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향한 꿈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⑤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ahnkw@snu.ac.kr

    입력2012-04-20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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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속 토막 살해 사건의 주범이 된 고교 동창
    • 서울대 법대 최초의 전맹(全盲) 장애인
    • 휠체어 타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돌진한 장애인단체 활동가
    •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과의 전쟁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향한 꿈

    2005년 3월 ‘장애인 차별철폐 공동투쟁단’ 소속 장애인들이 장애인 인권 보호를 요구하며 인권위 사무실을 점거한 모습. 인권위 사무실에서는 장애인 단체의 점거 농성이 수차 벌어졌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다루는 진정사건은 업무 분류상 ‘침해’와 ‘차별’로 나뉜다. 전자는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유린이 대상이다. 대한민국 국민 또는 대한민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제기할 수 있다. 피해자 본인뿐 아니라 제3자도 피해자를 위해 진정할 수 있다. 전체 사건의 80%가 모종의 침해사건이다. 차별의 경우는 민간기관도 적용대상에 포함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위원회법)은 ‘인권’을 이렇게 정의 한다.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말한다.”

    이 법은 제2조 4항에서 ‘평등권침해의 차별행위’로 19가지 유형을 열거한다. 헌법 제11조에 명시적으로 규정된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더해 장애, 나이, 출신지역, 출생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적 조건, (기혼·미혼·별거·이혼·사별·재혼·사실혼 등)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性的) 지향, 학력, 병력(病歷) 등이 명시돼 있다. 법이 제정된 2001년 당시의 세계적 기준과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인권관념보다 앞선 것이었다. 특히 ‘성적 지향’은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의 자율적 권리를 보호하는 취지로 서구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우리 며느리를 남자로 맞으란 말이냐!”같이 지극히 자극적인 구호로 무장한 어머니 부대의 데모야 웃어넘길 수 있지만, 말 없는 다수의 도덕관념에 익숙하지 않은 이 주제는 인권위의 대중적인 기반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사유가 돼왔다.

    차이와 차별

    2012년 3월 위원회법의 개정으로 종전에 제외됐던 사립학교와 공기업도 침해의 주체에 포함됐다.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만큼 인권위의 역할과 존재 의미가 강화된 셈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에는 인권위를 통째로 없애려 들었고, 그게 여의치 않자 막무가내로 정원을 축소했다. 그런 정부가 어떻게 이런 법에 동의했는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소리 없이 인권위의 인원도 늘었다. 줄일 때는 언제고 늘리는 건 또 뭔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이런 고무줄 정책인가? 정권 말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초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신을 차린 셈인가? 아니면 웬만큼 채찍질로 길들이기에 성공했으니, 이제 당근 몇 뿌리로 달래겠다는 뜻인가? 어쨌든 인권위로서는 잘된 일이다. 한 정부 관료는 전직 인권위원장인 내게 “그때 ‘빼앗았던’ 것을 ‘돌려드린다’”며 생색을 냈다. 그 말에 실소하고 말았다.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이 있다. 나쁜 뜻만은 아닐지 모른다. 영혼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정권과 시류에 부침하지 않고 중립, 객관적인 원칙에 따라 업무를 집행하는 소신이라면 말이다. 그게 헌법이 보장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 헌법 제7조가 규정한 공무원의 자세다. 그러나 원칙은 팽개치고 오로지 출세와 보신을 위해 수시로 영혼을 바꾸는 속물도 많다.



    인권위 인원을 증원하는 사유의 하나는 장애사건을 다룰 적정한 인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인권위의 사건 중 장애사건은 전체의 11%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2001년 11월 25일, 인권위 개소와 동시에 가장 먼저 접수된 진정도 장애인이 제기한 것이다. 그만큼 장애는 인권의 상징성이 높다. 게다가 2007년 3월, 장애차별금지법이 제정됐다. 이 법의 제정으로 단순한 차별 금지를 넘어서 활동보조인 제공 등 장애인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보호하고 촉진할 국가의 의무가 가중됐다.

    인권위 통계를 봐도 장애사건은 급증 추세다. 근래 들어 인권위의 상임위원 셋 중 한 자리는 장애인이 맡는 전통이 세워진 듯하다. 국회에서 선출된 분까지 포함해 내리 세 분의 장애인, 그중에서도 여성 지체장애인이 상임위원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세 명 모두 국회에서, 그것도 야당의 추천으로 선출됐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장애가 드러난 사람과 감추어진 사람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장애인이다.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자연적인 생체리듬을 봐도 사람은 모두 장애인으로 태어나 장애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갓난아이나 죽음을 앞둔 노인은 몸 가눔과 머리 씀이 온전치 못하다. 성인의 경우도 신체 한 부분의 기능이 모자라면 나머지가 공백을 메우기 마련이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귀가 밝아지고 손끝이 더욱 정교해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하고 쓰곤 하는 나도 비장애인과 장애인이라는 종래의 이원론,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장애란 사람들의 ‘차이’일 뿐이다. 인권의 본질은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존속 토막 살해 사건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장애인과 관련된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한쪽 다리가 의족인 반 친구가 있었다. 남달리 근면하고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그는 매일 경남 김해에서 부산 초량까지 시외버스로 통학했다. 당시에는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불구자’ 정도가 그나마 품위 있는 말이었다. 절름발이, 앉은뱅이, 곰배팔이, 벙어리, 소경과 같은 적나라한 용어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아울러 ‘병신’이라고도 불렀다. 그가 그 먼 길을 힘들게 통학한 이유는 ‘병신’을 받아줄 하숙집이 마땅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에게 내가 다가간 것은 알량한 서푼짜리 동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언덕배기 내리막 하굣길을 동행하다 의족이 부서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함께 허겁지급 응급처치를 하면서 그의 맨다리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순간 움찔했다. 그날 이후 애잔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반면 그는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게 자신의 치부를 내보인 것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본능적인 반응에 분개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새 학년 들어 반이 갈리면서 우리는 더욱 서로 무관한 사이가 됐다. 졸업 후 그는 부산의 의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때까지 서울대학교는 장애인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의대 상급반이던 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패륜아 살인마로 언론에 등장했다. 계모와 함께 친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한동안 세상을 뒤흔든 ‘김해토막살인’의 주범이다. 노름꾼, 술주정뱅이, 상습폭행자인 아버지의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나머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시체를 일곱 토막을 내 분산해 암매장했다. 정교한 칼 솜씨가 단서가 됐다. 직계존속 살인, 아무리 인간쓰레기라고 하더라도 ‘아비’를 죽인 패륜아는 자식을 죽인 ‘아비’보다 무겁게 벌하는 것이 우리 형법이다. 자식을 죽이면 보통 살인이지만 부모를 죽이면-시부모, 처부모도 포함된다!- 존속살해가 된다. 일반 살인은 법정형이 5년 이상의 징역이라 상황에 따라서는 집행유예로 풀려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속살해죄는 사형과 무기징역밖에 없는 일종의 사회적 대역죄다. 대학원에서 헌법을 공부하던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평등권과 신분의 이론을 깊이 파고들게 됐다.

    부모 되기는 택할 수 있지만 자식은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다. 근대 형법의 기초는 ‘인간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자신의 책임 아래 행동할 수 있다’는 대전제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자유의사로 선택하지 않은 직계비속(자식)의 신분을 그 반대의 경우보다 현저하게 불리하게 취급하는 이 법리를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옹호할 수 있겠는가? 칸트의 이론과 일본의 판례를 인용하면서 나는 그를 위한 변론서를 만들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의 접견을 거부했다. 그 후로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동창생 명부에서도 아예 사라져버렸다. 나 역시 애써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꿈속에 나타난 적은 있다. 유난히도 승부욕이 강하던 부릅뜬 두 눈동자가 그대로였다.

    장애도 신분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한 사람의 타고난 운명과 불운을 차별과 배제의 사유로 삼는 것이 옳지 않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장애인의 능력을 의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의 능력에 대해 다면적 평가를 실시하면 총합은 별반 차이가 없을 듯하다. 내 옛 친구의 경우도 그랬다. 한쪽 다리가 성하지 않은 대신 그는 무쇠팔뚝이었다. 위압감을 줄 정도로 강건하던 그 팔뚝을 만든 것은 잃어버린 다리가 아니었을까. 그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전에 은퇴한 선배교수를 만났다. 정년 후에 눈이 침침하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허깨비를 보지 않고 잡소리를 듣지 않으니 이젠 방해받지 않고 진짜 학문 세계에 몰입할 수 있지 않으냐고. 실없는 농담이 아니라 그럴 것만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인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 한가한 농담은 분노를 유발하기 십상이다. 수많은 숨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외관은 멀쩡한 비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알아차리기 힘든 수많은 애로가 장애인의 일상을 위축시킨다.

    배려 대신 조력

    비교적 일찌감치부터 외국 나들이를 하면서 이른바 선진국의 ‘신기한’ 면모를 봤다. 일상적인 인권문제에 눈뜨기 전이었다. 대로와 공공장소에서 장애인이 눈에 쉽게 띄었다.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그들의 이동을 눈으로 배려할 뿐, 애써 특별한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선진국의 모습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경멸과 차별의 대상에서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바뀐 것도 사회의식의 진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온정적 배려는 기껏해야 과도기적인 미덕에 불과하다. 사람의 신체적인 조건에 합당한 대우를 하면서 능동적인 사회구성원의 역할을 하도록 조력하는 것, 그게 진정한 선진국 시민의 미덕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 돕기를 선행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입신과 치부를 도모한 사람도 많았다. 내가 ‘인권양아치’라고 부르는 족속이다. 적지 않은 종교단체가 비판의 대상이 돼왔다.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일한다며 떠벌리는 사이비 단체와 개인도 많다. 나도 학교에 재직하면서 무수히 맞닥뜨린 바 있다. 장애인이 만든 것이라는 조악한 목각품을 터무니없는 고가에 구입한 적도 여러 차례 있다. 연말 ‘선행 시즌’이 되거나 신문에 글이라도 한 편 쓰고 나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약자에 대한 동정,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키는 지극히 옳은 말 앞에 거절할 명분이 옹색하고 곤혹스럽다.

    한때 ‘민주조세’라는 씁쓸한 용어가 유행했다. 잡지구독, 단체후원, 성금납부 등 형태는 구구하지만 적어도 동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질은 하나다. 독재정권을 상대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대가로 힘든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 그들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한 동시대인이 지고 있는 부채감을 더는, 일종의 자정(自淨)의식이다. 일상적인 민주화가 정착한 시대에는 ‘인권조세’가 과거의 민주조세를 대체한 셈이다. 때로 이러한 부채의식, 자정의식을 강요하고 악용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나는 2004년 서울법대 학장으로 재직할 때 ‘최초’로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을 입학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보도와 달리 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법은 신체장애를 이유로 하는 차별을 금했고, 그는 학교가 정한 특별입학의 기준에 합당했다. 이 기준에 따라 바로 직전 해에 지체장애인을 입학시킨 바 있다. 그의 입학으로 5층 건물에 없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등 가욋돈을 마련하느라 애를 먹었다. 전동휠체어를 마련하기 위해 독지가를 구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대학본부가 토를 달았다. 교육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한 사람에게 비장애인의 50배의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법이 장애인의 입학을 보장한 것은 응당 그 비용을 부담하라는 취지가 아니겠느냐, 그게 정운찬 총장의 뜻이냐고 내가 다그쳤다. 당시까지 내가 알던 정 총장은 그럴 리 없었다. 그를 입학시킨 후 모금에 나섰다. 그 학생은 어린 시절 실명을 했다. 안질이 생긴 것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치료 대신 기도로 고치려다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여의도의 대형 교회가 관여하는 신문에서 신자 학생의 합격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어렵사리 그 교회의 저명한 목사를 만나 지원을 부탁했다. 상냥하게 내부 회의를 거쳐 답을 주겠노라고 했다. 기대 속에 한 달을 기다렸다. 끝내 감감무소식이라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회의에서 부결되었다”고 냉랭하게 전했다. 분노보다 비애를 느꼈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장애인 인권이 나름대로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다. 지원단체와 가족의 기여도 컸다. 오랜 세월에 걸친 체계적인 노력의 결과, 비례대표 국회의원 명단에 장애인이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성과도 이뤘다. 장애 당사자가 입법자가 되면서 보다 널리 사정이 알려지고 입법에 반영됐다. 이젠 더 이상 내놓고 ‘병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행여 그런 낌새라도 보이는 순간, 그의 공적 인생은 마감이다.

    스스로의 노력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향한 꿈

    2011년 4월 제31회 장애인의 날에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 농성을 벌이다 경찰의 제지를 받자 차도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 인권의 신장에는 시민운동의 기여가 크다. 과거 군사독재를 상대로 했던 산발적, 비체계적인 민주화운동의 전통이 1990년부터는 시민운동으로 전환됐다. 일상적 정의와 인권문제에 관심이 집중됐다. 시민운동의 성과 중 가장 빛나는 3대 분야가 장애, 여성 그리고 환경이다.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장애 분야에서도 경쟁과 반목이 만만치 않다. 여러 단체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첨예하다. 장애의 부위와 정도에 따라 제각각 이해관계가 다르고, 따라서 요구사항도 다르다. 이를테면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서적이, 청각장애인에게는 영상자막이, 지체장애인에게는 전동 휠체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통계로 볼 때 어느 나라든지 대체로 국민의 10%는 신체 또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의 비율이 더 높다. 뾰족한 예방수단도 없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모두가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장애인권의 핵심 철학이다. 굳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문제 삼는다면 다양성이 질적 생산성의 총화를 제고한다는 믿음을 공유해야 한다. 특정한 능력이 처지는 사람은 다른 대안적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어쨌든 90%의 비장애인이 이들 10%를 품어 안아야 한다. 그것이 복지국가의 원리다.

    2006년,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에게만 부여하는 의료법과 하부규칙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 소송은 ‘스포츠 안마사’들이 제기한 것이다. 특정 직업을 특정 부류의 국민에게 독점시키는 것은 국민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지였다. 이 ‘비정한’ 판결에 항의한 시각장애인이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2008년 10월, 이 문제가 재차 헌재에서 논의됐을 때 인권위는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다행스럽게 장애인 측의 승소로 결말이 났다. 사건이 헌재에 계류되어 있는 동안 시각장애인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중증장애인들이 인권위 건물을 점거하고 옥상에서 고공시위도 벌였다. 창립 이래 인권위는 계속, 반복되는 점거농성에 시달렸다. 업무에 적지 않은 불편도 겪었다. 최초 7년간, 업무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에 각종 점거농성이 일어났다. 위원장실이 점거당한 적도 있다. 인권위를 겨냥한 항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인권위 업무와는 무관한 사유로 일어난 농성이었다. 단골 중의 단골은 장애인 단체다.

    장애인 시위의 공과

    점거농성은 세상에 하소하는 수단이다. 언론은 통상적인 사건에는 무관심하다. 그래서 시위자들은 강도 높은 실력행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따금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흡사 단체 합숙훈련에라도 나서듯 인권위 사무실을 무단 침입, 점거하는 경우가 있다. 업무의 성격상 인권위 사무실은 점거에 대비해 보안을 강화할 수 없다. 그래서 접근이 용이하다. 때때로 경찰력을 동원해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업무의 성격이나 견지해야 할 자세에 있어 여느 국가기관과는 다르다. 아무리 성가시기로서니 장애인을 쫓아내기 위해 경찰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종종 장애인임을 무슨 벼슬처럼 내세워서 성가시게 하는 상습 훼방꾼도 있었다. 시각장애인임을 자처하는 한 청년은 인권위가 주관하는 각종 회의에 참석해 점자자료가 없다는 등 각종 불평과 요구를 하며 회의를 방해하곤 했다. 때때로 국제회의장에도 나타나 볼썽사나운 행태를 보였다. 정당한 요구도 있지만 대체로 과도한, 그리고 시간과 장소에 부적합한 행위였다. 괘씸하기 짝이 없으나 그래도 기댈 곳이 인권위밖에 없으니 떼를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그를 측은하게 여기면서 받아주었다.

    그러나 장애인 활동가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실로 당혹스러운 일도 두 차례 겪었다. 하나는 200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행사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념사를 읽는 한명숙 국무총리 앞으로 한 청년이 갑자기 전동휠체어를 몰고 돌진했다. 널리 알려진 장애인단체 활동가였다. 행사를 주관한 나는 당혹스러웠다. 한 총리의 유연한 대응으로 가까스로 식을 끝냈다. 상임위원을 보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경호원들을 문책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일도 일어났다. 장애차별금지법 제정과 유엔장애인권리협약 가입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여기서도 그 청년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돌진했다. 정말이지 과했다. 대통령이 잠시 노기를 진정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후일에도 여러 차례 대면했지만 그는 한마디도 사과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장애인의 과도한 실력행사 문제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인권위 업무보고 자리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 출신의 초선의원이 따져물었다. 한동안 장애인들이 시청 정문을 점거 봉쇄한 사실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인권위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위법, 부당한 행위를 왜 간과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웬만하면 불편을 참아야 한다는 내 대답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그는 후일 인권위가 ‘촛불집회’ 의견서를 내자 이를 공격하는 선봉장이 됐다.

    요즘 들어 장애인의 점거농성은 한결 줄었다고 들었다. 말썽꾸러기 시각장애인 청년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다. 다만 인권위가 그들이 기댈 곳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기를 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아픔이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장애인권 사각지대

    세계 인권의 본부,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는 로잔이라는 아름다운 소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숨은 자랑은 아주 특별한 미술관이다.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언덕에 자리 잡은 ‘아르 브뤼(Art Brut)’ 미술관은 정신장애인의 작품 2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작품들을 보면 정상인과 비정상인, 수작과 태작의 이분법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된다. 제네바의 현대미술관에서 각종 실험적인 작품들을 감상한 후에는 이곳의 작품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진다. 일본 작품도 많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미술이 정신치료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됐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장애인 중에 가장 취약한 장애인이 정신장애인이다. ‘정신장애’라는 단어가 주는 사회적인 낙인이 너무 크다. 그래서 자신도 가족도 병력을 숨긴다. 당사자 단체는 없다. 가족협회도 없다. 이들을 챙겨줄 인권단체도 없다. 정신병원과 요양시설은 그야말로 인권의 사각지대다.

    1995년 우리나라에 정신보건법이 제정됐다. 1987년 만들어진 일본 법이 모델이 됐다. 법 제정에 앞서 세계보건기구(WHO) 전문가들이 내한해 자문에 응했다. 자문단 보고에 의하면 서구에 비해 한국 법은 환자 본인보다 가족의 권리와 의무가 강조된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동안 정신장애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본정책은 사회로부터의 ‘격리’였다. 병원을 짓고 병상을 늘리는 게 국가의 주된 정책이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붕괴되면서 격리 수요가 더욱 강해졌다. 그 결과 세계에서 유례없는 비자발적 입원과 장기입원이 나타났다.

    ‘문을 열자!’는 1999년 세계정신의학협회에서 주도한 캠페인의 구호다. 편견을 깨자는 것이다. 설립 직후부터 인권위도 이 문제에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들었다. 광범위한 인권유린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모든 정신병원에 인권위 앞으로 보내는 진정함을 설치했다. 2006년 10월, 위원장 취임과 동시에 나도 이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종합적인 인권보고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산 확보에 나섰다. 직접 전문위원회 장도 맡았다. 위원장이 전문위원회의 장을 맡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 결정한 일이다. 이후 현역 부장판사가 커밍아웃을 했다.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많은 법관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변호사회지에 기고한 그 글은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지금도 유능한 법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누구도 그의 판결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는다.

    나는 몇 달 차이로 보고서 발간을 보지 못하고 위원회를 떠났다. 2009년 가을, 대한민국 인권위 이름으로 ‘정신장애인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한 국가보고서’가 발간됐다. 1993년 호주(브라이언 보고서), 2003년 미국(부시 보고서)에 이어 세계적으로 세 번째 일이다. 내 이름으로 영문 논문도 발표했다. 2010년 2월, 미국 하버드대 법대에서 열린 세계정신장애인권 전문가 대회에 초청받아 강연한 일도 있다.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향한 꿈
    안경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1984년 미국 샌타클래라대 법학 박사

    제4대 국가인권위 위원장(2006.10~2009.06)

    現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 ‘법과 사회와 인권’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 ‘조영래 평전’ 등


    독일의 기업 코칭 전문가, 마르틴 베를레는 ‘나는 정신병원으로 출근한다’는 제목의 책을 썼다. 모든 직장이 생각하기 따라서는 정신병원이라는 뜻이다. 한 인권위 직원은 최근 쓴 글에 이렇게 적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없다. 정신장애도 고백이라는 표현이 필요 없길 바란다.” 그런 날이 쉬 오지는 않을 것이다. 편견과의 전쟁은 과정만 있지 종말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포기할 수 없는 전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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