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로스 전문점’을 자임하는 편집매장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패션 의류업계에서 ‘로스(loss)’는 ‘손실’되거나 ‘상실’된 물건을 뜻하는 말. 정확히는 대형 브랜드 제품의 생산 하도급 공장에서 정품 원단으로 제작했으나 정식 유통망을 통해 유통되지는 않는 물건을 가리킨다. 이들은 짝퉁이나 이미테이션과는 또 다른 형태의 ‘저렴이’ 명품으로 인기를 끈다. 태어나자마자 사라진 신상 ‘정품 로스’는 정품의 일란성 쌍둥이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사기꾼일 뿐인가?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강남의 편집매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매장 분위기도 독특하다. 보통 편집매장이라 하면 다양한 유통망을 통해 여러 브랜드 제품을 사서 판매하는 곳을 의미한다. 옛날 양품점이 압구정동과 청담동에서 럭셔리하게 진화한 형태라고 할까. 샤넬, 루이비통, 버버리 같은 해외 브랜드에서 국내외의 신진 디자이너까지, 옷에서 구두 서적 음반까지 편집매장의 콘셉트에 맞는 물건을 모아 놓고 판다. 공식 수입처가 아니기 때문에 유통 물량은 많지 않지만 국내외 트렌드를 빨리 보여주고 무명 디자이너를 스타로 키워내는 테스트 매장 구실도 한다.
그런데 편집매장에서는 국내 브랜드의 제품을 팔지 않는다. 해당 기업에서 유통과 브랜드 이미지를 직접 관리하기 때문이다. 타임을 내놓고 있는 ㈜한섬이나 구호, 르베이지를 가진 ㈜제일모직 등도 편집매장을 운영하지만, 그곳에서 자사가 생산하는 내셔널 브랜드 제품을 팔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우아한 가게는 최근 프랜차이즈화한 ‘중고명품’ 매장일까? 그러나 중고명품점에서는 아무리 너덜거리는 중고라도 해외 명품만 다루는 것을 나름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기에 ‘국내 명품’은 취급하지 않는다. 30대 꽃미남 사장님에게 물어보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로스 전문점입니다.”
“이미테이션이 아니라 ‘로스’”
로스? 삼겹살 로스나 등심 로스에만 익숙한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다. 패션 의류업계에서 ‘로스(loss)’란 ‘손실’되거나, ‘상실’된 물건을 의미한다.
“대부분 대형 브랜드에선 생산공장을 거느리고 옷이나 가방을 생산해요. 하도급 공장이라고도 하고, 협력사라고도 하지요. 공장에 발주 물량만큼 원단을 주는데, 원단이 불량할까봐, 또는 원단 끝에 재단선이 걸릴까봐 등등의 이유로 좀 여유 있게 줍니다. 게다가 옷은 방향에 맞춰 제 결대로 재단하지 않고 살짝 틀기만 해도 50벌 만들 때 한 벌 정도씩은 더 만들 수가 있어요. 공장에서 원단을 알뜰하게 써서 정품을 더 생산해 납품해주면 고마운 일이죠. 문제는 간혹 나쁜 마음을 먹는 공장 사장님들이 있어서 이걸 뒤로 빼돌린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유통되는 걸 ‘정품 로스’라고 해요.”
패션 디자이너 윤한희 씨의 말이다. 그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시작한 패션 브랜드 ‘오브제’를 최고의 내셔널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뉴욕에 진출한 뒤 대기업인 SK네트웍스와 합병했다. 드물게 한국의 패션 산업을 하도급 업체 사정부터 세계화 전망까지 꿰고 있는 디자이너 겸 경영인이다. 그가 “속이 상하지만 정품 로스 유통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로스 전문점의 젊은 사장 설명도 비슷했다.
사실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씩은 로스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심코 들어간 옷가게에서 직원이 “이 제품은 이미테이션(가짜)이 아니라 로스”라며 은근히 귀띔해주곤 하기 때문이다. 정품 로스를 주장하는 옷에는 해당 브랜드의 라벨이 붙어 있지 않거나 끝이 잘려나간 라벨이 붙어 있다. 백화점 해당 브랜드 매장에 가서 교환이나 환불은 물론이고, 문의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다.
서울 동대문시장은 물론이고 이태원동, 삼성동이나 강남역 근처 지하상가, 잠실, 이촌동 등 양품점으로 보이는 의류상가에서 이 로스들을 만나게 된다. 의류 로스 중에는 돌체앤가바나, 3·1필립림 등 아시아 하도급 공장에서 나왔다는 해외 브랜드가 많다. 국내 브랜드 로스라는 옷들은 대개 조악한 가짜들이어서 로스의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혹시 로스가 있다 해도, 극히 소량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 동네 양품점까지 들어오기는 어렵다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내셔널 브랜드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 수출량을 크게 늘리고, 해외에서도 생산을 할 만큼 하도급 공장 수가 늘어나자 정품 로스 물량도 많아졌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로스 마켓에서 인기 있는 브랜드인 구호, 르베이지, 빈폴 등을 생산하는 제일모직 관계자는 “여성복 하도급 업체만 1000개가 넘는다. 서울 경기도 지방에 영세한 규모로 산재해 있다. 하도급 업체를 아무리 엄격히 관리해도 일부 유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제일모직은 현지 법인의 감독 하에 중국 공장에서도 의류를 생산한다.
생산 하도급 공장은 원래 각 브랜드에서 보낸 디자인과 브랜드가 공급한 원단을 갖고 브랜드에서 요청한 수량만큼 납품하지만, 대형 하도급 업체의 경우 자체 디자이너가 있어서 디자인을 역으로 제안하는 일도 많다. 하도급 업체 디자인이 브랜드의 콘셉트와 맞으면 생산을 의뢰한다. 기업은 디자인 비용을 낮추고, 하도급 업체는 디자인료를 받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도급 공장에서 원단도 알아서 조달하므로 정품 로스의 유혹은 커지게 된다.
내셔널 명품 로스의 부상
같은 이유로 정품 로스가 많이 나오는 종류가 가죽, 니트, 패딩, 모피 소재 옷이나 가방, 신발, 액세서리 등이다. 특수 소재와 부자재를 소량으로 조달해 제작해야 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브랜드 MD가 원단을 공급하지 않고, 하도급 공장에서 이 과정을 모두 책임지기 때문이다.
“아휴, 아무리 관리를 해도 하도급 공장 사장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품 로스를 만들어 빼돌릴 수 있어요. 라벨도 청계천에 가면 얼마든지 똑같이 고급스럽게 직조해줘요. ‘오브제’ 정품 로스를 빼돌린다는 정보가 있어 하도급 공장을 급습한 적이 있는데, 사장님이 도망가버리니까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요. 의류 브랜드 하면서 제일 중요한 일이 양심적인 하도급 공장 사장님 만나는 거예요.”(패션디자이너 윤한희)
최근 국내 패션브랜드들이 해외 명품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럭셔리화(상품의 질과 이미지의 고급화 전략)하면서 로스 소비자들도 십중팔구 가짜인 해외 브랜드의 로스를 사기보다는 ‘믿을 만한’ 국내 고가 브랜드의 로스를 훨씬 선호하는 추세다. 한 패션지 기자는 “로스 구매가 ‘패피(패션피플)’에게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패션업계에 있으면 정품 로스 구매 기회가 다른 사람보다 많아요. 내셔널 브랜드의 하도급 업체 사장이 정품 로스나 본사에서 클레임 받은 물건들을 디자이너나 내부 직원에게 싸게 주는데, 이런 물건들이 나오면 믿을 만한 사람끼리 비밀리에 바로 사버리죠. 동대문시장 같은 데서 파는 ‘무늬만 로스’완 달라요. 이들은 절대 로스 샀다고 말하지 않아요.”
국내 브랜드의 경우 구조적으로 로스 유통이 가능하고, 소비자가 백화점 매장에 가서 확인할 수 있으니, 확실한 정품 로스를 구매한다면 정품을 싼 가격에, 심지어 남보다 빨리 ‘득템(인기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하는 쾌감까지 얻을 수 있다. 정품 로스는 생산 공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백화점보다 먼저 유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품 로스의 필요조건은 따끈따끈한 신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취재 중 정품 로스 가방을 추천받아 살펴보니, 정품으로 보였지만 몇 년 전 재고를 파는 아웃렛으로 들어간 제품이었다. 아웃렛에서 직접 살 때보다 15% 정도 비싼 가격을 불렀다. 정품 로스 중에는 이런 재고가 꽤 많이 섞여 있다.
정품 로스 마켓에서 인기 있는 브랜드는 제일모직이 생산하는 구호, 르베이지, 빈폴, 아동복 빈폴키즈와 SK네트웍스의 오브제, 한섬(최근 현대쇼핑이 합병)의 타임·마인, LG패션의 모그, 그리고 손정완 디자이너의 손정완 등이다. 이들 브랜드의 공통점은 수입 원단을 쓰는 등 고급화해 내셔널 브랜드 중 최고가 라인이라는 점. 백화점 매출 순위 상위권을 경쟁하면서, 해외시장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콧대 높은 백화점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내셔널 명품’이라는 점 등이다.
가격대도 해외 중급 명품보다 높다. 봄 정장 한 벌이 150만 원 안팎, 트렌치 코트류는 100만 원 이상, 모피는 1000만 원대를 넘는 것이 많고 가방은 소재에 따라 100만 원에서 300만 원을 상회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품 로스도 결코 싸지 않다. 원가 자체가 높고, 유통업자와 소매업자의 마진에 ‘위험부담금’까지 붙기 때문이다. 정품 로스가 대개 백화점 가격의 40~60% 정도에 팔리므로, 웬만한 내셔널 브랜드 정품보다도 비싸다.
예복이나 맞선용 정장으로 인기 있는 손정완 브랜드의 홍보담당자는 “아무리 예복이라도 보통 여성이 구매하기엔 가격이 높아서 로스를 사칭한 가짜가 인기가 있다. 가짜라도 ‘손정완’을 예복으로 샀다고 말하고 싶은 여성들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정품 로스를 인정하기 어려운 듯했다. 그러나 로스 유통업자는 “손정완 정품 로스를 구할 수 있고, 혼수로 인기 있는 모피는 예약을 받을 정도”라고 말했다.
‘사입 삼촌’과 ‘나까마’
이처럼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으니 로스를 유통하는 전문업자도 있다. 우선 브랜드 지정 하도급 공장과 동네 로스 판매점을 연결하는 ‘로스 도매상’들이 있다. 이 업계에서는 (소매 옷가게의) ‘사입 삼촌’ 또는 (하도급 공장의) ‘나까마’라고 부른다. 사입 삼촌들이 하도급 공장에서 나오는 정품 로스를 받아 동네에 있는 소매점에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정품 로스만 주는 사입 삼촌은 거의 없고, 대부분 ‘정카피’ ‘로스 카피’ ‘이미테이션’ 등으로 부르는 짝퉁과 이월 재고를 섞어서 공급한다. 인기 있는 정품 로스를 주는 조건으로 끼워 팔기를 하는 셈이다.
동네의 로스 소매점에서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사입 삼촌을 두다 보니, 삼촌들 간에 경쟁이 붙기도 한다. 짝퉁을 팔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은 소비자가 아니라 이 사입 삼촌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삼촌’을 들이는 것에 대한 보복이다.
로스를 파는 인터넷 사이트들. 브랜드명을 손정×, 구×로 가리거나 개인 판매자임을 강조한다. 단속에 대비하는 것이다.
사입 삼촌의 인기와 능력은 얼마나 많은 정품 로스를 확보해서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놀랍게도 인기 있는 브랜드 하도급 공장에서 정품 로스를 받으려면 적게는 1000만 원, 브랜드 메인 공장이라면 3000만 원 정도의 ‘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10년 넘게 정품 로스 도매를 해왔다는 사입 삼촌 박모 씨는 “유명 브랜드에서는 동대문시장 짝퉁은 그냥 넘어가도 정품 로스는 정말 무서워한다. 그래서 브랜드에서 하도급 공장에서 나온 로스를 원래 납품가보다 비싸게 되사간다. 그러니 도매업자는 공장에 그보다 더 많은 메리트를 줘야 한다. 기존에 거래하는 ‘나까마’가 있으면 거길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도 목돈과 ‘줄(힘)’을 대야 한다. 보증금은 전세 보증금과 달리, 정품 로스 값으로 미리 지급하는 ‘선입금’이다. 그렇다보니 물건은 하도급 공장에서 주는 대로 받아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인기 있는 상품을 빼오느냐가 로스 유통업자의 실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선입금이 서로 신고하는 것을 막는 입막음용 역할도 한다”고 덧붙인다.
한 의류업체 임원은 “로스에 대해서는 일반 발주품보다 더 많은 공임을 주고 사들인다. 하지만 하도급 업체들이 영세하다보니 목돈의 유혹에 넘어간다. 공장 전세금도 올려줘야 하고, 기계도 사야 하는데, 그런 것까지 기업에서 도와주진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100개를 납품해야 하는데, 불량이 나와 기업에서 90개만 사준다. 그러면 공장주는 로스분 포함 20개 정도는 손해 본다고 계산한다. 그 돈을 회수하려고 나까마와 거래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해외 명품 브랜드 역시 “이미테이션이 만들어지지 않는 명품이야말로 문제”라며 싸구려 가짜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로스는 아예 만들어지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한다. 샤넬의 경우, 가방이나 옷에 들어가는 수공예물을 만드는 작은 하도급 공장을 다 본사로 흡수했다. 또 본사 직원이 제작 단계에서 기준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제품이 나오면 현장에서 ‘분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소비자 가격에는 그 비용이 포함된다).
여러 브랜드의 하도급 공장 사장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정품 로스 유통업자 박 씨도 “최근 로스 유통업자를 자처하며 물을 흐리는 사람들이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정품 로스가 인기가 있는데, 구하기는 어렵다보니 ‘정카피’ ‘로스 카피’ ‘이미테이션’ 등 ‘가짜 로스’가 많이 나옵니다. 정카피는 브랜드 하도급 업체에서 정품급 원단으로 만들어내는 제품인데, 가끔 정품보다 더 비싼 원단을 쓰는 일도 벌어져요. 로스 카피나 이미테이션은 그냥 가짜라고 보면 돼요. 요즘 로스 유통업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가짜를 정품 로스라고 소매업자들에게 마구 공급합니다. 인터넷에서 정품 로스라고 파는 상품들도 대개 이런 물건들이고요. 옷가게 사장님이나 소비자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한두 번 이런 가짜를 사서 속았구나 싶으면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아무리 진짜를 줘도 믿지 않아요. 정품 로스의 매력은 희소성에 있는 거죠.”
국내 패션 브랜드가 명품화하면서 최근 가짜 시장에서는 해외 브랜드보다 더 인기 있다.
정품 로스의 가장 큰 시장은 역시 인터넷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풍’ ‘~ST(스타일)’은 짝퉁에 대한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그나마 솔직한 소개로, 별다른 제재 없이 거래가 이뤄진다. 그러나 정품 로스는 인터넷 카페에서만 구매가 가능하다. 대개 도소매를 겸하는데, 비회원은 정보나 사진을 볼 수 없게 해놓았다. 일단 회원가입을 하고, 몇 가지 번거로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로스 판매 인터넷 카페에서는 다소 고압적인 문구로 정품 로스임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지만 사진으로 가품을 확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진과 같은 물품이 올지, 다른 물건이 올지도 알 수 없다.
최근 정품 로스가 인기를 끌면서 도매상이나 유통업자에게 정품 로스 매장 창업을 상담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도 진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으면 가짜에 속고 큰돈을 날리기가 십상이다.
특기할 것은 정품 로스 소매업을 가게가 아닌 집에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온라인 판매도 할 수 있고, 세금 부담과 단속 위험이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지만, “정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당신에게만 구매 기회를 준다”는 은밀한 권유가 좋은 마케팅 전략이 되기도 한다.
자택 판매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핸드백 파티’와 아주 비슷하다. 핸드백 파티는 집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짜 명품 가방을 판매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등 대도시 교외의 중산층 주택 지역에서 많이 열린다. 주부가 이웃집 주부들을 초대해 고급 와인을 대접하고 패션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파티를 여는데, 진짜 목적은 가짜 명품백을 파는 데 있다. 경찰의 급습으로 체포된 범인 중엔 성공한 변호사 부인, 스포츠 스타의 부인 등이 포함돼 있어서 미국 사회에 충격을 줬다. 구매자들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가짜를 진품으로 믿었다고 한다. 한 로스 유통업자는 “지역에 따라 부잣집 사모님들도 모이지만, 고급 룸살롱에 나가는 여성들도 주요 고객이다. 어쨌든 정품을 아는 사람이 정품 로스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태어나자마자 사라진 신상 정품 로스는 정품의 일란성 쌍둥이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사기꾼일 뿐인가?
“없어서 못 판다”는 내셔널 브랜드의 정품 로스 가방을 보면 질문에 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가방은 로고와 라벨이 보이지 않는 옷과는 다르다. 명품 소비에서 가방은 옷보다 더 대중적인 상품이다. 상품의 품질보다 상징물만 보고 구매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가방에서 브랜드 로고는 매우 중요하다. 가방에 커다란 금속플레이트 로고를 붙이거나 가방 전체에 로고를 무늬처럼 새기는 ‘로고플레이’가 많다. 로고의 유무는 진품과 가짜를 가르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가짜에 붙은 로고는 범죄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S동의 로스 전문점에 있는 정품 로스의 ‘정품’을 찾으러 백화점으로 갔다. D브랜드의 정품 로스인 40만 원대 가방은 백화점에서 89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정품에 붙은 금속 로고는 정품 로스 사장님이 별도로 준다고 했다. 그 외의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T브랜드의 가방 하나는 신상 매장에서 찾을 수 없었지만 같은 브랜드의 다른 가방은 정품 로스와 정품의 외모가 완전히 똑같았다. 색, 디자인은 물론이고, 쇠 장식에 새겨진 작은 로고도 똑같았다. 정품은 82만5000원, 정품 로스는 41만 원이었다.
사장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정품 로스) 당연히 진품이에요. 가짜에 로고를 새겨 넣은 것이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패션기업 내부 관계자도 “같은 사람이 100개 만들 재료로 110개 만든 거니 진품이긴 한데…”라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한 공장에서, 정품과 똑같은 소재, 같은 직원의 손길로 태어났지만 줄을 선 순서대로 납품용 박스에 들어간 것을 정품이라 하고, 로스 유통업자의 차 트렁크로 들어간 것을 정품 로스라 하는 것일까.
정품 로스도 인기가 높은 한 브랜드의 신세계백화점 매장 매니저는 간혹 정품 로스를 사서 정품인지 확인하러 오는 ‘대담한’ 손님들이 있다고 말한다.
“정품 로스를 샀다며 백화점 매장에서 확인하려는 손님은 그 제품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산 게 아니라 브랜드와 로고가 좋아서 산 거겠죠. 잡지에서 봤다거나 주변 사람 누가 들었다는 이유로 사는 거예요. 재미있는 건 그런 손님들이 가진 정품 로스가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라고 말씀드리면 흥분하죠. 정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싸게 샀는데도 속았다고 해요.”
명품이되 명품이지 않은
정품 로스를 산 사람이 가진 것은 가방이고, 그가 사지 못한 것은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는 순간의 마약 같은 경험이다. 구매자는 명품을 살 때 브랜드의 가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화려한 로고가 쌓아온 역사와 그것이 상징하는 라이프스타일, 대리석이 깔린 백화점의 분위기, 매장 직원의 극진한 환대도 담아가기를 바란다. 정품 로스 구매자도 마찬가지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번거로운 인터넷 구매나 변두리 창고 사무실에서의 찜찜한 쇼핑, 싸구려 짝퉁과 정품 로스가 섞여 있는 진열대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명품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진 건조한 가방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품 로스를 가짜라고 부를 수 있다.
정품 로스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다. ‘타임’을 ‘타임’이라 부르지 못하고 ‘랑방’을 ‘랑방’이라 부르지 못하는 운명의 정품 로스는 소비자가 명품의 로고와 명품 쇼핑의 경험에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썽꾸러기다.
각 브랜드가 정품 로스를 빼돌린 하도급 업체를 퇴출하고, 작게는 빼돌린 물량에 백화점 판매가의 10배, 많게는 그 시즌에 하도급 생산한 옷의 판매가 전체를 물어내도록 하는 것, 심지어 제조 현장에서 분쇄해버리는 건, 그것이 신의를 저버리고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범법 행위이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소비자가 럭셔리 명품에 숨은 비밀을 알아채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럭셔리 산업의 성패가 브랜드의 로고와 아우라를 얼마나 비싸게 팔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음을 일찌감치, 가장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세계 최대의 럭셔리브랜드그룹 LVMH(루이비통, 디올 등 포함)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었다. 그는 남용에 가깝게 로고를 이용해 LVMH를 오늘날의 규모로 키웠고 자신은 세계 4위의 갑부가 됐지만 바로 그 로고 때문에 끊임없이 가짜의 역습을 받고 있다. 가짜가 로고를 이용해 게릴라처럼 생존해 진화하는 것이다. 명품의 하도급 공장이 더 싼 재료와 노동력을 찾아 전 세계로 아웃소싱되면서, 정품의 수보다 빠르게 늘고 있는 로스는 지금까지 만난 가짜들 중 가장 위협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