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능한 외교관 1명이 1개 사단 이상 병력, 자동차 10만대 수출과 맞먹는 국익수호자 역할을 하는 시대다. 외교관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얘기다.
- 우리 외교공무원은 어떤가. 일당백, 국익의 첨병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원인과 처방은 무엇인가.
2001년 9월 일본 외무성 간부들이 외무성 직원이 부정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데 대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표결이 있던 2002년 12월3일 오전까지도 우리 외교부는 2, 3차 투표에서 탈락국가의 지지표를 흡수, 중국에 최소 2표 이상 앞설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런 구도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는데 그 대책도 세워두었다고 했다. 대책이란 투표 직전 예정됐던 한·러 정상회담. 그러나 한·러 정상외교는 불발됐다. 급한대로 전윤철 부총리가 긴급 투입됐다.
11월29일 전부총리는 러시아로 날아가 러시아와의 최대 경제현안이던 ‘불곰2차사업’을 원만하게 마무리했다. 우리가 받지 못하고 있는 경협차관 원리금 중 5억3400만달러를 현금이 아닌 탱크 등 무기로 받는다는 것이 불곰2차사업의 줄거리다. 그것도 이 돈의 절반을 선급금으로 제공해 러시아의 공장을 가동케 한 뒤 생산한 물건을 들여오는 방식이다. 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이자 현대자동차 오너인 정몽구 회장까지 나서 현대자동차의 러시아 진출 문제를 논의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상하이를 후보지로 내건 중국도 가만 있지 않았다.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은 표결 전날 베이징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세계박람회 지지를 공식적으로 당부했다. 그것으로 게임은 끝났다. 16대 대통령 선거에 묻혀버렸지만 박람회 유치 실패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뛰어든 대규모 국제행사 유치전에서 실패한 첫 번째 사례다.
물론 세계박람회가 ‘외교 실패’의 처음은 아니다. 한-러 정상회담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파문, 중국 정부의 한국인 신아무개씨 처형 사건, 마늘 파동, 한-칠레 FTA 체결에 이어 최근엔 불법 비자발급사건에 반미시위에 이르기까지 우리 외교의 실패사례는 이어졌다. ‘3류 외교’ ‘망신 외교’ ‘소방 외교’ 등 갖은 비판과 질책이 쏟아졌지만, 정작 외교부는 미봉책만 내놓고 있다. 과연 우리 외교통상부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있는가.
우리 현실을 살펴보기에 앞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사정을 알아보자. 일본 외무성도 거듭되는 공직자 비리와 부정으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금 일본 외무성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수백 가지 과제를 내놓고 고쳐나가고 있는 중이다.
2001년 1월25일 일본 외무성은 ‘마쓰오 겐(松尾元) 전 요인외국방문지원실장의 공금횡령의혹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1995년 10월부터 1998년 3월까지 3년여 동안 마쓰오 실장이 무려 5400만엔의 공금을 횡령해 이를 경주마 구입 등에 사용했다는 것이 보고서의 줄거리다.
개인주머니로 흘러간 공금
마쓰오 실장은 1992년 10월10일부터 내각 총리의 외국 방문시 숙박·교통 등에 대한 지원업무를 맡았다. 그의 횡령수법은 너무나 간단했다. 은행에 자신의 이름으로 계좌를 열고 여기에 내각관방 보상비를 입금한 후 신용카드로 결제했던 것. 조사 결과 그는 총 5개 은행에 예금계좌 8개와 우체국계좌 1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계좌에 입금된 돈은 5억6000만엔(우리 돈 56억원), 반면 신용카드로 결제된 공금 누계는 2억5000만엔에 불과했다. 3억1000만엔의 예산이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외무성 조사단은 그 지출명세조차 규명하지 못했다. 그는 유용한 공금으로 8080만엔짜리 맨션을 구입하고 최소 14마리의 경주마와 5개 이상의 골프회원권을 구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마쓰오 실장이 횡령한 돈의 성격이다. 이 돈은 총리관저 예산으로 편성된 것으로, 국회의 예산심의는 고사하고 용도를 밝히지 않고 총리나 관방장관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내각관방 보상비였다. 대략 매년 15억엔 정도 편성되는데,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도 투명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특히 외무성 보상비의 총리관저 상납 의혹, 와인 구입·음식값 지불 등 외무성 직원들의 사적 유용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나 명쾌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마쓰오 사건은 총리관저의 관방 보상비와 외무성의 외무성 보상비라는 이른바 ‘기밀비(機密費)’ 감독 체계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개인 차원’의 범죄이며, 유용 사례가 밝혀질 경우 엄정 처리할 것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마쓰오 사건’ 이후 재발 방지와 외무성 개혁을 위해 사이토 아키라(齊藤 明) 마이니치신문사 사장을 단장으로 7인의 민간인이 참여하는 ‘외무성기능개혁회의’가 구성됐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은 이들에게 외무성의 신뢰회복 대책, 효율적인 외교체계 구축, 강력한 외교를 위한 인사개혁, 부정과 비리 방지대책 등을 주문했다.
‘개혁회의’는 마쓰오 사건의 배경으로 3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외무성 직원들의 전근대적 의식구조이다. 외무성에는 자금 관리나 숙박 업무 등 ‘저급한 일’보다는 정책 수립 등 고상한 외교활동에 전념해야 제대로 된 외교관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즉 조약이나 공동성명 등의 대외정책 형성이나 교섭 활동은 ‘서브(Substance,본질)’로 불리는 반면, 교통수단, 숙소, 통신수단 등의 준비 활동은 ‘로지(Logistics)’로 통칭되면서 차별받아 왔던 것이다. 마쓰오 실장은 외무성 내의 ‘3종 직원’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로지업무 외에 다른 업무는 맡지 못했다.
둘째, 제도의 문제이다. 총리대신의 외국 방문 과정에 내각관방과 외무성 사이의 업무분담이 극히 불명확했다. 또 여비의 예산편성이나 집행이 국제적 기준과 관행에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일례로 숙박시설의 예약 및 취소 비용 등은 국제 관례상 당연히 지불되어야 하지만, 실제 예산에는 이런 항목이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외무성은 일정액의 내각보상비를 받아 해결했지만, 수년 동안 그 집행을 마쓰오 실장에게만 맡겨 이런 비리가 싹튼 것이다.
셋째, 현대외교의 변화추세이다. 과거 외교는 당사국 중심이었다. 또 주재국 대사나 외무장관끼리 교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자간 외교, 국제회의, 총리급 정상외교 등의 비중이 급격히 늘었다. 게다가 통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정상외교에는 이상하리만치 대규모 방문단이 구성되고 있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로지’업무의 비중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개혁회의의 제언을 수용한 ‘외무성 개혁요강’이 발표됐다. 일정 금액 이상의 보상비를 사용할 경우 부외상 이상의 결재를 받도록 하고 외무성에 감찰실을 두며 재외공관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마쓰오 사건에 이어 또 다른 비리 사건이 터졌다. 2001년 7월 규슈 오키나와서미트 준비사무국의 자동차 렌털 계약 부정사건, 9월에는 1995년도 아시아태평양정상회담(APEC)회의와 관련된 비리가 드러났다.
규슈 오키나와서미트 준비사무국 부정사건이란 외무성 경제국 소속 사무관 2명이 리무진 렌털회사와 공모해 전세 자동차 사용요금을 과다 청구하는 수법으로 총 2150만엔을 횡령한 사건이다. 이들은 사취한 돈의 일부로 고속도로 통행 쿠폰 등을 구입, 최소 2명 이상의 상사에게 각각 125만엔, 90만엔씩을 상납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사무차관, 관방장이 감봉 조치되었고 경제국과 사무국 간부들이 각각 징계를 받았다.
마침내 드러난 ‘풀금’의 정체
그런데, 이 두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외무성에 만연해 있는 이른바 ‘풀금(プ-ル金)’의 실체가 드러났다. 외무성이 2001년 7월 특별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외무성과 거래해온 관계회사 31곳을 조사한 결과 이중 12개사에서, 그리고 외무성 119개 실과(室課) 중 60%에 이르는 71곳에서 풀금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풀금이란 국제회의·리셉션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하면서 외무성 각 실과들이 업무와 관련된 특정 업체에 경비를 초과 지불한 뒤 이 돈을 업체가 관리하게 하면서 업무추진·친목비용 등에 써온 것을 말한다. 외무성이 관계해왔던 회사들은 뉴오오타니 호텔 등 호텔 5곳, 여행업체 1곳, 자동차 렌털회사 4곳, 사무기기 업체 1곳, 회의 운영회사 1곳 등이었다. 조사결과 1995년 4월부터 2001년 7월까지 6년 반 동안 무려 1억6000만엔의 풀금이 조성됐고, 2001년 11월 기준 잔고만 4240만엔에 달했다.
외무성은 또다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즉각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우선 풀금 잔고를 즉시 국고에 반환하고 이미 써버린 소비액은 외무성 직원들이 갹출해서 모으도록 했으며 관련 직원 328명에 대해 징계조치했다.
소비액을 충당하려 외무성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반환회(返還會)’를 만들어 징수를 독려하고 직급별로 부담액을 나누었다. 지난해 3월22일까지 현역직원 2187명이 2억6012만6607엔을, 외무성 OB 245명이 3013만622엔을 모았다. 같은 날 외무성은 1억6000만엔의 소비액과 이의 이자분 등 총 1억9788만3457엔을 국고에 반납했고 초과모금액 4800만엔은 추가 반납에 대비해 반환회에서 관리하기로 했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해 국장급 41명, 과장급 101명, 수석사무관 93명, 회계직 93명이 징계를 받았으며 2명이 면직, 3명이 정직 당했고 나머지는 훈계, 주의 처분을 받았다.
최근 드러난 외무성 비리 사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아주 오랫동안 ‘관행(慣行)’처럼 이루어져왔다는 점이다. 즉 몇몇 문제 있는 직원의 일탈(逸脫)이 아니라 외무성 전반에 하나의 시스템처럼 비리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외무성 기밀비’는 예산 심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고 내부 감독 시스템조차 허술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유용이 가능했다.
부서의 사람은 바뀌어도 조직과 자금은 남았고, 이것이 일본 외무성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 관료주의의 저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며, 부정 비리의 깊이와 폭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외무성 직원들의 의식이다. 외상은 대국민 사과를 위해 기자회견장에 설 때마다 공무원의 직무의식, 윤리관 교육을 언급하고 있다.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하고 직원들이 공금 유용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말은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다.
일본 외무성 직원들의 비리·횡령 문제는 어디까지나 외무성 내부 문제다. 따라서 내부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상당히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외무성은 내부 문제뿐만 아니라 외부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북해도 출신 자민당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54) 중의원 사건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2002년 9월13일 스즈키 무네오 의원을 의회증언법 위반(위증)과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수입지출 보고서 허위기재) 혐의로 도쿄지법에 추가 기소했다. 2월 스즈키 의원을 알선수뢰 등 4개 죄목으로 기소한 이래 7개월 만의 일이다.
이를 대여 공세의 고리로 삼았던 일본 야당과 자당 의원을 보호하려는 자민당의 대결, 그리고 이 사건의 후폭풍(後暴風)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심하는 일본 외무성의 움직임 등에 일본정치의 메커니즘과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2002년 3월15일 스즈키 의원은 자민당을 탈당했고 6월19일 중의원은 결국 그의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약 40여 명의 외무성 직원이 감봉 및 주의 처분을 받았다. 스즈키 의원과 동향인 공산당의 사사카와 겐쇼(佐佐木憲昭·57) 중의원 의원은 이 사건을 제대로 추적해 의회에서 폭로했으며, 청문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반면 이 사건을 비롯한 정치권의 검은돈 의혹을 규명하는 데 앞장섰던 민주당 이시이 고오키(石井紘基·61) 중의원은 지난 10월25일 아침 집 앞에서 복면의 괴한이 휘두른 칼에 살해됐다.
뻐꾸기만 울어대는 ‘무네오 하우스’
스즈키 의원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북방 도서 지원사업을 둘러싼 추가 비리혐의가 드러난 것이다.
“북방 4개 도서 반환이나 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어느 정치가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북방 도서 지원사업에 대한 의혹이 가중되자, 2월2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스즈키 의원은 이렇게 호소했다.
일본정부는 구 소련이 붕괴하자 러시아정부의 민주화와 시장경제화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구나시리, 에토로후, 하보마이, 시코탄 등 북방 4개섬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스즈키 의원은 1990년 외무성 정무차관, 1997년 홋카이도·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을 지냈고 1998년 6월 현직 각료로는 최초로 북방영토를 방문하는 등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북방 4개섬 지원사업이 초기 단순 지원에서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건설사업으로 확대된 것도 스즈키 의원의 노력 덕분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을 진행한 외무성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개입은 필연적(?)이었다.
북방 4개섬 지원사업 중의 하나인 구나시리(國後島) ‘우호의 집’은, 지진이나 재해 발생 때 피난을 겸한 숙박시설로 1999년 10월에 완공되었는데, 스즈키 무네오 의원의 이름을 따 ‘무네오 하우스’로 불렸다. 그런데 스즈키 의원은 우호의 집 건립 공사 입찰에 개입했다. 외무성이 입찰자격을 ‘홋카이도에 본사가 있는 기업’으로 정하자, 스즈키 의원은 ‘홋카이도 내의 네무로(室根)시에 본사가 있는 기업’으로 고치도록 했다. 외무성은 그 도시에 본사를 가진 기업이 단 하나뿐임을 알았지만 스즈키 의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또 이 기업이 기준 평점에 미달하자 참가자격까지 완화해주었다. 이렇게 완공된 무네오 하우스를 지역주민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아 ‘산케이신문’은 ‘뻐꾸기만 울어댄다’고 쓰고 있다.
구나시리 부두 개수공사에서도 스즈키 의원은 ‘북방영토반환운동에 현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현지 기업에 공사를 맡겨야 한다’는 논리로 특정 업체를 밀었다.
대(對) 아프리카 외교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2001년도 예산안 편성 당시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정조(政調)회장이 아프리카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전년대비 30% 삭감하자, 그는 외무성과 힘을 합쳐 이를 3% 삭감으로 막아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정치 통설 바꾼 외교족 의원
스즈키 의원 사건의 본질은 ‘정관(政官) 유착’이다. ‘외무성이 의원에게 의지하고, 의원은 외무성의 도움을 받는’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상 유례가 없는 이 ‘외교족(外交族)’ 의원 때문에 ‘외교는 표도 돈도 안 된다’는 일본 정계의 통설까지 바뀌었다.
스즈키 의원은 외무성 내에 자신을 위해 일하는 정보팀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팀은 1999년 8월에 외무성 정보국 분석관을 팀장으로 유럽국, 중근동아프리카국의 서기관·사무관급 등 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외무성의 비밀정보를 탐지 분석하고, 외무성과 재외공관 사이의 극비 문서를 빼내 스즈키 의원에게 전달해왔다. 대신 이들은 스즈키 의원으로부터 회식비나 책값 등으로 연간 수백만엔씩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 지원을 위한 ‘지원위원회’는, 구소련 여러 나라들과 일본이 함께 참여하는 국제기관으로 설립됐으나 독자적인 실체를 갖지 못했다. 외무성은 지원위원회 사무국을 외무성의 일부로 간주했고 집행기관으로 이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제르바이잔 등 러시아 이외의 나라에 대한 지원은 JICA(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등 ODA의 지원체계를 통해 집행되었지만, 북방 4개도 지원사업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외무성 러시아 지원실장 스스로 자금지원을 결정하고 직접 위원회에 지시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계획과 집행기관이 분리되지 않았고 예산집행에 대한 외부감사도 없었다. 위원회 설립 당시와 비교해 여건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0여 년 동안 기구와 지원체계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즈키 의원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외상은 민간위원이 포함된 ‘지원위원회 개혁을 위한 전문가회의’를 설치했다. 이 전문가회의는 2002년 4월16일의 보고서에 문제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과거 10년간 지원위원회가 실시해온 인도적 지원과 기술지원의 성과를 일단 평가하지만, 국민의 감시가 어려운 국제기관으로 지원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형해화(形骸化)를 방치해 결과적으로 특정 국회의원과의 관계 때문에 ‘사회 통념에 비추어 있어서는 안 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지극히 큰 문제이다.”
또한 2002년 7월19일에는 외상 명의의 ‘ODA 개혁안’이 발표됐다. 개혁안에는 외부 감사를 강화하고 ODA 사업 평가 및 검증을 확대한다, 평가 결과를 공개하고 비정부기관(NGO) 참여를 확대하며 국제협력 관련 인재발굴 육성에 노력한다, ODA 정보 공개를 늘린다는 등의 총 15개 항목이 들어 있다.
외교를 크게 대외관계(Foreign Relations), 외교정책(Foreign Policy), 외교(Diplomacy) 등으로 나눈다면, 일본 외무성의 개혁은 협의의 외교(Diplo-macy), 즉 집행부분에 집중되고 있다. 거듭되는 비리·부정사건으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외무성은 개혁을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개혁에 대한 외무성 자체 여론과 의견을 수렴했다. 여기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 2002년 3월 ‘바꾸자! 바뀌자! 외무성(變えよう!變わろう!外務省)’이라는 임시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외부의 힘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수는 없다는 인식하에 직원 스스로 앞장서자는 ‘안으로부터의 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다. 제도개혁, 사무합리화, 의식개혁·예절(매너) 향상, 정책입안 강화, 홍보 등 5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개혁과제를 만들었다. 7월5일까지 모두 221명의 직원이 참가했고 14회의 전체 모임을 열어, 2002년 7월12일 마침내 ‘바꾸자! 바뀌자! 외무성 제언과 보고’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자민당은 ‘외무성 개혁에 관한 소위원회’를 만들어 개혁과제를 설정했으며, 3월6일에는 민관 합동의 ‘바꾸는 회’가 결성되었다. 2월12일 가와구치 요리코 외상은 ‘열린 외무성을 위한 10대 개혁’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공청회 개최, ‘바꾸는 회(變える會)’의 결성 등을 발표했다. 민간 쪽에서는 미야우치 요시히코(宮內義彦) 오릭스 회장이 단장을 맡고 교수·작가·언론인·NGO 대표 등 12명이, 외무성에서는 가와구치 외상을 비롯한 고위층이 참여했다. 5개월여 작업 끝에 7월22일 ‘부당한 압력의 배제’ 등 12가지의 ‘액션 프로그램’을 담은 최종보고서가 나왔다.
외무성 직원, 자민당, 민관합동기구 등 3갈래로 진행되던 개혁과제 도출작업은 2002년 8월21일 외무성 개혁 ‘행동계획(行動計劃)’으로 총괄·수렴되었다. ‘행동계획’은 일본 외교가 당면한 개혁의 절박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일련의 지극히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하루빨리 되찾아 과감한 외교 이니셔티브를 발휘해야 한다. … 이런 강한 결의와 위기감 속에서 이 행동계획이 확정되었다.”
행동계획은 그 목표를 21세기 새로운 국제환경하의 정책구상력과 위기대응능력 강화, 외무성 성원의 의식개혁과 경쟁원리의 도입, 외교시책의 투명성 및 효율성 확보, 대국민 행정서비스 향상 등에 두었다. 또 계획추진의 실천력을 담보하기 위해 가능한 실천지침을 구체화했으며 실시기한을 명기했다. 그리고 외상을 본부장으로 하는 ‘개혁추진본부’를 설치하고 ‘개혁 담당 심의관’을 별도로 두었다.
그렇다고 외무성 관료들이 솔선해 개혁을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용히’ ‘개인적 차원’으로 덮고 축소하려 했지만, 상황은 개혁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그러자, 외무성 관료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자발적인 개혁조직을 만들어 여러 대안들을 내놓았다.
이들 일련의 조치의 유효성과 적절성 그리고 성과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여러 단위의 위원회를 만들어 회의를 하고 구호만 외치다가 마무리될 가능성도 있다. 소나기는 피하자는 식의 자세로 일관하다가 개혁의 추진력이 떨어지면 흐지부지될 수도 있다. 특히 스즈키 의원 사건 같은 ‘정관유착’에 대한 해결방안은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행동계획’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외상의 권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국회의원의 ‘의견’은 반드시 문서화하고 외무성측의 응답 내용도 동시에 기록하며, 국회나 정당을 담당할 ‘정무본부’를 설치한다는 것이 전부다. 의원내각제 정치체제에서 이런 방안이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정치권, 민간전문가, 관료집단 등이 합의해 개혁안을 만들었고 현재 그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2002년 9월 우리 외교통상부는 정기국회와 국정감사를 앞두고 업무현황을 정리한 360쪽짜리 보고서를 만들었다. 매년 정례적으로 국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에는 국실별 업무추진 실적과 과제 등이 정리돼 있다. 이번 보고서에서 외교부는 외교 및 행정업무 개선과제로 ‘외무공무원 인사제도’와 ‘외교업무 정보화’를 거론했다. 과연 우리 외교부가 당면한 과제가 이 두 가지밖에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것은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책실패의 책임문제가 불거질 경우 외교부는 마치 표준운영절차(SOP)나 매뉴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수습한다. ‘일단 침묵으로 대응하다가 외교부의 책임이 확실해지면 유감표명과 수습책을 발표한다. 사안에 따라 자체조사도 벌인다.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려 그냥 넘어가거나 적당한 시기 하급직 몇 명에게 가벼운 징계를 하고 사태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2001년 중국이 한국인 신아무개씨를 처형한 사건과 관련해서는 장관부터 말단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외교부는 실무자 5명에 대해 ‘감봉’ 등 경징계 조치만 취하고 사건을 덮었다.
다음 사례는 2002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것으로, 외교부 실패와 책임 회피의 전형을 보여준다. 외교부는 2000년 3월 여권의 위·변조를 막기 위해 총 58억2400만원의 예산으로 여권전사장비(旅券轉寫裝備) 도입사업을 추진했다. 현행 여권은 사진만 바꿔 끼우면 쉽게 위조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처럼 여권 사진을 전산 인화하는 시스템을 갖추기로 하고 93대의 여권전사장비를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2000년 8월 국내외 10개 업체로부터 입찰 제안서를 받아 4개 업체를 선정했고, 2001년 2월 2차 시연회를 열어 1차평가에서 3위를 차지했던 대원SCN(한국조폐공사 합작)을 최적업체로 선정, 발표했다.
그러나 2002년 4월까지 이 업체의 전사장비는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사업은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외교통상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국정원, 외교통상부, 법무부, 행정자치부, 경찰청, 기술표준원 등 관련 6개 부처 국장급들이 참여하는 ‘도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 부처 과장급으로 실무위원회까지 만들어 범정부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회의록조차 만들지 않았다. 선정 방법도 지명경쟁 입찰에서 1차 평가까지 마친 뒤 돌연 수의계약(隨意契約)으로 바꿔버렸다. 이와 관련, 대원SCN과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 그리고 최규선씨의 부당압력과 불법로비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감사원은 5월9일부터 22일까지 특별감사를 실시해 계약방법의 변경과 적격업체의 부당 선정 등을 이유로 위원장 등 관계자에 대한 징계를 외교부에 일임하는 처분을 했다.
현실성 없는 미래 보고서
그러나 외교부는 그동안 ‘감사원의 처분결과서가 오지 않아 징계할 수 없다’며 몇 개월을 버텼다. 처분결과서가 도착한 지 2개월이 지났고 국회의 거듭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징계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외교부의 ‘제 식구 감싸기’는 유별나다. 다른 정부부처 공무원과 달리 외교관들은 ‘외무공무원법’의 적용을 받고 행정고시가 아닌 외무고시로 임용되기에 남다른 동류의식이 있는 모양이다.
일회성 사안이 아닌 구조적 문제인데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려는 것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외교부는 ‘우리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며 ‘중장기 외교전략’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외교부는 부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외교정책의 장기전망 수립과 직원 역량강화를 위한 이 사업을 2002년 초부터 추진했다.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7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해 2002년 말까지 보고서를 낸다는 일정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비밀리에 십몇억원의 예산을 써가며 외교부 직원만이 모여 만들어낸, 그것도 20년 이후를 전망한 보고서가 과연 외교부의 현재 문제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본 외무성의 개혁과정처럼 공개적으로 외부 전문가들의 머리를 빌려 당면한 현안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가하게 15년, 30년 뒤를 논할 때가 아닌 것이다.
외교부가 제시한 두 가지 과제의 추진현황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외교업무 정보화사업을 보면, 1997년부터 총 367억원을 투입한 광역외교정보망이 올해 완성된다. 본부와 재외공관을 전용회선으로 연결, 데이터·음성·동영상 등의 정보가 실시간 유통되는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운용에서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기에는 아직도 취약한 점이 많다. 특히 재외공관의 회계·감독 그리고 영사 민원 업무의 전산화, 외교통상정보·정부표준문서 유통 시스템 등의 개선 보완이 시급하다.
이성주 외교통상부 다자통상국장이 2002년 10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 결과 외무공무원법은 1998년 2월 이후 무려 5차례나 개정됐다. 2001년 7월1일 발효된 개정 외무공무원법에 따라 성과주의의 강화, 직위 위주의 인사운영, 다면평가에 의한 인사평정 등을 골자로 한 ‘신외무인사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보직기회의 불균형, 직무등급의 계급화, 실적 및 성과 측정의 한계 등의 제도적 문제점과 기존 인사 운영의 파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직무등급은 9등급에서 14등급으로 늘었고, 인사권자인 장관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보니 인사권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고 부당한 지시에 항거할 수도 없다.
외교부의 전설 ‘靑·秘·總’ 이야기
외교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청(靑)·비(秘)·총(總)’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하다. 청(靑)와대, 장관 비(秘)서실, 총(總)무과를 거쳐야 주미대사관에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사정실주의가 판치고 있고 지역·학벌·고시 기수 등이 전문성보다 우선시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정년·인사적체 문제다. 현직 장관 또래의 고시동기들은 모두가 장·차관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고시출신들은 인사적체로 국장은커녕 과장을 달기도 어렵다. 이러다 보니 공관장 자리를 놓고도 갈등이 심각하다. 59세에 3년짜리 공관장으로 나가면 62세까지 할 수 있는데, 60세에 공관장으로 나가지 못하면 퇴직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년 60세의 예외 자리가 무려 48개나 된다. 이런 예외를 이용해 누구는 몇 번씩 대사를 할 수 있지만 누구는 한 번도 하지 못하고 퇴직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신외무인사제도를 둘러싼 하위직과 상위직간 불신과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몇 차례 내부 설문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응답률은 20%를 넘지 않았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가 발주한 외부 연구용역도 여론조사의 진실성 문제 때문에 채택조차 되지 못하고 반려됐다.
이 신외무인사제도는 김대중 정부의 정부부문 인사개혁의 모범사례였다. 이 성과를 기반으로 타 부처로 확산하려 했던 야심만만한 개혁조치였던 것. 그러나 잘못된 개혁 방향 설정과 준비 미흡, 추진력 부족 등으로 부작용만 남긴 채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해외근무 기피현상으로 본부에는 인력이 남아돌고 재외공관에는 만성적으로 인원이 부족하다. 재외공관만 놓고 보면 하위직은 정원을 넘어서고 고위직은 부족한 기형적인 체제다. 특히 본부의 인력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현재 대통령령에 허용된 8개의 심의관 직제 이외에 무려 27개의 심의관 직위를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외공관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현상도 문제다. 최근에는 ‘비자 부정발급’ 사건까지 터졌는데 일부 영사관 직원들이 브로커와 짜고 부적격 현지인들에게 불법적으로 비자를 발급해주고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베이징과 선양영사관에서 사건이 불거졌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코리안 드림’ ‘월드컵’ ‘한류(韓流)’등으로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제국 등과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전세계에서 한국으로의 입국 희망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비리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입국비자 수요가 넘치는 이른바 ‘물 좋은 몇몇 자리’는 위와 선이 닿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요직이 된 지 오래다.
이번에 문제가 된 선양사무소의 경우, 2001년 3월 감사에서 권아무개 총영사의 비리가 적발돼 2002년 1월9일 해고처분을 받았고 차석 총무담당 부영사도 주의처분을 받았다. 비리적발 후 징계까지 10개월이나 걸린 셈이다. 권총영사의 후임 최아무개 부영사도 불법체류 조선족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한 단서가 포착됐지만 2001년 3월 감사에서는 적발되지 않았다.
그 후 3차례의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나서야 외교부는 지난해 3월12일 법무부에 최부영사의 비리혐의를 법무부에 통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무려 7개월이 지난 10월25일에야 구속기소됐고 10월31일 직위해제됐다. 비리 인지 이후 처벌까지 만 2년이 걸린 셈이다.
재외공관의 영사 교민업무에 대한 교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2002년 6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근에서 완구 공장을 운영하는 지아무개씨가 파업중인 현지 노동자들에 의해 22시간 동안 감금되는 사건이 있었다. 감금 직전 지씨는 대사관 홈페이지에 불법파업으로 회사가 도산 위기에 몰려 있고 신변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호소문을 올렸다. 대사관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무성의를 질타하는 현지 여론이 비등하자 그제서야 영사를 현장에 파견했다.
재외공관의 존재이유는 자국민 권익보호에 있다. 재외국민으로부터 각종 사건사고 신고를 받으면 즉시 주재국 치안 및 사법당국과 협력해 자국민 신변보호에 나서는 것이 영사의 업무다. 그러나 영사 교민업무는 오히려 ‘3D업종’으로 인식돼 이를 맡은 공무원은 ‘물먹었다’고 여겨지는 형편이다. 중국 정부의 신아무개씨 사형 사건 이후 외교부는 재외국민 보호와 영사 교민업무 개선대책을 내놓았지만,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2001년도 감사원의 재외공관에 대한 감사결과를 보면, 전체 공관의 80%인 102개 공관이 비자발급 내용과 건수조차 관리하지 않았고, 여권발급 수량과 영사수입금 액수가 맞지 않아 지적을 받았다. 주필리핀 대사관 등 8개 공관은 2년 동안 9000건의 공증서류를 발급하면서 근거도 없이 3만달러의 수수료를 징수했다가 적발됐다. 또 재외공관 공금 횡령, 회계장부 위조, 교민으로부터의 금품 수수 등 무수한 불법·편법사례들이 지적되고 있다. 공관장이나 외교관이 도박이나 마약 관련 비리사건으로 국가적 망신을 산 경우도 있었다. 이런 원시적 부정·비리는 일본의 ‘보상비유용사건’이나 ‘풀금’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재외공관 영사수입금 징수와 직접 집행을 둘러싼 점검도 필요하다. 최근 비자 부정발급의 진원지였던 베이징 주재 대사관의 영사수입금은 1999년 255만달러, 2000년 271만달러, 2001년 349만달러로 매년 증가했다. 2002년 1/4분기에만 82만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나머지 주중 영사관의 2001년 말 기준 수입금을 보면, 선양 영사사무소 218만달러, 상하이 총영사관 102만달러, 칭다오 총영사관 86만달러, 홍콩 총영사관 34만달러, 광저우 총영사관 17만달러 등 총 457만달러이다. 베이징 대사관의 수입까지 합치면 총 806만달러. 예산편성 환율 1100원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우리 돈 89억원이다. 이 돈은 2001년도 주중대사관 기본사업비 61억원의 1.5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현재 이 수입금은 수입대체경비(收入代替經費)로써, 공관이 거두어 쓰고 추후 세출예산에서 정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재외공관의 수입을 서울로 보내고 다시 운영경비를 받기보다 현지에서 걷어 쓰고 예산에서 그만큼 덜 받는 방식을 쓰고 있는데, 업무를 간소화하고 송금 수수료를 줄일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1964년부터 시행해 오고 있다. 재외공관의 영사 수입금 임의사용, 회계처리 부적정(不適正) 문제 등은 이미 고질적인 것으로 근본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ODA(공적개발원조)의 집행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1년 현재 ODA 규모는 총 2억6500만달러로 GNI(국민총소득) 대비 0.064%에 불과하다. 이는 OECD 평균 0.22%의 4분의 1 수준으로 국력에 비해 너무 적다. 앞으로 수년 내에 0.1%까지 늘린다는 계획이 마련됐으나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절대액의 부족도 문제지만, ODA 정책 결정의 적절성과 투명성, 집행 과정의 비리 근절 등을 위한 시스템 마련은 더욱 급한 문제이다. 2000년 6월 우즈베키스탄에 보냈던 3400만달러 규모의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사업은 지원 물품인 교육용 기자재의 품질이 형편없었고 값도 터무니없이 비싸게 매겨졌다. 하자규모가 295만달러에 이르렀고, 업자들은 무려 88억원을 착복했다. 한마디로 ‘돈 꿔주고 욕만 먹은’ 국가망신의 본보기이다.
무상원조는 2001년 기준 총 5800만달러 수준으로 연수생 초청, 물자 지원, 봉사단 파견, 연구조사 등 무려 10여 개 사업분야로 쪼개져 ‘조금씩 고루고루’ 쓰여진다. 2002년 국정감사 결과, 국제협력단의 대외물자 조달은 품목별로 1~2개 업체가 독점하고 있으며, 수의계약이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 12월 계약 비중이 30%를 넘어서고 있어 ‘밀어내기식’ 예산집행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외원조는 유·무상 원조를 병행해야 효율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유상원조는 재정경제부와 수출입은행이, 무상원조는 외교통상부와 국제협력단이 맡는다. 그렇지만 정보공유도 미흡해 효율성을 논할 수준도 못된다. 원조체계의 일원화를 말하지만, 유상원조를 수출의 방편으로 여기고 ‘밥그릇 지키기’에 열중하는 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대외원조를 외교부로 일원화하고 현재 유상 64 대 무상 36인 원조체제도 무상 위주로 바꾸어야 한다.
지난 몇 년은 외교부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시기였다. 그 고리를 끊고 근본부터 바로세워야 한다. 외교부의 분발도 중요하지만 정치권의 적절한 개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
우선 외교부 실태에 대한 바른 진단이 필요하다. 일본은 외부 민간전문가·외무성·정치권 등 3자가 함께 해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진단하고 그에 맞는 수백 가지의 개혁과제를 도출해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우리도 21세기의 외교 방향과 진용에 대한 계획을 위해 외부 전문가 중심으로 ‘외교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장기 플랜과 ‘외교개혁 5개년 계획’ 같은 단기 플랜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우리 외교 역사상 이런 노력은 전혀 없었다.
전직 대통령을 개혁위원장으로
지금은 ‘유능한 외교관 1명이 1개 사단 이상 병력, 자동차 10만대 수출과 맞먹는 국익수호자’일 수 있는 시대이다. 전직대통령을 외교개혁위원회 위원장에 모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울러 NGO 등 민간 부문이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교부의 수장(首長)은 무엇보다 기존 외교계의 관행이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참신하고 개혁적인 인물이 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정부조직 개편론이 나오고 부처와 기구를 이리저리 떼고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미래 외교의 기획과 전략 도출이 먼저이고 외교 인프라 확충과 외교 진용의 재편은 그 다음 문제이다. 이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
외교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외교부문의 비중 축소를 공약하고 예산과 인력을 동결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외교예산이 정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997년 0.73%에서 2002년 0.61%, 2003년 0.63%로 낮아졌다. 외교인력은 10여 년 전인 1991년의 1275명보다 오히려 15명이 줄어든 1260명에 불과하다. 외교통상업무의 중요성, 외교통상 수요의 증대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9월말 현재 30개 공관(23.4%)이 공관장을 포함하여 3인 이하, 88개 공관(68.7%)이 공관장 포함 5인 이하로 운영되고 있다. 외교 예산과 인력의 확충이 절실한 것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향후 10년 이내에 ‘GDP 대비 외교예산 1%·인력 2000명’을 향한 ‘외교발전 10개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외교부는 정부 조직 중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이해관계를 다룬다.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이 그것이다. 즉 개별적 부처의 이해가 아니라 국가전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안보와 관련된 외교정책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다루게 되었고, 대외정책 조정기능은 약화되었다. 일본 외무성이 중장기 국가전략을 다루고 다른 부처를 이끌고 있는 데 비해, 우리 외교부는 정책적 일상(policy routine)을 처리하는 데 급급하다.
일례로 1998년 외교와 통상을 묶어 외교통상부를 출범시켰지만 ‘마늘 파동’ ‘한-칠레 FTA’추진 과정에서 보여 주듯 그 성과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부처간·이익집단간의 조정·통제 권한을 강화·보장해주지 않고서는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통상교섭본부를 분리해 별도의 독립조직으로 만들든, 외교부에 그냥 두든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통상절차법’ 제정, 통상부처 수장의 위상과 조정권한 강화, 대통령의 통상업무 직접 관장 등도 시급한 문제다.
다음으로 ‘열린 외교부’를 만들어야 한다. ‘외무고시’와 ‘외무공무원법’의 시대는 지나갔다. 굳이 따로 이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외교인력의 ‘이종교배(異種交配)’를 강화해야 한다. 외무고시를 통해 충원된 외교관은 재외공관과 본부를 오갈 뿐이다. 재외공관원이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본부에 ‘편지 자주 보내기’를 한다는 소문이 나 있다. 외교부 내의 파벌 할거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일본은 향후 3년 이내에 주요국을 포함한 대사직의 20%를 외부에서 임용하기로 했다. 또 국제기관, NGO, 각 부처, 지자체, 민간기업 등과의 인사교류를 강화하며 매년 10명 이상을 지자체에 내보낸다. 우리도 현재 형식적으로 운영중인 개방형 직위, 지자체 파견대사제도를 내실화해야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외무고시를 폐지하고 인력 충원방식을 다원화해야 한다. 정무 중심에서 경제 통상·영사교민 중심으로 업무운영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외교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기득권에 연연해할 것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바꿔가려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성과를 중시해야 한다. 그간 ‘실리외교’라는 말은 많이 했지만, 외교 과정과 모양새에 지나치게 얽매인 측면이 없지 않다. 목표가 정해지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야 함에도 ‘중구난방(衆口難防)’ 식의 모습을 보였다. 인사·예산 등에서 성과 중심의 관리체계를 도입하여 외교의 질을 높이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재외공관의 혁신은 미룰 수 없는 문제다. 2002년 8월말 현재 24개 부처에서 205명의 주재관을 내보내고 있지만, 이들은 친정부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공관장의 지휘하에 일관된 책임행정을 펼 수 있도록 지휘·감독권이 강화돼야 한다. 필요하다면 별도의 입법도 검토해야 한다. 또한 재외공관의 회계, 운영업무의 실시간 점검체계를 구축하고, 다수의 소규모 공관을 유지하기보다는 거점공관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 외교도 본격적인 개혁을 해야한다. 외교인력도 확충해야 하고 외교관의 사명감도 훨씬 커져야 한다. 하루하루 대처하는 외교가 아니라 중장기 비전을 갖고 국익신장에 충실해야 한다. 새정부의 큰 과제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