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부부가 합쳐 홀인원 6번 한사람 있으면 나와봐!”

아내와 골프, ‘선택’ 아닌 ‘필수’

  • 박용민 전 두산기업사장·춘천컨트리클럽사장

    입력2006-10-13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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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제가 껄끄럽다. 둘이서 즐기는 일을 세상 사람이 다 읽어볼 수 있게 펴놓으라니….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야밤의 일이 아니라 대낮에 태양 아래서 즐기는 일이니 팔불출 소리들을 줄 뻔히 알면서도 글을 내민다.》
    서양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우리네 정서는 그렇지 않다. 오죽 못났으면 그 좋은 친구들 제쳐 놓고 허구 헌날 여편네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골프를 즐기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벌써 귓전에 들 려오는 것 같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실은 집사람이 내 뒤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클럽을 휘두르는데 말이다. 20여 년 전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이었다. 골프에 미친 놈이란 소리를 듣던 때라 노 는 날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오금이 쑤셨다. 마음은 이미 골프장에 가있는데 마누라는 눈치도 없이 한가할 때 책이나 읽으란다. 다행히 우리집 베란다에 나서면 가물가물하게 동서울 CC가 보인 다.나는 일본 특파원 시절 구입한 망원경을 꺼내들고 초점을 골프장에 맞춘다. 파란 페어웨이 한쪽이 눈에 들어오는데 더는 견딜 재간이없다.부엌일을 하던 집사람이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처량하게 여긴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면 2만원쯤되는 돈을 내 주머니에 찔러 주며 “갔다 오세요” 하더니 골프가방을 내오며 피식 웃는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꽤나 염치 없는 놈 이다.기다렸다는 듯이 부랴부랴 골프채를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그때만해도 골프장에는 지금같이 손님이 붐비지 않아 말만 잘하면 조인(join)이 가능했다. 정말이지 좋은 시절이었다.

    잘 아는 K프로에게 부탁해 마침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부부와 조인해 몸을 풀기 시작했다. 두 분은 서로 코치 해가면서 너무 다정하게 플레이를 즐겼다. 전반 9홀을 끝낼 무렵에는 그 노부부와 이런저 런 얘기를 나누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두 분은 30년 동안 작은 회사를 경영하다가 몇 달 전에 은퇴했다면서 일주일에 두 번은 어김없이 골프장을 찾는데 골프야말로 노부부의 낙(樂)이자 건강 비법이라 고 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내와 같이 한 미국 동서횡단 골프투어

    문득집에서 애들과 씨름하고 있을 집사람을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그때부터 골프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 맞은 일요일이니 애들 데리고 창경궁이나 돈 안 드는 남산이라도 올라야 하는 데무에 그리 좋다고 마누라와 애들 팽개치고 혼자 골프를 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날 해가 넘어갈 무렵 골프 백을 둘러메고 나오면서 집에 올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애들 이다 커 결혼해 나간다면 결국 둘이서만 여생을 보낼 텐데 어떻게하면 남은 인생을 멋지게 보낼 수 있을까. 내 딴은 제법 머리를 굴려 먼 훗날을 생각한 셈이다.

    그 후 나는 집사람에게 제일 먼저 운전을 가르쳤다. 지금은 너나 없이 운전을 하지만 그때는 운전면허가 있는 남자도 그리 흔치 않을때다. 싫다는 사람 윽박질러 열심히 운전을 가르쳤다. 그뿐인가, 골프 연습장에도 보냈다. ‘아내에게 세상 모든 일을 가르쳐도 운전과 골프는 가르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한번 손 대면 끝을 보는 성미인 집사람은 연습장을 3년쯤 거의 매일 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3년 동안 한 차례도 필드에 나가자는 말이 없었다. 얼마나 필드에 나가고 싶었을까. 하지만 우리집 주머 니 형편이 말이 아니니 언감생심 투정을 부릴까만…. 집사람은 연습에 연습만 거듭했고 나는 명동 뒷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골프 관련 잡지를 꾸준히 사다가 읽혔다. 엄한 사부(師父)가 된 것이다. 꿈 같 은 얘기지만 언젠가는 우리 둘이서 마음껏 골프 인생을 즐기자고 위로와 약속을 거듭하면서 골프장에 같이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른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월급쟁이(당시는 기자)를 믿 고 묵묵히 연습만 해준 집사람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어쨌거나 마누라 칭찬은 팔불출이라는데…).

    지난해 우리는 오랜 계획을 마침내 실천에 옮겼다. 더 늙으면 운전할 기력도 떨어지고 지팡이를 들고 다녀야 할 테니 더는 훗날로 미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환갑 진갑 다 훌쩍 넘어 70을 바라보지만 용기를내 미국의 동서횡단 골프에 도전한 것이다. 직접 차를 몰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라운딩을 하면서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골프여행을 한 것이다. 우리는 교대로 대충 100km로 운전하면서 피곤 을 줄였다. 오래 전에 집사람에게 운전을 가르쳐 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새삼 느꼈다. 로스앤젤레스가 뉴욕에서 보면 서쪽에 있으니 지도책을 펴들고 서쪽으로만 달렸다. 마을이나 주유소에 들러 골 프장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는 찾아간다.

    부킹은 무슨부킹. 골프장에 들어서면 목도 축일 겸 먼저 커피 한 잔을 따라 마시면서 지배인을 찾는다. 우리가 동서 횡단 골프에 도전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결국 27일동안 31개 골프장에서 하루 18홀, 어떤 때는 36홀을 돌아 모두 558홀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루도 쉬지 않고 플레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많은 곳을 찾아갔지만 운이 좋았는지 단 한 군데도 거절하는 데가 없 었기때문이다. 오히려 자기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라며 꼭 성공하라는 당부까지 보태주었다. 어떤 지배인은 건강 조심하라면서 다음에 닿게 될 골프장에 전화를 걸어주기도 했다. 또 핸디캡 증명을 보 고는 나이가 60이 넘었다고 그린 피를 디스카운트 해주는 곳도 있었다. 역시프런티어 정신을 높이 사는 백성들이라 우리네와는 다른 것 같았다.

    부부 골프가 즐거우려면…

    내가 골프장사장 시절 이런 부부를 만났다면 ‘부킹도 없이 무슨 골프냐’고 쫓아냈을 텐데…. 아침은 모텔(호텔은 감히 넘보지도 않았다)에서 주는 간단한 식사로, 점심은 골프장에서 파는 핫도그나 햄버거로 때웠다. 그래도 집사람은 즐거워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요일 새벽 미사는 거르지 않았다. 집사람은 우리에게 이렇게 여행할 수 있는 건강과 약간의 여유를 주신 성모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 다.

    나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 차례는 집사람과 골프를 즐긴다. 무슨 재미가 있냐고 친지들이 놀려대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내기 골프를 치기때문에 그런대로 재미있다. 내기 골프라니, 주머닛돈이 쌈짓돈 아니냐고하지만 우리 부부의 내기는 사정이 다르다. 물론 가끔 현금거래도 있고 저녁내기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이때는 조건이 붙는다.내 식성은 돼지고기 비계파다. 집사람은 생선을 즐기고. 진 쪽 은무조건 이긴 사람을 따라야 한다. 우리집 내기 골프 규칙 제1조다.

    이 밖에도 또 있다. 좀 구차스러워 내 놓기 부끄럽지만 내기는 내기니 어쩔도리 없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하기’ ‘이불 개고 방 청소하기’‘골프장에서 집까지 운전하기(이기면 맥주 몇 잔 마시 고 돌아올 수가 있고 음주운전으로 걸릴 염려가 없으니 나에게 이 내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등등. 우리집 자질구레한 일들은 내기에서 시작해 내기로 끝난다. 그렇지만 ‘밥상 차리기’ 내기 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사람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설거지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쌀 씻고 밥하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어찌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어떤 중소기업인은 억대 내기도 서슴지 않았다는데 (결국 경찰에 구속됐지만) 이 나이에 겨우 설거지 내기나 하니, 쯧쯧….

    사실 솔직히 말해 옛날에는 9홀에 10점을 접어주고도 내가 판판이 이겼는데 세상이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요즘은 그렇지 않다. 10점이 9점이 되고 9점이 8점으로 좁아지더니 마침내는 9홀에 3점을 주고도 벅차 ‘설거지’ 횟수가 나날이 는다. 아무리 세월은 흐르고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억울한 일이다.

    부부 골프는 많은 여건이 맞아야 한다. 먼저 두 사람이 다 건강해야하고 서로 골프를 좋아하고 또 골프를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 둘만 가질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있어야 하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약간 의여유(주머니 사정)가 필수 조건이다. 욕심을 보탠다면 핸디캡이 엇비슷해야 한결 재미가 더하다. 그래야만 골프장 마샬이나 다음 팀의 눈치 보지 않고 여유있게 플레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깊은 애정이 속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골퍼들이 경험했겠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 미운 사람과 5시간이나 함께 플레이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기 때문이다.

    도전이 있어 즐거운 운동, 골프

    우리 부부가 아직 못 이룬 것은 일주일에 5일 연속(주말은 부킹 사정 때문에)으로 전국 108개 골프장을 돌면서 골프를 치는 것과 미국 북쪽 끝에 해당하는 시애틀의 캐나다 국경에서 출발, 로키산맥을 지 나플로리다 남쪽 끝까지 남북종단 골프를 치는 것이다. 물론 하루도 쉬지 않고 연속으로…. 주위에서는 꿈도 야무지다고 코웃음을 치지만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 시간만 나면 국내 골프장 지도와 미국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둘이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것이 희망에 찬 새즐거움이 되고 있다.

    골프는 적어도 우리 부부에게는 마약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아들놈에게는 권하지 않을 생각이다. 골프를 빼면 우리 부부는 논에 꽂아놓은 허수아비같은데 자칫 아들에게 허수아비 가정을 갖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부부의 화제는 자나 깨나 골프다. 밥을 먹다가도 TV프로에 골프 중계가 나오면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밥상을 들고 TV 앞으로 다가간다. 박세리와 김미현이 한참 날릴 때는 며칠 밤을 둘이서 뜬눈으로 지샌 날도 많다. 나는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 유명선수들의 이름을 자주 까먹지만 집사람은 골프 인명사전이다. 웬만한 선수의 과거 경력은 물론 스윙 폼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아내고 흉내까지 내니 말이다.

    내 골프 경력 25년에, 또 집 사람의 골프 경력 20년. 골프를 치자는데 거절해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 좋은 말로는 골프 마니아라고 하지만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골프에 한이 맺히거나 골프에 미친 부부 임이 틀림없다. 우리 부부의 자랑이라면 그 어렵다는 홀인원을 번갈아가며 세 번씩 기록한 것이다. 친구들과 골프 얘기를 하다가 내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이 가운데 부부가 합쳐서 홀인원 6번 기록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구!” 사람 욕심은 끝도 없나 보다. 우리는 남이 평생 한 번 기록하기도 어렵다는 그 홀인원을 몇 차례 더 기록하고 싶으니….

    골프는 어째서 그리 재미있을까? 거기에는 도전이 있기 때문이다. 몇 십년을 플레이를 해도 한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샷을 날릴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항상 새로운 조건에서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해볼 만한 일인가 . 비록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지만 도전이라는 매력만은 뿌리칠 수가 없다. 지금도 골프 약속이 있으면 전날 밤 잠자리에서 18홀을 헤맨 후 잠을 청한 다.그뿐인가. 집을 나서기 전에 우리는 서로 격려를 잊지 않는다. 헤드업 하지 말라든가 스탠스에 신경 쓰라는 등등. ‘골프에 문제가 있다면 너무 너무 재미있는 것이 문제’라는 골프 성현들이 남긴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골프를 즐 기고 싶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골프장을 찾지 못하는 많은 분께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 이런 글을 쓰기가 더욱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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