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어보를 찾아서(전5권)/ 이태원 지음/ 청어람미디어/ 각 400여쪽/ 각 2만3000원
이렇게 ‘송정사의’를 통해 이태원씨를 알게 됐다. 이 대단한 발견을 한 사람이 어떤 이일까 궁금해 직접 만나본 것이다. 나는 그때 그가 서른을 갓 넘긴 고등학교 생물교사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그 뒤 다시 한번 놀랄 일이 생겼다. 지난해 말 출간된 ‘현산어보를 찾아서’를 보고 아마추어답지 않은 필력과 상세한 고증, 흥미로운 서술, 풍부하고 섬세한 도판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려 3권 1200쪽에 달하는 양으로도 모자라 이번에 다시 2권을 보태 5권을 완성했다. ‘현산어보’ 번역본이 겨우 문고판 1권 분량임을 생각하면 ‘현산어보를 찾아서’가 얼마나 대단한 노력의 결실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흥미와 지식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새로 제작한 도판의 수준도 높아서 만든 이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이 책은 1차본이 간행된 후 언론의 호평을 받았고 일반 독자들도 꽤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과 부담스러운 분량에도 독자들의 반응이 좋은 이유는 책이 발산하는 매력이 작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흑산도 물고기 이야기에 반한 이유
이 책은 ‘현산어보’의 저자와 그 속에 나오는 물고기를 추적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고한 글이다. ‘현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의 물고기를 조사해 기록한 어류학 서적으로 한문으로 쓰였다. 기왕에 ‘자산어보’라는 이름으로 두 차례 번역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이유야 당연하다. 물고기의 생태를 꼼꼼히 기록한 학술적인 글에 눈길을 줄 독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내 서가에도 1977년에 나온 ‘현산어보’ 번역본이 꽂혀 있지만 모르는 물고기 이름이 너무 많았다는 것만 떠오른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정약전의 설명은 단순히 물고기에 관한 기호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이태원씨의 저술은 ‘현산어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흑산도를 직접 찾아가 정약전이 문자로 옮겨놓은 물고기와 현장에 있는 물고기를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자연과학서 ‘현산어보’를 새로운 인문서로 변신시켰다. 솔직히 ‘현산어보’의 저자 정약전이나 주석을 단 이청은 그들이 견문한 사실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했을 뿐인데, 200년이란 시차를 두고 이태원의 손에서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탐문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라도 사투리 그대로 옮겨놓았고, 우연히 만난 어린아이들의 말과 표정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현지에서 생활하는 어부들의 입을 통해 ‘현산어보’의 물고기 기호가 재현되고, 어부의 아련한 기억을 일깨운다. 아울러 저자의 추론을 통해 뒤엉킨 서술의 문제점들이 해명된다.
말미잘의 어원은 말의 항문
생소한 기호를 해독해나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그 가운데 백미는 말미잘의 기원. 저자는 ‘말의 항문’이란 뜻에서 말미잘이 나왔다는 것을 차근차근 추적해간다. ‘현산어보’에서 말미잘에 해당하는 어류는 ‘석항호(石肛?) 속명 홍말주알(紅末周軋)’이다. 정약전의 설명은 이렇다. “모양은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사람이 탈항한 것 같고 빛깔은 검푸르다. 조수가 미치는 곳의 돌 틈에서 산다. 모양은 둥글고 길쭉하게 생겼다. 그러나 붙어 있는 돌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진다.”
정약전이 말미잘의 생김새를 보고 사람의 항문을 연상한 대목에 주목해서 저자는 말미잘이 항문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속명인 홍말주알은 어떤 의미일까 추적하다가 말(末)이 미(未)의 오자이며, 홍미주알은 다름아닌 붉은 미주알로서 탈항한 항문이라는 정약전의 연상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이름임을 밝혀낸다. 결국 말미잘의 미잘은 미주알의 줄임말이요, 말미잘은 사람보다 훨씬 큰 항문을 가진 어류라는 의미라고 추정했다. 석항호란 이름에도 항문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추적은 타당하다.
정약전의 딱딱한 설명은 이태원의 추적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뀐다. 장황한 듯하지만 이러한 탐방과 추적, 유추와 확인의 모든 과정이 독자를 유인하는 이 책의 미덕이다. 책의 곳곳에서 물고기에 관한 지식과 흥미로운 사실이 번득인다. 청어가 잡히는 어획고에 일정한 주기가 있음을 발견한 정약전의 안목을 설명하는 대목, 연안에 출몰하는 다양한 고래의 생태에 관한 설명, 홍어의 생태와 특별한 맛을 설명하며 만만한 게 홍어좆이라는 속담의 유래를 소개한 대목들 역시 흥미롭다.
뻘떡기, 좆고기, 꾸죽, 검처귀
또 대립복에 대해 정약전이 매우 희귀하다고 했는데, 이태원은 장수삿갓조개에 해당하는 이 어종이 현재 정부에서 보호야생동식물로 지정한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현산어보’가 현재 해양생물을 조사할 때 직접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책임을 의미한다.
저자는 어느 지점에서 ‘현산어보’라는 본류를 벗어나 잡담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다시 본류로 돌아오곤 한다. ‘현산어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다루어 보겠다는 저자의 좌충우돌식 ‘탐심’을 느끼게 된다. 물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읽다보면 부수적인 소득도 있다. 뻘떡기, 좆고기, 꾸죽, 검처귀, 총저리, 조전대미, 노래미, 오만동, 존지락 등등의 우리말 물고기 이름과 그에 대한 설명에서 손에 잡힐 듯한 귀여움과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또 ‘구쟁기 뒤보레 가불민 게드레기가 차지한다(소라가 똥을 누러 간 사이에 집게가 대신 집을 차지한다)’는 제주도 속담처럼 물고기를 둘러싼 속담에도 전문적 지식이 동원된다. 중간중간에 정약전 주변의 인물과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비롯하여 박물학, 물고기와 관련한 지식들은 덤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즐겁다.
이 책의 출간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우리 고전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죽은 글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흥미롭고 현재적 의미를 지닌 보물창고도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은 인문교양서이지만 그 안에는 학술적으로 새롭고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어류분야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저자가 탐방을 통해서 장창대라는 무명의 박물학자를 부각시키려 한 것이나, ‘송정사의’를 발굴하여 소개한 것은 작업의 부산물로서 참으로 소중하다. 또 이 책에 주석을 단 다산의 제자 이청의 가치를 부각시킨 것 역시 의미가 크다.
여기서 우리 고전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각각의 고전이 서로 다른 의미를 발산하지만 이태원씨가 한 것처럼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면 과거의 저술이 과거의 생경한 지식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과 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고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한 저작이 ‘현산어보’만은 아니다. 최근 ‘미암일기’ ‘열하일기’, 퇴계와 고봉의 편지를 새롭게 해석한 인문서들이 출간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 책들은 고전을 구태의연한 시각과 방법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참신한 해석과 시각을 동원하여 현대의 고급독자들을 사로잡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원저자의 지식이나 학문적 역량을 뒤따라가기보다 한편으로는 압도하면서 텍스트를 자기화, 현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출판사와 독자들의 높은 안목도 가세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고전 목록에는 ‘흠영’ ‘이재난고’ ‘연경’ 등 잠재력 면에서 결코 ‘현산어보’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저술들이 있다. 그들이 현대의 독자들과 다시 만나기까지 또 다른 ‘이태원’의 등장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