 있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검사 결과 뇌는 깨끗하더군요.”

    “루게릭병 치료비까지 모아 저개발국 어린이 후원”

    김정하 목사와 ‘컴패션’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운데 양복 입은 남자가 김 목사.

    ▼ 루게릭병은 원래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진단받은 지 2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벌써 언어장애가 생겼으면, 진행 속도가 좀 빠른 거 아닌가요?

    “사람에 따라 다른데 제 경우에는 진행이 좀 빠른 편이에요.”

    ▼ 몸이 불편해지셨는데 후원금을 벌기 위해 하던 구두닦이 일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추수술 후에는 딱 한 달만 쉬고 다시 구두솔을 잡았습니다. 그러다 여섯 달 만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지요. 그때부터는 저를 대신해 아내가 구두를 닦았습니다. 유일한 제자이자 후계자라고 치켜세웠는데 제가 움직이기 힘들어지면서 저를 수발하느라 아내도 결국은 그만두게 됐어요.”

    ▼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 8명을 후원하고 계시지 않나요.

    “원래 아내가 간호사였어요. 그런데 제가 수술한 뒤 병원을 그만뒀지요. 구두닦이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고요. 그때 ‘이제 후원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중단할 수는 없잖아요. 특히 ‘리켄샤’라는 동인도 아이만큼은 계속 돕고 싶어 잠실에 사는 한 집사님과 연결해드렸지요. 이후 그런 식으로 다른 아이도 후원할 분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교회 인터넷 카페에 자초지종을 담은 사연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둘 후원자가 나타나더군요. 예전에 늘 제가 구두를 닦아드리던 단골손님이 한 아이를 후원해주겠다고 나섰고, 매달 1만~2만 원씩 후원금을 보내주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모아준 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8명의 아이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교회 이름으로 후원하고 있어요.”

    ▼ 갑작스러운 병마에 충격과 두려움도 크셨지요.

    “의외로 괜찮습니다. 그동안 제가 죽을 고비를 7번 넘겼거든요. 이번이 8번째입니다.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요. 오히려 건강할 때는 몰랐던 사소한 것까지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삽니다. 숨 쉬는 것도, 아직까지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모두 감사해요.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지 않습니까. 내일 일을 모르고요. 그에 비하면 저는 언제쯤 죽을지 알 수 있으니까, 제게 남은 3~5년 동안 삶을 잘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살아 있음의 기적

    ▼ 죽을 고비를 7번 넘겼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제 고향이 강원도 삼척이에요. 일곱 살 때 바다에 빠져 처음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그 뒤에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 번 죽음의 문턱을 오갔고, 중학생 때 전기를 잘못 만져 감전사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폐결핵을 앓았어요. 1995년 태풍 재니스가 왔을 때 교통사고도 당했고요. 가족과 함께 강원도 강릉 처가와 삼척 본가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는데 엄청나게 큰 나무가 쓰러져 차를 덮쳤습니다. 앞 범퍼가 완전히 망가졌고, 1초만 빨리 갔다면 차체가 그대로 깔릴 뻔한 상황이었어요.”

    김 목사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부모의 이혼으로 갓난아기 때 조부모의 손에 맡겨진 그는 고1 때 고향에서 경북 상주로 가출을 감행했다. 재혼해 그곳에 살고 있는 어머니 소개로 양복점에 취직한 이후 공장노동자, 커튼가게 기사, 건설현장 막노동꾼, 선원, 외판원, 리어카 노점상 등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사회를 배워나간 김 목사는 뒤늦게 고교에 진학해 9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고, 다시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해 8년 만에 졸업했다. 결혼 후 목회자의 꿈을 품고 2년제 야간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40대 나이로 서울장신대 신학과에 편입, 대학원까지 마쳤다.

    ▼ 가출은 왜 했나요?

    “중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소외감을 많이 느꼈거든요. 늘 외로웠고요. 중학교만 졸업한 뒤 일찍 성공하려고 가출했습니다. 그 뒤로 안 해본 일이 없어서 폐지 주워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가난한 사람들 속사정을 잘 압니다.”

    ▼ 마흔이 넘어 신학대에 진학했는데, 어떻게 목회자가 될 생각을 하셨습니까?

    “원래는 무신론자였어요. 결혼 후 아내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게 좋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요. 그러다보니 신학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그때까지는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외환위기 때 서울에서 하던 유통 사업이 망했습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계속 막다른 길로 몰리면서 ‘내 갈 길은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업을 정리하고 삼척으로 내려가 산 밑에 오두막을 짓고 5년간 생활하면서 신학공부를 했지요. 그 후 이곳 성남으로 옮겨왔고요. 대학원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건 2011년 가을입니다.”

    ▼ 고향을 등진 지 20여 년 만에 사업이 망한 채 귀향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요.

    “제가 기억하는 고향 풍경은 매일 사람들이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싸우고 노름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데서 안 산다고 떠났는데 몸도 마음도 지쳐서 다시 돌아가게 된 거죠. 그나마 그곳에 할아버지가 남긴 땅이 좀 있었어요. 우리 수중에는 2000만 원이 전부였고요. 폐자재를 구해 인가라고는 전혀 없는 산 밑에 오두막을 짓고 근처 군부대에서 잔반을 얻어 개, 닭 같은 가축을 길렀습니다. 그걸로는 생활비 충당이 안 돼 스쿨버스를 개조해 간이휴게점인 버스 카페도 해보고 정말 갖은 고생을 했어요. 그러던 중에 강원도 동해안에 큰 산불이 나서 오두막이 있던 산을 홀랑 다 태웠는데 대피했다 돌아와 보니 기적적으로 우리 오두막만 남기고 주변이 몽땅 불에 탔더군요. 그때 감격해서 우리 가족 모두 울었습니다.”

    “루게릭병 치료비까지 모아 저개발국 어린이 후원”
    ▼ 가족들 고생이 심했을 거 같습니다.

    “아내가 둘째를 낳고 얼마 안 돼 이혼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어한 적이 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다보니 아버지가 되는 법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지만 반면교사로 삼을 대상조차 없다보니 아이 양육에 서툴렀지요. 맘대로 안 되면 화나 짜증을 전부 아내한테 쏟아 부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결혼반지를 녹여 십자가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참아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라고 하고선 아버지학교를 두 번 다녔습니다. 그때가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위기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밥 먹는 일부터 화장실 뒤처리까지 아내 최 씨가 없으면 김 목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예배는 주말 낮에만 김 목사가 직접 주관하는데 미리 노트북에 설교 내용을 담아뒀다가 스크린에 띄우는 ‘보는 설교’로 진행한다. 최 씨의 도움을 받아 강단에 선 김 목사가 알아듣기 힘든 말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스크린을 보며 이해하는 식이다. 일상생활의 수발부터 통역까지 부부가 24시간 함께 붙어 생활해온 기간이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이제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하는 듯했다. 간간이 아내의 통역이 잘못됐음을 표시하는 “아니야”라는 김 목사의 말 외에는 단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터뷰가 막힘없이 이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부부로 만나는 게 운명이라면 두 사람은 하늘이 맺어준 운명처럼 보였다. 인터뷰 이틀 뒤인 4월 5일은 부부의 결혼 25주년 기념일이었다.

    운명적인 만남

    ▼ 두 분은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1986년 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열린 방송통신대 축제 때 처음 봤어요. 아내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1년 후배였습니다. 그때 한 300~400명이 모였는데 유난히 검소하고 순수해 보이는 아내가 눈에 띄더군요. 한창 멋 부릴 20대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반지나 목걸이도 안 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도 안 칠했어요. 내가 나중에 돈을 많이 못 벌어도 괜찮겠다 싶었지요.”

    김 목사의 말이 끝나자 아내 최 씨가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축제 때 목사님이 기타 치면서 사회를 봤다. 그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기자가 “미남이라 끌린 건 아니냐”라고 묻자 최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 목사님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많았다”고 웃었다. 부부의 큰딸 고은(22) 씨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 3년생이다. 고교 졸업 때 효행상을 받은 아들 동엽(20) 씨는 올해 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다.

    ▼ 요즘 같은 시대에 한 집에 대학생이 두 명이면 핵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겠습니다.

    “다행히 두 아이 다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있어 우리 부부에게 부담은 없어요. 용돈도 아르바이트로 벌어 쓰기 때문에 딱히 돈 들 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큰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부모가 도와줘야겠지만 지금까지는 알아서 잘들 하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나중에 돈 벌면 자기들 이름으로 해외 아동을 후원하겠다니 더욱 기특하고 감사해요.”

    ▼ 김 목사님은 표정이 밝고 활달해 아픈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안고 사는 환자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어차피 현대의학으로 못 고치는 병이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합니다. 고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면 전국 병원을 돌아다니며 의사한테 매달렸을 거 아닙니까. 그럴 수 없는 처지니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리면 됩니다. 그분이 뭔가를 보여주시겠지. 그게 안될 지라도 그분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언젠가 차 집사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북한 어린이 동영상을 봤어요.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지금 교회 수양관으로 쓰는 삼척의 오두막에 공동체를 만들어 해외선교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사람들,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안식처가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김 목사는 목사 안수 때 받은 축의금과 그동안 모아온 치료비를 합쳐 1000만 원을 해외 아동 후원 NGO에 기부했다. 북한 어린이를 돕는 데 쓰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김 목사는 지난 1월 출간한 책 ‘지금 행복합니다’에 “비록 치명적인 병으로 그 꿈이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여전히 내 맑은 정신은 거울을 닦듯 내게 주신 그 귀한 꿈을 닦고 또 닦는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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