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이 700여 개, 방이 9000여 개에 이르는 자금성은 ‘도시 속의 도시’나 다름없다. 도성의 거대한 규모는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일컫던 옛 황제들의 위엄을 드러내지만, 구석구석 발품을 팔며 살펴보면 곳곳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다.
-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건륭제를 중심으로 중국 황제들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본다.
명·청 왕조가 정궁으로 사용한 자금성(紫禁城).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가 발길을 멈춘 곳은 채광이 아주 좋은 전전(前殿)의 삼희당(三希堂). 오늘처럼 흰눈이 대지를 온통 덮어버리는 날이면 화급을 다투는 일이 없는 한 어김없이 이 삼희당을 찾는 것이 그의 습관이자 낙이다.
재위 11년째 되던 해(1746년) 봄 2월 어느 날, 건륭제는 뜻하지 않게 동진(東晋)시대의 서예가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을 손에 넣게 됐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일우로 내가 이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구나!”
그는 이미 선대에 황실로 들어온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을 백원첩과 합쳐 ‘세 가지 보물(三希)’이라 부르고는, 이들을 한 곳에 모셔두기 위해 자신이 정무를 보는 양심전(養心殿)의 전전에 작은 서재를 꾸몄다. 한 평이 조금 넘는(4㎡) 작은 방에 ‘세 가지 희귀한 보물’을 모셔놓았다 하여 그 이름을 삼희당이라 지었다.
이들은 모두 왕희지 일가의 글씨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산둥(山東)에서 태어났으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변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정착, 수많은 서첩을 남긴 왕희지(303∼361)는 글씨의 나라 중국에서도 ‘서성(書聖)’으로 추앙 받는 인물. 한마디로 글씨의 대가다.
왕희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서법은 전서와 예서 일색이었는데, 강남에 문화다운 문화를 진작시킨 동진시대 왕희지 일족에 의해 행서, 초서, 해서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뿐 아니라 그 서법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중국 문인들의 모델이 됐다. 그러므로 그에게 서성이란 칭호를 내렸다 해서 결코 과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희지의 서법에 매료된 건륭제는 만주족이라는 혈통의 한계를 초월하여 중국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색 유리기와가 흰눈에 덮여버린 날, 그는 근엄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소박한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예술사랑에 빠진 ‘문화황제’
삼희당, 나아가 양심전에선 첫눈에 봐서 이렇다할 만한 장식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안(書案), 탁자, 의자, 장롱 등이 하나같이 자단목 같은 진귀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마루에 깔린 요는 담황색 공단인데, 그 위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꿨다. 여름에는 갈포나 하포, 겨울에는 수달피와 담비 가죽, 해룡피를 깔았다. 동난각(東暖閣)의 남쪽 창문과 항탁(온돌 위에 놓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당대(唐代) 도자기가 놓여 있다. 옥기와 도자기, 서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건륭제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단연 쾌설시청첩이다. 이것은 왕희지가 대설이 내린 다음 날씨가 화창하게 개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 산음장후(山陰張侯)의 안부가 궁금해 그 심정을 전하고자 쓴 한 장의 서한문이다. 재질은 종이가 아니라 마(麻)이고, 가로 14.8cm, 세로 23cm의 작은 지면에 4행의 행서로 고작 28자만을 적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건륭제는 이를 보고는 ‘신기(神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서화를 평할 때는 ‘능(能)’ ‘묘(妙)’ ‘신(神)’이란 말로 표현했다. ‘신’은 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찬사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서첩 옆에다 ‘神’이란 글자를 직접 써넣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천하무쌍 고금선대(天下無雙 古今鮮對)’라는 댓구를 덧붙였으며, 삼희당이란 인(印)을 세 개씩이나 찍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서첩에 매료됐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단지 낭만적인 기분에서 이 서첩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춘전(春前)의 서설(瑞雪)’ ‘입춘, 감설(甘雪)이 내리다’라는 글귀까지 남겨놓은 것을 보면 그는 눈을 어지간히도 기다렸던 모양이다.
하북 지방에선 겨울 적설량의 다소가 다음해 농사의 풍작과 흉작을 결정지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백성을 아끼는 어진 군주였다. 건륭제는 그렇게 서설이 펑펑 내리는 날엔 긴요한 공무가 없으면 상서방, 군기처, 육부의 관리들에게 임시 휴가를 줘 가족끼리 모처럼 화롯불 앞에 둘러앉아 설경을 즐길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건륭제가 심취한 것은 서첩뿐만이 아니었다. 그림과 도자기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당시 왕실 도자기는 장시성(江西省)의 경덕진(景德鎭)에서 구워냈다. 인근 고령산의 흙이 화강암이 풍화한 것이라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백 그 자체였다.
건륭제가 좋아했던 도자기는 법랑채였다. 법랑은 색채가 너무 선명해 문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륭제는 순백의 소지(素地)에 세세한 필체가 가해지면 전통적인 중국화의 세계까지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깊고 맑은 채색을 주문했다.
그리하여 비취색이 도는 푸른 바탕 위에 붉은색, 노란색, 녹색의 모란, 봉황, 나비 등이 영롱한 자태를 취하고 있는 최고의 걸작들이 태어났다. 지금도 자금성, 아니 고궁박물원(자금성은 1925년 ‘고궁박물원’이란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됐다)에는 이런 법랑채가 다수 남아 있다.
요즘 ‘문화대통령’이라는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문화와 예술을 배려해 달라는 심정에서 하는 말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스스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문화대통령이 될 수 없다. 수준 높은 감상자가 없으면 결코 수준 높은 예술작품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건륭제의 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건륭제의 이같은 깊은 관심이 후일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전무후무한 백과전서를 편찬케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고전서는 중국의 역대 문헌들을 유교 고전을 일컫는 경(經), 역사서인 사(史), 유교 이외의 고대 사상과 기술에 관한 저작인 자(子), 시집 또는 문집을 지칭하는 집(集)의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10년간에 걸쳐 집대성한 것으로, 총 7만9582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상자 속의 황태자
건륭제(1711∼99)는 1735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무려 60년(말년에 태상황제로 재위한 것까지 포함하면 64년) 동안 재위한 청나라 제6대 황제다. 중국의 그 많은 황제들 가운데서도 사실상 가장 오래 제위에 머문 인물이다. 그는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제(康熙帝)를 조부로 하여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름은 홍력(弘曆),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그는 넷째 아들이면서도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또는 비밀입도법)에 따라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즉위했다. 밀건법이란 황제가 왕위 계승자의 이름을 적은 유조(遺詔)를 건도갑(建匣)이라는 상자에 넣어뒀다가 세상을 떠나면 즉시 뚜껑을 열게 해서 왕위를 잇게 한 제도다.
만주족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적출과 서출을 가리지 않고 황자의 나이 순서대로 ‘제1 아고(황자)’‘제2 아고’ 하는 식으로 불렀으며, 그들 모두를 아고방에 수용해 키웠다. 그러므로 교육 내용에도 차이를 두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는 자격이 있는 자가 자신의 힘으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리 황태자를 세워서 계승자를 정해놓을 수 없었다.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 순치제 등 초기 3대까지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상에 불탔던 강희제는 만주식의 이러한 왕위 계승방식에 반발, 처음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황태자를 세웠다.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말썽의 연속이었다. 황실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 어쩔 수 없이 후계자 지정을 무효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황실 측근들의 옹립으로 황제가 된 옹정제는 강희제의 실수를 거울삼아 밀건법이라는 독특한 왕위 계승방식을 고안해냈다. 황제가 생전에 황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 가장 제왕다운 자질을 가진 이를 고른 다음 그의 이름을 적은 유조를 작은 상자 속에 넣고, 그것을 다시 건도갑에 넣어뒀다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대신들이 상자를 열어 후계자를 발표하게 한 것이다. 건도갑을 둔 장소는 건청궁(乾淸宮)의 옥좌 뒤. 그 위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밀건법은 제9대 함풍제 때 폐지됐다.
經書로 머리 적시고 茶로 목 축이고
명·청 왕조가 정궁으로 사용한 베이징의 자금성은 가로 750m, 세로 1000m의 장방형 공간으로 700여 개의 건축물과 9000여 개의 방이 있다. 한마디로 도시 속의 도시인 것이다. 통자하(筒子河)라는 사각의 해자로 둘러싸인 자금성은 천안문 광장을 바라보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외부 인사들이 출입하기에 좋은 남쪽 부분에서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탄신 축하연, 혼례식, 중요한 칙령의 공표, 외국 사신의 조공, 출정하는 장군의 임명식 등이 벌어졌는데, 이를 외조(外朝)라 불렀다. 이곳에는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 들어서 있다.
외조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면 황제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몸을 정히 한 다음 태화전으로 향했다. 해뜨기 전까지는 조정회의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궁궐 남쪽에서 시장이 열렸다. 그때부터는 백성들의 시간으로, 그들의 생업이 시작됐다. 천안문 광장 남쪽의 숭문구(崇文區) 지역은 왕조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베이징의 재래시장 노릇을 하고 있다. 궁궐 앞에 이처럼 시장을 배치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시구조에 따른 것이다.
삼희당.건륭제가 ‘세가지 보물’을 모셨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명 왕조가 외조를 조영(造營)할 때는 전각의 이름이 지금 같지 않았다. 태화전은 황극전(皇極殿), 중화전은 중극전(中極殿), 보화전은 건극전(建極殿)이었는데, 1644년 순치제가 즉위한 다음해 청조가 이곳을 차지하면서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청조가 이토록 ‘화(和)’를 중시한 사실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소수민족인 처지에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것이다.
외조는 좌우로 날개를 거느리고 있다. 동쪽의 문화전(文華殿)과 문연각(文淵閣), 서쪽의 무영전(武英殿)이 그것이다. 3대 궁전의 종(從) 배열에다 이렇게 좌우 대칭구조를 갖춤으로써 권위와 함께 균형을 도모했던 것이다. 명나라 때 동궁으로 쓰인 문화전은 청대에 들어선 경서를 강의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즉 황제의 교육공간이었다.
이곳에선 한 달에 세 차례 경연(經筵)이 열렸는데, 여기에는 황제와 대신들이 참석했다. 재미있는 것은 경연장에선 반드시 다연(茶宴)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건청궁에서도 다연이 행해졌지만 차다운 차를 마신 곳은 바로 이 문화전이었다.
경연은 문집, 경서, 역사의 순으로 진행됐다. 경연이 끝나면 황제는 참석자 모두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것은 목을 축이는 실용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교육을 장려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었다. 차는 그들에게 일상이자 도(道)였기 때문이다.
다연은 건륭제 때 극치를 이뤘다. 그가 문화전에 들어서면 대신들은 절을 올렸다. 황제가 자리에 앉으면 만주족과 한족 출신의 학자 네 명이 먼저 사서(四書)를 읽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황제가 뜻을 새겼다. 이때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경청했다. 이러한 방식은 오경의 경연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중국 최고의 차, 룽징차(龍井茶)
음다(飮茶)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건륭제는 대단한 차 애호가였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이제 제위를 물려주려 하노라.”
신하된 처지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들 수는 없는 일. 대신들은 화들짝 놀라 입을 모았다.
“하루라도 황제가 계시지 않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건륭제가 응수했다.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는다면 황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를 그토록 즐겼기 때문일까. 그는 시작(詩作)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 자신 일생동안 4만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 정월 초순 하루 길일을 택해 대신과 학자, 왕실 가족들을 건청궁으로 불러 차를 대접하며 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 자리엔 1000명 정도가 참석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장관(壯觀)은 재위 마지막 해인 1795년에 열린 다연이었다. 그 날엔 8000명이 초빙됐는데, 5000명은 자리가 없어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고 한다.
황실에서 내놓는 차는 차의 나라 중국에서도 최고로 치는 룽징차(龍井茶). 여기에 우유를 섞어 마셨다. 룽징차는 룽징이라는 바위샘이 있는 마을에서 생산된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비취처럼 푸르다는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 서남쪽 룽징촌이 바로 그 산지다.
룽징차를 어차(御茶)로 만든 인물 또한 건륭제다. 황제는 강남을 순시하던 중 룽징촌 부근의 효공묘라는 절에서 잠시 쉬게 됐다. 그때 이 절의 스님이 황제에게 그곳의 명차를 올렸다. 황제도 차에는 일가견이 있기에 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결한 찻잔 속에는 참새의 혀처럼 가느다란 찻잎이 은은한 향기와 함께 푸르스름한 찻물을 녹여내고 있었다.
바로 한 모금을 마셨다. 아닌게 아니라 향기가 입 안에 가득했다. 맛이 기가 막혔다. 황제가 “이 차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디서 나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스님은 “이 절에서 나는 룽징차”라고 대답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황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절 앞에 푸른색을 살짝 덧칠한 듯한 열여덟 그루의 차나무가 막 싹을 돋웠는지 푸른 물방울 같은 찻잎을 매달고 있었다. 주위의 산을 일견하니 마치 사자처럼 보였다. 나무의 수도 길하다는 열여덟 그루. 황제는 즉시 차나무를 어차로 지정하고는 황실에 바치라고 명했다. 그때부터 룽징차는 황제가 마시는 차가 되어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룽징차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자봉 근처에서 나는 차를 최고로 쳤다.
건륭제를 비롯한 청조의 황제들은 다연을 한(漢) 문화와의 소통창구로 활용했다. 다시 말해 유교문화를 함께 즐김으로써 한족과 자연스레 일체감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 진흥이라는 효과로도 나타났다.
문화전 뒤에 있는 문연각은 명조의 ‘영락대전’과 청조의 ‘사고전서’ 등 수많은 서적을 보관하고 있는 황제의 도서관이다. 문연각의 반대쪽에 있는 무영전은 서적을 편찬, 인쇄하던 곳으로 ‘사고전서’도 이곳에서 인쇄됐다.
외조의 마지막 전각인 보화전 뒤로는 건청문이 버티고 서 있다. 문의 좌우로는 높다란 담장이 쳐져 있어 외조와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그곳부터는 사내라고는 황제와 거세된 환관들만 드나들 수 있다. 황제와 황후, 비빈(妃嬪)들이 기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건청문을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건청궁은 명대에는 황제와 황후의 침궁으로 쓰였고, 강희제 때는 황제의 침궁 겸 정무를 처리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옹정제가 침궁을 양심전으로 옮기고 난 후로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의식, 연회를 벌이는 장소로 바뀌었다. 건청궁 뒤의 교태전은 명대에는 황후의 거소였고, 청대에 들어선 이후로 황후의 책립(冊立) 공간으로 쓰였다. 황후는 이곳에서 매년 원단(元旦)과 동지, 황후의 탄신일에 대신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건륭제가 옥새를 보관하던 장소도 이곳이다.
침대 위엔 ‘又日新’ 써붙여
그 뒤에 자리한 곤녕전은 평소에는 여러 신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신들에게 공양물을 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청조 발상의 땅인 만주의 샤머니즘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또한 혼례가 있은 다음 사흘 동안은 황제 내외가 이곳 동원각에서 달콤한 신혼 밤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 그 방을 동방(洞房)이라 불렀다. 그 3일간은 연극이 계속해서 공연됐다. 하지만 말이 연극이지, 그것은 지금의 드라마 형태가 아니라 중국 특유의 경극(京劇)이었다. 그때 각지의 이름난 배우들을 초빙해 최고의 볼거리를 펼쳐 보였는데, 이는 궐내 연극과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인 승평서(昇平署)에 의해 조직됐다. 신혼의 황제 내외는 대개 이틀째 되는 날, 수방재(漱芳齋)에서 태후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과 함께 이를 관람했다.
외조의 구조가 음양을 상징한다면 건청궁·교태전·곤녕궁의 3대 궁궐로 이루어진 내정(內廷)은 삼재(三才)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삼재란 건(乾·하늘)·곤(坤·땅), 교(交·하늘과 땅의 결합으로서의 인간)를 일컫는다.
내정의 동서에도 역시 날개가 달려 있다. 동육궁과 서육궁이 그것인데, 여기에는 모두 600여 개의 궁전과 창고가 들어서 있다. 황실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여인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음을 살지게 한다는 뜻의 양심전은 서육궁 가운데서도 맨 앞쪽에 위치했다. 그 앞으로 군기처(군사전략 기능이 강조된 비서실 같은 곳. 1729년 설치)를 두고, 뒤로는 여인들의 거소를 거느렸다. 양심전은 ‘工’자형 구조로, 전전은 정무를 보는 공간답게 장중하고 실용적으로 꾸며졌고, 후전은 침전이라 은밀하면서 깊은 맛이 우러났다.
황제는 옥좌가 마련된 서난각에서 군기대신을 접견하며 결재를 행했고, 삼희당은 앞서도 말했듯이 서재로 썼으며, 후전의 동난각은 자신의 침전으로 사용했다. 황제는 전전과 후전 사이를 잇는 보랑(步廊) 동측의 체순당(體順堂)에는 황후를, 서측의 연희당(燕禧堂)에는 비빈을 대기시켜놓았다가 시간이 되면 불러들였다.
황제의 침대 앞으로는 커튼을 둘렀고, 바닥에는 구들을 들였으며, 은제 변기를 두어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유지토록 했다. 난방에도 최선을 기했다. 침대 위에는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의 ‘우일신(又日新)’이라는 세 글자가 적힌 편액을 걸어놓았고, ‘목숨 수(壽)’자 또한 곳곳에 붙여놓았다. 양심전은 비록 크기는 작아도 청조 황제들의 사생활이 이뤄지는 주무대라 외조의 3궁과 내정의 3궁 못지않게 중요한 전각이었다.
건륭제가 눈 내리는 날이면 찾곤 했다는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지금은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황제가 ‘전선(傳膳)’, 즉 ‘식사 개시’를 분부하면 어전태감이 그와 똑같이 밖으로 큰소리를 지른다. 음식이 동난각 밖에서 들어오면 이를 어전태감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황제의 식사는 규정에 따라 이뤄져야 했다. 식탁으로는 팔선탁(八仙卓)이 쓰였다. 그리고 모든 요리는 황금빛 용이 그려진 붉은색 칠기 그릇이나 ‘용’과 ‘만수무강’이란 글자가 그려진 그릇에 담아냈다. 추운 겨울에는 은 식기를 사용했다.
음식은 60∼70종이 올랐는데, 모두 어선방(御膳房)에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 4명의 태비가 보내온 20여 종에 이르는 일상의 가정요리(家常菜)가 추가됐다. 쌀밥 3∼4종과 반찬 10여 종, 죽 5∼6종이 포함됐다.
어전태감이 황제의 용안을 살피다 때가 됐다 싶으면 환관들에게 “그릇을 열어라”라고 명한다. 그의 명령에 따라 네댓 명의 어린 환관들이 은 뚜껑을 열고 음식을 하나둘 담아낸다. 어선방에서 준비된 음식이 식탁에 오른다고 해서 황제가 곧바로 식사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먼저 은수저로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살핀다. 만약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환관들로 하여금 음식을 맛보게 한다. 황제는 모든 사람을 자기를 해치는 적이라 생각하고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황제는 고독했다. 절대의 존재가 바로 황제였건만, 그는 어느 누구와도 나눠가질 수 없는 고독을 지녔다. 그래서 그걸 스스로 부둥켜안고 살아야 했다.
세상 잡사로부터 절연되어 있으면서 세상사를 좌지우지해야 하는 책임을 홀로 지게 되는 자가 갖는 고독은 절대고독, 바로 그것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할 때조차 자신의 몸종 같은 환관들까지 경계해야 한다면 황제의 삶을 그저 행복하다고만 볼 게 아니다.
8珍味의 으뜸은 제비 둥지
황제의 식사에서 중요한 것은 음식 재료들 간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오곡과 오미(五味·단맛, 짠맛, 신맛, 쓴맛, 매운맛)를 고루 갖춰야 했다. 그래야만 입맛을 돋우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재료의 다양성에 있었다. 중국 역사상 건륭제만큼 다양한 식재료를 구하고자 노력한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전통적인 황실 음식재료였던 오리와 오리알, 바다제비 둥지, 물고기, 사슴, 곰 발바닥, 날 짐승, 햄, 죽순, 백합, 돌배, 곡물, 야채, 과일뿐만 아니라 각지의 특산물을 망라했다. 위취안산(玉泉山)의 기장과 쌀, 산둥의 연밥(蓮子), 후난성(湖南省)의 백합과 복숭아, 산시성(山西省)의 멜론, 광둥성(廣東省)의 귤과 리쯔 등 좋다는 것은 빠짐없이 자금성으로 진상케 했다.
사실 중국의 황실요리만큼 재료가 다양한 음식도 드물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요리의 진수라 불리는 ‘만한취안시(滿漢全席)’를 꼽을 수 있다. 만석(滿席)과 한석(漢席)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일컫는 만한취안시는 갖가지 희귀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곰 발바닥, 낙타 등, 원숭이 골, 코뿔소 뿔 등이 그것. 오늘날 만한취안시를 맛보려면 베이징 시내에 있는 유명한 중국음식점 ‘메이웨이전(美味珍)’을 찾으면 된다. 이곳에선 불도장(佛跳墻)도 즐길 수 있다.
청조 때 196종의 음식을 담아내던 만한취안시 식기 풀세트가 지금까지 보관돼 있어 흥미를 끈다. 취푸(曲阜)에 있는 공부(孔府·공자 집안의 저택)가 바로 그 현장이다. 이 또한 건륭제와 관련이 있다는데, 건륭제가 딸을 공자의 72대 손에게 시집보내면서 혼수품으로 그것을 보냈다는 것이다.
다양하기는 조리법도 마찬가지다. 냉채와 온채, 고기와 야채와 밥, 단것과 짠것, 수프와 우유, 짠지, 면류, 후식, 과일 등이 한 상에 올랐다. 중국 황실요리의 특징은 ‘세심하게 준비된 보기 좋은 모양, 깔끔한 맛, 가벼운 양념, 향기·맛·색깔의 통일성’에 있다고 하는데, 건륭제의 수라상은 그것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중국대륙 곳곳에서 나는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요리사가 최고의 기술을 발휘해 내놓은 것이 건륭제의 수라상이었다.
특히 그가 늘 수라상에 올리게 했던 것은 달콤한 탕옌워(糖燕窩), 즉 바다제비 둥지 요리였다. 섬세한 감식안의 소유자였던 만큼 미각 또한 발달했던 그는 바다제비 둥지 수프를 가장 좋아했다.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장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탕옌워를 8진미의 으뜸으로 쳤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도 있다.
“재위 12년째 되던 해 10월1일. 황제는 동난각의 일본식 칠기 식탁에서 조반을 들었다. 바다제비 둥지, 훈제 고기, 오리 가슴살, 저수(猪手·돼지 발), 캐비지, 닭 날개, 돼지 내장, 버섯 등 8진미가 올랐다.”
양심전의 옥좌. 황제는 이곳에서 군기대신을 접견하고 서류를 결재했다.
이렇게 아침 식사를 들고 난 다음에는 군기처에서 올라온 문서들을 챙겼다. 수많은 관리들을 거느리는 처지라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 것은 황제의 당연한 임무였다. 황제는 주요 지방관들에게 서신 형식의 보고서를 자주 올리도록 했다. 그것을 ‘주접(奏摺)’이라 불렀는데, 황제는 이를 통해 지방관에 대한 인사와 인물평가, 농작물 작황, 기상 및 재해상황, 민심 등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보고서의 신빙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신빙성을 높이고자 군기처를 뒀던 것이다.
건륭제는 군기처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서 기다리는 데만 목을 맨 것은 아니다. 느닷없이 육부에 들이닥쳐 신하들의 업무처리 자세며 미처 올리지 못한 서류들을 살폈고, 밤에는 아무 예고 없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대신들의 집을 찾았다. 그런 과정에서 가공되지 않은 정보를 얻었고, 때로는 쓸만한 인재를 발굴하기도 했다.
미복 순행은 서민들의 삶터로까지 이어졌는데, 거기에서 그는 민심의 소재와 향방을 읽어냈다.
‘데이트’ 순서는 달(月)이 정해
그렇다면 황제의 밤 생활은 어떠했을까. 황제는 1인의 황후, 1인의 황귀비, 2인의 귀비, 4인의 비, 6인의 빈, 그리고 다수의 귀인을 거느릴 수 있었다. 건륭제는 일생동안 41명의 처첩을 뒀다. 그 사이에서 아들 17명, 딸 10명을 낳았다. 그는 이렇게 많은 여인들과 어떻게 ‘밤일’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던 것일까.
‘예기(禮記)’가 쓰여진 주나라 시대 사람들은 천체, 음양, 역수(易數) 등을 통해 일의 순서를 정했으며, 심지어는 비빈과 제왕의 데이트 순서까지도 달(月)의 흐리고 맑은 것이나, 차고 기우는 것, 즉 음청원결(陰晴圓缺)에 따라 결정했다고 한다. 음청원결이란 달이 매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점점 차 올랐다가 보름에서 그믐날까지 15일 동안 점차 기우는 것을 말한다.
제왕과의 동침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해 이뤄졌는데,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는 지위가 낮은 궁녀에서 시작해 지위가 높은 비빈이나 정실로 올라갔다가, 보름을 지나서는 다시 지위가 높은 비빈으로부터 시작해 점점 지위가 낮은 궁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황제와 황후, 비빈들의 침소는 달랐다. 비빈들은 서육궁의 최북단에 위치한 장춘궁과 도수궁에서 살았다. 그러다 황제가 부르면 양심전의 체순당과 연희당으로 가서 대기했다. 황제의 밤일은 ‘조종(祖宗)의 정제(定制)’에 따랐다. 그리고 그 일을 실제적으로 도운 곳은 경사방(敬事房)이라는 부서였다.
황후와 세 명의 일품 부인들은 황제와의 잠자리에서 우선권을 가졌다. 황제와의 동침 사실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 황자 출산의 증거로 삼았다. 황후 이외의 여인들과 잠자리를 주선하기 위해 태감은 매일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준비된 비빈들의 이름이 적힌, 선패(膳牌)라고 부르는 녹색 명찰을 커다란 은 쟁반에 담아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가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르면 선택된 비빈은 목욕과 화장을 시킨 다음 모피로 알몸을 가린 채 여관(女官)들에게 안겨 황제의 침소로 옮겨진다.
환관은 밤새 문밖을 지키고 있다 시간이 되면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라고 아뢴다. 그 시간은 새벽 6시경. 그런데도 안에서 기척이 없으면 두 번 더 그렇게 아뢰고는 비빈을 데리러 안으로 들어간다. 여관이 비빈을 모피에 싸서 데리고 나가면 환관은 황제에게 “어떠했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때 황제가 “예스”라고 답하면 방사(房事)의 일시를 기록해 후일의 증거로 삼지만, “노”라고 답하면 비빈의 국부를 마사지해 용정(龍精·황제의 정액)을 배출시킨다.
황제의 밤일은 규제가 하도 복잡해 황제 자신도 불편해했다. 사내라면 한번 멋지게 놀아보고 싶기도 했겠지만, 그에게 밤일은 글자 그대로 ‘일’이었다. 그래서 이궁이나 승덕(承德)의 피서 산장을 찾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자금성을 벗어나면 그같은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제는 여름이면 반드시 승덕의 피서 산장을 찾았다. 건륭제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합 15차례나 도성을 떠나 각지로 행차했다. 특히 강남지방을 여행할 때에는 그 기간이 4∼5개월에 이르러 많은 경비가 드는데도 불구하고 6차례나 다녀왔다. 남순(南巡)은 색다른 음식과 풍류를 즐기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빼어난 남방 미인(쑤저우[蘇州]와 항저우는 예로부터 미인의 고장으로 유명하다)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건륭제는 모후인 태후는 물론, 황후 부찰(富察)과 비빈 모두를 늘 따뜻하게 대했다. 이는 중국 역사소설가 이월하(二月河)가 쓴 소설 ‘건륭대제’에도 나온다.
부러울 것 없는 황제인 그에게 비공식적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월하는 그 여인이 당아라고 했다. 황제는 당아가 유부녀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다. 그런 기회를 만들기 위해 남편 푸엉을 외방으로 내보내곤 하면서. 그런데 푸엉은 황태후의 남동생이었다. 결국 건륭제는 외숙모와 몰래 사랑을 나눈 셈이다.
건륭제의 비빈 가운데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로 향비(香妃)라는 여인이 있다. 몸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중국 왕실에선 용비(容妃)라 불렀다. 그가 건륭제와 관계를 가진 것은 청조가 신장 위구르 지역을 정복한 직후인 1760년경이었다.
향비가 어떤 경로로 베이징에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 중의 하나는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았다는 것. 그녀의 정체 또한 분명치 않다. 누구는 카슈카르(위구르의 중심도시)의 한 족장 부인이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정혼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건륭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푹 빠지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지녔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자금성에 들어온 향비는 그런 건륭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이 단 것은 오히려 황제였다. 향비가 궁중 음식을 입에 대지 않자 고향 카슈카르에서 나는 재료를 특별히 구해 음식을 만들어줬고, 그녀에게만은 위구르의 전통복장을 입을 수 있는 특권도 부여했다. 그것으로도 안 되자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朝服)을 챙겨주고, 무영전 서북쪽에다 터키식 욕실인 욕덕전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향비는 늘 비수를 품고 있다가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면 칼을 빼들고 자신의 배를 찌를 자세를 취해 어쩌지도 못하게 했다. 이런 비타협적인 태도가 그녀의 명을 재촉했는지, 향비는 자금성에 들어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자살했다느니 살해됐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다.
자살설은 그녀가 이미 정혼한 몸이라 항시 비수를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했다는 데서 나왔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걱정이 되어 그녀를 불러다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해 자살케 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됐건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정복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저항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시신이 묻히지도 않은 카슈카르의 공동묘지를 굳이 ‘향비묘’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사(正史)에는 향비가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실존을 증명하는 근거는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건축가이자 예수회 멤버로서 건륭제를 보좌한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명 郎世寧·1688∼1766)의 그림 ‘향비융장상(戎裝像)’이 유일하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한 여인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아래에 ‘사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는 위구르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나서 새삼 옷에 향내를 피워 머리를 감고 몸을 깨끗이 할 필요가 없었다.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위구르로 출정을 떠나는 원정군 총사령군 조혜(兆惠)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위구르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얻어 경사(京師)에 데려와 바쳤다.”
침몰하는 거함
중국의 건륭제 시대에 유럽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계몽주의를 겪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카스틸리오네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알게 됐다. 그는 베이징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하던 외국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하거나 처형했지만,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오히려 자신과 가까이 두고 천문학자, 통역, 지도 제작자, 화공(畵工), 조각가, 건축가, 토목기사 등으로 활용했다.
카스틸리오네는 화공으로서 황제의 초상화를 여럿 그렸고, 건축가로서는 베이징의 황실원림 원명원(圓明園)에 베르사유 궁전을 닮은 서양식 건물인 해안당(海晏堂)을 지었다. 그러나 이 서구식 건축물은 1860년 애로우호 사건을 구실로 베이징을 침공한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지금은 폐허만 남아 뼈아픈 역사의 한 순간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고궁박물원에 전시된 황제의 유품들. 외국으로부터 선물받은 자명종 시계(위)와 건륭제가 특히 좋아한 법랑채 도자기.
건륭제의 70회 탄신일(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성절정사(聖節正使)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중국을 찾았던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를 배알한 장소도 이곳이다. 그래서 그는 중국을 오가며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열하일기’라는 제목의 글로 남겼다. 열하(熱河)란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250km 떨어진 피서 산장을 끼고 흐르는 강인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열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자는 매년 여름 이 열하에 머문다. 열하는 장성 밖의 황벽한 곳이다. 천자는 무엇이 부족해서 변방의 벽지에 나와 머무는 것일까. 명분은 더위를 피한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변방에 나가 변방을 방비하는 것이다.”
어쨌든 매카트니는 청조 대신들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씩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전례)의 예를 완강히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한쪽 무릎만 꿇고는 조지 3세의 선물과 함께 통상하자는 뜻을 전했다. 이에 건륭제는 조지 3세의 공손함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천자지국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
통상이란 여유가 있는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일정한 조건에 따라서 서로 교환하거나 거래하여 상호이익을 도모하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모든 것이 풍족해 부족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한다는 말인가. 결국 매카트니는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중국은 낡고 흔들거리는 일급 전함이다. 이 전함은 당장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한동안 표류하다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만년의 대실책
그로부터 50년이 채 안 되어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했고, 그 결과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해 다섯 항구를 그들에게 열어줘야 했다. 건륭제가 위엄을 갖고 매카트니를 만났던 열하 이궁에서는 훗날 베이징에서 도망쳐간 황제가 서구 열강에 굴복해 베이징조약에 서명하고 말았으니 매카트니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강희제와 옹정제 때 기틀이 다져진 청조는 건륭제 때 완숙함을 보이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로 급속히 쇠약해졌다. 그의 장기 집권이 왕조의 노쇠를 재촉했을 수도 있다. 생리적인 노쇠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무감각해지는 현상을 낳고, 그것은 다시 모든 것을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기에 그렇다.
84세가 되던 해인 1795년, 건륭제는 조부 강희제의 재위기간(61년)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재위 60년인 그해 열다섯 째 아들 가경제(嘉慶帝)에게 제위를 물려줬다. 자신은 태상황제로 칭하면서 영수궁(寧壽宮)에 은거했다. 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가 만년에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화신(和?)에 대한 편애였다. 늘 조화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그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신만은 허물이 있어도 덮어줬고, 자신의 두 딸마저 화신의 집안과 혼인시켰다. 노망기가 발동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가 끝내 벌주지 못했던 화신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가 무섭게 저 세상 사람이 됐다. 가경제가 20가지 죄목을 열거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왕위에 머물던 건륭제는 1799년 정월,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베이징과 승덕 사이에 있는 청동릉에 묻혔다. 거기서 가장 큰 무덤인 유릉(裕陵)이 그의 유택(幽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