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경험과 과거에 대한 유력한 전달방식인 기록과 기억을 통해 구성되는 역사는 층층의 한계를 지닌다. 왜곡의 가능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벽이면서 시작을 의미하는 아포리아처럼 역사학은 그 한계와 왜곡을 하나씩 닦고 벗겨내면서 진실에 가까이 가는 학문이다.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지만 그 작업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 어떤가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영화 ‘메멘토’에서 범인을 추적하며 잊지 않기 위해 몸에 정보를 새겨 넣은 레너드.
그러면 우리 삶을 만든 것이 기억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억 없는 삶은 삶도 아니다.……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일관성이요, 이유요, 감정이며, 심지어 행동이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숙제를 내드리겠다. 이 글을 읽을 독자 대부분은 이제 숙제라는 쇠사슬에서 벗어나 있을 터, 그러니 이제는 숙제의 아스라한 추억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그런대로 운치 있지 않을까? 억울해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이 숙제, 필자에게도 해당된다.
자신이 겪었던 일 하나를 떠올리자. 오래전의 일도 좋고, 최근의 일도 좋다. 자신과 상관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하다. 사실이 분명하고, 증거가 있으면 더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과 기뻤던 일, 사회생활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 혹은 어떤 이의 숭고한 삶에 대한 회상도 좋다. 기억할 만한 어떤 사건을 A4용지에 적어보자. 절반도 좋고 다 채워도 좋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시 그 사건을 회상해 마찬가지 방법으로 적어보자. 이 연재가 한 달에 한 번 있으니까, 한 달을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침에 적었으면 저녁에 다시 적어보아도 되고, 하루 뒤, 일주일 뒤, 모두 상관없다. 여기가 끝이다. 숙제 참 쉽다. 이제 먼저 쓴 글과 다음에 쓴 글을 비교해보는 일이 남았다. 이건 한 달 뒤에 하자. 오늘은 그 비교를 위해 몇 가지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자.
냉소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게 마련이고, 따라서 승자의 관점에서 왜곡되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이 말은 역사 또는 역사 기록의 한계를 언명하는 가장 소박한 형태의 냉소(冷笑)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동의하는 걸 보면 이 말에 뭔가 일리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이,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가 승패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보면, 나는 삼시 세끼 먹고 월급 타고, 학생들 가르치다가 혼내기도 하고 혼내고는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아침에 연구실에 나가 자료 보고 새로운 문제는 노트도 했다. 점심때면 늘 그렇듯 학교식당이나 주변 식당에서 동료들과 즐겁게 또는 밋밋하게 식사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생일 턱을 낸 동료도 있었다. 학교, 사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글도 쓰고 평론도 했다. 이렇게 나의 시간은 흘러갔고, 앞으로도 대개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직장 다니는 많은 분이 필자와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승패의 삶이 없지는 않다. 승진을 승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구는 몇 평 아파트, 얼마짜리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것을 인생의 패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업하는 분들 중에는 경쟁사를 물리치고 사업을 수주하거나, 4·11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처럼 그 결과에 따라 ‘당락=승패’가 엇갈린 정치인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상에 보이는 쿠데타와 혁명, 반정(反正)도 그런 승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너와 나의 인생에서 승패가 그리 많지 않듯, 사회나 나라에서도 승패는 그리 많지 않다. 대한민국에는 승패가 갈리는 선거가 이어지지만, 매년 예산이 짜이고 그에 따라 세입과 지출이 이루어지고, 국민은 그 틀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오히려 승패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개 하루하루의 축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내다보니 나타나는 호들갑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경우가 꽤 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 중 해당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명제다.
또한 승패가 나뉘는 경우에라도 그 사건 자체의 세팅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 사건에 대한 관찰이나 기록이 승자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승패가 나뉘는 사안 또는 사건이라는 사실과, 그 승패가 승자의 손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승패가 갈리는 그 사실을 승자만 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견해가 옳다면, 우리가 역사의 패자에게 보내는 그 많은 관심은 어디서 온 것이라는 말인가?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견해조차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관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승패가 나뉘고 그것이 기록될지라도 역사가 승자의 눈으로만 기록되지는 않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격언이 정녕 맞는 데가 있다면, 아마 역사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승패로 나뉘는 세상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평범한 진실에 더하여, 승패가 있다는 사실과 승패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평범한 이치에 더해, 이쯤에서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관점이 갖는 함정 하나를 지적하고 가야겠다. 이 견해에는 무엇보다도 일부에 대한 진실로 전체를 덮어버리는 지적 게으름이 숨어 있다. 원래 게으름은 모든 냉소의 공통된 속성이라서 이상할 것은 없지만, 적당한 전문성과 함께 이 냉소가 찾아올 경우 소심한 비전문가들은 포섭되거나 타협하고 말기 때문에 짚어두고 싶다. 털고 가자.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 그런 거 없다!
메멘토
그런 거는 없지만 이런 거는 있다. 기억, 또는 기록과 관련된 합리적 의심 말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인 2001년 작 ‘메멘토(memento)’는 이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메멘토에서 놀란 감독은 기억의 진실성에 대한 질문을 영화화했고, 이어 ‘인셉션(Inception)’에서 기억의 층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영화화했다. 먼저 나온 메멘토가 놀란 감독의 출발점이다.
못 본 분들을 위한 내용 정리. 보험 수사관이던 레너드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다.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인슐린을 과다 주사해 죽게 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범인 존 G를 추격한다. 그는 10분이 지나면 기억을 상실한다. 안타까운 주인공을 둘러싸고 조작과 진실이 교차한다. 저급한 기억 능력을 가진 필자의 처지에서는 심상히 보아 넘길 주제가 아니었다.
주인공은 10분으로 제한된 기억을 연장시키려고 자신의 신체 거의 모든 부분을 메모장으로 이용한다. 손등, 팔뚝, 배, 허벅지 등 곳곳에 필사적으로 기록작업(Documentation)을 한다. 그러나 제한된 신체와 시간 속에서 이뤄지는 경험과의 싸움은 사실 무모한 일이다. 그 틈을 비집고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진실을 새겨놓은 손등, 팔뚝, 배, 허벅지 등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고(史庫), 지금 국가기록원, 각 기업이나 방송국의 아카이브(Archives), 그리고 우리의 일기장과 같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는 약간 다른 나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원래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대화법을 통하여 문제를 탐구하는 도중에 부딪치게 되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고 정의하고, 또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이 된다”고도 했다. 흥미롭다. 풀기 어려운 문제이자 막다른 골목인데,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
아포리아
역사의 대상이 되는 과거를 재현(再現)할 수 없다는 데서 역사학의 아포리아는 시작된다. 재현, 말 그대로 다시 보여준다는 뜻이다. 사진으로 남기든, 기록으로 남기든, 과거는 성글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림인 셈이다. 실제로 CCTV를 설치해놓아도 필자의 역사학개론 강의시간 1시간조차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 이 아포리아 때문에 좌절과 냉소를 오고갔던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1950년 라쇼몬(羅生門)이라는 영화에서 묘사해주었듯, 같은 사건을 놓고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얘기한다. 원래 금석물어(今昔物語, 즉 옛날이야기)의 한 스토리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줄거리는 이렇다. 어떤 무사가 예쁜 아내를 말에 태우고 산길을 가고 있는데 산적을 만났다. 산적은 이들을 유인해 무사를 나무에 묶어놓고, 무사의 아내를 강간했다. 그리고 무사는 살해됐다. 무슨 다른 관점이 가능하겠나 싶을 정도로 단순한 사건이다. 이 소설을 놓고 구로자와 감독은 같은 사건에 대한 네 대목의 영화를 완성했다. 무사, 무사의 아내, 산적의 관점으로 본다는 원작에, 이 장면을 숨어 보던 나무꾼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네 사람이 각각 하나의 사건에 대해 진술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다 진술이 달랐다. 산적 다조마루는 무사의 아내를 강간한 뒤 떠나려고 했는데 무사의 아내가 붙잡으며 내 몸을 버려놓았으니 너 아니면 내 남편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울부짖어서 할 수 없이 결투를 하다가 무사를 죽였다고 했다. 무사의 아내 마사고는 강간을 당한 뒤 남편의 눈에서 느낀 경멸감에 말다툼을 하던 중 남편을 단검으로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나무꾼이나 죽은 무사의 영혼 역시 진술이 달랐다. 구로자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리가 객관적 진실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라쇼몬의 영화사적 의미나 해석은 더 진행하지 말자. 필자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이 정도의 문제제기만으로도 우리 주제와 관련해 할 말은 넘쳐나니까.
여기서 필자는, 역시 ‘각기 보기 나름이야’라는 식으로 객관적 진실에 대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가지론으로 빠질지도 모르는 아포리아를 붙잡고, 거기서 출발점을 삼은, 이 아포리아를 아포리아답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우리는 역사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억할 만한 경험이자 그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기억할 만한 경험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단순한 정보일 수도 있다. 역사는 시간의 학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서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하든 못하든, 수업시간에 졸든 말든, 역사는 세상 모든 존재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사의 아포리아는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적 규정성에서 시작된다.
정부 각 부처에서 이관한 공공기록을 보존하는 국가기록원, 나라의 기억을 보관하는 곳이다.
모든 존재는 변한다. 돌이킬 수가 없다. 인생이 스물, 서른 …… 일흔, 이렇게 가다가 죽듯이, 세상도 흥망성쇠를 겪듯, 그렇게 변한다. 내가 스무 살의 그날로 돌아갈 수 없듯, 내가 태어나 자란 성환 홍경리는 어린 시절 그때로 돌아갈 수도, 조선시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정착하시던 그때의 홍경리로 돌아갈 수가 없다. 고려시대 수백 명의 승려가 살던 홍경사(弘慶寺)가 있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역사가 재현이 불가능한 이유는 우선 여기에 있다. 누가 지나간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과거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역사의 아포리아는 인생의 아포리아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재현의 수단이 시원치 않다는 점도 문제였다. 있다고 해보아야 붓이었다. 그나마 나아진 것이 사진, 녹음이다. 여전히 도도히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니 부족하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수단밖에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안도해야 할지, 더 좌절해야 할지 모르겠다. 과학은 우리의 기억이 안정적이지 않은 이유를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이 ‘기억난다’고 말한다. ‘그래, 우리 전에 만났었지?’ 하며 기억을 떠올린다. 이 떠올림이 문제다. 이 떠올림이 창고에 있던 물건을 꺼내오듯이, 머릿속 어딘가에 있던 기억을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뭔가 기억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그것을 테이프 돌리듯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은 그때그때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좀 더 알아보자.
기억
우리가 말하는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기억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단기기억이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라는 말로 불린다. 언뜻 단기기억은 컴퓨터를 사용할 때 메모리라고 부르는 RAM(Random Access Memory)처럼 이해되고, 장기기억은 중앙처리장치, CPU(Central Processing Unit)에 해당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면 될 듯하면서도, 안 된다. 무슨 말인가?
컴퓨터의 메모리는 컴퓨터를 켜고 문서든 그래픽이든 작업을 할 때 중앙처리장치에서 불러오는 것이다. 즉 뭔가 CPU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다른 사이버 공간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은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먼저 단기기억. 오른쪽 그림을 보면서 이해하자. 기억할 무엇이 충격이라는 형태로 주어지면, 우리 뇌는 중간뉴런을 활성화해 화학적 전달자인 세로토닌을 시냅스(신경전달부위)로 방출하게 만든다. 세로토닌이 시냅스 틈새를 건너 감각뉴런(신경세포)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하고 이로 인해 환상(環狀) AMP가 생산된다. 환상 AMP는 단백질 키나아제A를 자유롭게 만들고 이것이 운동뉴런으로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의 방출을 촉진한다. 이런 단기기억의 작용은 ‘시냅스를 강화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한편 장기기억은 단순히 단기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둘 사이에 해부학적 차이가 있다. 흔히 여러 번 복습하면 그 반복학습을 통해 학습효과가 높아진다고 말하듯이, 기억이 반복되면 단백질 키나아제A가 핵으로 이동해 감각뉴런의 유전자를 발현시키고, 새로운 시냅스의 성장을 가져온다. 이것이 단기기억의 작용으로 설명했던 ‘시냅스를 강화한다’는 것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은 서로 다른 메커니즘 속에서 형성된다.
이를 연구하는 분자생물학자들도 ‘기억 저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필자는 그 ‘저장’ 자체가 ‘단백질 합성’이라는 점에서, 창고 물건을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서 물건을 재구성해서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니, 심지어 창고조차 계속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기억 저장이라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은 생물학적으로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이 같은 사건에 대해서조차 사람마다 다른 데 대해 죄의식 같은 거 가질 이유가 없다. 한 사람의 기억도 언제나 다르게 재생되는데, 각기 다른 개체들끼리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기억 메커니즘의 진화가 그렇게 이루어졌던 걸 어쩌겠는가? 이제 시간 속에 덧없는 존재의 근원적 규정성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우리 머릿속의 기억마저 고정된 기억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위에 과거에 대한 재현의 자료인 기록마저 언제나 부족하고, 나아가 선입관, 고정관념, 이해가 엇갈리면서 우리의 기억은 또 굴절을 겪는다.
기억을 고정시킨 자료, 즉 과거를 재현할 기록이 부족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자연적 원인과 인위적 원인이 그것이다. 먼저 자연적 원인.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국가기록원에 근무할 때 한 지방자체단체에서 침수(沈水)된 기록물의 복원에 대한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침수는 전통적으로 기록에 대한 가장 자연적 위협이었다. 특히 종이는 일단 물을 먹으면 떡이 되다시피 해서 복원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수난
하지만 언제나 문명의 흥망이 그렇듯, 자연적인 이유보다는 인위적인 이유가 기록의 생명에는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밟고 사는 지구도 그렇듯 문명도 인간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무엇이 위협일까? 인간 자체가 위협이다.
조선시대에 실록을 편찬했다는 사실은 다 아는 일이다. 앞으로 우리가 다루게 될 내용이나 주제도 실록의 도움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록의 생존은 기록에 대한 인위적인 위협에 관해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모여 사는 인간 자체가 위협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인간이 벌이는 전쟁이라는 위협이다.
처음에 한 질을 간행했던 실록은 손실의 위험 때문에 여러 질을 간행하게 되는데,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네 군데의 사고(史庫)였다. 한양 궁궐 안에 있는 춘추관(春秋館)을 비롯해 충주(忠州), 전주(全州), 성주(星州) 사고가 그것이었다. 양성지(梁誠之) 같은 사람은 사고가 관청과 붙어 있어서 화재가 염려될 뿐 아니라 또 나중에 외구(外寇)의 침탈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불행하게도 이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중종 33년 11월 성주사고에 불이 났다. 사고가 관청 옆에 있었다는 것은 읍치(邑治) 지역에 있었다는 말인데, 요즘으로 치면 면사무소나 군사무소 옆에 두었다는 의미다. 아마 관리가 편해서 그리했던 듯한데, 결과적으로 인재(人災)를 피할 수 없었던 셈이다.
선조 25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란을 떠났다. 그 무렵 무력한 조정을 비판하듯 궁궐과 관청에 불이 났다. 조선시대 연구자들은 누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남은 사료가 현격히 차이가 나는 데 놀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어림잡아 이전 사료는 실록 빼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 어디 갔을까? 누군가 가져가고 탔을 터이다. 전쟁은 종종 광기를 불로 보여주니까.
전쟁 때 사라진 기록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6·25전쟁 당시 남한과 북한의 종이쪽지에 쓰인 기록이란 기록은 미군이 자루에 쓸어 담아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한국 학자들은 지금도 현대사를 연구하려면 미국 국립기록청(NARA)으로 가야 한다. 미군은 전쟁 수행 중에도 점령지에서는 맨 먼저 기록부터 주워 담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록들은 십핑넘버(선적번호)가 매겨진 채로 NARA 수장고에 처박혀 있다. 그 시간만큼 한국 현대사는 구멍이 뚫려 있다.
악의
선입관, 고정관념, 이해가 낳는 왜곡의 가능성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은 마쳐야겠다. 역사에서 의도를 찾는 것처럼 어려운 대목은 없다. 여기에서 프랑스 역사수정주의(revisional historicism)가 보여주는 의도적 왜곡은 그 좋은 예다. 일단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나치의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학살)’가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증언, 자료는 위조이며, ‘독가스실’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논법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과 논법들이 점차 팔레스티나 문제를 덮어 감추는 방향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은폐는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쯤 되면 어디에선가 좀 본 듯한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위안부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형편과 통하는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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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치지 말자. 과연 이런 ‘수정주의’는 정당한 역사학과 관계가 없는 것일까? 단지 왜곡일까? 그렇지 않다. 은폐의 논리, 왜곡의 논리는 역사학의 논리로 비판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역사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바로 사건이 일어났음을 출발점으로 삼는 역사학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 역사기록을 통해 구성되는 역사는 이렇듯 층층이 한계를 지니며 왜곡의 가능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한계와 왜곡을 하나씩 닦고 벗겨내어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공자의 오랜 격언처럼, 서두르면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도달할 수 있다. 어떤가, 해볼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