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4월이면 멕시코 한인(韓人) 이민 100주년.
- 하지만 그간의 관련연구는 그리 깊지 못했다.
- 멕시코 이민 연구에 몰두해온 두 학자가 최근 멕시코 이민 출항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해냈다. 당시의 이민선 사진과 이민모집 광고를 중심으로, 잊혀진 구한말 멕시코 한인 이민의 아픔을 되새겨본다.
일포드 호(S.S ILFORD) 사진. 1905년 4월 초 우리 이민 1033명을 싣고 인천항을 출항, 멕시코로 향한 이민선. 위 사진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촬영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뱃머리에 ILFORD라는 배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소장자 : The World Ship Society, Carlisle, U.K. 이 사진을 사용하려면 소장자로부터 사전 허락을 구해야 함)
이미 멕시코 현지에선 서동수 회장, 조남환 목사, 율리세스 박 회장 등을 중심으로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활동을 개시했고, 국내외 관련학계 연구자들도 몇 년 전부터 멕시코 이민과 관련한 자료들을 발굴해 멕시코 이민사를 최대한 복원해보려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여러 해 전에 ‘애니깽’이란 영화로 국내 일반에 알려진 100년 전의 멕시코 이민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사의 일부로 편입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구한말의 멕시코 이민은 멕시코 유카탄 농장주협회 대리인 마이어스(John G. Meyers)가 일본의 이민회사 중 하나인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殖民合資會社)를 움직여 서울에 그 회사의 총대리점을 차려놓고 전국에 걸쳐 모집해서 송출한 이민이었다. 당시는 하와이 이민이 근 2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오류로 점철된 멕시코 이민 연구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1월 미국인 데쉴러(David W. Deshler: 大是羅)가 당시 미국 공사 알렌(Horace Allen: 安連)의 주선으로 고종황제로부터 ‘大韓國役夫 國外雇傭事는 米國人 大是羅로 掌理케 할 事’라는 칙령을 받아내서 합법적으로 추진됐다. 반면 멕시코 이민은 우리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은 기록이 없다. 또한 우리의 이민법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계약노동이민’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불법이민으로 간주되고 있다.
멕시코 이민은 법적으론 불법이었지만 신문광고까지 내며 공개리에 추진됐으며, 종국에는 여권까지 발급해줬던 점 등으로 미뤄보아 우리 정부의 관계기관에서 이를 알면서도 묵인해주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생각된다.
멕시코 이민은 이민자들을 떠나보낸 직후 그들이 노예나 다름없는 심히 고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전해져서 고종황제를 비롯해 정부 관계기관에서 몇 차례 관심을 보였을 뿐 곧 잊혀진 존재가 돼버렸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에도 구한말 이민 1세대와 그 후손들에게 모국 정부와 국민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멕시코 이민에 관한 기초적 자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자경의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1998)는 기존 자료들을 총체적으로 취합하고 멕시코 현지에서 발굴한 새로운 자료들을 통합 정리했을 뿐 아니라 이민 1세대와 그 후예들의 증언을 채취함으로써 멕시코 이민에 관한 총체적인 그림을 제시해준다. 이자경은 이 과정에서 자료의 망실과 부족, 기존 자료간의 상충 등에서 비롯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서성철은 ‘멕시코 한인 이민사 현황과 문제점: 초기 한인 이민에 국한하여’(1995)란 논문에서 기존 자료가 많지도 않은데 이들마저 ‘잘못된 기록, 오류들로 점철되어’ 있으며 멕시코 이민 연구자들이 이 잘못된 자료들을 비판 없이 ‘재인용하고 참조하는 바람에 계속 오류가 오류를 낳게 되는 결과’를 빚어왔다고 지적했다.
서성철은 이제부터라도 학계에서 멕시코 이민에 관련된 ‘원사료(原史料)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서 이를 취합 정리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취합된 ‘사료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 모든 부정확, 잘못을 정정해 학술적 자료로서 그것들을 재구성해보는 일’의 시급함과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필자들은 멕시코 이민에 관한 원사료가 크게 부족한 현 상황에서 멕시코 이민과 관련한 문헌에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몇몇 자료들을 새로 찾았다. 따라서 이들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에 관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멕시코 이민 연구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로이드 선박등록부(Lloyd’s Register), 1914~15, IHU-ILF’에 올라 있는 일포드 호에 관한 사항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자료나 연구에서는 일포드호가 영국 선적(船籍)의 선박으로, 이민모집책 마이어스가 일본 모지(門司)항에서 전세를 내서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 수송에 투입한 배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필자들은 이민선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으니 사진까지 찾게 된다면 훨씬 실감이 나리라 생각했고, 영상시대에 비중이 크게 높아지고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시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2003년 2월부터 일포드호의 사진을 찾아 나섰다.
일포드호 사진 탐색 초기, 일본 ‘가이진샤(海人社)’ 발행의 선박 전문지 ‘세계의 함선(世界の艦船)’ 관계자의 도움이 컸다. ‘세계의 함선’ 편집부의 고이케 가쓰미(小池克己)씨에게 일포드호가 일본의 모지항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그 배의 사진을 소장하고 있느냐고 문의했더니 사진은 없다면서 일포드호의 주요 자료가 담긴 ‘로이드 선박등록부(Lloyd’s Register of Ships, 1914∼15)’의 해당 면을 복사해 보내주었다. 이 등록부에서 일포드호가 1901년 영국 뉴캐슬의 조선소에서 건조됐으며 총 4266톤의 강철선이라는 것, 선박의 소유회사는 ‘영국기선회사(Britain Steamshop Co.)’라는 것 등을 알 수 있었다.
‘세계의 함선’지 관계자는 또한 일포드호 사진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으로 영국 국립해양박물관(National Maritime Museum), ‘해풍’ 잡지(Sea Breezes), 그리고 ‘세계선박동호인회(World Ship Society)’ 등 세 곳을 알려줬다. 이들 세 곳에 문의했더니 국립해양박물관 쪽에선 메리 에드워즈(Ms. Mary Edwards)라는 이름의 연구관(curator)이 일포드호의 사진이 없다면서 영국 칼아이슬(Carlisle)의 ‘세계선박사진도서관(World Ship Photographs Library)’에 알아볼 것을 권했다. 세계선박사진도서관에 항공우편으로 두 차례 문의했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
몇 달간의 탐색에도 성과가 없자 일포드호 사진 찾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전자우편에 화이트사이드(Whiteside)란 사람으로부터 ‘ilford’란 제목의 편지가 와 있어 급히 열어보았다. ‘내게 당신이 찾는 일포드호 사진의 음화(negative)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각 답신을 띄워 멕시코 이민 연구를 위해 그 사진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 사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료가 얼마인지, 송금은 어떻게 어디로 해야 하는지 등을 문의했다. 이에 대한 회신에 따라 사용료를 송금했으며 얼마 뒤 연구논문에 그 사진을 사용해도 좋다는 사전허가와 함께 일포드호 사진이 도착했다.
필자들은 ‘멕시코 이민선 일포드호, 이민선이니까 여객선이겠지’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었다. 따라서 도착한 사진을 보는 순간 일포드호가 화물선인 데 크게 놀랐다. 어쩌면 이 선박이 우리 이민자들이 타고 간 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전에 하와이 이민에 관한 자료를 찾으면서 1973년 10∼12월 당시 경향신문의 윤여준 기자가 ‘미주이민 70년’ 특집을 연재하면서 ‘멕시코 이민선 일포드호’에 관해 기사를 썼던 것이 생각나 그 기사를 급히 찾아보았다.
일포드호는 화물선이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민선은 화물선이었다. 짐을 싣던 선실에는 나무로 만든 2층 혹은 3층 침대가 임시로 설비되어 있었는데(이흥만씨의 말)…’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영국에서 날아온 사진의 ‘화물선 일포드호’가 우리의 멕시코 이민선이었음을 확신하게 됐다.
이민모집 신문광고 추가 발견
구한말에 우리 국민 1000여 명이 어떻게 해서 영국 선적의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게 됐을까?
되돌아보면 당시 멕시코 에네껜(Henequen: 용설란) 농장의 노동력 부족이라는 끌어당기는 요인, 구한말의 정치적 혼란 및 무력감과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등 밀어내는 요인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마이어스라는 이민모집자와 대륙식민회사라는 이민모집 대행사가 신문광고와 벽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을 통해 멕시코를 이상향으로 그리면서 이민자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민모집 광고에 실린 멕시코에 관한 환상에 이끌려 거기에 적힌 약속을 믿고 이민선에 올라탔던 이민자들이 막상 멕시코 에네껜 농장에서 부딪친 현실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힘겨운 것이었다. 계약의 굴레에 얽매여 말 못할 고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노예로 부림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져 황성신문 등 우리의 신문들에 보도되기도 했다.
고종황제는 멕시코로 이민 간 백성들의 참상을 듣고 통탄하며, “…이 1000여 명의 불쌍한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소환할 것에 대해 의정부로 하여금 충분히 토의하고 해당 회사에 교섭하여 기어이 빨리 살아 돌아오도록 하되 날짜를 끌지 않도록 하라”(고종순종실록, 음력 을사년 7월1일 조)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 고종황제는 하와이와 멕시코의 이민들을 돌아보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도록 윤치호 외무차관을 파견했는데 그는 여비가 모자라 고국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는 멕시코에 가지도 못하고 귀국했다.
멕시코 이민에 관한 그동안의 연구에서 이민모집 신문광고에 관해서는 1904년 12월17일부터 7회에 걸쳐 게재됐던 황성신문 광고만이 언급돼왔다. 그런데 또 다른 신문인 대한일보(大韓日報)에 났던 이민모집 광고를 이번에 새롭게 찾았다. 광고가 난 시기도 황성신문과는 달랐다.
대한일보는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1904년 3월10일에 창간한 국한문 혼용신문으로, 1904년 12월10일에 서울 명례방 종현(현재의 명동2가 명동성당 서쪽 부근)으로 옮겨서 1909년 너머까지 발행했던 신문이었다. 이 대한일보가 황성신문보다 20여 일 앞선 1904년 11월25일자에 “北美墨西哥國招工廣告”라는 제목으로 멕시코 이민모집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대한일보는 이 광고를 같은해 12월1일까지 일주일간 매일 게재했다.
일찍부터 본격화됐던 이민모집
대한일보에 처음 난 멕시코 이민모집 광고는 황성신문에 실렸던 광고, 즉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 광고와 내용면에서는 대체로 비슷하나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대한일보 광고엔 ‘大韓外部에도 業經承認얏오니…’라는 구절, 즉 대한정부의 승인이 있었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는데 황성신문 광고에선 이 구절이 빠져 있다. 광고의 제목이 대한일보의 경우 ‘北美墨西哥國招工廣告’인데 황성신문엔 ‘農夫募集廣告’로 돼 있어서 문어체적인 감이 덜 든다.
대한일보에는 이민모집 대리점으로 제시된 것이 ‘京城 竹洞 81統 대륙식민합자회사 대리점’ 하나뿐이었으나 황성신문은 이 총대리점 외에 5개 지방 대리점들을 추가해서 밝히고 있다.
황성신문의 멕시코 이민모집 광고는 1904년 12월17일부터 1905년 1월13일까지 7차례 게재됐는데,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긴 대한일보가 황성신문에 이어 1905년 1월29일과 2월1일, 3일에 순한글로 된 구어체의 멕시코 이민 ‘농부모집광고’를 실었다. 이민모집 광고가 몇 차례 더 실렸을 것 같은데 그 뒤의 신문 여러 날 분이 보존되지 않아 확인을 할 수 없었다.
대한일보에 실린 이 순한글 광고의 내용 가운데 이전의 광고와 크게 달라진 게 하나 있는데, 계약기간에 관한 조항이다. 황성신문 광고의 경우에는 ‘農作은 五個年으로 爲限고…’로 돼 있었고, 그 앞의 대한일보(인천) 광고의 경우엔 ‘工作은 五年爲限고…’로 돼 있던 것이 대한일보(서울)에 난 이 순한글 광고에서는 ‘고용은 사년인…’로 1년이 줄어 있다.
지원 마감일자도 황성신문 광고에서는 ‘음력 12월 초 10일 내’였던 것이 대한일보 두 번째 광고에서는 ‘음력 정월 십오일 내로…’ 1개월여가 더 미뤄져 있다. 대리점도 황성신문 광고에는 서울, 인천, 개성, 평양, 진남포, 수원의 6개 지역에 두었던 것이 대한일보에서는 부산, 목포, 마산, 광주, 군산의 5개 지역이 추가돼 모두 11개 지역으로 늘어나 있다.
멕시코 이민모집에 관한 대한일보의 이들 두 광고를 새로 찾음으로써 마이어스와 대륙식민회사의 이민모집 작업이 황성신문 광고를 통해 알려졌던 것보다 일찍 본격화돼서 보다 오래 동안, 즉 1905년 2월26일의 제1차 출항 직전까지 추진됐음이 밝혀지게 됐다.
대한일보 1905년 2월2일자 이민모집 광고를 보면, 신청 마감일자가 ‘음정월십오일’ 즉 양력 2월18일로 나와 있고, 황성신문 2월24일자 광고를 보면 ‘북미묵서가로 떠나는 배’ 즉 멕시코행 일포드호의 인천 출항일자가 ‘금월(2월) 26일(양력)’로 나와 있다. 이민모집 광고가 2월 초순까지 실렸고 이민신청 마감일자가 2월 중순이었으며 이민선 출항이 2월 하순이었음을 이들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 2월26일의 인천항 출항은 멕시코를 향한 제1차 출항으로서, 그 뒤에도 인천항 출항에 관한 기사나 문건이 두 차례 더 나오게 된다.
대한일보에 실린 멕시코 이민모집 광고. 1905년 1월29일자 4면 게재. 2월 1, 2일에도 실렸다. (소장처 : 한국연구원(서울). 이 광고는 한국외대 정진석 교수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출항일자와 도착일자는 자료원과 증언자에 따라 서로 엇갈려 나타나고 있다. 출항일자와 도착일자가 중요한 것은 이 일자들이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데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민을 보낸 한국의 입장에서는 출항일이, 이민을 받아들인 멕시코와 그 곳의 이민 후예들에겐 도착일이 이민 100주년의 기준일이 된다.
금년 초부터 하와이를 비롯한 북미주 전역에서 ‘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크고 작은 많은 행사와 사업들을 벌여오고 있는데, 이 기념사업회는 하와이 이민 제1진이 호놀룰루항에 입항한 1903년 1월12일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배에서 하선해 하와이 땅을 밟은 13일을 이민 100주년의 기준일로 잡고 있다.
하와이 이민의 선례를 따른다면 멕시코 이민 100주년도 이민선 일포드호가 멕시코 서남단의 살리나 크루스항에 입항한 날짜보다 이민자들이 하선해서 멕시코 땅을 처음 밟은 날짜를 기준 삼아야 할 것 같다.
출항일과 도착일을 둘러싼 혼선은 기존의 연구와 자료, 증언 등에 나와 있는 관련일자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놓고, 현 단계에서 확실한 자료들과 일의 전개과정에 관한 지식들을 기준으로 비교검토해보면 맞는 날짜들이 가려지게 돼 상당 부분 풀릴 수 있다.
기존 문헌에 대한 검토를 통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들로 인천항 출항에서 멕시코 유카탄주(州) 메리다시(市) 도착까지의 과정과 일자를 재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2월26일: 멕시코 이민선의 첫 출항지는 인천항이었고 출항일은 1905년 2월26일이었다. 멕시코행 이민선의 출항을 알리는 첫 소식은 1905년 2월24일자 황성신문 광고에서 전해졌다. 서울에 있던 이민모집 대행사인 대륙식민사 총대리점은 이 광고에서 ‘북미 멕시코로 떠나는 배가 2월26일 오전 10시에 인천항에서 출항하니 그곳으로 농사를 하러 가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미 본사가 발행한 증명서를 받은 사람은 24일까지 본사로 오시오’라고 알리고 있다. 멕시코 이민선이 2월26일 인천항에서 출항한다는 예고였다.
이어 서울에서 서양인들이 매월 발행하던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지 2월호(3월 발행)에는 ‘한국인 남녀 수백명이 2월26일 멕시코를 향해 출항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3월14일: 이민선은 곧바로 멕시코로 가지 않고 부산에 들러 그곳에 모인 이민자들을 태우고 3월14일 다시 인천항으로 왔다. 멕시코 연구자 패터슨이 이 부분에 관해 쓴 구절에 ‘이민선 일포드호가 일본 모지항에서 용선되어 처음 부산에 와서 이민자들을 싣고 나서 인천에 집결한 이민자들을 싣기 위해 인천으로 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어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이민선이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간 것이 3월14일로 돼 있고 또 임천택에 의하면 이민단 일행이 처음 인천을 떠나 부산에 갔다가 20여 일 지나 빙표(여권) 문제로 다시 인천항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돼 있다.
‘코리아 리뷰’의 보도와 임천택의 이야기와 일본 외무성 자료, 이들 셋을 짜맞춰보면 ‘멕시코 이민선이 2월26일 인천항을 출항해, 부산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가 3월14일 인천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 자료가 서로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이민선이 부산항부터 먼저 들렀을 것 같지는 않다.
마이어스와 대륙식민회사는 처음에는 우리 정부가 발행한 여권 없이 이민자들을 멕시코로 송출하려 했었던 것 같은데 뒤늦게 이의 불법성을 우려해 여권을 받기 위한 로비를 벌인 끝에 이민자들을 위한 여권을 받아냈다.
이민선의 2월26일 인천 출항을 알리는 황성신문의 대륙식민회사 광고는 ‘본사호패(本社號牌)’를 받은 사람들은 본사로 24일까지 집결할 것을 알리고 있는데, 한국정부가 발급하는 ‘집조(여권)’가 아니라 대륙식민회사가 발급한 ‘호패(일종의 증명서)’만으로 이민을 송출하려 했음을 짐작케 한다. 호패는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며 신분을 증명하는 패로,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었다. 대륙식민사의 광고에서 호패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여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 회사에서 발급한 ‘이민자 증명서’를 지칭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호’자로 시작되는 비슷한 용어로 ‘호조(護照)’가 있는데, 이것은 외국인에게 내주던 국내 여행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여권(旅券)이라 부르는 것을 당시에는 집조(執照) 또는 빙표(憑票)라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해외로 이민시키는 사업은 고종황제로부터 칙령을 받은 미국인 데쉴러에게 독점권이 인정돼 있었다. 때문에 데쉴러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회사에 의한 이민송출사업은 자동적으로 불법적인 것이 된다. 이민회사 대륙식민사는 자신들의 한인 멕시코 이민송출사업의 이와 같은 불법적 요소를 알고 있었기에 대한정부로부터의 여권 발급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여권 없이 ‘자기네 회사의 호패’만으로 이민을 송출하려 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대륙식민회사측에서 여권 없이 이민을 송출했을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여권 발급을 위한 로비를 벌이게 된 것 같다. 영국공사를 통해 불란서 공사를 움직여 여권을 발급받게 된 것이다. 여권 문제가 해결되어 막 출항하려 할 때 이민자 중 한 어린이가 수두에 감염된 것이 발견돼 약 2주간의 정선명령이 내려지고 검역조치가 취해지느라 출항은 다시 더 미뤄졌다.
멕시코 이민을 인솔한 통역의 한 사람인 권병숙은 1906년 7월26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기서(寄書: 투고)에서 일포드호에 이민자들이 다 승선하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을 때 수두 감염이 발견돼 방역조치와 해관검사를 받느라 출항이 늦춰졌다고 말하고 있다. 패터슨도 당시 인천주재 일본 영사였던 가토의 보고서를 근거로 출항 직전에 수두 감염이 발견돼 출항이 연기됐다고 말하고 있다.
권병숙은 같은 동포임에도 이민자들을 몹시 괴롭힌 것으로 알려져 평판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의 투고 내용 가운데 ‘이민자들이 노예나 다름없는 혹사에 크게 시달리고 있다’는 보도와 전언에 대한 변명 부분은 문제가 많지만, 인천을 출항해서 멕시코 유카탄주 수도 메리다시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정에 관한 내용은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기존 연구에서 출항과 관련해 날짜가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 지적됐던 것들은 권병숙의 투고에서 적고 있는 멕시코 도착까지의 일지를 기준으로 판단해볼 때는 대개 해결되는 것들이다. 반면 멕시코 도착일과 관련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의문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졌던 사항 가운데 새롭게 의문이 제기되는 것들도 생겨난다. 이에 관해서는 해당 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논의하겠다.
4월2일과 4일: 인천항 출항일이 4월2일이냐 4월4일이냐 하는 문제는 둘 다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이 있었고 수두에 대한 방역조치도 끝나 멕시코를 향해 최종적으로 인천항을 출항한 때가 4월2일이었고 출항 직후 이민자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 (요구한 것이 담배라는 설과 여권의 각자 지급이라는 설이 있음) 잠시 회항해 이들을 이민회사로부터 찾아 싣고 출항한 때가 4월4일이었기 때문이다.
멕시코 이민의 인천항 출항일자에 대해 황성신문에 보도된 것(4월2일)과 일본의 외교문서에 나와 있는 것(4월4일)이 다르다는 점은 멕시코 이민을 다루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고민거리의 하나였다.
농상공부의 문서, 관보의 광고, 통감부 공보의 공고<br>① 농상공부의 멕시코 이민 관련 문서. 1907년 4월 초순 공문. (규장각 奎18152 農商工部去牒存案 11-37) ② 관보에 난 멕시코 이민광고. 1907년 4월11일자. ③ 통감부 공보 1907년 4월27일자.
4월4일이 맞다고 하면 4월2일 떠났다고 한 황성신문의 보도가 틀리는 것이 된다. 그런데 권병숙의 기서에 보면 이민선의 출항일자로 4월2일과 4월4일이 모두 언급돼 있어 어느 한쪽도 틀린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권병숙에 의하면 “이민자 전원이 음력 2월16일(양력 3월21일) 이민선에 승선했는데 한 어린이가 수두에 걸린 것이 발견되어 방역조치를 취하느라 즉시 떠나지 못하고 12일 뒤인 음력 2월28일(양력 4월2일)에야 출항을 했다. 군산 앞바다쯤 갔을 때 담배를 미처 갖추지 못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민자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해 그 기세가 위험을 느낄 정도까지 이르게 되자 선장에게 권유해서 선수를 돌려 음력 2월29일(양력 4월3일) 인천항으로 되돌아왔다. 이민회사에 알려 담배와 짚신과 호조(여권)를 받아 이민자 각자에게 지급하고 나서 그 다음날 즉 음력 2월30일(양력 4월4일)에 출항했다”고 했다.
이로써 황성신문의 4월2일 출항 기사도 맞고 인천부사의 4월4일 출항 보고도 맞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서 어느 날을 공식적인 출항일로 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일 뿐 ‘맞고 틀리는 문제’는 아닌 것이 된다.
5월8일과 15일: 이민선 일포드호의 멕시코 서남부 살리나 크루스항 도착일이 양력 5월15일로 알려져왔으나 인천항 출항일이 4월2일 혹은 4월4일이라면 권병숙의 기서에 나오는 양력 5월8일(현지 날짜)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100주년 기념, 5월12일 기준일 삼아야
기존의 연구에서 살리나 크루스항 도착일 5월15일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패터슨도 이민자 후손 호세 산체스(Jose Sanchez: 한국명 최병덕)의 ‘회상(Memorias)’을 인용하면서 ‘한국 이민자들이 1905년 5월15일 살리나 크루스항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으며, 이자경도 한국 이민자들의 ‘살리나 크루스항 5월15일 도착’을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자경의 경우 “한인들이 살리나 크루스에 도착한 건 5월15일경”이라고 하면서 ‘경’자를 붙인 점과 ‘41일(?)간의 태평양 항해 중…’이라면서 41일에 ‘?’표를 붙인 점으로 미뤄볼 때 ‘도착일 5월15일’에 대해 다소 의문점이 있었던 것 같고, ‘항해기간 41일’이 예상보다 길게 느껴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항해 소요기간에 관해서는 이민모집 광고에서 ‘行中期間은 大略 一個月’, 즉 ‘가는 일자는 대강 한달 동안’이라 밝히고 있다. 살리나 크루스항 도착이 5월15일이라고 하면 4월2일 출항의 경우는 43일이 걸린 것이 되고 4월4일 출항의 경우는 41일이 걸린 것이 된다. 이민회사가 광고에서 밝힌 항해 예상기간 약 1개월, 즉 30여 일에 비춰볼 때 10여일이 더 걸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편 권병숙은 황성신문에 실린 그의 기서에서 음력 4월6일에 살리나 크루스항에 도착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음력 4월6일은 양력으로 따지면 5월9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권병숙이 쓰고 있는 음력이 한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출항 때부터의 일지에 따른 일정을 밝히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멕시코에 도착해서도 현지의 양력에 따라 자신의 음력을 조정한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병숙이 말한 음력 날짜를 음양력 대조표에 따라 양력으로 바꾼 날짜는 한국에서의 양력이고 현지에서의 양력은 일부변경선을 서쪽으로 넘어섰기 때문에 하루를 빼야 맞게 된다. 즉 이민선이 살리나 크루스항에 도착한 음력 4월6일은 양력으로는 5월9일이 되는데 이는 한국에서의 양력이고 멕시코 현지의 날짜 기준으로는 5월8일이 살리나 크루스항 도착일이 된다.
권병숙에 의하면 우리 이민자들은 멕시코 해관당국이 즉시 하선을 허락하지 않아 4일간 배 안에 머물다가 음력 4월10일(양력 5월13일)에야 배에서 내려 멕시코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의 양력 5월13일은 멕시코 현지의 양력으로는 5월12일이다. 이 날이 우리 이민들의 멕시코 상륙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이민자들이 일포드호에서 하선해 멕시코의 땅을 밟은 날짜가 현지시각으로 5월12일이 맞을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이민자들이 만 4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풀려난 날짜가 ‘1909년 5월12일’이었다는 점이다. 패터슨의 연구에 나와 있는 노동계약 제5조에는 ‘계약기간은 농장에 도착한 날로부터 4년간으로 한다’로 돼 있으나 이렇게 되면 이민자 각자의 계약만료일이 각기 다를 수 있어서 번잡해지기 때문에 편의상 멕시코 상륙일을 계약의 기준일로 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한말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의 기준일을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일에서와 같이 상륙일로 삼는다면 5월12일은 그 기준일로서 고려돼야 할 날짜가 되는 것이다.
권병숙이 기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이민들은 음력 4월11일(현지 양력 5월13일) 기차 편으로 멕시코만 해안의 코알라코앗사에 도착, 선박편으로 음력 4월13일(현지 양력 5월15일) 오후 3시경 유카탄주 프로그레소항에 도착, 그날 즉 멕시코 날짜로 5월15일 저녁 8시경에 유카탄주 수도 메리다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권병숙의 기서에도 멕시코 날짜로 양력 5월15일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권병숙의 경우는 5월15일이 사리나크루즈항 도착일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농장에 배속되기 전 마지막 기착지 메리다시 도착일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진행된 일련의 검토 끝에 필자들이 도달한 잠정적 결론은 권병숙이 밝힌 일정이 맞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권병숙이 기서에서 말한 일정을 다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음력 2월16일 = 양력 3월21일: 이민선 승선. 수두 발생으로 출항 연기.음력 2월28일 = 양력 4월2일: 인천항 출항.음력 2월29일 = 양력 4월3일: 여권 등을 각자 지급받기 위해 인천항 회항.음력 2월30일 = 양력 4월4일: 인천항 출항.음력 4월6일 = 양력 5월9일(현지 5월8일): 살리나 크루스항 도착.음력 4월10일 = 양력 5월13일(현지 5월12일): 하선해서 멕시코 땅에 상륙.음력 4월11일 = 양력 5월14일(현지 5월13일): 코알라코앗사 도착.음력 4월13일 = 양력 5월16일(현지 5월15일): 프로그레소항 도착.음력 4월13일 = 양력 5월16일(현지 5월15일): 메리다시 도착.
멕시코 이민선이 인천항을 출항하기 직전인 4월1일 대한제국 정부는 모든 이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황성신문 4월3일자에 이에 관한 기사가 났다. 멕시코 이민선은 이민금지령이 시행되려 할 때 인천항을 막 출항했던 것이다.
멕시코 이민은 출항하기 전부터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멕시코 이민만을 금지시키려 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제1차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한국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크게 강화한 일본측은 일본인의 하와이 이민과 상충되는 우리의 하와이 이민을 중지시키려 압력을 넣고 있었다.
멕시코 이민을 금지하려던 한국정부는 차별적 조치는 부당하다는 일본측 압력에 밀려 하와이 이민을 포함한 모든 해외이민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됐던 것이다. 구한말 우리의 멕시코 이민은 이렇게 해서 단 한 차례의 송출로 끝나게 된다.
우리의 해외이민은 1905년 4월 초에 전면 금지됐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906년 7월에 이민보호법이 제정 공포됐다. 일본의 이민회사들은 이 법에 따라 한국에 이민회사들을 설립하고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사업을 다시 시도한다. 이 시도는 그러나 무위로 끝난 것 같다.
일본 이민회사들의 이민 재모집 무산
이자경은 일본인 코보리 카오루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한편 대륙의 히나타 데루타게는 다른 이민업자와 동업으로 1907년 한국에 한국식민합자회사를 설립하고 유카탄으로 6000여 명의 한인을 송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산되었던 걸로 알려지고 있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는 ‘한국식민합자회사’라는 한 회사의 이름만 나와 있지만 대한제국 농상공부(農商工部) 관련문서에서 새로 찾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에 설립한 이민회사는 3개였다. 즉 1907년 4월에 대한식민합자회사(유카탄주 이민), 7월에 한국이민합자회사(韓國移民合資會社: 멕시코주 이민), 8월에 대한이민주식회사(大韓移民株式會社: 페루 남부 이민)가 설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일본의 이민회사들이 1907년의 중남미 이민 송출사업을 어떻게 벌여나갔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3개 회사는 ‘문서, 관보 및 공보 1’에 예시돼 있는 것과 같은 관보 광고 한 번씩을 낸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이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이 서울에 이민회사를 세워놓고 중남미 이민모집을 준비하고 있을 때 황성신문은 7월1일과 2일에, 대한매일신보는 7월27일과 9월17일에 2년 전에 멕시코로 이민 간 우리 동포들이 말 못할 고생을 하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글들을 실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중남미 이민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일본인들이 1907년에 한국정부(실제로는 통감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이민회사를 셋이나 차려놓고 추진했던 우리 국민의 중남미 이민모집 사업은 결국 무산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의 발굴 노력을 기대하며
구한말의 멕시코 한인 이민은 이렇게 시작돼 이렇게 끝났다. 후속 이민은 없었으나 멕시코 유카탄반도 에네껜 농장에 던져진 우리의 동족들은 고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고국의 관심에 목말라하면서 생존했다.
이민자들은 30여일간의 태평양 횡단 항해 중 얼마나 많은 기대와 우려, 외로움 속에서 초조함을 달랬을까. 농장에 도착해서 고국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우리 이민자들은 이민선 일포드호를 또 얼마나 원망했을까.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홈페이지(www.koreamexico.org)에 올라 있는 서동수 회장의 인사말 가운데 일부를 빌어 필자들의 이번 연구를 끝맺는 말을 대신하고 싶다.
“…멕시코 이민을 가리켜 곧잘 기민(棄民)이라고 부릅니다. 조국과 민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어떻든 그 기민의 무정한 세월 속에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더 열심히 발굴해서 복원·정리하는 작업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멕시코와 한국의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고 경제협력 차원의 이해력을 돕는 일도 중요합니다. 100주년 사업은 이제 막이 올랐습니다…모두가 함께 만드는 100주년 축제인 이 역사적 행렬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주시길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