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워커홀릭’ 삼성에버랜드 허태학 사장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다. 삼성의 서비스 분야를 개척한 산 증인. 허사장의 텁텁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드러운 경영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드라이브 허.’ 이것이 삼성그룹에서 불리는 그의 별명이다. 신규사업만을 전문적으로 추진해온데다 거의 모두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력은 그가 기획력과 추진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용인자연농원이란 브랜드를 삼성에버랜드로 바꾸고, 중앙개발이란 회사이름도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하고 나서 그가 이룩한 성과는 눈부실 지경이다.
하지만 허사장은 ‘외강내유(外剛內柔)’란 말로 자신의 내면은 매우 나긋하고 연약하다고 소개한다. 비록 외모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우락부락하지만 내면은 서비스업에 오래 종사하면서 많이 순치됐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사실인 듯하다. 삼성에버랜드에서 이룩한 성과 중에는 내면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경영이념 중 디자인경영과 고객만족경영이 그렇다.
삼성에버랜드의 CEO로서 그가 올린 가장 큰 성과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변화다. 그는 친절을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퍼뜨린 주인공이다. 서비스아카데미 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직원을 채용할 때 반드시 제가 면접을 봅니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서비스맨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직접 두 시간 정도 친절에 대한 교육을 시킵니다. 그런 다음에야 서비스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지요.”
친절의 벤치마킹, 전국민의 친절화가 모토
삼성에버랜드의 직원이 친절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벤치마킹을 하러 왔는데 이것이 1994년 서비스아카데미를 설립하게 된 이유다. 현재까지 서비스아카데미를 거쳐간 인원은 26만 명, 2001년 한 해에만 8만5000명이 교육을 받았다. 경찰청은 물론 국세청, 철도청, 은행, 언론사 간부들도 찾아왔다. 최근에는 병원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많이 입교하는데 예약하고 2개월간 기다려야 할 정도라고 한다.
서비스아카데미는 친절교육에 관한 한 어느 교육기관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다. 하지만 전국민을 매너와 에티켓을 갖춘 사람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는 허사장은 서비스아카데미를 독점적인 교육기관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래서 그는 다른 회사에서 이런 교육기관을 만드는 것을 장려하고 있으며 그 교육기관의 선생들을 연수시켜주기도 한다. 철도청을 비롯 한국야쿠르트, 교보생명, 삼성생명 등이 서비스아카데미를 만든 회사들.
“저희 나이 또래는 할아버지에게 예절을 배웠지요. 하지만 요즘은 입시지옥이다 뭐다 해서 가정교육이 잘 안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어쩝니까. 사회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바로 기업이 나서야지요. 우리는 상대가 인사 안하면 먼저 안합니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서로 돌아서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선진외국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문화가 없어요. 먼저 보는 사람이 합니다. 아이터치만 되면 인사합니다. OECD 가입하면 뭐합니까. 하는 짓들이 컨트리보이 스타일인데….”
그는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까지 우리가 일본경제를 따라잡을 수 없을 바엔 의식과 관행만이라도 일본을 누르자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위해 월드컵문화시민위원회와 연계해서 범국민적인 계몽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가 호텔신라에서의 24년 근무를 마치고 삼성에버랜드에 온 것은 1993년 9월. 두 달간 개발사업부 본부장으로 일하다 11월 대표이사 전무가 됐다.
“처음에 와서 보니까 참 촌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전직원을 모아놓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차산업에서 3차산업형으로, 자기중심적에서 고객중심적으로, 지역형 지방형에서 국가형 국제형으로, 내국인 중심에서 내외국인 중심으로 바꾸겠다, 이를 위해 친절·청결·고급·정보·종업원 만족을 실시하겠다고요.”
사명 바꾸고 ‘三間주의’ 선언
자연농원이란 브랜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팜랜드’라는 ‘지역적’인 이름으로는 외국인 유치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 외국인 관광객이 오지 않으면 그가 추구하는 월드클래스의 테마파크는 물 건너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삼성에버랜드라는 회사도 한계에 부딪칠 것이 뻔했다.
“자연농원은 선대회장(이병철 삼성창업자)께서 국토의 70%가 산지이므로 과수와 가축의 시험장으로 쓰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용인은 물이 별로 없어서 과일이 안됩니다. ‘살아서 진천, 죽어서 용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관이 썩지 않는다고 해 묘자리로 좋다고 해요. 그럼 축산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역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땅을 전부 나눠줬습니다.”
그는 이건희 회장에게 이름을 바꿔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당시는 이회장이 신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자’고 할 때였다. 허사장은 이왕 바꿀 바에야 최고로 하자며 월트디즈니를 비롯, 아이비엠, 코카콜라 등 세계적인 기업의 CI를 작업한 미국의 랜도(Landor)사에 의뢰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에버’와 ‘랜드’의 합성어인 에버랜드다.
“에버는 시간(時間)이고 랜드는 공간(空間)이죠. 그래서 인간(人間)을 포함해서 3간(三間)주의를 경영이념으로 정했습니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 나가자는 취지였습니다.”
골프장 브랜드도 그때 다 바꿨다. 안양골프장을 안양베네스트로 바꾸면서 다른 골프장에도 다 베네스트란 이름을 붙였다. 베네스트란 ‘베스트’와 ‘네스트’의 합성어로 최고의 보금자리란 뜻이다.
그 다음에 한 것이 인프라구축을 위한 투자다. 허사장은 삼성에버랜드 진입로를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늘렸다. 5000대밖에 수용하지 못하던 주차장을 1만6000대 수준으로 확장했다. 여름상품이 전혀 없어 여름이 극비수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소재로 한 상품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캐러비안 베이’라는 워터파크. 연기자도 내국인 일색에서 벗어나 외국인들을 상당수 채용했다. 총 6000억원을 투자해 삼성에버랜드를 사계절 놀이시설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월드클래스 테마파크로 격상시킨 것이다.
“당시에는 일년에 겨우 400만 명이 입장했어요. 2001년엔 915만 명이 다녀갔어요. 외국인도 50만 명이나 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거의 오지 않았지요.”
테마파크를 소개하는 외국 매거진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던 삼성에버랜드는 현재 세계 6위의 테마파크로 성장했다. 1위는 동경디즈니랜드이며 5위까지 디즈니랜드가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디즈니랜드 다음의 테마파크인 셈.
그러나 이런 하드웨어적 요소보다는 소프트웨어적 요소의 변화가 허태학 사장의 경영능력을 더 잘 보여준다. 고객만족 경영과 환경·안전·위생·디자인 경영을 부르짖으며 사원들을 독려한 결과 고객만족 부문에서는 국내평가기관으로부터 5년 연속 상을 받았다.
“우리는 무한정 문을 열어놓고 아무나 오기를 기다리는 사업이므로 환경 안전이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법규가 정하는 이상으로 해야 됩니다. 또 보여주는 비즈니스이므로 디자인도 특별해야지요. 직원들의 복장과 용모를 변화시키는 데 한 3년 걸렸습니다. 제가 부임하고 나서 한때 용인 땅에 무스가 동이 났을 정도니까요. 하하….”
그 결과 대만 디스커버리월드로부터 200만달러를 받고 테마파크 운영컨설팅을 따내는 감격도 누렸다. 대만 디스커버리월드 측은 처음에는 동경디즈니랜드와 접촉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버랜드를 둘러보고 컨셉트가 동경디즈니랜드보다 낫다고 판단, 계획을 긴급 수정한 것.
“대만 측 실무자들이 파크의 구성과 친절도에서 에버랜드가 일본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어요. 동경디즈니랜드에는 동물원이 없고 사계절 꽃축제라든가 워터파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떻게 그런 친절이 가능하냐는 말을 들은 게 더 기뻤습니다. 그래서 서비스아카데미를 보여줬죠.”
그는 삼성에버랜드와 서비스아카데미 외에 빌딩엔지니어링사업과 환경개발사업, 전문급식·식자재유통, 골프장사업 등도 펼치고 있다. 각 사업부가 모두 국내 톱을 달리고 있는 것도 그의 자랑거리. 이중 전문급식·식자재유통사업은 삼성에버랜드의 전체 매출액 7300여 억원 중에서 3000억원을 차지할 정도로 매머드급이다.
ROTC장교를 마치고 첫직장으로 삼성그룹에 입사해 서비스업종에 배치됐을 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서비스업은 경시되던 시절이었고 특히 호텔은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경남 고성의 유가(儒家) 가정에서 장손으로 자랐어요. 특히 조부님은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를 틀고 지내셨지요. 조부님은 제가 부친처럼 문하생이 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학교도 안 보내려고 해 그 지방을 떠나지 않는 조건으로 간신히 진주 경상대에서 농림학을 전공했지요. 봉제사 접빈객, 평생 제사를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것을 나의 본분으로 해야 가문이 영속된다고 믿으셨지요. 제 부친은 지금도 한복만 입고 지내십니다.”
그러나 집안의 아저씨뻘들이 “삼성은 뭐라도 다를 것”이라며 “서비스업이라 해도 열심히 해보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며 원군으로 나서 겨우 조부의 허락을 받았다. 기획실에서 3년간 근무하던 그가 ‘드라이브 허’라는 별명을 얻게된 계기는 1973년의 호텔사업부 신설. 그는 1972년부터 호텔프로젝트팀에 스카우트돼 호텔업이라는 신규사업에 몸담게 됐다.
“이병철 회장님이 일본 호텔 오쿠라를 배우라고 지시했지요. 그 호텔은 당시 세계에서 서비스를 가장 잘하는 호텔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추진한 신규사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업담당 이사 시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선수촌과 기자촌 식당의 운영권을 따낸 것.
“86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 정부에서는 우리나라 기업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매리어트 등 세계적인 캐터링업체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어요. 그 정보를 듣고 제가 우리 기업도 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불안하면 컨소시엄을 구성할 용의도 있으니 외화를 낭비하지 말자고 건의했죠.”
롯데, 프라자호텔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식당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자 88올림픽 때는 외국업체와 하겠다는 얘기가 일절 없었다. 그는 롯데와 함께 올림픽의 ‘푸드 서플라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호텔에 면세점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가 최초였고, 제주신라는 신규사업 기획부터 건설과 조기 정착까지를 해냈다. 면세점 사업은 6개월 만에 상위업체의 시장점유율을 빼앗을 정도로 급속히 발전시켰고, 제주신라는 1년 만에 객실 가동률 90%로 업계 1위를 달성했다.
“제주신라를 선진형 시스템으로 구축한 것이 저의 보람입니다. 서울신라도 제주신라를 벤치마킹했을 정도니까요. 서울신라의 경우 레스토랑이나 바가 층층이 흩어져 있어요. 그렇게 되면 주방과 홀에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구매동선을 여러 개 연결해야 합니다.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고, 인력과 시간의 손실도 많습니다. 제주신라는 식당을 3층에한데 모으고 3개만 만들었습니다. 레스토랑은 수익률이 그리 높지 않은 사업이거든요.”
“로컬 레벨은 성에 안찬다”
제주도라는 지역 특성상 성수기와 비수기의 매출 차이가 커 인사시스템을 새롭게 한 것도 허태학 사장의 경영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주중과 주말에 따라 고객의 수에 차이가 큰 것을 감안, 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정규직을 가급적 줄이고 비정규직을 여유있게 확보하는 전략을 세웠다. 조직도 호텔업에 맞게 ‘콤팩트’하게 운영했다.
“호텔은 대개 상무이사가 총지배인을 맡는데, 그 밑에 이사 둘, 이사 밑에 부장 3∼4명을 둡니다. 관리부장이 이런 형식적인 조직도를 갖고 왔지만 위인설관(爲人設官)형으로는 조직안정이 어렵다고 판단돼 임원 둘을 빼고 8개 부서를 3개 부서로 통합했습니다. 440명을 300명 이하로 줄이고 나머지는 아웃소싱을 했지요. 거기서 절감되는 비용으로 직원들 복리 후생비를 늘렸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허사장은 신규사업 추진이 성취감도 크고 일하는 재미도 있지만 어렵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인다고 털어놓는다. 신규사업팀을 구성하면 타부서에서 사람을 데려와야 하는데 1급 인력은 주지 않고 2급이나 3급 사원을 보낸다는 것. 이런 인력을 정예요원으로 만드는 용해과정이 가장 어려웠다는 그는 목욕탕 스킨십으로 조직의 단결을 이끌어왔다고 설명한다.
“팀 파워를 형성하는 것이 급선무니까요. 한 달에 한 번 일요일에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땀 흘린 뒤에 공중목욕탕에서 함께 벌거벗고 목욕하면 아주 친해집니다. 그리고 소주 한잔 마시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하지 못하면 조직에 짐이 되고 누가 된다, 바보같은 조직원이 되지 말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삼성에버랜드에 온 이후 해마다 신년 해맞이를 간부들과 함께 관악산에서 한다. 등산 후 목욕하고 술을 마시며 단합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예전이나 똑같다.
그와 일하는 직원들은 ‘드라이브 허’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항상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추진하기 때문에 일이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일 이외의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고 인간적인 정도 많아 인기는 좋은 편이라고 한다. 직원들과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을 즐기고 서류결재를 없앨 정도로 생각이 깨어있는 경영인인 그는 오고가는 시간을 단축해서 그 시간을 고객 만족에 할애하는 철저한 서비스맨이다.
허사장은 5년 후배와 뜻이 잘 맞아 옮겨다닐 때마다 그를 중용했다고 한다. 허사장이 매번 신규프로젝트를 추진했으니 그 후배의 일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간다. 삼성에버랜드에 와서도 그 후배와 함께 많은 일을 추진했는데, 후배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 직원의 회고.
“장례식장에서 선 채로 한 30분을 엉엉 소리내 흐느껴 울어 보는 직원들까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사장님한테 들은 얘긴데 그 후배를 고생만 시킨 것 같아 가장 마음에 걸렸다고 하시더군요.”
그는 일 하지 않고 성과창출이 없는 직원은 솎아내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아무리 서비스업종이라도 선택과 집중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면 CEO로서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로컬레벨을 가장 싫어한다는 그는 60억 세계 인구의 공감대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창조는 도전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 워커홀릭을 자처하며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고 있다.
세계적 서비스전문 CEO가 꿈
1998년 지식경영을 도입한 허사장은 전직원의 지식인화에 성공, 2년 연속 지식경영상을 받았고, 지난해는 6시그마경영을 도입했다. 세계적으로 서비스기업이 6시그마경영을 도입한 예가 없다고 하는데, 이의 결과로 재무성과가 좋아져 지난해 15억원, 2001년 상반기 45억원, 하반기 90억원의 비용절감을 기록했다고 한다.
‘물은 고이면 반드시 썩는다’고 확신하는 허사장은 현재까지 68회의 해외출장을 다니며 한번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최고의 리조트와 테마파크, 휴양지를 다니며 벤치마킹하는 것이 그의 주요 일과. 그는 다녀본 곳 중에서 엄청난 자본을 투자한 플로리다의 월트디즈니를 최고의 리조트로 꼽는다.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페블비치와 하와이의 나나이 아일랜드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또 골프장은 역시 스코틀랜드가 최고라고 소개한다.
그에게 당장 닥친 일은 삼성에버랜드를 체재형 테마파크로 만드는 것. 1박2일과 2박3일의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콘도와 호텔을 설계중이다. 내년에 착공 예정인데, 이 또한 최고의 시설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삼성에버랜드의 CEO로서 8년째 장수하고 있는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말한다. “서비스맨으로 일관해 지겨울 때도 됐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제 와서 방향 선회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며 “한국의 CEO로서 서비스 부문에도 특성화·전문화된 월드클래스급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그는 2001년 9월 세계관광의 날 기념식에서 서비스 향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상은 60억 인구 모두가 삼성에버랜드, 나아가 한국의 서비스를 인정해줄 때 받을 수 있다고 수상의 기쁨을 유보했다.
허태학 사장이 전파하는 서비스 정신이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습관화하고 인격화하는 것. 그의 서비스 정신이 이대로 계속 퍼져나간다면 한국이 문화선진국으로 우뚝 설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