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서부의 민간 연구단체인 태평양위원회는 지난 11월5일 서울에서 한국프로젝트 최종보고서인 ‘한국 개편론(The Reshaping of Korea)’을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과 미국 양국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협조해 만든 것으로 한국의 경제와 정치개혁, 그리고 남북한 화해에 대한 견해를 담고 있다. 이 보고서의 요지와 해설을 소개한다.
이 위원회는 2000년 9월 한국과 미국의 각 분야 전문가 100여 명이 참가한 특별위원회를 구성, 중장기적으로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경제·정치적인 요소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한국상황 전반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다. 2000년 11월부터 2001년 5월까지 다섯 차례 회의를 거쳐 만든 60쪽 분량의 최종보고서를 작성했다. 협의회는 이 과정에 그동안 존재가 미미했던 한국계 미국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위원회에서는 이 연구에 관여한 주요인사로 조지 F. 트레버튼(전 RAND 국제안보국방정책센터소장), 스펜서 H. 김(재미사업가), 마이클 팍스(전 로스앤젤레스타임지 부사장). 스콧 스나이더(아시아재단 한국지부장) 등을 꼽는데 한국 사람들에게 낯익은 인사도 적지 않다. 이 보고서 작성에 참여해 최종적으로 서명한 사람들 중에는 스티븐 보스워스(전 주한미대사), 도널드 그레그(전 주한미대사), 로버트 A.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장), 김경원(사회과학원장), 한승주(고려대 교수), 이상우(서강대 교수), 김달중(연세대 교수), 문정인(연세대 국제대학원장), 황우려(한나라당 의원), 손학규(한나라당 의원), 김기환(골드만삭스 국제자문)씨 등이 있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사려깊고 공정한 평가를 담아내려고 한 노력이 엿보인다.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도 하고 있지만 통치방식과 인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 그런 탓인지 이 보고서에 서명한 사람들 중 친여권 인사는 한두 사람을 빼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보고서의 내용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재미교포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비록 중국 현대화과정에 화교가 기여한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의 미래를 변화시켜 나가는 데 있어 그들의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권고한다.
보고서는 또 한국을 미국의 동맹국가로서, 무역파트너로서, 성공적 경제발전의 모델로서, 그리고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라고 평가한다. 이처럼 한국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이해 수준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다음은 이 보고서 본문을 요약한 것이다.
1. 서론
2000년 6월에 이루어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12월의 노벨 평화상 수상 등으로 남북한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보고서는 최근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주시하면서, 향후 5년에서 10년 동안 한국과 한반도의 변화를 이끌 힘에 대해 분석했다. 한국정부에 정책적 지침을 제시할 목적으로 작성한 보고서는 아니다. 개인과 기업, 그리고 그룹 등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향후 한국의 변화를 이끌어갈 원동력은 기업, 금융, 노동, 행정 분야에서의 경제개혁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두번째 원동력은 정치분야의 개혁이다. 3김(金) 시대의 청산과 대통령의 제왕적 통치스타일의 변화, 부정부패와 하향식 정치구조의 변화 등이 해당된다. 세번째 원동력은 남북한의 화해 달성이다.
본 보고서는 상술한 원동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북한 경제모델의 변화와 정치 퍼즐에 대한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한국과 미국, 그리고 기타 역내 국가들과 평양과의 향후 관계개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로드맵(정책지도)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경제적 구조조정
경제의 구조조정은 한국이 향후 아시아 지역 내에서 자신의 위상과 입지를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한국은 IMF 사태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지난 3년간 5%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세계경제의 변화에 잘 적응해 왔다. 그러나 향후 일본의 해외투자 증가, 중국의 고속 경제성장, 그리고 한국 제조업의 회복 불능 등과 같은 상황을 예상할 때 한국경제의 구조조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다.
특히 한국 기업은 인맥 중심 경영과 불투명한 경영방식에서 빨리 탈피해야 한다. 한국경제의 구조조정 성공 여부는 향후 남북경협의 성공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대북사업이 지금처럼 정치논리로 계속 진행된다면 한국의 경제개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북한에도 좋지 못한 선례가 된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대북 경제지원은 한국경제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3. 정치현안
보고서는 한국정치의 통치방식이 ‘법치(法治)’가 아니라 ‘인치(人治)’이므로 2002년 대선을 목전에 둔 상황에 분열과 혼란이 극심할 것으로 전망한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 햇볕정책과 대북사업으로 남남갈등이 매우 심각하다. 내년 대선에서는 정책대결이 아닌 인물 위주의 정치 풍토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예컨대 정당 내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들은 경선에 불복해 탈당과 신당 창당을 통해 후보로 나설 것이 분명하다. 이는 지난번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의 경험을 근거로 한 전망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레임덕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올 것이다. 그 까닭은 한국의 지지부진한 개혁 속도에 있다. 개혁이 제대로 안되는 이유 중 하나는 오랜 망명과 감옥 생활을 해야했던 김대통령의 정치적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다. 김대통령은 능력보다는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정부의 요직을 배분했다. 이들의 능력은 일반 공무원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김대중 정부의 개혁 구호는 거창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하다.
한나라당은 대북 포용정책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차별화를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대북사업과 교류에 시민단체의 역할을 중시하는 대신 정부 차원에서 기부방식으로 지원하는 데는 반대하면서 상호주의와 투명성에 바탕한 대북지원 원칙을 강조한다.
4. 새로운 정치
보고서는 지역주의, 군, 세대교체, NGO 등이 한국 정치에 주는 의미와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최근 통일부장관의 불신임안과 경제개혁, 대북 지원과 관련한 국회의 의사결정 투표과정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정치에서 지역주의의 골은 매우 깊다.
군이 정치의 핵심에서 제거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도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공조했다는 분석이 있다. 현재와 같은 무질서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군부쿠데타에 관한 말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군부의 정치 개입 가능성은 현저하게 감소된 것 같다.
세대교체에 대해서는 통일문제와 대북관, 그리고 대미관에서 세대간 인식 격차가 뚜렷하다. 세대교체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일 것이다. 하나는 3김시대가 계속되고, 이들의 후계자 역시 보스주의, 지역주의, 권위주의, 금권정치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가 정치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정치변화를 보기가 어려울거라는 점이다. 또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NGO와 여성세력에 대해 주목한다. 이들의 등장으로 한국정치에 세대교체 바람이 불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5. 재미교포의 역할
보고서는 북한과의 경제교류와 사업 활성화를 위해 재미교포를 적극 활용할 때가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재미교포의 활약이 아직 중국 화교의 역할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미국에서 입지가 튼튼해지면서 해외에서의 활약도 점차 확대될 것이다. 이같은 분석은 미국사회에서 교포들의 활발한 사회활동과 능력있는 교포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최근 10년간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의 대부분은 중산계층이지만, 미국 현지에서 언어 등의 문제로 원하는 직종에 종사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한국의 비즈니스를 재벌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연계해서 사업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시민단체와 같은 비영리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교포들의 사회활동이 초기에는 이민자들의 단순한 안식처이자 향수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지만, 활동범위가 확대되면서 이제는 문화 변혁을 끌어가는 조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사회단체가 우후죽순같이 생겨나면서 대장은 많아도 대원이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포 사회단체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50만명에 달하는 친지들과 상봉하기 위해 한반도의 화해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싶어한다. 교포 2세들은 대북 인도주의 지원사업에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이제 미국도 북한과 사업을 벌이고 지원하는 데 재미교포들을 적극 활용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보고서는 남북화해가 단기적인 시일 내에 달성되기 어렵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 까닭은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문제점, 북한의 독자적 외교 및 성과, 남북관계 개선을 저해하는 이슈 등에 기인한다. 북한의 대남 테러역사와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감안하면, 남북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이 화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북한 변화에 관한 김대통령의 낙관적인 견해가 오히려 남남(南南)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 아울러 서울의 언론이나 여론지도자들의 대북 비판을 김대통령이 용납하지 않은 점도 남남갈등을 심화시킨 요인이다. 2000년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해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북한은 유럽연합(EU) 국가 중 2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북한의 이러한 외교적 행보는 독자적으로 대외관계를 개선하려는 평양의 노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보고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비용을 얼마나 지불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북한에서 이득을 본 적이 없는 이상, 경제활동은 정치적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제약과 상호주의 요구가 김대중 정권이 남북경협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대북 지원사업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물을 해소하는 것이 관건이다.
일례로 현 상황에서 한국이 대북 지원사업을 계속하려면 사회복지문제와의 충돌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 또 북한이 상호주의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는 총체적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만약 북한이 동시적인 상호주의를 지키기 어렵다면 전향적으로 비동시적인 상호주의 움직임이라도 보여주어야 대북 지원과 남북경협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 북한에 경제 원조를 할 경우, 북한에서도 교류 확대를 위해 안보 분야에서 상호주의 움직임을 보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북한 경제의 변화에 대한 이해
보고서는 북한이 택한 변화가 전략적인 것인지, 아니면 난국 돌파를 위한 전술적인 것인지에 따라 한반도의 미래가 달리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김정일이 북한이 처한 경제 위기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주체사상 구호를 외쳐대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불가피하게 변화를 선택할 시점은 아무것도 팔 물건이 없고 교역할 것도 없을 때일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면, 북한은 원상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북한은 경제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 외부적인 환경과 요건, 예컨대 미국의 경제제재,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붕괴, 군사비의 부담과 자연재해 등에 기인한다고 자체 진단한다.
그러나 북한에 정작 부족한 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와 전문가들이며, 외부세계와 경제교류를 할 수 있는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더욱이 한국도 북한을 적극 도와줄 형편이 못되고, 재미교포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북한이 중국과 같은 발전 모델을 채택할 수 있을까? 북한과 중국의 여건을 비교할 때 개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권위기의 가능성이 중국보다 북한에서 훨씬 크므로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또 북한은 내수시장의 규모나 식량의 자급자족 상황 등 경제적 환경과 여건이 중국과 많이 다르다. 보고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이 경제발전노선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냐보다는 북한 스스로가 과연 이러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8. 북한의 정치적 변화에 대한 평가
북한의 정치적 변화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매우 회의적이다. 북한이 정치적으로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개혁을 유발할 수 있는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추구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북한 동포에 대한 김정일의 극심한 불신에 있다. 또 정치체제 면에서도 중국과 달리 전제주의 체제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적 개혁이나 변화를 기대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렇다고 정치적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북한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북한에는 진정한 의미의 민간단체가 없기 때문에 주민들 저항을 기대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NGO의 북한 활동이 적극 지원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NGO가 간접적으로나마 북한에 진입하여 지방행정과 당조직의 관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해볼 만한 일이다.
9. 로드맵의 준비
보고서는 북한과의 협상과 접촉, 대화와 교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른바 로드맵이 준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드맵 작성에 중요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제시한 안보의제를 북한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한국과 미국이 대북 협상을 하면서 어떻게 의제와 역할을 분담하느냐는 것이다. 북한과의 협상, 접촉, 대화 등에서 진전을 보기 위해서는 안보관련 의제의 해결이 전제돼야 한다.
또한 미국이 북한체제의 보장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북한체제의 보장선언은 미국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지만 북한에는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국이 역내의 군사적 균형을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보지 말고 북한체제의 안전을 미국이 보장해준다고 선언한다면, 향후 북한의 국방비 감축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한국 단독에 의한 대북 위협 가능성이 상승하므로 북한은 오히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요구하고 나설 것이다. 아울러 북한은 미국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기존의 4자회담이 양자간 또는 3자간 협상기회를 제공하므로 이를 부활할 필요가 있다.
해설 : 미국의 민간부문 활용방안과 관련하여
이 보고서는 미국이나 한국정부에 대한반도 정책이나 주요 정책 방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는 정계, 재계, 학계, 시민단체 리더 등 한국과 미국의 여론지도층 중에서 남한과 북한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대북사업에 재미교포들을 적극 활용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실제로 태평양위원회에는 재미교포가 다수 참석하고 있는데 향후 이들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에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므로 약속해주는 것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면 한국의 대북 위협이 상승할 것이므로 이를 우려하여 북한은 오히려 주한미군의 주둔을 요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논리다.
이번 태평양위원회의 보고서가 비록 민간차원에서 작성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행간에서 대(對) 한반도 정책 결정과 실행과정에 민간 분야를 활용하는 미국식 노하우를 엿볼 수 있다.
첫째, 미국은 대 한반도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 ‘비용 대 이익’, ‘주고받기’식의 비즈니스 접근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 한반도의 군사·안보적 가치를 등한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의 외교원칙, 곧 일방주의와 도덕적 실용주의 원칙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경제적 실리를 적극 추구한다는 의미다.
대북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줄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원회측은 대북사업에 재미교포를 적극 활용하라고 권고했는데, 이것은 한국이 대북사업을 독자적으로 하지 말고 미국과 공조해 하는 것이 좋다는 ‘충고’인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으로서는 독자적으로 대북사업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고, 또 우리의 경제 규모가 미국의 특수자본에 의해 쉽게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태평양위원회는 인적구성을 볼 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대 한반도 인맥을 대체할 목적에서 부시 행정부에 맞는 새로운 라인업으로 구축된 것 같다. 이러한 추측이 나름대로 타당하다면 우리도 현실적인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둘째, 현재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결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들의 출신과 성향, 그리고 인적 관계가 중요하므로 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결정에 영향을 끼칠 전문인력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더 세밀하게 관찰해 끈끈한 유대를 맺는다면 한반도 관련 정책에서 워싱턴과의 합의를 도출하기가 예상외로 쉬울 수 있다. 부시 행정부 들어 대 한반도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성향을 띠고 있다.
첫째 부류는 60~70대 연령의 친한파 인사들로서, 이들은 한국전쟁 이래 계속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어왔다. 주로 반공 성향이 강한 보수적인 공화당계 인사들이다.
둘째 부류는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 한반도 문제를 다뤘던 인사들이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야당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왔으며, 현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공감하면서 북한에 진출하는 데 한국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얻고 또 성과를 얻었다. 이들은 한국전쟁 경험이 없는 세대들로 대체로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의 연령층에 속해 있다. 이들은 특별히 북한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대북사업을 일종의 비즈니스로 접근하는 합리적 사고를 가졌다. 이들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의 입장에서만 한반도 상황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친한(親韓)인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셋째 부류는 기본적으로 공화계 성향을 지니면서 부시 행정부 출범과 더불어 다시 등장한 인물군이다. 이들은 김정일의 신뢰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투명성에 대한 검증과 상호주의를 결여한 김대중 정권의 대북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그룹이다. 또한 한반도의 군사·안보적 문제는 미·북 관계라는 인식을 포기하지 않은 인사들이다. 이번 태평양위원회의 구성원 면면을 보면 대개 이 그룹에 속하는 것 같다. 그중 클린턴 행정부 당시 역할을 했던 몇몇 인사는 정권교체와 더불어 배를 바꿔탄 것 같다. 또 새롭게 진입한 인사들, 특히 재미교포들이 눈에 띈다.
셋째, 팀 플레이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정보수집과 정보분석, 이를 활용한 정책결정, 그리고 필드의 실행 등 역할분담과 역할간 유기적 통합을 중시한다. 미국도 팀을 구성할 때 신뢰가 뒷받침된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팀과 별도로 비밀리에 개별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면 어떤 형태로든 그들 사이에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또 민간단체, 대학, 연구기관 등 다양한 라인을 활용해 민감한 정책결정으로 자칫 야기될지도 모를 정부 차원의 부담을 미연에 분산·해소시키는 목적도 있다.
넷째, 각종 민간 커뮤니티의 압력과 여론은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미국에서 민간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이유는 민간과 정부간 상호 조정된 역할분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민간전문가들이 효율적으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양성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또한 정책결정과정에서 언론을 활용하는 기술이 탁월하다. 정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언론과 민간은 원칙적 차원의 ‘알 권리’를 고집하기보다는 국익 차원에서 적극 협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조율되는 인상을 느끼게 한다.
태평양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상기할 것이 있다.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을 가질 때 ‘전략적 마인드’에 근거한 엔지니어링 어프로치(engineering approach)가 가능하다. 이번 보고서는 태평양위원회의 단순한 연구성과물일 수도 있지만, 향후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