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몽상 _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343쪽, 1만7000원
우리는 때로 이유도 모르는 채 무언가에 낚이고 끌려간다. ‘매혹’이라고 해야 할 이런 사태를 블랑쇼는 “그것이 내게 와서 손을 대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손을 대는 것’ 이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쉽지 않은 것은 나를 매혹시킨 그것을 그저 따라갈 수만은 없는 경우가 외려 ‘현실’이란 이름을 얻기 때문일 게다. 수학이 내게 그랬다. 모든 공부를 지겹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입시지만, 어째서인지 수학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학력고사’를 치른 날 저녁, 서점에 가서 대학의 미적분학 책을 사들고 들어왔다. 물론 시험에 바친 시간을 향해 웃음을 날리는 통쾌함이 없었다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간 1980년대의 대학은 재미있는 것을 그저 따라가는 방식으로 살기엔 너무 무겁고 심각했다. 대학의 캠퍼스에는 유령들이 떠돌고 있었다. 전태일의 유령, 광주시민들의 유령들…. 그들의 손이 우리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 손에 이끌려 나는 뜻하지 않았던 삶으로 말려들어갔다. 그 또한 하나의 매혹이었을 것이다. 목숨마저 걸게 하는 미친 매혹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학과도, 음악과도 이별해야 했다.
그 사이에 원혼들에 시달리던 군사정권은 두 손을 들었고, 희망인 줄 알았던 사회주의는 요란한 파산의 길을 걸었다. 많은 것이 뒤집히듯 변해버린 시간 속에서, 수학은 내게 근대성, 혹은 근대적 삶에 대한 질문으로 변장한 채 되돌아왔다. 근대를 사는 우리는 잔 눈금으로 가득 찬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움직이고, 돈으로 계산되는 상품세계 속을 살며, 모든 것을 계산하려는 과학적 욕망을 진리로 믿고 살지 않는가! 이런 근대성의 밑바닥에 수학이 있었다. 이렇게 근대 수학의 역사는, 뒤로 치워두었던 매혹의 영(靈)을 다시 불러냈다. 매혹한 자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더구나 거기엔 무릅써야 할 감옥이나 죽음의 고통도 없었다.
행복하게 공부한 것이기에 행복하게 나누고 싶었고, 재미있게 공부한 것이기에 재미있게 읽도록 하고 싶었다. 심각한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격한 서술이나 정확한 ‘전달’의 언어 대신, 있지도 않은 전설을 만들고 악마와 소녀를 앞세워 심각한 수학자들을 몽상 같은 상상의 세계 속에 끌어들였다.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배웠던 것들을 섞어 넣었고, 수학적으로 작동하는 감옥에 대한 영화적 공상을 덧붙였다. 그것을 통해 엄밀한 기초와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19세기식 수학적 몽상을 다른 종류의 몽상과 섞어버리고 싶었다. 근엄한 교사의 얼굴을 때론 유쾌하고 때론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는 이웃의 얼굴로 바꾸고 싶었다. 그것을 통해 데카르트 이후의 수학사와 근대성의 관련을 나름대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수학적 내용의 요체를 빼놓지 않고 넣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지금도 다시 펼쳐보며 흐뭇해하는 건, 단순한 나르시시즘일까? 나는 아직도 그 수학의 매혹에서 헤어나지 못한 징표라고 믿고 싶다.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서울과학기술대 교수 │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_ 안경환 지음
셰익스피어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은 부녀간 법률 분쟁으로 시작된다. 여주인공 허미아에게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고른 사윗감과 결혼할 것을 요구한다. 당시 아테네 법은 아버지 동의 없이 결혼하는 딸을 사형시키거나 수도원에 종신 감금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허미아를 영주의 법정에 고발하면서 작품은 막을 올린다. 젊은 연인과 요정이 등장하는 아름다운 소극을 이처럼 법률가의 눈으로 분석하는 저자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그는 “법이 곧 몸이고 시가 되는 세상, 법 따로, 문학 따로가 아니라, 법과 문학이 하나가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라야 진정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라고 말하며 ‘햄릿’ ‘리어 왕’ ‘오셀로’ 등 셰익스피어가 남긴 희곡 13편을 통해 당대와 현대의 법률을 비교 검토한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84쪽, 1만8000원
사람이, 아프다 _ 김영미 지음
“아프가니스탄에도 사람이 있었다. 상처 받고 가슴 아픈 사연이 가득했다. 그들은 세상의 관심 밖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그늘이었다. 당장 굶어 죽어도, 총에 맞아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 세상 밑바닥에서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2년간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해온 프리랜서 PD인 저자는 이런 책임감으로 그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책에는 그 과정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계 유수 언론과 일하는 취재 전문 운전기사 알리와, 부르카를 벗어던진 아프가니스탄의 첫 여성 앵커 마리암, 이라크 저항 세력 압달라 등 쟁쟁한 인물부터 구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녀가장이면서도 틈날 때마다 공부하는 열 살 오마이라까지, 저마다 소중한 꿈을 간직한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추수밭, 336쪽, 1만3000원
천안함 정치학 _ 이정훈 지음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만든 정치목적 때문에 군사목표가 흔들려온 나라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국가목표와 국방목표, 군사목표를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인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방, 북한, 정보 등의 분야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저자는 2010년 발생한 ‘천안함 사건’을 “대한민국이 ‘북한이 무너질 것’이라는 집단사고 증후군에 빠져 있다가 허를 찔린 작은 6·25”라고 진단한다. 또 “사건 발생 후 안보를 모르는 대통령이 위기를 확대해가면서 국가 자부심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후퇴했다”고 밝힌다. 그 사례로 처절한 반성 없이 사건 내용만 나열한 ‘천안함 피침 사건 백서’ 발간과 군의 분열을 야기한 이른바 ‘국방개혁’을 든다. 부제는 ‘이명박식 보수는 왜 실패했는가’다. 글마당, 515쪽, 2만3000원
편집자가 말하는 ‘이 책은…’
명강 _ 송호근·유홍준·정재승·최재천·김지하·문정인·이덕일·도정일 지음, 블루엘리펀트, 252쪽, 1만3000원
“‘신동아’에서 김지하, 유홍준, 최재천 연속 강연회를 하나봐.”
지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 같은 출판 편집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저자의 글을 받고 그 글을 다듬으며 설렘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명사의 글은 좀처럼 받기 어렵다.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신동아’ 창간 80주년 기념 강연회라면 강연자의 명성, 내용 어느 면에서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기대로 저항시인이자 생명운동가인 김지하 선생님 강연회부터 인문학자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전 문화재청장이자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교수, 역사연구가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자연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사회학자인 송호근 서울대 교수, 정치학자인 문정인 연세대 교수, 뇌과학자 정재승 KAIST 교수의 강연 등 한 달에 한 번씩 이어지는 여덟 번의 강의를 들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명사들의 열강이었다. 강연 때마다 ‘열정이야말로 성공으로 가는 열쇠’라는 느낌을 받았다. 강연회가 끝난 후 청중의 얼굴에서 평소 느껴온 인문학적 욕망과 지적 허기를 채운 듯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나를 포함한 청중은 소모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지성의 수목원을 거닐며 폼 나게 쉬고 싶은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송호근 교수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 말하면서 “초인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교양 시민으로 변화할 것”을 요청했고, 유홍준 교수는 “명품은 장인이 만들지만 문화는 소비자가 만든다”면서 문화에 있어 우리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재승 교수는 다양한 창의적 리더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스스로 인생 지도 그리는 법을 배울 것”을 주문했다. 또 최재천 교수는 “지식의 통섭을 통해 나만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사회로 곧 돌입할 것”임을 경고했고, “살림(生)의 힘은 모심(母心)에 있고 모심(섬김)만이 우리 시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역설한 김지하 선생은 치열한 자기반성을 통해 깨달은 궁극의 화두가 모심임을 고백했다. ‘일생에 한 번은 들어야 할, 명강’은 이렇듯 2011년 5월부터 12월까지 성황리에 개최된 여덟 차례의 강연회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강연회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강연자의 말투를 그대로 살려 실었다.
이 강연회를 기획한 ‘신동아’ 조성식 차장은 ‘명강’ 에필로그에서 “당대의 대표 지성인들을 초대한 이 강연회는 대중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교양 강좌이자 우리의 정체성을 되짚어보고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성찰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시장의 요동 속에서 자신을 다잡고, 정치적 충돌 속에서 비판적 안목을 배양하고, 사회적 갈등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게 도와줄 정신의 양식이 필요한 시대. 강연회를 함께하지 못한 많은 분이 이 책을 통해 ‘삶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성찰하시기를 권한다면 편집자의 욕심일까?
홍현경│블루엘리펀트 편집자│
일침 _ 정민 지음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 저자는 “지식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간명한 통찰이 필요하다”며 현대인에게 ‘정문일침’이 될 만한 사자성어를 묶어 소개한다. 1부 ‘마음의 표정’에 등장하는 ‘남산현표(南山玄豹)’를 보자. ‘남산의 검은 표범’이라고 풀이되는 이 사자성어에는 ‘공부를 차곡차곡 쌓아야 문득 반짝이는 지혜를 갖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어린 표범의 털은 얼룩덜룩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짙고 기름진 무늬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표범은 아름다운 무늬를 위해 배고픔을 참고 견디며 태양을 멀리한다. 이런 표범의 모습을 통해 군자의 학문하는 자세를 설명하는 것이다. 주역에도 같은 뜻을 담은 ‘군자표변(君子豹變)’, 즉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사자성어가 있다. 책의 부제는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이다. 김영사, 296쪽, 1만4000원
빨리요, 송아지가 나오려고 해요 _ 데이비드 페린 지음, 박상표·조미숙 옮김
저자는 수의대를 갓 졸업한 뒤 캐나다 시골 마을에서 진료를 시작한다. 시골 수의사의 삶은 연일 모험의 연속이다. 난산에 시달리는 암소, 다리가 부러진 개, 항문 없이 태어난 아기 돼지, 기생충에 감염된 염소 등이 연이어 저자를 찾아오고, 이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초보 수의사는 점점 진짜 수의사가 돼간다. “나는 자궁의 절개 부분을 다시 2인치 정도 더 넓히고 송아지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다리가 더 보였고, 그다음 코가 보이더니, 이마, 그리고 귀가 나타났다. ‘보시오! 새끼가 살아 있소!’”처럼 저자의 체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부제는 신출내기 시골 수의사의 외양간 어드벤처. 역자 중 박상표는 서울대 수의대를 졸업한 현직 수의사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고려원북스, 439쪽, 1만2500원
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_ 강미현 엮음
철혈재상으로 불린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291편을 모아 엮은 책. 1862년 프로이센 총리에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이끈 뒤 독일제국의 첫 총리로 취임해 1890년까지 28년간 집권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제국의 창건자’라는 찬사와 ‘나치 독재의 개척자’라는 비난을 함께 받았다. 저자는 이 ‘거인’의 사적인 부분에 집중한다. “언젠가 비스마르크가 친구 샤를라흐에게 요한나와 부부로 함께한 48년의 의미를 진솔하게 얘기했다. ‘신께 감사드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독일제국을 통일한 재상으로서 맘껏 누린 영광이 아니라, 요한나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지금의 나 자신이 있게 된 것이네.’ … 숨을 거두기 직전의 짧고도 절실했던 마지막 순간에는 ‘요한나를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만을 남겼다” 등이다. 에코리브로, 288쪽, 1만3500원
저자가 말하는 ‘내 책은…’
곤충 마음 야생화 마음 _ 정부희 지음, 상상의숲, 432쪽, 4만5000원
봄이 바짝 곁에 다가왔다. 두꺼운 옷 벗어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공원길을 걷는다. 그새 봄꽃들이 피었다. 꽃샘바람 덕에 꽃들이 더 야무지고 튼튼하게 피어나 생글생글 웃는다. 보랏빛이 선명한 제비꽃, 샛노란 서양민들레꽃, 쌀 한 톨만한 노란 꽃다지꽃, 쪽빛보다 더 푸른 큰개불알풀꽃…. 참 많이도 피었다. 가던 길 멈추고 꽃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숨 고르며 찬찬히 꽃을 들여다보는데 색동옷 입은 광붙이꽃 등에, 아주 조그만 파리류, 낯익은 꿀벌, 네발나비도 날아온다. 다들 꽃이 푸짐하게 차려놓은 꽃 밥상에 들락날락거리며 맛있게 식사를 한다. 한참을 녀석들의 몸짓을 구경하다보니 발이 저려 아예 땅에 앉아버린다.
이렇게 야생화와 곤충과 자연에 빠져 살아온 세월이 20년이 다 되어간다. 서른 살 무렵, 조상의 숨결이 깃든 우리 유물을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만난 야생화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야생화는 피었던 자리에서 또 피고 지니, 해마다 그 자리에 가고 또 가면서 야생화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야생화에 날아온 곤충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마다 개성 있게 생겨 마치 외계인을 만난 듯했다. 곤충 몸이 어찌나 세밀하게 디자인돼 있는지, 얼마나 예쁘게 치장했는지 볼수록 묘했다. 그 후로 야생화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곤충을 찾게 되고, 어느새 야생화와 곤충 그리고 나와의 삼각 동행이 시작됐다. 내친김에 불혹의 나이에 낯선 곤충학도의 길에 들어섰다. 인생 여정에서 보면 굉장히 큰 방향전환이었다.
정식으로 곤충을 연구하면서 소원이 생겼다. ‘바늘과 실’같은 곤충과 야생화의 열정적인 대화를 사람의 말로 통역하고 싶었다. 야생화와 곤충을 한 식탁에 올리기까지 굉장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진정한 통섭의 문제니까. 그렇게 탄생한 책이 ‘곤충 마음 야생화 마음’이다.
‘꽃과 곤충’ 하면 사람들은 서로 돕는 관계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론 그렇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꽃과 곤충의 생각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꽃은 오로지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해 꽃 밥상을 차려 놓고, 곤충은 오로지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꽃 밥상을 찾는다. 곤충이 굶주린 배를 채우느라 이 꽃 저 꽃 찾아다니는 와중에 정말 우연히도 꽃을 중매하게 된다. 물론 식물 중에는 바람이 불기만을 바라는 풍매화도 있다. 서양민들레처럼 바람의 도움도, 중매 곤충의 도움도 정중히 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복제해 대를 이어가는 꽃도 있다.
봄이다. 잠시라도 틈을 내 들길이나 산길을 걸어보자. 길옆에 피어난 수많은 야생화, 그 야생화를 찾아와 열심히 식사하는 곤충들과 눈 마주치며 놀다보면 문득 여기가 무릉도원이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깃들어 사는 뭇 생명의 합창소리에 한순간이라도 묻혀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부희│곤충학자│
E.H. 카 평전 _ 조너선 해슬럼 지음, 박원용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저명 역사학자이면서 동시에 외교관, 언론인, 정치학자였던 E.H. 카의 삶을 다룬 평전. 영국 케임브리지대 역사학부 교수인 저자는 카의 저작과 논문, 비망록과 육필 기록뿐 아니라 언론에 기고한 칼럼과 평론까지 꼼꼼히 분석해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 책에 따르면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카는 자유주의 풍토에서 자라났지만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계획경제를 주장했고, 외교관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들이 주도하던 국제연맹을 비판하며 소수민족과 신생국을 옹호했다. 당시 영국 정부의 준기관지였던 ‘타임스’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의 반소비에트 정책을 비판했다. 록펠러재단의 기금을 받아 연구하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조롱하기도 했다. 책의 부제는 ‘사회적 통념을 거부한 역사가’다. 삼천리, 640쪽, 3만5000원
인디언 마을 공화국 _ 여치헌 지음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인 저자는 세계 곳곳의 토착민 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 책에서 그는 독자를 향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땅을 빼앗은 논리는 무엇인가?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왜 국가를 만들어 대항하지 않았을까? 강제 이주 이후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중 책 제목과 연결되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왜 국가를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그들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권력의 탄생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보다 오래된 인디언 사회를 분석하고, 그들이 현재 미국에서 연방 주권과 대등한 영향력을 지닌 부족 주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소개하며 ‘인디언은 멸망하지 않았다’고 밝히는 저자의 시각이 신선하다. 휴머니스트, 311쪽, 1만6000원
감정의 자유 _ 주디스 올로프 지음, 이유경 옮김
‘부정적 감정에서 해방되어 인생을 바꾸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정신과 의사이자 미국 UCLA 임상교수인 저자는 “모든 감정은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운동하느냐만큼이나 분명하게 우리의 건강을 형성하는 생물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바꾸면 생물학적 반응도 바뀐다. … 감정이 육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삶을 바꾸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의 자유는 사랑을 더 많이 주고받는 능력이다. 그는 독자가 현재 어느 정도로 감정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평가하는 자가 테스트 문항을 소개하고, 두려움에 맞서고 용기 키우기, 좌절감과 실망에 맞서고 인내심 키우기, 외로움에 맞서고 관계 키우기 등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소개한다. 물푸레, 288쪽, 1만9800원
저자가 말하는 ‘내 책은…’
이상 문학의 비밀 13 _ 권영민 지음, 민음사, 672쪽, 2만8000원
이상의 삶과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상 문학의 비밀 13’은 이 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상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가 남겨놓은 문학 작품의 양보다 훨씬 많은 주석이 붙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그가 살았던 짧은 삶보다 훨씬 이채로운 해설이 따라붙는다. 그는 희대의 천재가 되기도 하고, 전위적인 실험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그가 철저하게 19세기를 거부한 반전통주의자였다고 지목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문학이 1920년대 이후 일본에서 일어났던 신감각파 시 운동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평가 절하한 사람도 있다.
한국 현대문학 연구가 학문적인 성격을 갖춘 이후 가장 많은 연구자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며, 해마다 수많은 평문과 연구 논문이 이상 문학을 위해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새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상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둘러싼 문화적 조건에 일찍 눈을 떴던 천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꾸면서 현대미술의 변화와 그 미학적 변주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동안 현대 기술 문명을 주도해온 물리학과 기하학 등에 관한 수준 높은 지식을 터득했다. 새로운 예술 형태로 주목되기 시작한 영화에도 유별난 취미를 키웠다. 그 결과 이상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바로 그것이 그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물의 외관의 무의미성을 강조하면서 상상력의 하부 구조를 열어갈 수 있는 비밀의 통로를 그의 문학 속에 감추어놓았다. 구속이 없는 자유와 상상력의 해방을 요구하는 그의 문학은 한국 문단에 여전히 하나의 충격으로 남아 있으며,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일탈이 되었다.
이상의 문학이 보여주는 전위성은 보기 드문 일탈된 방식이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자기 논리를 지닌다. 이상은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와 기법의 변화를 통해 일상적인 규범에 얽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성과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물의 현상과 본질의 대립에 대해 깊이 고뇌했으며,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를 끈질기게 질문하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러므로 그의 개인적인 행적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는 오히려 과장되거나 신비화되고 있다. 특히 그의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 편력, 결핵과 도쿄(東京)에서의 죽음 등은 모두 일종의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상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되어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 문학의 비밀 13’은 이상의 삶과 그 문학에 관한 열세 가지의 질문을 통해 명확한 사실 규명을 바탕으로 문학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권영민│단국대 석좌교수│
지하디스트의 여정 _ 파와즈 게르게스 지음, 장지향·신지현 옮김
지하드(jihad)는 아랍어로 열심, 노력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이슬람교 전파를 위해 벌이는 이교도와의 전쟁, 이른바 성전(聖戰)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이자 중동연구센터 소장인 저자는 ‘지하드’에 복무하는 이슬람 전사, 지하디스트들을 만나 인터뷰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는 싸움에 뛰어들었는지 소개한다. 동시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자살테러 등을 교리화한 지하디스트는 반이슬람적 테러집단이라는 또 다른 무슬림의 목소리도 담아낸다. 저자에 따르면 지하디스트는 단일한 이념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전사가 아니며, 상황이 만들어낸 기형적 존재다. 미국과 서구가 이슬람의 본질을 이해하고, 대화와 공존을 추구할 경우 이들은 곧 사라진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산정책연구원, 294쪽, 1만3000원
개를 춤추게 하는 클리커 트레이닝 _ 카렌 프라이어 지음, 김소희 옮김
미국 코넬대에서 동물학과 행동생물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물 훈련 전문가다. 그가 개발한 ‘클리커 트레이닝’은 동물의 바람직한 행동을 포착해 표시하고 보상해주는 훈련 방식. 동물의 행동을 표시하기 위해 ‘클릭’ 소리를 내는 ‘클리커’라는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클리커 트레이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저자에 따르면 개의 목줄을 잡아채거나 거칠게 다루는 훈련법에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좀 아플 거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반면 클리커 트레이닝은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 칭찬해줄게”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개는 이 훈련의 의미를 이해하고 ‘클릭’ 소리를 듣기 위해 자발적으로 ‘좋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개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앉아, 엎드려, 기다려 등의 말뜻을 가르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페티앙북스, 184쪽, 1만5000원
생각에 관한 생각 _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저자는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로, 심리학자로는 사상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행하는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설명한 그의 ‘전망이론’은 ‘심리학과 경제학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과 통섭을 통해 새로운 학문-행동경제학을 창시한 혁신적인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이 이론을 설명한 이 책에서 인간의 생각을 크게 두가지로 설명한다. 직관을 뜻하는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다. 갑자기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프랑스의 수도’를 떠올리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정신활동이 전자라면, 354×687의 정답처럼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을 심사숙고하는, 노력하는 사고방식이 후자다. 부제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이다. 김영사, 556쪽,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