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사가 2000년 12월 프레시움을 개관하면서 우리나라도 신문박물관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세계 유수의 신문박물관을 통해 세계 신문의 역사는 물론 우리 신문의 발전사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한국 최초·유일의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박물관 개관을 위해 실무진들이 한창 바쁘게 일하던 작년 한 해, 나는 몇 차례 서울에 와서 박물관의 도면을 보면서 전시물의 배치, 크기, 내용 등에 관해서 자문하였고, 일본에서도 이 메일로 보내주는 파일을 검토해서 수정·보완을 거듭했다. 박물관 측이 개관행사에서 나를 자문위원으로 소개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은 동아일보만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주류는 언론의 역사가 핵심을 이룬다. 개화의 여명기에 발행된 국내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부터 시작하여 혁명적인 선각자 서재필 선생이 창간한 민간지 ‘독립신문’과 한말 민족지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황성신문’, ‘뎨국신문’과 같은 민족지들로 이어오는 한국언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추상 같은 항일논조로 치열한 무장 의병활동에 불을 붙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도 신문이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발행된 동아일보, 조선일보 관련 자료들과 광고의 변천, 신문 만화, 연재소설 등 신문의 여러 모습과 광복 후 역사의 큰 고비를 기록한 신문지면 등이 종합적이고 균형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신문박물관의 개관으로 격동의 현대사를 당시의 지면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금싸라기 같은 공간을 수익성이 없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신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학습장으로 만든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몇십년 동안 애써 모은 내 자료를 양도·임대한 것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신문박물관이라는 동아일보사의 공익적 취지에 찬동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의 영어 명칭 프레시움(Preseum)은 프레스(Press)와 뮤지엄(Museum)을 합성해 만든 조어(造語)다. 워싱턴에 있는 뉴지엄(Newseum: News와 Museum의 합성)과 견줄 만한 단어다. 일본의 신문박물관은 뉴스파크(News Park), 뉴스 역사의 공원이라는 뜻이 된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에는 5000여 점의 자료가 소장돼 있다. 그 가운데는 내가 언론사(言論史) 연구를 처음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부터 모아온 추억의 자료들도 포함돼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일보의 맞은편 국제극장 뒤쪽 큰길가에도 보문서림이라는 고서점이 있었고, 인사동에는 경문서림, 한국서적과 같은 단골집들이 있었다. 언론사 관련 자료를 찾는 사람도 별로 없던 시기였기에 나는 그런 고서점을 즐겨 찾았다. 그러나 자료 수집도 어느 단계를 지나고 나면 보관이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혼자 지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수집가들이 비슷한 과정과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동아일보에 양도한 자료 가운데는 역사적 사료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 많다. 신문이 85종이고, 그 외에 잡지, 언론관련 서적 등이 있다. 신문 가운데는 ‘황성신문’(61점)을 비롯하여 ‘대한매일신보’(2), ‘만세보’(45), ‘한성신보’(8), ‘대동신보’(1), ‘경향신문’(한말 발행 22점), 최남선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신문 ‘붉은져고리’(8) 등의 귀중한 한말 신문이 있었고, 일제치하의 ‘중외일보’(1), ‘조선중앙일보’(3), ‘매일신보’(18), ‘경성일보’(42), ‘국민신보’(2), ‘조선신보’(1), 1945년 광복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속간호도 있으며, ‘조선인민보’(46), ‘해방일보’ 같은 좌익 신문은 광복 후 좌익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담은 신문들이다.
대한매일신보사에 걸렸던 태극기와 유니언 잭
호외도 237종이 있다. 1951년 4월7일자 서울신문이 보도한 ‘38선 전면돌파’를 비롯하여, ‘이기붕 일가 자살’(1960.4. 28), 5·16의 발발을 알리는 ‘군부 쿠데타’(1961.5.16) 등은 수많은 역사적 대사건을 단 1분이라도 근접한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알리려 했던 기록들이다. 통신은 광복 후에 발행된 여러 종류를 포함하여 29종이 있고, 잡지 가운데는 한말에 발행된 ‘조양보(朝陽報)’, 일제하의 언론 전문지 ‘쩌날리즘’, 광복 후의 ‘민성(民聲)’ 등이 있다.
내가 보관하던 유물 가운데 3점은 박물관에 양도하지 않고 임대하는 형식으로 전시하도록 했다. 1904년에서 1910년까지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사’에 게양됐던 태극기와 영국 국기 ‘유니언 잭’, 그리고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裴說: Ernest Tho- mas Bethell)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집(輓詞集)이 그것이다. 대한매일신보에 걸려 있던 태극기는 흰 무명 천에 태극의 붉은색과 푸른색 대신 검은색의 천을 덧대어 박음질한 것이다. 4개의 검은색 괘(卦)도 천조각으로 박음질했다. 다만 현재의 태극기와는 태극과 4괘의 위치가 달라서 상하 어느 쪽으로 걸어도 맞지 않는다. 그 태극기가 지닌 역사적 상징성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중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태극기 연구가들에게는 매우 흥미있는 실물 자료가 될 것이다.
유니언 잭은 일본 경찰이나 헌병대가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임을 선언했던 상징물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로서 이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이끌고 있던 양기탁(梁起鐸) 선생은 일본 경찰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문사 안에 기거하면서 피끓는 구국 언론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었다. 일본이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위해 영국에 끈질긴 외교교섭을 벌이던 때였다. 당시 영국의 ‘데일리 미러(Daily Mirror)’는 1908년 8월5일자에 “유니언 잭이 양기탁을 보호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유니언 잭이 옥상에 휘날리던 대한매일신보사 건물은 일본 경찰이나 헌병대가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것이다.
1909년 5월1일 배설이 36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을 때에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전국에서 답지했다. 박은식, 양기탁, 박용규를 비롯, 각계 각층, 지방의 이름없는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런 마음을 담은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정성스럽게 배접(褙接)한 만사집을 배설의 아내가 영국으로 가져갔고, 영국에 유학중이던 내가 찾아내 유족으로부터 양도받아 한국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1930년대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교재는 20여 년 전에 고서점에서 구입했던 것인데 1999년에 LG상남언론재단에서 영인본을 만들어 발행했다.
발행되는 시점에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물건이 신문이다. 큰 사건이 일어나면 길거리에는 호외가 낙엽처럼 흩날리고 누구나 집어서 읽지만 곧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신문은 더없이 소중한 역사의 타임캡슐이 된다. 선악이 공존하는 사건의 현장에 가장 근접했던 증인이면서 흘러간 시대의 흐름을 비춰주는 역사의 실록이 되고, 서민의 애환이 담긴 귀중한 보물로 승격한다.
한 세기를 넘기는 동안 이 땅에는 수많은 신문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당대의 여론을 좌우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위력을 지녔던 신문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경우도 있다. 크게 떨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신문도 있다. 이 소중한 유산들이 일제치하와 광복 후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많이 유실되었다. 도서관에서도 50년대 이전의 신문은 희귀본, 또는 귀중 장서로 분류되어 열람이 어렵다. 열람자의 손이 닿거나 복사 과정에 지면이 마모되고 손상되기 때문이다.
요코하마의 뉴스파크
이 귀한 신문들을 모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일반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신문박물관이다. 국내에도 출판박물관, 잡지박물관은 있지만 언론의 주역인 신문박물관은 뒤늦게 마련되었다. 신문박물관은 언론의 역사만 아니라 현대사의 축도(縮圖)가 되어야 한다. 역사학자, 언론전공자, 그리고 우리의 정치, 경제 문학과 문화, 사회의 지난 일들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역사의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한말과 일제의 식민지 치하 엄혹한 검열로 압수당한 지면은 역사의 살아있는 교재가 될 것이다.
일본의 신문박물관 뉴스파크(News Park)는 동아일보의 프레시움보다 2개월 먼저인 2000년 10월13일 요코하마(橫濱)에서 문을 열었다. 요코하마는 도쿄와 가깝기도 하지만, 일본 신문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우리나라의 ‘조보(朝報)’에 해당하는 전근대적 뉴스 전달매체가 있었다. ‘가와라반(瓦板)’으로 불리는 것으로, 에도(江戶)시대에 뉴스성 있는 내용을 목판이나 흙으로 만든 토판(土版)으로 인쇄한 것이다. 이 소식지는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팔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요미우리(讀賣)’로 통칭하였는데, ‘가와라반’으로 불린 것은 에도(江戶)시대 말기부터였다. 만드는 방법은 기와(가와라)를 만드는 점토를 편평하게 굳혀서 가볍게 구워 판목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서양식 근대신문의 발상지는 요코하마였다. ‘내외신문(內外新聞)’(1865)은 미국 국적을 가진 일본인 조셉 헤코(Joseph Heco)가 일본인들의 협력을 얻어 요코하마에서 발행한 것으로, 외국 신문 번역이 주된 내용이었다. 1867년 요코하마에서 ‘만국신문(萬國新聞)’을 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베일리(Buckworth M.Baily)였다. 일본 최초의 일간지 ‘요코하마매일신문(橫濱每日新聞)’이 창간된 것은 1871년 1월28일(음력으로는 그 한 해 전인 메이지 3년 12월8일)로, 일본 언론 역사상 최초의 일간지인 이 신문이 발행된 장소에는 ‘신문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신문박물관은 가나가와 현청 바로 옆에 있는 요코하마 정보문화센터 건물 5층을 차지하고 있다. 지하철에서는 걸어서 10분, 버스는 ‘현청 앞’ 정류장에서 1분 거리다. 박물관은 일본신문협회가 1987년부터 설립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 것은 1997년으로 요코하마시의 협조로 확보한 부지에서 기공식을 가졌고 이듬해에는 박물관을 관리할 일본신문교육문화재단을 발족시켜 자료수집과 개설작업을 시작했다. 개관 특별기획으로는 ‘20세기의 호외’ 전시회를 가졌다.
신문의 과거와 현재 담담하게 정리
박물관은 연면적이 1600여 평에 달한다. 1층 현관에는 대형 윤전기가 2층과 3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볼 수 있도록 세워져 있다. 2층에 있는 ‘뉴스파크 시어터’에는 ‘알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온 언론의 역사를 기록한 15분짜리 영화를 상영한다. 박물관은 크게 ‘역사 존(zone)’과 ‘현대 존’으로 나뉘어 있다. 3층의 ‘역사 존’은 신문 발생기부터 다매체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6개 시대로 나눠 보여준다.
신문의 발생기(1850∼1900)
근대신문의 성립기(1901∼1930)
전시 통제기(1931∼1945)
신문의 고도 성장기(1961∼1979)
다(多)미디어 시대의 신문(1980∼2000)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창간호(조선일보는 창간 기념호)도 복사된 지면이 전시되어 있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말소한 동아일보 지면, 1940년 8월의 조선일보 폐간호, ‘한겨레신문’ 창간호도 복사본으로 전시돼 있다.
4층의 ‘신문 라이브러리’는 일본신문협회에 가맹한 150여 개 일간신문의 창간호의 지면을 마이크로 필름, CD롬 등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저널리즘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서적, 각 신문사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데이터를 단말기를 이용하여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든 신문 전문도서관이다. 5층 ‘현대 존’의 취재부문은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사진부, 항공부, 과학부, 운동부, 학예부, 문화부, 지방부, 외신부로 나누어 기사를 어떻게 취재하여 신문을 제작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편집 시어터(theater), 통신사, 전자편집, 광고, 제작, 발송, 판매, 사업활동(문화, 스포츠, 교육, 복지사업) 등으로 구분하여 신문 운영과 관련한 여러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일본은 신문 발행 부수 세계 1위(1999년 현재 일간지 발행부수 7222만부), 인구 1000명당 보급률 제2위(1위 노르웨이)의 신문 대국이다. 군국주의 시대에는 신문이 침략 전쟁을 부추기고, 국민여론을 오도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와 같은 대언론인들의 유품 또는 사진을 전시하여 신문의 과거와 현재를 담담하게 긍정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스모 경기장 바로 근처에 있는 ‘에도-도쿄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도쿄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그러나 1873년에 준공되었던 ‘조야신문(朝野新聞)’의 사옥이 재현되어 있고, 에도 시대의 출판문화와 서적의 유통에 관련한 전시공간이 꽤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신문박물관 외에도 독일, 벨기에, 덴마크 등 유럽과, 미국, 터키와 같은 나라에도 신문박물관은 있다. 가장 규모가 크고 첨단시설을 갖춘 박물관은 미국의 뉴지엄(Newseum)이다. 비영리재단인 ‘프리덤 하우스’가 설립한 박물관으로,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의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국제자유언론단체인 프리덤 포럼이 5000만 달러를 들여 1997년 4월에 만들었으며 ▲상호작용 뉴스룸 ▲투데이 뉴스 ▲방송 스튜디오 ▲뉴스역사전시관 ▲언론인 ▲자유공원 등 6개 주제관으로 구성돼 있다.
7200평방피트의 넓이에 신문, 방송매체와 뉴미디어를 포함하는 ‘뉴스 박물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뉴스 역사 갤러리’에는 구두(口頭)로 뉴스를 전파하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뉴스의 역사를 보여준다. 특히 126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비디오 뉴스 벽 아래쪽에는 50여 개국에서 보내온 그날 1면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등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영국에는 신문박물관이 없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문을 소장한 신문도서관(Newspaper Library)과 1998년에 신축 개관한 대영도서관은 박물관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신문도서관은 런던의 중심가에서 벗어나 북쪽에 위치한 콜린데일(Colindale)에 있다. 이 도서관은 1801년부터 현재까지 200년간 런던에서 발간된 모든 일간지와 주간 신문, 그리고 지방지를 포함하여 세계 각 나라의 주요 언어로 발행된 신문이 보관되어 있다. 1999년 3월 현재 제본된 신문이 65만 권이 넘고 일간지와 주간지 또는 잡지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촬영한 분량이 32만 릴(reel)에 달한다. 그 후에도 계속 분량이 늘어나고 있다.
소장품 가운데는 19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신문도 있다. 대표적인 영 일간지 ‘고베 크로니클’(1900년부터는 ‘재팬 크로니클’로 개제)은 1900년 3월부터 1938년까지의 지면이 무려 60개의 릴로 필름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코리안 리퍼블릭’(현 ‘코리아헤럴드’)과 북한의 ‘평양 타임스’도 마이크로 필름으로 일부 보관되어있으며, 일본의 ‘재팬메일’, ‘아사히이브닝 뉴스’, ‘오사카 마이니치’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볼 수 있다.
대영도서관은 멀리 1753년에 제정된 영국 박물관법을 근거로 하여 개관한 대영박물관의 일부였다. 그러나 100년 뒤인 1857년 직제상 도서관과 박물관이 분리되어 독립된 두개의 기구가 되었는데, 두 기구는 1997년 11월24일까지는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도서관은 1998년에 역사적인 장소였던 대영박물관 건물을 떠나 지하철로 한정거장 떨어진 세인트 팬크라스(St. Pancras)역 근처로 이전했다. 새로 지은 도서관은 20세기에 건축된 영국의 공공건물 가운데는 규모가 가장 크다. 건립이 추진된 것은 1962년인데, 1976년에 건물 부지를 매입하고 그 2년 뒤에 세부 계획이 확정되었다. 건축가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건축학과 과장이었던 존 윌슨 교수다. 1984년에 착공하여 일반에게 완전 개방된 것은 1998년이었으니, 공사 기간만 15년, 계획부터 완공까지는 약 30년이 소요돼 그 건립 과정을 ‘30년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건축 기간과 규모에서 런던의 명소인 세인트 폴 성당(건축에 36년이 소요되었다)과 비교할 만한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그러나 겉모습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결코 웅장하거나 대단히 큰 건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건물 안에 들어가 전시된 건물의 모형도를 보고 전시실을 둘러보고야 비로소 이 건물의 규모에 놀라게 된다.
넓은 도서관 마당의 입구 쪽에는 12피트(3.65m) 높이의 우람한 뉴턴(Isaac Newton)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구부린 자세로 삼각 컴퍼스를 가지고 지구의 넓이를 재는 뉴턴의 모습은 이 도서관이 인류가 진리를 탐구하고 이를 후세에 전수하는 지식의 보고이며 문화의 전당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다. 7층 건물 가운데 4층은 지하에 있는 서고(書庫)인데 340km에 달하는 서가 가운데 240km가 이동식으로 되어 있어서 공간의 활용이 매우 효율적이다.
조선조 금속활자 책도 전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도서관 건물 안에 있는 전시실이다. 3층으로 된 전시공간에는 세계적인 희귀 도서를 비롯하여 지도, 음반 등에 이르는 역사적 유품들이 체계적이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잘 전시돼 있다.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세종대왕 때에 갑인자(甲寅字)로 인쇄한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1434년; 세종 16년 인쇄)라는 한국의 책 한 권인데, 한국은 인쇄술에 있어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개발하고 완성시킨 나라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다. 서양 인쇄술의 원조가 된 구텐베르크가 42행으로 조판한 성경을 인쇄한 해가 1455년. ‘춘추경전집해’는 그보다 20년이 앞서 인쇄된 금속활자본이다.
‘대영도서관의 보물들(Treasures of the British Library)’(1996, 163쪽)에는 이 도서관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부터 한국의 그림과 서적들을 수집했다고 쓰여 있다. 구한말 외교관으로 한국에 왔던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서지(書誌)학자인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1894년에 ‘한국서지’를 발행할 때에 이미 대영도서관이 소장한 한국의 책들을 조사한 것으로 보아 대영도서관은 19세기부터 적지 않은 한국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신문의 역사는 1883년 10월31일에 창간된 ‘한성순보’에서 시작되었다. 1896년 4월7일에는 서재필 선생이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민간신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와 같은 한말의 민족지들이 창간되고 남궁억, 이종일, 장지연,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같은 우국적인 언론인들이 필봉을 들고 기우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다.
일제치하에서는 직업적인 언론인들과 함께 다수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문인들이 신문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신문박물관은 개화와 자주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역사를 기록해 온 언론인들과 만나는 장소, 신문이 기록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