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國史)는 억압, 배제, 은폐의 기제이므로 해체해야 한다.
-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이 ‘국사의 해체를 향하여’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내걸고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과연 ‘국사 해체’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자, 동아시아 연대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2001년 7월 ‘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가 개최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재수정 거부를 규탄하는 집회
국사는 억압, 배제, 은폐의 기제이므로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사학계를 강타했다. 8월21일 ‘비판과 연대를 위한 역사포럼’(이하 역사포럼)이 주최한 공개토론회는 ‘국사의 해체를 향하여’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내걸었다. 북한의 핵 도발과 미국의 군사적 위협, 일본의 우경화와 재무장화, 동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 복원을 시도하는 중국 등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제기된 ‘국사 해체론’인 만큼 논쟁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한·일 민족주의는 적대적 공범관계
이 논쟁을 이끈 ‘역사포럼’은 일국사적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며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2000년 1월 결성됐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한국경제사), 임지현 한양대 교수(서양사), 도면회 대전대 교수(한국근대사), 박환무 한양대 강사(일본근대사),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한국고대사), 이와사키 미노루 도쿄외대 교수(정치사상사),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한국근대사)를 중심으로 한·일 역사학자들이 지난 4년 동안 4차례의 한·일 워크숍과 15차례 국내 세미나를 통해 꾸준히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대중 공개토론회는 이번이 처음. 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임지현 교수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이 ‘국사 해체’ 논의의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2000~2001년에 걸쳐 일본 우익계가 만든 역사교과서로 인해 파문이 이어졌을 때 한국정부가 나서서 항의하고 시민들이 규탄대회를 여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비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옳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식은 곤란하다. 오죽하면 일본의 우파언론인 ‘산케이신문’이 한국의 국사교과서를 본받으라고 했겠나.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든 주체나 한국의 비판주체는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과 국민 만들기라는 동일한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다.”
임교수는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하고 겉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결국 민족주의라는 같은 토양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2002년 ‘당대비평’ 특별호 ‘기억과 역사의 투쟁’에서 일본이 우리의 수정요구를 일부 받아들인다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이 바로잡힌다 해도 일본이라는 민족국가의 ‘정사(正史)’가 중국 또는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정사’와 부딪치고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근·현대사의 해석에 드리워진 군국주의적 역사관의 망령을 거두어버린다 해도 발해사와 고구려사를 둘러싼 중국 ‘정사’와 한국 ‘정사’의 갈등은 참으로 해소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 2001년 후쇼샤판 역사교과서의 채택률이 0.1%에도 못미치자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교과서 채택 결과가 외국의 압력과 시민단체들의 활동으로 왜곡됐다”며 “4년 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별렀다. 한편 교과서 파동으로 일본의 각급 학교가 우익 교과서의 채택을 꺼린 만큼 좌파 교과서도 외면해 어부지리로 중립적 교과서들의 채택률이 높아지는 결과가 초래됐다. 좌파 교과서는 정신대 문제를 비롯,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에서의 가해행위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우파로부터 ‘자학사관’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대해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우와 좌의 극단을 배제하고 중(中)을 취한다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게 좋지 않았던 역사의 기억을 물타기해서 망각시키는 긴 호흡의 ‘역사수정주의’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우파의 승리인 셈이다. 임지현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가 적대적 포즈를 취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공범자”라며 “내셔널 히스토리의 틀을 고수하는 한 이런 싸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예 그 틀을 깨자는 것이 국사 해체”라고 설명했다.
이번 토론회에는 탈식민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해 각자 다른 입장을 지닌 3개국(한·미·일) 5명의 연구자가 패널로 참가했다. 먼저 ‘국사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한국인이 유사 이래 혈연·지역·문화·운명·역사의 공동체로서 하나의 민족이었으며, 높은 수준의 문명을 건설했고,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서유럽의 근대국가 못지않은 공공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으나 그만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의해 망가졌다는 식의 역사 인식 자체가 신화”라고 했다.
이교수에 따르면 19세기까지 한국인들에게 ‘민족’은 그 개념조차 없었다. 원래 ‘족(族)’이란 왕족·귀족·사족과 같이 지배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피지배신분인 ‘민(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혈연공동체니 민족이니 하는 것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민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로,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하자 집단적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일본으로부터 ‘민족’이라는 말을 수입해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대항물로서 탄생한 한국의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국사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국사의 신화적 속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왕조의 문민정치를 서유럽 근대 민주주의와 거의 같은 수준의 문명으로 평가하려는 최근 국사학계의 시도를 꼽을 수 있다”며 “조선왕조는 어디까지나 재분배에 기초한 도덕경제요 도덕사회이지 근대의 경제사회는 아니었다”고 못박는다.
또 민족주의 사학이 과거를 미화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 나라(일본)를 주저없이 ‘강포한 도둑’이나 ‘악의 화신’이라 부를 만큼 대외적으로 배타적인 반면, 반문명의 극치라 할 북한의 ‘수령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을 봉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토론자로 나선 서울대 박지향 교수(서양사)는 이영훈 교수가 지적한 민족주의 사학의 폐해에 공감하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아시아를 방문하고 관찰한 영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기록한 데서 민족주의는 자연 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즉 한 민족이 한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19세기식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정체성 형성의 범주로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이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면서 국민국가 체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국가는 이제 시민들에게 한 가지 정체성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민족주의의 태생적 한계
또 박교수는 국민국가에서 민족주의는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념이었으며, 그 민족주의는 ‘나와 남’의 테두리를 규정하고 구별짓는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자신들의 ‘예정된 숙명’에 대한 믿음과 ‘영광과 구원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민족의 신화를 짓밟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태생적으로 파괴를 함유하며, 비이성적이고, 편협하고 증오심을 유발한다고 했다.
그러나 박교수는 ‘국사 해체’라는 주장이 학술적 범위를 벗어나 이미 정치적 장(場)으로 진입했다는 현실론에 입각해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세계가 여전히 국민국가 체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약화는 민족의 약화일 뿐이다. 둘째 특히 현재 한국이 처해 있는 국제정치적 조건-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정학적 여건과 분단국가-때문에라도 민족주의를 강력히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민족통일이라는 대명분 때문에 민족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호소력을 갖는다. 이에 대한 국사 해체론자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또 다른 토론자인 인하대 이영호 교수(한국근대사)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역사포럼이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국사’란 과연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영호 교수는 이 토론회가 타깃으로 삼은 것이 ‘국가주의적 역사이해의 해체’로 보인다며, 그러나 해체의 대상으로 점 찍힌 국사가 과연 한반도에서 어떻게 시작됐으며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현실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영호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국사는 식민주의사학에 의해 구축됐고 그나마 식민지 하에서 한국의 역사는 역사체계 속에서 사라졌음을 강조했다. 1911년 1차 조선교육령에서 역사과목이 없어졌고,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일본역사를 가르쳤으며 1927년 일본사가 ‘국사’로 바뀌었다.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민족적인 것의 말살, 내선일체의 강조, 대동아 공영권의 역사적 사명이 강조되는 국사편찬이 이루어졌다. 이는 독자적인 국민국가와 민족의 형성에 실패한 집단이 세계사에서 어떻게 지워지는지 보여준다.
이영호 교수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의 차이는 엄청난 것인데 그것을 동등하게 평가해 ‘주변부의 저항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거울반사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양자는 적대적 공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국권회복을 목표로 무력을 선택한 의병과 국운의 융성을 위해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군을, 무력을 동원하고 민중의 희생을 동반했다는 점에서 적대적 공범관계로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국사 해체론 대신 애국주의에 기초한 미국의 세계패권전략, 일본의 군사대국화, 중국의 티베트 탄압과 러시아의 체첸 탄압 등 현존하는 적대적 공범관계의 청산을 촉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국사 해체’라는 과격한 표현을 걷어내고 나면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1994년 임지현 교수는 ‘역사비평’ 가을호에 ‘한국사학계의 민족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금기나 다름없던 민족주의 역사학의 영역에 도전했다. 사실 그 무렵 한국사학계는 1980년대를 풍미한 민족 해방론과 민중 민주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역사연구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문제의 교과서
이와 비슷한 문제제기는 이후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2001년)에서도 반복된다. 이교수는 이 책에서 “고대사 서술에서 ‘우리나라의…’와 같은 구절은 있을 수 없다”며 “근대의 국민 의식을 전제로 일본민족과 한민족이 제각각 고대이래 자기 완결적으로 민족사를 걸어왔다는 식의 논의가 횡행했다”고 비판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일 수밖에 없는 임교수의 주장은 1999년 출간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 담기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한다. 그러나 1994년에는 그야말로 문제제기 수준에서 멈췄다. 임교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는 절대 선이라는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 무렵 사학계에 민족주의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역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 ‘국제화 시대의 민족주의와 민족문화’에서 민족주의는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당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분단은 곧 민족주의의 좌절을 의미하며, 분단국가는 민족의 이익보다 민족의 대표자, 대표기구임을 자임하는 남북 양측의 ‘국가 이익’을 우선한다”고 했다. 결국 남북한의 역사는 모두 민족주의의 언술을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국가주의의 원칙 하에 민족주의를 억제해온 역사였다는 것이다. 북한은 구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저항적·배제적 민족주의’를 견지했으나 그것은 내부의 단결을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였고, 남한에선 박정희 대통령 집권 초기에 ‘민족적 민주주의’ 논리를 표방했지만 실제 외교정책이나 국내 통치에서는 오히려 민족주의가 억제됐다고 했다.
당시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한국사)도 “안두희가 국사법정에서 당당하게 ‘나는 국가를 위해 김구 선생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나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만들어질 때 친일파들이 반공구국 총궐기대회를 열면서 ‘반민법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을 분열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식의 극우반공주의는 민족주의와 구분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민족단위, 국가단위가 여전히 국가경쟁력의 최대 원천이자 구체적 범위라고 할 때 민족을 단합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덧붙여 서교수는 “통일민족국가를 이루는 데는 민족의식, 민족주의, 자주성, 공동체의 문제 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좋은 민족주의’ ‘나쁜 민족주의’ ‘열린 민족주의’ ‘닫힌 민족주의’ 등 민족주의 안에서도 차별을 두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절대 선’이라는 민족주의의 견고한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민족 1국가론의 허구
민족주의 역사관이 다시금 공개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1999년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 ‘한국 민족주의-저항 이데올로기인가, 지배 이데올로기인가’에서였다.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한국 민족주의의 근대성 비판’이라는 글에서 민족주의의 폐해를 집중 거론했다. “외국인 혐오증이나 공격적 팽창주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극단적 반일감정, 반미운동이 모두 민족주의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1민족 1국가론의 허구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국 민족주의는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할 때 완성된다는 것은 그릇된 환상이며, 우리가 2개의 국가를 가진 민족으로서 냉전을 해체하는 것이 절대적 과제라 해도 이런 ‘환상적 민족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8월21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개 토론회. ‘국사의 해체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실례로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민족담론의 주도권을 놓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민족주의 담론이 ‘국가성’ 확립이라는 최우선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도구로 인식됐던 것이다. 일장기가 태극기로, 천황의 사진이 대통령의 사진으로 대체됐을 뿐 국가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논리는 애국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에게 강요된 시절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국사
2000년대 들어 이처럼 민족주의 역사학의 재검토 작업이 활발히 진행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1990년대 한국사학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92년 고시된 6차 교육과정에서 국사교과가 폐지되고 사회교과로 통합됐다. 1997년 7차 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 국사 교육내용에서 근현대사를 제외해 사회교과 내 선택과목 중 하나로 편제했다. 서울산업대 서의식 교수(한국사)는 역사교육의 위축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정책 주도층이 제 나라 역사성과 문화전통을 아는 것이 현실의 삶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그 효용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여긴 점이며, 다음으로 지금까지의 국사교육이 민족·국가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파행과 경제적 불균(不均)을 정당화하는 정치 교육적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작용했다. 여기에 역사학이 다루는 사실의 객관성과 실재성을 의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학문경향이 한국사의 입지를 더욱 좁혀놓았다.
이 무렵 민족·국가 중심의 역사인식을 배격해야 할 거대담론으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을 놓고 서양사와 한국사 연구자들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역사비평’ 지면을 통해 ‘탈국가·탈민족 역사서술’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그것은 한국사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가장 첨예한 논쟁 중 하나였다.
서울대 안병직 교수(서양사)는 그동안 한국사학계가 역사인식과 서술에 관한 이론적 논의에 소홀했던 점을 지적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론을 위한 변론’이라는 글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론은 사료가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낙관적 신념은 허구에 불과함을 확인시켜 주었다”며 “사료와 고증이 역사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사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론이 제기하는 역사인식 문제를 곰곰이 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서의식 교수는 “스스로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하며 독립된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인간공동체로서 민족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민족 중심의 역사이해가 한국사를 왜곡으로 이끌었다는 지적은 부당하다”며 “민족 중심의 사관과 역사서술은 우리가 완성하고 이루어내야 할 과제”라고 역설했다. 덧붙여 “국사는 단순한 교과목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가진 자기의식의 표상이고 정신·사상이기 때문에 국사교과를 사회과에 함몰시킨 조처는 자주국가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신의 방기”라며 한국사학계의 분노를 대변했다.
反국민과 애국의 이분법을 넘어
과연 민족·국가 개념을 버리고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전대 도면회 교수는 “민족·국가 개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에 도덕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부여하지 말고 역사서술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국민국가와 민족·민중 중심의 역사는 과거 인간의 행위를 반국민(민족)적 행위와 애국(애족)적 행위로 양분하고 그 사이의 중간적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에게 해롭게 했다는 이유로 역사로부터 배제되거나 반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했다 해서 이전의 모든 행위가 역사의 이름으로 사면되는 도덕적 판단을 멈출 때 역사는 비로소 개인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도교수의 주장은 ‘국사 해체’ 이후 어떻게 역사를 서술할 것인가에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역사비평’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게재된 글과 이 논쟁에 참가한 역사학자의 수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회에 걸쳐 총 17편의 글이 발표됐고, 토론자까지 포함하면 참가자는 23명에 이른다.
한편 이 논쟁에서 경기대 김기봉 교수(서양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문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해 이후 역사포럼이 주장한 ‘국사 해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한국은 실증적 연구를 통해 입증된 객관적 역사 사실이 이러하니 마땅히 그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적 사실이란 해석된 사실이며 역사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사관’을 내세웠다.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참가자들이 2003년 일본에서 워크숍을 마치고 한자리에 모였다.
김교수는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주장하는 ‘아시아해방전쟁’ 혹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일본 우익의 역사논리를 해체하기 위해 우리는 국사교육의 강화가 아닌 세계사교육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시 말해 역사투쟁에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민족을 코드로 한 ‘역사청산’으로부터 ‘탈민족적 연대’로 문제의 틀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 민족을 단위로 해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전선을 형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안의 그들’을 배제하고 ‘그들 안의 우리’와 연대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권하고 있다. 김기봉 교수의 ‘탈민족적 연대론’은 2003년 8월 역사포럼이 제기한 ‘국사 해체론’과 손을 잡는다.
그러나 새롭게 제기된 ‘국사 해체론’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일종의 이벤트’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국사라는 말이 19세기 국수주의적 개념이기 때문에 ‘국사 해체론’이 국사 명칭 바꾸기 운동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미 학계에서는 국사라는 용어를 거의 쓰지 않고 ‘한국사’가 통용되고 있어 큰 의미가 없다”고 평한다. 또 서교수는 “동양사, 서양사, 한국사가 따로 노는 지금의 연구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이미 한국사학계도 서양사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으며 역사교육이 일국사적 입장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한국사 속의 세계사’로 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곧 국사 해체는 아니다”라고 했다.
앞서 서중석 교수는 한국의 국사교과서 서술에 문제가 많다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역사비평’ 2001년 가을). 서교수는 이 글에서 “아무리 국사교과서라고 하지만, 그리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민족사와 국가사, 지역사가 대체로 일치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민족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었다”고 했다. 특히 고교 교과서에서 홍익인간을 우리 민족이 간직해온 민족정신의 원류이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부합한다고 한 것은 과도한 주장이며 이것이 ‘퇴행성 국가주의’로 이해될 소지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서교수는 세계 여러 나라, 여러 민족과 평등하게 교류 협력하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민족주의, 강대국 국가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성·정체성을 살리려는 민족주의가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사관에 대한 반성
명지대 한명기 교수(한국사)는 “국사 해체론은 한마디로 담론의 과잉이며, 대안 없는 문제 제기”라고 평했다. “국사 해체라는 말 속에는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담겨 있다고 본다. 특히 동아시아 3국의 전통이 긴밀히 연대해온 이상 일국사적 시각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중국이 ‘중화(中華)학’을 앞세우고 일본이 재무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혼자 발가벗고(국사 해체) 비판하는 것이 과연 동아시아 평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논의를 반전시켜 한국사학계가 개별연구를 통해 한국사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역사학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한영우 교수(한국사)는 비록 이번 역사포럼 토론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그가 언술한 ‘사관에 대한 반성’은 ‘국사 해체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교수는 역사를 주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사관은 선과 악의 양면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했다.
“사관이 강할수록 역사학은 실천성이 강하다. 사관 자체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주장’, 즉 호소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호소력과 실천성이 강한 사관일수록 과거의 진실을 과장하고 왜곡하고 단순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를 풍미한 민족주의사관은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미화시키며, 계급주의사관은 계급 갈등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는 오류를 범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역사학은 중대한 딜레마에 직면한다.”(한영우 ‘역사학의 역사’에서)
한교수의 시각을 빌리면 ‘국사 해체’란 기독교사관, 인문주의사관, 계몽주의사관, 민족주의사관, 유물사관, 문화주의사관, 유교사관 등 서로 다른 가치 기준을 넘어서는 한편, 실증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역사 연구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한교수는 “동아시아 보편의 역사인 동시에 한민족의 특수사라는 이중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한국인이 어떻게 인간과 자연의 생명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는지 검토하는 것이 한국사 연구의 주요 과제”라고 했다. ‘국사 해체’라는 도발적 질문 뒤에 던져진 무거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