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4-19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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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아 칼라스는 전설이다. 클래식 분야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전설. 데뷔 때부터 그를 괴롭힌 고·중·저음이 각기 다른 목소리는 예술적인 표현력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극복했지만, 정작 사랑만큼은 극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사랑 오나시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2년간 아파트에 칩거하다 끝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는,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됐는지 모른다.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아’에서 열연하는 마리아 칼라스.

    요즘 “전설이 됐다”는 말은 그 분야에서 최고로 뛰어났던 사람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찬사로 쓰인다. 대중가수 중에는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조용필 등이 이 찬사를 듣고 있다. 클래식 분야에서는 아마도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를 꼽을 수 있겠다. 최고의 프리마돈나였던 그는 너무 유명했던 까닭에 일간지의 문화·예술면을 넘어 사회면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최고 무대를 선사한 예술가로, 때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악녀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 마리아 칼라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가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비극적 여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필자는 프리마돈나를 꿈꾸던 어린 시절 음반가게앞을 지나다가 한 여인의 포스터를 넋 나간 사람처럼 들여다본 적이 있다. 튀어나올 듯 정열적인 큰 눈,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 하는 높은 콧날, 모나리자 모습과 비슷한 다중적인 표정의 매혹적인 여인…. 차비까지 털어 구입한 그의 LP판을 듣는 순간 필자는 한 번 더 놀랐다. 그의 음성은 ‘천상의 소리’가 아니었다. 때로는 투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친 소리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동경과 존경심에 매일 듣고 또 들었다. 그 덕분에 필자의 목소리에도 이상이 생겼다. 저음에 너무 힘을 주게 됐고, 고음에서는 이상한 바이브레이션을 넣는다는 지적을 들어야 했다.

    미운 오리새끼 칼라스

    내팽개쳤던 칼라스를 다시 접한 것은 이탈리아 유학시절이었다. 오페라 음반을 찾으면 어디에나 칼라스의 음반이 있을 정도로 방대한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지만, 그를 최고로 만든 것은 음성이 아니라 예술적인 표현력이었다. 표현력이 그의 음성을 예술로 만든 것인데, 어린 필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의 음성만 모방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필자는 칼라스의 팬이 되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마리아 칼로게로풀로스’라는 본명에서 알 수 있듯,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그리스계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부친은 그리스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의료사고에 휘말려 부인과 큰딸과 함께 이민선을 탔다. 당시 여느 남부 유럽인처럼 이들 부부도 아들을 원했지만 첫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등졌다.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가 마리아였다. 비만에 심한 근시로 알이 두꺼운 안경을 낀 마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롭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 부모의 이혼으로 13세의 칼라스는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마리아 칼라스는 불안정한 그리스 사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또 언니만 편애하던 어머니 때문에 애정결핍을 겪으면서 말수가 적은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은 그로 하여금 모든 열정을 음악에 쏟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아테네음악원 재학시절에는 같은 반에 있던 학생들의 노래 레슨을 도와주는 열성을 보였으며, 그 덕분에 후일 모든 파트의 레퍼토리를 빠른 시간에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군의 성악적 기량을 보인 칼라스는 각종 극장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날로 성숙해갔다.

    2차대전 중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은 독일 작곡가의 작품 공연을 전략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칼라스는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의 음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의 정치와 경제가 극도로 불안정해지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칼라스는 더 이상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됐고, 결국 그리스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향했다.

    27세 연상 남편 메네기니

    미국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수많은 오디션에서 낙방했다. 그의 목소리가 저음, 중음, 고음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겨우 오디션을 통과해 연습 시작을 기다리다가 이유 없이 교체통보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이탈리아 베로나의 야외극장인 ‘아레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라 조콘다’의 오디션이 눈에 띄었다. 1947년 미국 오디션에서 선발돼 난생처음 이탈리아 베로나 땅을 밟게 되면서 칼라스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탈리아에 도착할 당시 칼라스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가 들고 온 허름한 가방 안에는 쓸 만한 물건이라고는 오디션용 의상 한 벌과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칼라스의 국제무대 데뷔는 대성공을 거두며 각종 찬사와 주목을 받았지만, 막상 계약을 하려는 에이전트는 없었다. 그동안 겪었던 인고의 시기가 여전히 지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베로나의 부유한 사업가로 예술, 특히 오페라에 조예가 깊었던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896~1981)가 후원자로 나타났다. 27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확실하게 서로 능력을 믿어주는 예술적인 동지 관계로 발전해나갔고, 동지 관계는 점차 사랑으로 바뀌었다.

    후세 사람들 중에는 메네기니를 칼라스의 발목을 잡고 ‘노예계약’을 한 악덕 매니저이자 남편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부정확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칼라스는 예술적인 가능성은 보여주었지만 인정은 받지 못했고, 몸무게도 100㎏에 육박해 열등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칼라스는 메네기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관계에서는 칼라스가 더욱 적극적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메네기니 집안에서는 나이 차가 많은 외국인 성악가를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메네기니는 집안의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고 1949년 칼라스와 결혼한다. 그를 위해 매니저로 일하며 전 세계를 함께 누볐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경제적인 안정 속에 칼라스는 음악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고, 일취월장하는 기량은 그를 최고의 스타 자리로 이끌었다. 이와 함께 특정 음(音)에서 소리가 갈라지고 투박한 메탈 음색에 스산하고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는 그동안의 혹평은 모두 사라지고, 팬들은 칼라스에 열광하면서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섰다. 결국 칼라스는 미운 오리새끼에서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쥔 백조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칼라스는 겸손하고 무대를 위해 최대한 절제할 줄 아는 프리마돈나였다.

    1953년에 만들어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호리호리한 헵번을 동경하던 칼라스는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1954년 10개월에 걸친 노력 끝에 체중을 30㎏ 줄이는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모든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주문해 시식할 정도로 음식을 좋아했던 그가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을 보면 그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로 보인다. 172㎝의 키에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로 변신해 본격적인 백조가 된 칼라스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명훈의 스승인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는 다이어트 이후의 칼라스를 처음 보는 순간 너무 매혹적인 여인이어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칼라스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외모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탓이었을까. 이때부터 완벽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칼라스는 공연계약 파기, 공연 직전 출연 포기 등을 거듭하면서 불화와 분쟁의 장본인이 된다. 이탈리아 대통령이 관람하는 공연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을 중단하는가 하면 미국 메트로폴리탄극장과 계약서를 쓸 때는 “다른 프리마돈나보다 1센트를 더 달라”며 자신이 최고임을 계약서에 명시하라고 억지를 부린다.

    칼라스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이탈리아의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1915~1982)에 의하면, 1955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안드레아 세니에’를 공연할 때 그가 악보를 무시하고 테너인 자신보다 고음을 더 오래 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해서 무대 커튼 뒤에서 사나운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운 적이 있다고 한다. 이렇듯 칼라스는 극장 측이나 동료들뿐만 아니라 종종 본인의 팬들과 언론에까지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칼라스는 1000만 안티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동시에 1000만 명의 열광적 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될수록 칼라스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졌고, 극장 앞은 그의 공연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암표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동시에 그의 악명도 함께 뛰어오르게 된다.

    “다른 프리마돈나보다 1센트 더 주세요”

    1959년 세계 최고의 갑부인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1907~1975)가 개최한 선상파티에서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예기치 못한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다. 칼라스는 한때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부부와 가깝게 지냈는데, 로셀리니가 아내 잉그리드 버그만을 버리고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자 로셀리니와의 인연을 냉혹하게 끊어버린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는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신앙이 깊고 도덕적이라고 자신했다.

    첫사랑 메네기니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이자 매니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사랑에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면서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 오나시스의 장식품처럼 모든 행사에 동행하게 된다.

    그 결과 컨디션은 엉망이 되었고, 음역은 점점 좁아져 고음에서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다. 1960년 오나시스가 부인 티나와 이혼하자 칼라스는 남편 메네기니에게 노골적으로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 메네기니가 요구에 응하지 않자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다시 취득하면서까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고집했다. 당시 그리스는 법으로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칼라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오나시스는 칼라스와 결혼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칼라스를 결혼 상대자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 사실은 칼라스가 마흔이 넘어 극적으로 임신했을 때에 오나시스가 유산을 종용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에 눈이 멀었던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말을 따랐다.

    오나시스가 세계 최고의 갑부였기에 사람들은 칼라스가 그의 도움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렇지만 칼라스 주변 인물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오나시스로부터 받은 선물은 강아지 두 마리뿐이었고, 칼라스가 쓰는 모든 돈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한다. 오나시스와 사귀면서 칼라스는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음반녹음을 더욱 활발히 했고, 그 덕분에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게 됐다.

    칼라스는 1968년 그토록 사랑하던 오나시스가 미국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1917~1963)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1929~1994)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망연자실한다. 세기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커플이었기에 칼라스가 감당해야 할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사회적인 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후 칼라스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고 했는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1922~2004)가 공연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찾아 무대의 숙적이었던 테발디와 극적인 화해를 했다. 그러고는 파리의 아파트에만 머무르면서 세간의 동정과 비웃음을 피했다.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1960년대 ‘선박왕’오나시스와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마리아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는 1969년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아’에 출연해 야심 찬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10년 전 무대에서 보여준 오페라 ‘메데아’에서의 성공은 영화 스크린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또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면서 후학들을 가르쳐보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옛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이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1921~2008)를 비롯한 지인들의 설득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에 이르는 세계투어 공연에 나섰다. 이때 그의 목소리는 과거의 칼라스를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칼라스는 칼라스였다. 특유의 음악성과 표현력으로 무대를 장악한 그의 공연은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관객들은 칼라스의 주옥같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 있는 칼라스의 전설적인 아우라(Aura·고고한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4년 이화여대 대강당에 섰던 그는 그해 일본 삿포로 공연을 마지막으로 1차 투어공연을 마무리했다.

    “오나시스가 죽은 날, 그녀도 죽었다”

    1차 투어를 통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 무대라는 것을 깨닫고 2차 투어를 계획하던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원망과 증오로 점철되어야 할 존재였건만, 그때까지도 칼라스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변함없이 오나시스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라스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다시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 후 쓸쓸하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칼라스의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나시스가 죽은 날 그도 함께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소프라노의 음역은 보통 콜로라투라, 레제로, 리릭, 아질리타, 스핀토, 드라마티코 등 여러 영역으로 나뉜다. 보통 소프라노는 두 영역을 소화할 수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높은 영역에서 낮은 영역으로 내려오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또한 같은 영역의 소프라노일지라도, 작곡자에 따라 적합한 소리의 질감, 크기, 색깔 등이 다르다. 그런데 칼라스는 특유의 강한 표현력과 데뷔 때부터 그를 괴롭힌 고·중·저음이 각기 다른 자신만의 소리를 살려내 성공했다. 음반으로 들으면 그의 성량이 아주 클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다지 큰 성량의 소리도 아니었다. 극적인 표현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최고의 인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현재까지 소프라노 역사상 모든 영역을 뛰어넘고, 메조소프라노의 역까지 소화할 수 있는 가수는 칼라스밖에 없다. 칼라스는 어린 시절 연습벌레였고, 자라서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훈련을 통해 완벽한 테크닉을 구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랑을 좇다가 음악이 망가졌고, 다시 음악을 찾았지만 사랑이 죽자 그녀도 따라 죽었다.

    클래식계의 거장들이 죽음과 동시에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칼라스는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현재 칼라스에 열광하는 사람 대부분은 칼라스의 노래를 실제 들어보지 못한 세대이지만 실제로 들리는 음성 이상의 감동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칼라스는 사랑하는 남자의 연인은 될 수 없었지만 만인의 연인이 됐다. 그에 대한 사랑은 세대에서 세대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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