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임동원, 금강산댐엔 침묵하고 경의선은 과장했다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 hoon@donga.com

    입력2004-09-09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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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군부 반대로 남측 비행기 휴전선 통과 못해”
    • 남과 북이 다른 공동보도문…남측은 “재개한다” 북측은 “건의한다”
    • 北 군부, 5차 군사회담서 ‘종결선언문’ 발표, 그런데 남측은…
    • 2001년 2월8일 합의한 DMZ 공동규칙안, 北 서명 거부
    • 경의선 연결은 ‘정치쇼’, 동해선 연결도 난망
    • DJ, “미사일 생산은 북한의 주권, 美·日은 히스테리컬하게 대응”
    • 임동원, “非등가성을 감안, 신축적으로 상호주의 적용한다”


    한동안 ‘주적(主敵)’이란 표현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오갔다. 주적 논쟁은 4월6일 임동원(林東源·68)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적 논쟁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논쟁은 북한에서 제기한 것이었다. 반면 임특보가 돌아온 후 제기된 논쟁은 한국 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이번 논쟁은 과거와 달리 매우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등은 주적 표현을 없애자는 데 대해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남북화해시대를 맞아 주적 표현을 쓰지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등 남남(南南) 갈등의 양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국방부가 곧 발간할 2002년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삭제하지 않겠다는 쪽으로 정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언제라도 다시 불붙을 수 있는 것이므로 주적에 대한 모든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국어사전에 없는 ‘主敵’

    주적은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말일까. 국어사전에는 ‘주적(酒積)’과 ‘주적(籌摘)’은 나와 있어도, ‘주적(主敵)’이란 단어는 없다. 따라서 ‘주적’은 누군가가 한자어를 조합해 만든 신조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적을 영어로 옮기면 ‘main enemy’가 될 것이다. 미국은 국방백서를 출간하지 않는다. 대신 ‘연감’ 또는 ‘연차보고서’ 정도로 번역되는 ‘Almanac’을 출간한다. 그러나 Almanac에서는 enemy 혹은 main enemy라는 말을 찾을 수 없다. 대신 ‘threat’이 눈에 띄는데, threat은 ‘주적’이 아니라 ‘위협’ 또는 ‘위협 세력’으로 번역된다.

    유럽과 러시아 군은 ‘황적(黃敵·yellow enemy)’과 ‘주적(朱敵·red enem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황적은 ‘가상 적’을 의미하고, 붉을 ‘주(朱)’자 주적은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적을 의미한다. 유럽과 러시아 군에서도 main enemy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 일본의 방위백서(防衛白書)에는 주적이니, 적이니, 위협이니 하는 단어들이 아예 발견되지 않는다. 대만과 중국도 적이나 주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있다. 주적은 오로지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main enemy는 영어사전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의미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 ‘archenemy’가 있다. 영한사전은 archenemy를 ‘대적(大敵)’ 또는 ‘사탄’으로 번역하고 있고, 국어사전은 ‘대적(大敵)’을 ‘썩 강한 적’이나 ‘강적(强敵)’으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주적은 영어의 archenemy를 옮긴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주적을 ‘우리 앞에 있는 가장 큰 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이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주적이란 단어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린 것은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1992년 1월28일자에 ‘主敵 개념 주변 列强으로 전환’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처음으로 주적이라는 단어를 공론화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김재홍(金在洪·52·현재 경기대학교 교수) 기자였다. 그가 국방부를 출입하던 1991년 12월6일 육군에서는 김진영(金振永) 대장이 제29대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김기자는 김총장이 취임식 연설에서 “한반도에는 북한 외에도 위협 세력이 많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북한만을 우리의 위협세력으로 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 주목했다.

    그해 12월20일, 최세창(崔世昌)씨가 제29대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김기자는 최장관도 “우리 군은 21세기에는 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언급한 데 주목했다. 김기자는 우리 군이 북한만을 위협세력으로 간주하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주변국의 위협에도 대처하려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김기자는 또 국방부가 통일에 대비한 ‘중장기 신국방정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해가 바뀐 1992년 1월28일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새해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국방부를 방문했다. 이날 최세창 장관은 노대통령에게 신국방정책에 대해 보고했는데, 김기자는 이 보고를 근거로 ‘지금까지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主敵 개념이 주변 열강들의 잠재적인 군사적 위협을 겨냥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도하며, ‘주적’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 기사가 나가자 국방부가 발칵 뒤집혔다. 국방부는 “그러면 중국·일본 등이 우리의 적이라는 뜻이냐? 우리는 북한을 제외한 주변국을 적이나 위협세력으로 본 적이 없다”며 기사를 빼거나 정정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김기자와 맞선 사람은 육군본부 보도과장이던 박재욱(朴裁旭·육사 26기·예비역 육군 준장)대령이었다.

    박대령은 기사 전체를 강판시킬 요량으로 ‘주적’이란 단어에 대해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 “적이면 적이지 주적은 도대체 무슨 말이냐? 주적은 우리말에 없는 단어고 어법에도 맞지 않다. 그러한 군사용어도 없다. 적을 공격할 때는 주공(主攻)이 있고 조공(助攻)이 있다. 그러니 주적이 있으면 ‘조적(助敵)’이 있다는 말이냐? 아니면 ‘부적(副敵)’이 있거나 ‘종적(從敵)’이 있다는 말이냐? 북한을 주적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조적·부적·종적은 도대체 누구냐?”

    박대령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동아일보가 다음 판 제목에서 ‘주변열강’이라는 제목을 빼고, ‘北韓 대상 主敵 개념 재조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제목에서 주적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고수했다. ‘주적’은 이렇게 호된 신고식을 치르며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이후 주적은 확고부동한 저널리즘 용어로 자리잡았고 학자들은 군사용어인줄 알고 사용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단어를 군사용어로 편입시키지 않았다. 국어사전 또한 이 단어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았다.

    1993년 2월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출범했다. 초기 김영삼 정부는 지금의 김대중(金大中) 정부만큼이나 북한에 대해 꽤 온정적인 유화정책을 택했다. 그러나 북한은 다른 선택을 했다.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 국가들의 연쇄적 붕괴와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를 지켜보면서 심각한 고립에 빠진 북한은, ‘정권 안보’를 위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선택했다. 이는 한반도 주변에 새로운 위기를 몰고 왔다.

    핵과 미사일처럼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무기를 ‘대량살상무기’라고 한다. UN과 ‘세계의 경찰’ 미국은 제3세계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하거나 보유하는 것을 적극 억제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북한은 IAEA(국제원자력기구) 등의 사찰을 받아라”고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섰다. UN 안보리도 ‘북한이 IAEA의 사찰을 받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 채택을 논의하게 되었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괌에 주둔한 미 13공군에서 고공 정찰기 U-2, 미국 본토에서 F-117 스텔스 폭격기와 B-2 전략 폭격기 등을 미 7공군이 운영하는 한국의 오산기지로 대거 전진 배치한 것이다. 이에 맞서 북한도 후방에 있던 전투기를 황해도 과일군 등에 있는 전방 비행장으로 대거 전진 배치했다. 1994년 미국과 북한 공군은, 한국 공군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이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며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김영삼 정부는 미·북간의 대립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간의 회담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발상은 정권 수호를 위해 이를 악물고 핵개발에 매진해온 북한에게 스스로 ‘인질’이 돼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의 정상회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과 미국측이 대단히 불쾌해 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곳은 바로 한국”이라며 북한에 핵무기를 개발할 빌미를 주지 말라고 경고했다. YS는 그러한 미국의 입장도 헤아려준다며 “핵무기를 가진 자와는 악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북한은 ‘오월동주(吳越同舟)’로 대립하고 있는데, YS는 두 세력의 비위를 모두 맞추겠다고 했으니 사단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바다’ 자초한 YS의 양다리 외교


    1994년 3월19일 판문점에서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제8차 실무접촉이 열렸다. 냉랭한 표정으로 회담장에 들어온 북측의 박영수 대표는 험담을 퍼붓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대화에는 대화,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남측의 송영대 대표를 가리키며) 전쟁이 나면 당신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북한도 동유럽처럼 무너질 것’이라며 ‘북한 급변대책’까지 논의하던 ‘YS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일전불사로 나아갔다. 미국은 1994년 6월 중 어느 하루를 택해 핵시설이 있는 북한 영변을 공습한다는 작전계획 작성에 들어간 것이다. 시시각각 전운(戰雲)이 짙어가자 박영수의 ‘불바다 발언’ 때는 아무 소리 않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을 향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안된다”고 강력히 제지했다.

    이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최후 통첩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카터는 김일성으로부터 뜻밖에도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대답을 갖고 돌아왔다. 이로써 전운은 걷히고 다시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됐는데, 그로부터 채 한 달이 못돼 김일성이 사망했다(7월8일).

    김일성 사망은 또다른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외부세계를 향해 연신 “우리를 위협하면 강력히 대처할 것이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로인해 남한에서는 ‘북한이 자포자기로 전쟁을 벌인다’ ‘북한에 내부 권력투쟁이 일어나 한반도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등 전쟁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두려움은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결의를 촉구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북한의 ‘불바다’ 위협에 자극받은 세력은 국회로 하여금 연일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 아닌가를 따지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방부 정책실은 국방백서에 ‘주적’이라는 단어를 넣기로 결정했다. 주적이란 단어는 1995~1996년 국방백서에 처음 등장했는데, 그 논리가 상당히 흥미롭다(1995~1996년 국방백서는 1995년 발간되었다. 당시에는 연도 표시를 이렇게 했다).

    국방백서는 먼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추구하는 ‘국가목표’를 설정하고, 이 국가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위 목표 ‘국방목표’를 정의한다. 그리고 국방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무기와 조직체계가 필요한지를 서술하고 있다. 주적은 국방목표를 부연 설명하는 대목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

    국방백서에 정의된 국가목표는 이렇다. ‘첫째, 자유민주주의 이념 하에 국가를 보위하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며, 영구적 독립을 보전한다. 둘째,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여 사회복지를 실현한다. 셋째,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켜 국위를 선양하고 항구적인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2000년 국방백서 기준: 과거의 국방백서는 첫째 둘째 셋째의 세 문장으로 나눠 쓰지 않고 같은 내용을 길게 한 문장으로 기록했다).

    1995년 이전의 국방백서는 직접 ‘적’이라는 단어를 써서 다음과 같이 국방목표를 정의했다. ‘적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그런데 1995∼1996년 국방백서는 ‘적의 무력 침공’을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 바꾸어 국방목표를 이렇게 정의했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대신 이 백서는 국방목표를 부연하는 설명에서 ‘북한이 …공격형 부대 배치 …등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실을 감안, 북한을 주적으로 상정하면서…’라며 최초로 ‘주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부연 설명은 해가 바뀜에 따라 조금씩 세밀해져 2000년 국방백서는 ‘첫째,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 함은 주적인 북한의 현실적 군사위협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모든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것을 말한다.’ 라고 했다.

    1995~1996년 국방백서가 적을 빼는 대신 주적이란 단어를 수용하자, 정신전력을 담당하는 정훈장교들은 즉각 적과 주적에 대한 용어 정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한 정훈장교의 설명이다.

    “보통 적(敵)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세력으로 정의된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는 북한이 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평화조약을 맺으면 그때부터는 적이 아니다. 이처럼 적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키는 총칭어다. 때문에 우리는 주적을 적과 구분해, 지금 눈앞에 있는 적으로 한정하기로 했다. 통일되기 전까지 우리와 대적하는 북한만을 가리켜 주적으로 부르기로 정의한 것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다면 ‘귀순자도 주적인가’라는 문제에 부딪친다. 여기서 정훈장교들은 더욱 정교한 정의를 시도했다. 즉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김일성-김정일 세력과 북한 주민을 구분한 것이다. 국방부는 주적을 ‘북괴군과 그 예비전력, 노동당과 북한 정권기관’으로 한정하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북한 주민과 그 같은 기관에 있다가 자발적으로 탈퇴한 북한인은 주적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주적은 한반도가 통일될 때까지만 사용하는 아주 ‘한시적(限時的)’인 용어가 됐다. 이러한 한정성과 한시성 때문에 국방부는 주적을 종종 ‘국군의 주적’이란 말로 바꿔 쓰기도 한다.

    우리말 어법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뚜렷한 정의 없이 통념적으로 쓰이는 말을 수용해 새롭게 정의하는 것을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라고 한다. 주적은 조작적 정의가 내려진 말이다.

    그런 좋은 예가 ‘핸드폰’이다. 핸드폰은 손을 뜻하는 영어 ‘hand’와 전화를 뜻하는 ‘phone’이 결합된 단어다. 그러나 영어에는 핸드폰이라는 단어가 없다. 영어권에서 핸드폰을 뜻하는 단어는 ‘mobile phone(모바일 폰)’이나 ‘cellular phone(셀룰러 폰)’이다. 핸드폰처럼 어법에 맞지 않게 생겨났지만 다중이 사용함으로써 새롭게 단어 뜻이 정의되면 그것이 바로 ‘조작적 정의’가 된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은 매우 감격적이었다. 여기서는 여러 의제가 논의됐는데 그중 하나가 반세기 동안 끊어져 있던 경의선을 다시 잇는 문제였다. 2000년 6월15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 대표단을 위한 오찬을 열고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남측 대표단은 귀경 후 기억을 모아 김위원장이 한 말을 재생해냈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 김정일도 주적이라는 말을 썼다는 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별 오찬석상에서 “서울에 가겠다”고 거듭 답방 의사를 밝혔다. … 또 자신이 이날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대남 비방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군대는 가만두면 늘 주적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니, 그렇지 않게 하자면 일을 시켜야 한다”면서 “경의선 철로 복원사업이 벌어진다면 인민군들을 투입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조선일보 2000년 6월16일자)

    김정일이 고무적인 이야기를 했음에도 남측 대표단을 태운 비행기는 휴전선을 넘어 직선으로 서울-평양을 오가지 못했다. 이 비행기는 휴전선을 피해 서해로 나갔다가 ‘ㄷ’자 모양으로 서울-평양을 비행했다.

    왜 김대통령 일행이 탄 비행기는 ㄷ자 항로를 택했을까. 이 의문의 답은 두 달 후 남측의 언론사 사장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의 입을 통해 풀렸다. 언론사 사장단은 8월12일 평양 모란관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오찬을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사장단은 서울에 돌아온 후 기억을 되살려 김정일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내 힘의 원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모두 일심단결하는 일이고, 두번째가 군력(軍力)입니다. 외국과의 관계에서 힘도 군력에서 나오고, 내 힘도 군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친해도 군력을 가져가야 합니다.…(남북) 직항로 문제는 (북한) 정부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고 군부가 문제인데, 군대 문제는 내가 말해야 직항로가 열리게 돼 있습니다. 큰 대표단은 직항로로 곧바로 오십시오. 남북 모두가 휘발유를 사서 쓰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돌아서 다니면서 중국에 돈 써가며 굽실거리나? 직항로를 열면 비행기에서 특수카메라로 다 사진을 찍는다고 군부에서 반대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인공위성이 우리 사진을 다 찍고 있는데 비행기 타고 찍는다는 게 문제될 게 있는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동아일보 2000년 8월13자).

    항공촬영 가능성을 거론하며 반대하는 군부 때문에 남측 비행기는 ㄷ자로 비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은 자신의 의사에 배치되는 의견을 내놓은 군부를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며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 김정일의 이러한 태도는 김대중 정부와 상당히 대비된다. 군부에 대한 남북 지도자의 인식 차이가 작금의 주적 논쟁을 일으킨 먼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8월29일부터 9월1일 사이, 평양에서는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북한에서는 북남상급회담으로 표현)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남북은 공동보도문 작성에 합의했는데, 남측이 발표한 공동보도문 2항에는 ‘쌍방 군사당국자들이 회담을 조속한 시일 내에 가지도록 협의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북측이 발표한 공동보도문 2항은 …조속한 시일 내에 가지도록 건의한다’로 적혀 있었다 (이 차이점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군사당국자회담은 경의선을 잇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경의선은 휴전선을 통과하기 때문에, 남북 군사당국간의 합의가 있어야 연결공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공동보도문 제4항에는 ‘경의선 … 등을 연결하기 위한 실무접촉을 9월중에 가지고 착공식 문제 등을 협의한다(북측 공동보도문에는 ‘건의한다’로 표기)’는 내용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협의한다’는 것은 아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9월14일 남측은 성대하게 행사를 열고 경의선 연결 공사에 착수했다.



    조급증 對 어깃장


    이때부터 김대중 정부는 ‘협의한다’ 때로는 그보다도 강도가 약한 말을 근거로, 거창한 남북 행사를 반복하는 ‘만성적인 조급증’에 시달리게 된다. 협상자의 국어 해독 실력을 의심케 할 정도로 서두르는 남측의 조급증이 지금의 주적 시비를 초래한 근인(近因)이 되었다. 이러한 남측의 조급증에 대해 북측이 어깃장으로 대응하면서, 남북관계는 꼬여갔다. 이러한 흐름을 차례차례 살펴보기로 하자.

    제2차 장관급회담 합의에 따라 2000년 9월25일부터 26일 사이 남북은 제주도에서 사상 최초로 국방장관회담을 열었다 2차 장관급회당의 공동보도문에 남측은 ‘협의한다’ 북측은 ‘건의한다’로 적었 는데, 남북은 국방장관 회담을 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도 공동보도문이 발표됐는데, 남북은 ‘경의선을 잇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 인원과 차량 기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며 10월초 실무급 회담에서 구체적인 사항을 추진한다’(제3항)와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2000년 11월 중순 북측에서 갖는다’는 데 ‘합의’하였다(제5항).

    그러나 국방장관회담에서도 남측은 군사 직통전화를 설치하고 대규모로 병력을 이동할 때는 그 사실을 상호 통보하자며 매우 서둘렀다. 이러한 조급증에 대해 북한은 ‘어깃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국방장관회담이 끝난 며칠 후 한국에서는 주적이라는 단어를 담고 있는 2000년 국방백서가 발간되었다. 이때부터 북측 언론은 “남조선의 국방백서가 동족인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국방백서에서도 남측은 북한 집권층을 주적으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허락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켰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주적 시비를 들고 나온 것이다.

    북측은 11월로 합의한 2차 국방장관회담을 무산시키고 대신 경의선을 잇기 위한 남북 군사실무회담에만 응했다. 그에 따라 그해 11월28일 국방부 군비통제차장인 김경덕(金暻德·육사30기) 준장을 대표로 한 남측과 인민군 판문점대표부의 류영철 대좌를 대표로 한 북측이 만나 제1차 남북군사실무회담에 들어갔다.

    이 회담 벽두에 류영철 대좌는 “남북국방장관회담 이후 남측 회담 당사자들이 북을 자극하는 발언을 함부로 했으며, 특히 10월26일 한미 독수리훈련에 참가한 두 대의 (미군) 전투기가 북측 영공에 침입했다. 11월14일 서해에서는 남측 전투함정 네 척이 북측 영해에 침입해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고 주장해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이후 양측은 2차(12월5일), 3차(12월21일), 4차(2001년 1월31일), 5차(2001년 2월8일) 회담을 가졌으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孤掌難鳴

    3차와 5차 회담에서 류대좌는 집중적으로 주적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3차 회담에서는 “남북이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마당에 남측이 주적 개념을 유지하는 것은 대화를 버리고 다시 대결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주적 개념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남북간 대화와 협의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5차 회담에서는 “남측이 주적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제2차) 국방장관회담은 없다”는 요지의 ‘회담 종결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러한 소동을 겪으면서 5차 회담에서 비무장지대(DMZ) 안에서 경의선 등을 연결하는 데 필요한 41개항의 ‘비무장지대 관리구역 공동규칙안’이 만들어졌다. 이 합의서는 양측 국방장관이 교차서명해 서로 돌려받아야 효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자기네 국방장관이 서명한 합의서를 상대측에 보내기 직전인 2월11일, 북측은 ‘행정상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며 일방적으로 합의서 교환을 연기했다.

    이날 이후 현재까지 군사회담은 올 스톱되었다. 그러나 이미 경의선 공사에 착수한 남측은 공사를 중단시킬 명분이 없어 ‘꾸역꾸역’ 공사를 진행했다. 이 공사는 지난 4월 초쯤 끝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3일 임동원 특보가 북한을 방문했다. 임특보를 상대한 이는 북한의 김용순 비서다. 임특보는 김비서와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하고 궁극적으로는 북한 군부를 설득해야 경의선 연결 합의를 성사시킬 수 있다. 여기서 ‘인질’로 잡힌 것이 국방백서의 주적 표현이다.

    때문에 김용순 비서와의 토론이 길어졌다. 임특보는 귀경을 하루 늦춘 4월6일 김용순 아태위원장과 합의한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공동보도문의 문구가 예사롭지 않다. 남측에서 발표한 공동보도문과 북측에서 발표한 공동보도문의 문안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분단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의 어법과 표현법은 상당히 달라졌다. 예를 들어 남측은 서기(西紀)를 쓰는 데 반해 북측은 주체 연호를 쓴다. 우리는 ‘임동원’ ‘노동당’ ‘시찰단’이라고 쓰지만 북측은 ‘림동원’ ‘로동당’ ‘고찰단’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차이는 양해할 수 있다.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을 지나치게 ‘존대’한다. 이것도 내용과는 상관이 없는 부문이므로 양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북이 합의했다는 내용이 다르다면 이는 지나칠 수 없다.

    그런데 임투보가 갖고 온 공동보도문의 내용중에는 북측에서 공개한 공동보도문과 내용이 다른 것이 있었다.

    임특보가 들고 온 공동보도문 제5항에는 ‘쌍방은 남북 군사 당국자 사이의 회담을 재개하기로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로동신문에 공개된 북측의 공동보도문 제5항은 ‘쌍방은 북남 군사당국자 사이의 회담을 재개할 데 대하여 군사 당국에 건의하기로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사진 참조).

    남북 사이의 어법이 아무리 달라졌더라도, ‘재개하기로 하였다’와 ‘재개하도록 건의하기로 하였다’를 같은 뜻으로 볼 사람을 없을 것이다. 북측 보도문에 나오는 ‘건의하기로 했다’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남측 보도문에 나오는 ‘재개하기로 했다’와는 전혀 다른 뜻이 될 수가 있다.

    임특보가 이러한 문구를 들고 돌아온 이틀 후(4월8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경의선은 연내에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4월11일 ‘외로이’ 경의선 공사를 해온 남측은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 민통선 지대 안에서 ‘거창한’ 도라산역 개통식 행사를 가졌다. 이어 남측 언론에는 동해선도 잇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남측이 벌인 이러한 행사는 모두 ‘정치 쇼’다. ‘비무장지대 관리구역 공동 규칙안’이 교환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경의선이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것이 ‘주적’ 삭제 논의였다. 이러한 논의는 북측이 아니라 남측에서 ‘주적’을 빼자는 논의가 나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남측의 현역 군인들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한 현역 장교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김정일은 독재자이지만 군부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가 현지 지도의 70% 가량을 군부대 방문으로 돌리고, 군부대에 가서는 자기 얼굴이 손톱만 하게 나오는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김정일은 이렇게 군부를 우대하는 데 우리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게다가 이제 주적이라는 표현까지 빼자는 말이 나오니 군인들의 마음은 영 불안한 것이다. 물론 통일이라는 거창한 국가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국방 분야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자꾸 우리의 무장만 해제하라고 하니 불만이 나오는 것이다. 주적은 조작적 정의에 의해 생겨난 단어이지만, 이 시점에서 빼는 데는 반대한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임동원 특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자는 임특보 측에 면담을 요구했으나 임특보는 측근을 통해 “대통령을 보필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언론과 만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대신 기자는 서면 질문을 보내 측근으로부터 구두 답변을 받았다. 임특보 측은 ‘남북이 발표한 공동보도문의 내용이 다른가’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박재규 장관과 전금진 부위원장이 만난 2차 남북장관급회담 때 우리측이 발표한 공동보도문 2항은 ‘쌍방 군사당국자들이 회담을 조속한 시일 내에 가지도록 협의한다’로 돼 있다. 반면 북측이 발표한 공동보도문 2항은 ‘쌍방 군사당국자들의 회담을 조속한 시일 내에 가지도록 건의한다’로 돼 있다. 우리 쪽은 ‘협의한다’로, 북측은 ‘건의한다’로 돼 있는데도 그해 9월25일 제주도에서는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열렸다.

    북한에서는 당쪽 사람들은 군부의 일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건의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양측이 충분히 합의했더라도 문서로 정리할 때는 북한 군부를 존중해 건의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임특보) 방북에서도 우리는 군사실무회담을 재개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 북측이 ‘건의한다’고 표기하는 것을 양해해주었다. 표현상의 문제는 체제 존중의 기본정신 위에서 편리하게 하기로 양해해주었기 때문에 북측 보도문에 그러한 문구가 나오게 되었다.”

    임특보 측은 박재규 장관 때의 공동보도문을 선례로 들어 해명했지만, 박장관이 발표한 공동보도문과 임특보가 공개한 공동보도문의 문구는 크게 다르다. 박장관 공동보도문의 ‘협의한다’는 ‘합의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경우라면 북측이 그들의 보도문에 ‘건의한다’고 표기하는 것을 양해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임특보의 공동보도문은 ‘군사당국자 회담을 재개한다’로 돼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합의를 전제로 해야만 쓸 수가 있다.

    두번째로 살펴볼 것은 임특보가 들고 온 공동보도문의 다른 조항이 제대로 이행되었냐는 문제다. 다른 조항들이 다 이행됐다면 군사회담 재개 부분에 대한 임특보측의 설명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특보가 들고 온 공동보도문의 ‘합의’ 조항 중 몇 개는 완전 무산되었다.

    임특보가 들고 온 공동보도문 제4항에는 ‘①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제2차 회의를 5월7일부터 10일까지 서울에서 개최한다. ②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제2차 당국 사이의 회담을 6월11일부터 금강산에서 진행한다. ③제4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사업을 4월28일부터 금강산에서 진행한다. ④북측은 이미 합의한 경제시찰단을 5월중 남측에 보낸다. ⑤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들이 이행되고 진척되는 데 따라 제7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개최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섯 개 사항 중에서 현실화된 것은 금강산에서 열린 4차 이산가족 만남뿐이다. 반면 경추위 제2차 회의와 경제 시찰단 파견은 무기연기(사실상 취소)되었다. 6월11일부터 금강산에서 열기로 한 제2차 당국 사이 회담과, 일정을 밝히지 않은 채 열기로 한 제7차 남북장관급 회담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성사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합의’한 5개 사항 중에 한 개만 성사되고 두 개는 이미 무산되었으니 경의선 부분에 대한 북측의 구두약속을 믿기 힘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주적 삭제 논쟁이 일어났다. 임특보 측은 임특보가 주적 논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임특보측은 이런 해명을 보내왔다.

    “우리(임특보)가 주적 삭제를 주도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국방부다. 물론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측에서 주적 문제를 꺼낸 것은 사실이다. 북측이 주적 문제를 제기했을 때 우리는, ‘지금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조기에 군사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빨리 군사당국자 회담을 열고, 거기에서 주적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설명해주었다. 주적을 우리가 빼자고 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주적 시비가 일어난 시점에 북한 금강산댐에 관한 보도가 쏟아졌다. 존재 자체가 불투명했던 금강산댐 문제가 불거지게 된 계기는 이상면(李相冕·56) 서울대 법대 교수가 ‘신동아’ 2002년 5월호에 ‘금강산댐, 북한강을 잘라먹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북한은 금강산댐을 완공해 담수에 들어갔으며, 부실공사와 수공(水攻)으로 인한 붕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을 놀라게 한 금강산댐과 임동원 특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금강산댐과 임특보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임특보의 대북관을 엿볼 수 있는 한 사례가 된다. 또 국가의 안보와 외교문제를 총괄해서 다루는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로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검증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기 위해 북한강 수계에 3억t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가(假)물막이 공사에 들어간 것은 1986년 10월21일이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전두환(全斗煥)씨, 안기부장은 장세동(張世東)씨였다. 남측은 장세동 안기부장의 주도로 금강산댐 위협을 과도하게 부풀려 국민성금으로 평화의댐 건설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 5월 5.9억t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제1단계 평화의댐 공사가 완료되었다. 때문에 가물막이가 터져 3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더라도 평화의댐은 이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3억t의 물을 가두면 오히려 평화의댐 북쪽에 있는 북한 지역이 수몰되는 이른바 역수공(逆水攻)이 일어난다. 그 때문인지 북한은 곧바로 금강산댐 건설에 착수하지 못하다가 1996년에서야 1단계 공사를 완료했다. 이때 남측의 대통령은 김영삼씨고 안기부장은 권영해(權寧海)씨였다. 김영삼 대통령과 권영해 안기부장은 북측이 금강산댐 1단계 공사를 완료했음에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99년, 북한은 금강산댐의 저수용량을 12억t으로 늘리는 2단계 공사에 들어가, 2000년 10월21일 완공식을 가졌다. 12억t짜리 금강산댐이 터지면 5.9억t짜리 평화의댐은 금방 터지고 만다. 수공이든 사고든 금강산댐이 터지는 시점은, 연이은 홍수로 각 댐의 수위가 가장 높이 올라간 장마철일 것이다. 이때 12억t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면 서울을 포함한 한강 유역의 대도시는 물바다가 될 것이다.

    북측이 금강산댐 2단계 공사를 추진한 시기는 남측이,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북한이 금강산댐 2단계 공사를 추진해 완공할 때 남측 국정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임동원씨다. 2000년 10월21일 북한은 금강산댐 2단계 공사 완료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나, 임동원씨가 이끄는 국정원은 이 사실을 남측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국가 안보를 책임진 마지막 보루인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은 왜 침묵한 것일까. 임특보 측은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우리 국민에게 금강산댐 완공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0년 10월21일 북한의 중앙방송과 로동신문이 안변청년발전소의 임남언제(북한에서 부르는 금강산댐 이름) 완공을 보도하자, 우리 언론은 이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후로도 지금까지 국정원은 유관기관에 금강산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왔다.”

    북한의 금강산댐 2단계 완공 사실을 보도한 것은 소수의 언론이었다. 그러나 이 언론들은 국정원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아 보도한 게 아니라, 자체 취재력으로 보도했다. 기자는 당시 국정원이 우리 사회에 금강산댐 완공 사실을 알려주었는가란 문제를 좀더 면밀히 확인하기 위해 국정원에 “금강산댐 완공 사실에 대해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는가”고 문의했다.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낸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북한의 금강산댐 완공식이 열린 시점은 남북정상회담과 제2차 장관회담(9월1일), 제3차 장관회담(9월30일) 그리고 제1차 남북국방장관 회담(제주, 9월25일)이 열린 직후로, 남북관계가 더 없이 좋을 때였다.

    아무튼 북한은 금강산댐을 완공한 후 주적 문제를 꺼내 남북 군사실무회담과 경의선 연결까지 무산시켰다. 한 대북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대화는 대화고 안보는 안보라는 이중 잣대로 임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자세로 북한을 대했어야 한다. 다른 나라와 외교를 할 때도 안보와 대화는 별개로 진행하지 않는가. 그러나 임특보는 안보를 무시하고 화해와 협력 일변도로 북한을 상대했다. 그 결과 그는 국정원장 시절 금강산댐 같은 안보 위협 요소를 간과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주적 시비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그는 경의선을 잇겠다는 데 너무 집착함으로써 남남(南南) 갈등만 조장하고 말았다.”

    지난 4년간 임동원 특보는 박지원(朴智元)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지근거리에서 김대통령을 보좌해왔다. 임특보와 박실장은 대북정책과 국내 정치를 담당한 김대통령의 양 날개였다는 게 중론이다. 임특보가 화해와 협력 일변도로 북한을 상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김대통령의 대북관이 깊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이 다 돼 가던 1999년 2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가졌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2월3일자에 김대통령과의 기자회견 내용을 실었는데, 여기에는 김대통령의 대북관을 짐작케 하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있다(영문은 LA타임스 기사 원문).

    ‘그러나 김대통령은 북한이 미사일 생산과 관련하여 부당하게 비판받아왔다고 시사했다. 김대통령은 “북한은 주권국가로서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결코 약속한 적이 없으며, 누구에게든 그렇게 할 의무도 없다”고 말하고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대해) 대단히 우려하고 있으며, 일본은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But Kim suggested that North Korea has been unfairly criticized for its missile production. “As s sovereign nation, North Korea has never promised that it won’t develop missiles, and they have no obligation to anyone not to,” Kim said, “The U.S. is very concerned, and Japan is reacting hysterically.”)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대통령이 “북한이 미사일 생산과 관련해 부당하게 비판받아왔다” “북한은 주권 국가다”고 한 부분이다. 경기대 남주홍 교수는 김대통령의 대북관이 이러한 시각 위에 기초하고 있다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1998년 8월31일 북한은 ‘광명성1호’라는 조악한 위성을 단 대포동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대포동1호는 일본열도를 넘어 2150㎞를 날아가 북태평양에 떨어짐으로써 북한이 초보적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할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대포동1호는 노동1호 위에 스커드B를 올리는 식으로 엉성하게 조립한 것이라 아직까지는 양산될 수 없다. 북한이 양산하는 미사일은 한국과 일부 일본지역을 사정권에 넣는 스커드B와 노동1호다. 1994년 북한 핵위기 때처럼 북한이 미국에 맞서 전쟁 위기로 치닫는다면 북한은 이 미사일을 ‘영원한 볼모’인 남한을 향해 쏠 수밖에 없다. 한 대북 전문가의 지적이다.

    “미국 대통령이 핵과 미사일 같은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막는 데 주력하는 것은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 대통령도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을 억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한국의 힘만으로 북한의 무기 생산을 억제할 수 없다면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억제 정책을 빌려서라도 막아야 하는데, 김대통령은 반대로 미국이 너무 예민하게 대응한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미사일 생산이 북한의 주권 사항이라면, 북한을 주적으로 선정하는 것은 남한의 주권 사항이다. 김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생산을 북한의 주권으로 인정해 개입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이는데, 북한은 남측에 왜 동포인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냐며 시비를 걸고 있다. 한 해군 대령은 “이것도 화해와 협력에 해당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임특보가 북한에 머물고 있던 지난 4월5일 ‘로동신문’은 1면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남측 특사 일행을 접견하시였다’라는 제목으로 김정일과 임동원 특보 일행이 찍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그런데 이 신문 5면에는 ‘미제는 조선인민의 백년 숙적,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필자 ‘리진’은 이 기사에서 ‘6·15 공동선언 리행을 저지시키기 위한 미제의 책동은 반테로(反테러)의 간판 밑에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핵전쟁도 서슴지 않을 무모한 단계에 이르렀다’ ‘미국은 친미 주구들을 내세워 파쑈적 정권을 꾸리고 그로 하여금 보안법과 같은 반인민적 악법들을 조작하여 인민들의 반미애국 진출을 차단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백년 숙적’ ‘철천지 원쑤’ ‘파쑈적 정권’ ‘괴뢰’ ‘만고역적’ ‘과녁’ 등은 북한 언론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북한은 남한 주민들이 보라고 이러한 단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북한 주민의 정신무장을 탄탄히 하기 위해 사용하는 내부용 단어들이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한국에서도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미친 개’ 따위의 구호가 난무했었다. 이러한 구호들은 지금 북측 언론이 사용하는 ‘철천지 원쑤’ 등과 같은 뉘앙스를 가진 말들이었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이러한 구호들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국방부는 국방과 관련된 각종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국방백서의 내용을 서술한다. 정리해서 말하면 국방백서는 국방 관련 법률보다 하위 개념의 문건인 것이다. 남측은 이렇게 하위 문서인 국방백서에서 유일하게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측에서는 헌법보다도 조선로동당 규약이 상위다. 이 규약 전문(前文)에는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 제국주의의 침략 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재침 기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남조선 인민들의 사회민주화와 생존권 투쟁을 적극 지원하고 조국을 자주적 평화적으로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기초하여 통일을 이룩하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투쟁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남측은 하위 문서인 국방백서에서 북측을 주적으로 규정하나, 북한은 최고법안인 당 규약을 통해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는 것이 노동당의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2000년 8월12일 남측의 언론사 사장단을 만난 김정일이 “노동당 규약도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임특보는 북측에서 주적이라는 표현을 없애라고 요구했을 때, 김위원장이 바꾸겠다고 한 조선로동당의 규약부터 바꾸라고 대꾸했어야 한다. 북한에 대해 우리가 양보하는 만큼의 똑같은 양보를 요구하는 것을 상호주의라고 한다. 임특보는 이러한 상호주의를 실행할 수 없는가. ‘대북 상호주의 시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임특보 측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상호주의를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 정부는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는 실사구시의 정책을 펼쳐왔다. 다만 비등가성(非等價性)·비동시성·비대칭성을 감안해 신축적으로 상호주의를 적용한다는 원칙 위에 대화와 협력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한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상호주의는 등가성과 동시성·대칭성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임특보는 비등가성·비동시성·비대칭성을 감안한 신축적인 상호주의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을 가리켜 상호주의라고 할수 있는가.

    임특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대북문제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안보와 외교문제까지 총괄해서 다루는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를 맡고 있다.

    한국 안보의 핵심은 대북문제인데, 이 복잡한 문제를 대화와 협력만으로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한 현실주의자는 임특보를 이렇게 비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 경제는 금액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어느 선을 넘어서면 ‘위험 경보’가 울린다. 그러나 안보와 통일 분야는 진행과정을 수치로 표현하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라, 어느 선을 넘어가면 경보가 울리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그냥 승부가 갈려버린다.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정신전력이 매우 중요하다.

    경제는 돈을 다루는 분야라, 모든 것을 잃어도 생명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외교·안보·통일 분야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지킬 수 있다. 때문에 이 분야에서만은 온정주의보다는 현실주의가 지배한다. 임특보는 그의 종교관과 인생관을 근거로 헌신주의적인 자세로 북한을 상대해왔다. 그리나 그의 헌신주의는 경의선 연결실패와 북한의 금강산댐 완공으로 돌아왔다. 대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대북정책이 실패로 드러난 만큼 임특보는 대북 분야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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