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높고 깊고 아득한 모악산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9-18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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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가 서녘으로 넘어갔다. 산의 그림자가 넓은 마당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진표율사와 견훤, 대동계 정여립, 척양척왜 전봉준, 후천개벽 강일순, 원불교 소태산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모악산.

    교황이 다녀갔다. 신드롬이 일었다. 천주교 신자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이가 교황의 거룩한 발걸음과 아름다운 말씀과 은혜로운 눈빛을 우러렀다. 교황이라는 자리, 그 역사, 그 권위에 더해 가난한 이탈리아계 이민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의 가난과 슬픔과 애통함을 어루만져온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신부라는 점에서, 그리고 예수 이래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꼽히는 ‘프란치스코’라는 거룩한 이름을 무한한 책임감으로 떠안은 교황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열렬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교황은 말씀을 남겼다. 한국 주교들과의 대화에서 “가난한 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가난한 자를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가난한 자를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성과 속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린 이 나라의 종교 현황에서 볼 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에서는 ”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라고 했다. 물론 그 싸움이 거리의 싸움, 광장의 싸움을 곧이곧대로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거리와 광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질책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아울러 이 미사 강론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해 생명을 잃은 모든 이들과 이 국가적인 대재난으로 여전히 고통 받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합니다”라고 했다. 말씀만이 아니라 몸소 그렇게 실천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일일이 찾았고 가슴에 품었다.

    왜 모악산으로 갔나

    그리고 교황은 이 나라를 떠났다. 떠난 이후, 이 나라는, 교황이 오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 아니 더 격해지고 야박해졌다. 교황이 그야말로 ‘전지전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또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교황이 탄 비행기가 이탈리아로 향발하자마자 무섭게도 이 나라는 한 줌의 공감도 연민도 윤리 감각도 실종된 상태로 다시 ‘침몰’하고 있다. 아시아 주교단과의 대화에서 교황은 “공감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고 말했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이 같은 공감과 대화가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악산으로 갔다. 언제고 한번은 가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이 산하의 모든 명산이 그렇듯이, 그저 놀이 삼아 왔다 갔다 하기에는 조심스러웠다. 경북 영주, 그 산골 깊숙한 곳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내 고향 산골에서 좀 더 올라가면 곧 소백산이다. 그런 산에 편한 마음으로 가기가 쉽지 않다. 태백산도 그렇고 지리산도 그렇다. 산이 좋아 산에 깃드는 산사람들에겐 이런 소리가 한가롭게 들리겠지만, 나는 들에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하고 거기 앉아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아득한 산, 드높은 산, 깊고 깊은 산.

    1985년, 폭우를 뚫고 월악산 기슭의 산길을 자전거로 달리던 때가 생각난다. 밤이 깊어 길을 잃어 공사가 중단된 시커먼 건물 안에 들어가 겨우 비를 피해 하루를 잔 적 있다. 인부들이 시멘트 포대를 깔고 지저분한 신문지를 기어코 펴서 이불로 삼았다. 짓다만 건물이라 사방이 뚫려 있어 무서웠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피할 수 있었다.

    과연 잠이 올까 싶었지만 영주에서 단양 거쳐 충주로 지향하는 길들이 워낙 험했던 탓에 금세 곯아떨어졌는데, 그러나 수시로 깰 수밖에 없었다. 들쥐들도 폭우를 피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열아홉 살의 나는 들쥐가 진실로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자주 몸을, 심하게 뒤척였다. 들쥐들도 내가 무서웠을 것이다. 내가 일부러 심하게 몸을 뒤척이면 슬금슬금 다가오던 녀석들이 사방의 구석으로 잽싸게 사라졌다.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여명이 되어 겨우 한 치 건너 두 치를 살필 수 있게 되자, 나는 간신히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았다. 검은 산, 검은 물이 뒤엉켜 있었다.

    신성한 구도의 길

    나는 그 산이 무서웠다. 산에서 도망치려고 페달을 힘껏 밟았다. 돌아보니 검은 산이 계속 쫓아왔다. 월악산이 계속 나를 쫓았다. 골짜기를 벗어나도 또 다른 골짜기였다. 산자락은, 내 예상보다 너무도 길어서 하루 종일 장마철 폭우를 뚫고 충주에 이르러서야 녹슨 자전거의 거친 행로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포장 공사를 이제 막 시작한 곳이라서, 길은 자갈과 진흙으로 뒤엉켜 있어 타고 가는 일보다 오랜 친구처럼 핸들을 붙잡고 자전거와 나란히 걷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월악산 언저리를 벗어난 뒤로부터 나는 언제나 산을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크고 넓은 산, 이를테면 모악산은, 그 근처의 큰 도시들, 그러니까 남원, 김제, 전주 등지로 자주 다니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산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교황이 다녀간 뒤로, 모악산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곳은, 그저 큰 산이 아니라 근세기 이래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종교가 태를 묻은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올레길 열풍 이후 곳곳에 호젓하게 걷는 길이 많아졌다. 큰 산의 허리를 감아 돌면서 천천히 완상하는 북한산이나 지리산의 둘레길, 오래된 마을의 오래된 길을 걷는 부안 변산의 마실길, 근대 건축문화유산을 따라 걷는 군산 구불길, 옛 시골의 정회를 느끼게 하는 강화 나들길, 서정주 시인의 문향을 따라 걷는 고창 질마재 100리길, 500년 도읍지를 돌아보는 서울 한양도성길, 느림과 걸음이 결합된 청산도 슬로길 등이 그것이다.

    모악산 일대는 순례길이다. 순례, 즉 종교적 의미가 도드라진 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악산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미륵신앙의 본산 금산사를 비롯해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증산교 등 근세기 이후 이 나라에서 중요한 종교의 중심이자 근원이 되는 신성한 처소가 모조리 이 모악산 골짜기에 모여 있다. 이 나라 산 중에서도 종교적 신성성이 뛰어나다는 태백산이나 마니산도 모악산의 이만한 풍경을 따라오지 못한다.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수류성당과 그 안의 소박한 고해실.

    단아한 수류성당

    나는 지리산 구례에서 출발해 쾌속의 고속도로와 드넓은 국도를 버리고 오래된 국도를 따라 천천히 달려 남원을 지나고 임실을 지나자마자 곧장 방향을 틀어 완주, 김제, 전주를 평평하게 가르는 국사봉, 화율봉을 따라 모악산으로 갔다. 국사봉 고갯마루에서 모악산 방향을 바라보니, 날씨도 흐린 탓에 첩첩한 산들은 묵객들이 여가 삼아 산수화를 그린 듯, 은은하면서도 장엄하게 번져 있었다. 그 산들 사이사이마다 이 나라 종교 문화의 신성한 장소들이 있다.

    국사봉을 넘고 화율봉의 터널을 지나면 금산면 골짜기다. 지금이야 교통도 발달하고 터널도 뚫려서 김제, 완주, 임실, 남원으로 쉽게 나가고 또 들어올 수 있는 마을이 됐지만, 오래전에 이 마을은 산중 오지 깊숙한 은신의 땅이었다.

    옛날의 지리적 감각으로 말하자면, 깊고 깊은 오지에 수류성당이 들어섰던 것이다. 지금은 화율리지만 당시 지명은 수류면이었다. 무려 1895년의 일, 이제 곧 120주년이 되는 역사다. 전북 지역의 천주교는 1889년 축성된 전주 전동성당과 완주 배재(梨峴)본당을 근거로 한다. 이 배재본당이 6년 뒤인 1895년 김제 수류면 소재지였던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수류본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00여 년 전, 전북 지역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소작 쟁의로 시작한 이 혁명은 봉건적 신분제 폐지와 척양척왜까지 외치는 수준으로 크게 불길이 일었는데, 혁명이 좌절된 이후에도 그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아서 전북 일대의 농촌 지역에서는 동학사상의 불씨가 응어리를 앓고 있었다. 수류면도 그러했다. 그런 까닭에 천주교 성당이 들어선다고 하자 당시 주민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고 아예 마을을 떠나기도 했다. 그 후 수류면 일대 사람들은 수류성당으로 인해 대부분 천주교 신자가 됐다.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금산교회와 ㄱ자 한옥 예배당.

    지금 단아하게 서 있는 성당 건물은 195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수류면의 어느 대감 집 재실을 사서 쓰다가 1907년 신축했는데 그만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전주 전동성당, 익산 나바위 한옥 성당, 서울 중림동성당(옛 약현성당),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프랑스인 박도행(빅토르 프와넬) 신부의 작품이었는데, 1950년 9월 24일, 북한군에 의해 전소되고 말았다. 마을의 신자들은 전쟁 직후의 가난과 혼란 속에서도 성당 재건에 힘을 썼다. 구호물자를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성당 마당에 모아서 경비로 충당했다. 화려한 위용이나 근사한 장식을 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 이 성당의 단아하고 소박한 기품은, 요즘 유행하는 그 무슨 미니멀리즘의 형식주의가 아니라, 전후의 혼란과 물자 부족에도 굴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기도를 올린 이들의 마음이 빚어낸 결과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법도 한데, 그 흔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없고 고해실도 지극히 소박하다. 이런 곳에서는, 비록 가톨릭을 믿지 않는다 해도, 한순간이나마 정결한 마음을 갖게 된다. 종교적 공간이 주는 무거운 압력이되 결코 무서운 것은 아닌, 그런 마음 말이다.

    아니, 이상의 역사적 기록이나 신앙적 면모를 다 떠나서 화율리 수류성당이라, 북쪽의 모악산과 남쪽의 국사봉 사이에, 그에 못지않은 화율봉을 거점으로 하여 벼(禾)와 밤(栗)이 풍족한 화율리이며 옛 이름으로 수류(水流)라고 이르니, 이만한 지명의 따스함도 달리 없다.

    신실한 믿음의 삶

    수류성당에서 걸어서 30분 남짓이고 차로는 5분이면 닿는 곳에 금산교회가 있다. 충분히 걸을 만한 길이고, 걷는 동안 깊은 산과 넓은 들, 벼와 밤과 물소리가 더해지는, 그야말로 ‘걷는 길’ 열풍에 반드시 꼽힐 만한, 그런 길이다.

    금산교회는 크게 두 개로 이뤄졌다. 100여 년 역사의 ㄱ자 한옥 교회가 있고 그 옆으로 20세기 중엽 이후 작은 마을마다 들어섰던 시골 교회가 서 있다. 한옥 교회가 낮고 아담해 이 벽돌 교회는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교회임에도 오히려 중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옛 금산교회, 그러니까 ㄱ자 한옥 교회는 두 가지 점에서 순례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08년 미국 남장로회 전주 선교부의 루이 테이트 선교사가 지은 것으로 전북 문화재자료 136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옛 마을의 사랑방을 들어가듯,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순간 시간은 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버린다. 남녀가 유별하다 해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가 서로 나뉘어 앉아 예배를 볼 수 있도록 ㄱ자로 구성된 면도 있지만 당시 신자 수가 늘어나는 교회마다 이렇게 기존의 예배당에 ㄱ자로 수평 증축한 점도 있다. 서구의 종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나라 사람들의 주거 양식, 생활 방식, 문화 관습 등을 고려하고 존중하되 목회자의 집례만큼은 어느 방향에서든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결과다. 전북 익산의 두동교회도 이런 모양이다.

    금산교회의 이 같은 외형적 면모는 그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신실한 믿음의 삶과 연관할 때 더욱 가치가 높아진다. 이 교회를 개척하는 데 이 마을의 대지주 조덕삼이라는 분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경상도 출신의 이자익이라는 분과 함께 교회에 헌신했다. 주인과 하인 관계인데, 이 두 사람은 루이 테이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됐으며 교회가 축성된 이듬해인 1909년에 장로가 됐다.

    1909년이면, 법적으로는 반상의 차별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관습으로는 신분 차별이 남아 있었고,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오랜 관례가 든든했는데 마을 지주였던 조덕삼에 앞서 그 집의 마부 이자익이 장로 자리에 먼저 오른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교회 신자들의 분분한 의견을 제치고 조덕삼 집사는 이자익 장로를 잘 보좌했고, 아예 신학교에 보내 목회자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자익 목사는 훗날 금산교회 아래쪽의 원평마을에서 원평교회를 크게 일으킨다. 이런 마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금산교회는 그저 외형의 특이함으로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구릿골, 동곡마을

    금산교회에서 개천을 따라 내려오면 동곡마을로 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금평저수지와 나란한 이 길을 걸어가면 작은 공원이 나온다. 공원 이름이 특이하다. 예쁘고 기특하다. 아니, 좀 더 생각해보면 미륵신앙의 본산이 되는 모악산 골짜기라서 더욱 의미가 새로운 이름이다. ‘동동동심원’이 그것이다. 동녘 동(東), 같을 동(同), 아이 동(童)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맑고 청신한 마음을 가진 동녘 사람들이라는 뜻!

    아닌 게 아니라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동곡약방’이 있는 동곡마을이 나온다. 옛말로 구릿골이라 부른다. 후천개벽과 미륵사상에 몰두하던 시인 김지하는 ‘구릿골 기행’을 쓰기도 했다. 1900년대 초 증산교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이 백성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던 곳이다. 강증산은 이미 만들어진 세상, 곧 선천개벽(先天開闢) 시대에 쌓인 원한이 극에 달해 현존의 세상 운명이 다했으며 그 원한을 풀고(해원, 解寃) 후천개벽을 도모하고자 했다. 동곡약방과 마을은 한동안 방치돼 있었으나 2003년 대순진리회에서 동곡약방과 인근 부지를 매입해 성지로 복원됐다. 이들에게 이 마을은 거룩한 땅이요 개벽의 뜻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동곡약방이나 동곡마을 안으로 일반인이 들어가기는 어렵다. 이를 포함해 이 동곡마을 일대에서 증산법종교본원, 대순진리회 등의 거점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왔던 길을 되짚어 금평저수지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원평마을이 나오는데, 이 작은 마을에 조계종 학교법인 금산고교, 원불교 원평교당, 천주교 원평성당, 원평교회 등이 옹기종기 모였다. 하나같이 각 종교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장소다. 소태산 대종사가 1925년에 창건한 원불교 초기 교당인 원평교당, 1938년 축성해 이 지역 천주교의 거점이 된 원평성당, 이자익 목사가 큰 흔적을 남긴 원평교회 등이 한 데모여 있다.

    또한 이 일대는 동학혁명군의 마지막 전투가 처절하게 벌어진 곳이며 조선 중기 최대의 정치적 혼란이던 정여립 사건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정여립은 전주에서 태어나 출중한 문기로 조정에 출사했으나 선조 임금을 정점으로 해 얽히고설킨 당파에 의해 진안으로 내려와 대동계(大同契)를 창설했다. 이 조직에 전라도와 황해도 지역의 문사와 기인과 무인이 모여들었으니 결국 역모의 파당이 돼 비운의 길을 갔다. 정여립은 물론 그와 관련해 체포돼 곧바로 극형을 받거나 문초를 당해 사망한 이가 3년 동안 무려 1000여 명이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대동계’라는 이름과 “천하는 공공의 물(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는 생각을 도모했으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당쟁과 일거에 혼돈의 정국을 다잡으려는 선조의 계책이 작동한 점도 있지만, 그래도 이 지역의 오랜 기풍대로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사태의 본질이었음은 분명하다.

    진표율사가 중창한 금산사

    신흥종교 발원한 순례와 은신의 땅

    금산사 미륵존불.

    수류성당에서 원평마을과 동곡마을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금산교회로 나와 모악산 중심으로 들어서는 길, 약 30㎞ 남짓한 코스의 절정은 금산사다. 금산사를 시작으로 해도 좋고 마무리로 해도 좋다. 그저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라 이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근세기의 격동을 맞이했던 대선사들과 목자들과 신부들과 민족종교의 창시자들의 흔적을 일일이 살펴보고 그 마음의 일부라도 더듬다보면 해가 서녘으로 기울 정도가 된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어머니가 아기를 애틋하게 품은 산형이라는 뜻의 모악산, 그 한복판에 금산사가 있다. 백제 시대에 창건됐으며 통일신라 시대 진표율사가 중창했다는 금산사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을 직감할 수 있다. 진표율사는 백제 사람으로 망국의 한을 미륵정토로 이었으며 그리하여 후백제의 마지막 임금 견훤이 전주를 도읍으로 하고 금산사를 정신적 거점으로 삼았다. 견훤은 한때 금산사에 유폐되기도 했다.

    금산사는 호쾌하고 유려하다. 대범한 기운이 산사에 흐른다. 과연 미륵신앙의 본산이라 할 만하다. 신영복 선생이 쓴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 현판 글씨도 이 장려한 가람에 어울리며 호남의 기세와 모악산의 산세를 버티고 있다. 모악산이 바라보이는 전주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한 신영복은 ‘나무야 나무야’에서 “모악산의 길고 부드러운 능선은 언제 보아도 그 푸근함이 어머니의 품 같았습니다. 교도소의 하루가 저무는 시각에 우리는 곧잘 창가에 다가가 모악산을 바라보며 한 가닥 위로를 얻던 기억을 당신도 가지고 있겠지요”라고 쓴 적 있다.

    대웅전의 오른편으로 미륵전이 보인다. 밖에서 보면 3층으로 된 목조 건물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광활한 우주의 축약처럼 한 층으로 펼쳐져 있다.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의 상징인 미륵존불이 강건하게 서 있다. 망국의 진표율사를 비롯해 견훤, 대동계의 정여립, 척양척왜의 전봉준, 후천개벽의 강일순, 원불교의 소태산 등 난세를 만나면 사람들이 모악산으로 모여들었고 금산사 미륵전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난세인가? 길게 볼 것도 없이 근세기 100여 년, 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은 세대마다 치른 쓰디쓴 경험으로 뚜렷하건대 오늘의 삶 또한 유례없는 혼돈과 격정에 사로잡힌 상황이다. 망국, 전쟁, 궁핍, 독재 등의 고된 시간을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이겨내서 겨우 21세기에 이르렀건만, 오히려 이 휘황찬란한 하이테크 시대에 우리는 철옹성의 권력과 무기력한 정치와 격앙해진 민심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한순간이나마 교황이 내한해 깊은 말씀으로 슬픔을 다독여주었지만, 이후 우리는 더 격앙된, 출구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생각을 한참이나 하는 동안 해는 서녘으로 넘어갔고 모악산의 그림자가 대웅전과 미륵전 사이, 그 넓은 마당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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