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중국판 장학퀴즈 ‘SK 좡위안방(壯元榜)’ 열풍

‘그림자 마케팅’ 으로 13억 가슴 파고들다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4-11-24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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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그룹은 지난 10월28일 중국 사업을 총괄하는 지주회사를 베이징에 설립했다. 한·중수교 2년 전인 1990년, 한국 대기업 중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 지 15년 만의 일이다. SK의 중국 진출 노하우는 ‘동충하초 전략’ 또는 ‘그림자 마케팅’으로 일컬어진다. 시스템보다는 사람을 통해 서서히 시장에 스며들어 깊이 뿌리내리는 방식이다. SK 후원으로 제작되는 고교생 퀴즈 프로그램 ‘SK 좡위안방’이 그 생생한 실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판 장학퀴즈 ‘SK 좡위안방(壯元榜)’ 열풍
    매주 금요일 저녁 8시5분. 중국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이 TV 앞으로 모여든다. 베이징TV(BTV) 8채널에서 방영하는 ‘SK 좡위안방(壯元榜)’을 시청하기 위해서다. ‘SK 좡위안방’은 고교생 2인1조 4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자를 가리는 퀴즈 프로그램. 중국판 ‘장학퀴즈’라 할 수 있다. 주·월·기·연장원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는데, 연장원 장학금은 8만위안(한화 1200만원)으로 중국 대학의 4년치 등록금과 책값, 기숙사비를 충당할 수 있는 액수다.

    2000년 1월1일 처음 전파를 탄 ‘SK 좡위안방’은 5년째 중국 청소년들을 사로잡으며 최고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베이징 지역 고교생의 97.5%가 이 프로그램을 알고 있으며 90.7%가 월 1회 이상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9.2%는 이 프로그램이 유익하다고 평가했다.

    방송 초기부터 ‘SK 좡위안방’ MC를 맡아온 레이밍(雷鳴)씨는 “프로그램 평균수명이 1∼2년에 불과한 BTV에서 무려 5년째 장수하는 것만으로도 ‘SK 좡위안방’은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독보적 프로그램”이라며 “덕분에 나도 덩달아 유명인사가 됐다”고 말한다. 공동진행자인 신예 여성 MC 슈춘니(徐春尼)씨는 BTV 입사 후 처음 맡은 프로그램인 ‘SK 좡위안방’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지난해 네티즌이 뽑은 중국 10대 인기 MC 중 4위에 올랐다.

    BTV는 금요일 본방송과 토·일요일 재방송을 포함, 매주 3회 이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본방송은 베이징 일원은 물론 상하이(上海)·다롄(大蓮)시와 후난(湖南)·장쑤(江蘇)·쓰촨(四川)·허베이(河北)성 등 7개 지역으로 송출된다. 일요일 재방송은 위성 전국방송인 BTV 1채널로 방영된다.

    매회 참가신청자가 3000명에 이르는 데다 많은 지역에서 신청이 몰리기 때문에 지역을 나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전체 출연자의 절반은 베이징 외 지역 출신이다. 이들은 ‘SK 좡위안방’에 참가하기 위해 길게는 2∼3일간 기차나 버스를 타고 베이징을 찾는다. 거액의 장학금이 걸린데다 상당수 대학이 ‘SK 좡위안방’ 입상자에게 입시에서 가산점을 주기 때문에 전국에서 수재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



    ‘시’ 구축 위한 인재 양성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SK 좡위안방’은 SK그룹이 제작비와 공익광고를 후원하는 프로그램. SK는 한국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에 진출했다. 한·중수교 2년 전인 1990년 푸젠(福建)성에 비디오테이프 합작공장을 세우며 중국에 첫발을 디뎠고, 1991년 중국 사무소를 여는 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선전(深)에 10억달러 규모의 정유단지를 건설하려던 사업계획이 무산되는 등 시행착오도 겪었다. 중국 정부가 SK의 주력 사업분야인 에너지·화학 등 중공업 부문에서 외국 기업의 진출을 제한한 데 따른 결과였다. 이후 한동안 SK의 중국사업은 활기를 잃었다.

    SK가 다시 중국시장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99년. 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로 강타한 외환위기 파고에도 중국이 두터운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건재를 과시하자 ‘그래도 중국이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SK는 그해 중국을 ‘21세기 핵심 전략지역’으로 선언하고 그룹의 역량을 집중할 것을 천명했다.

    앞서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SK는 상품판매에 급급한 단순한 광고·홍보전략으로는 중국시장에 연착륙하기 어렵다고 보고, 장기적인 관점의 PR전략을 구상했다. ‘SK 좡위안방’은 그 과정에 기획됐다. 1973년부터 ‘인재양성’을 표방하며 후원해온 ‘장학퀴즈’를 중국에 그대로 가져오기로 한 것.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사람에 대한 장기적 투자로 이른바 ‘시(關係)’를 구축하는 게 관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SK 좡위안방’에 참여한 학생들이 자라나 각계의 주역으로 활동할 무렵이 되면 이들이 친한파, 지한파가 되어 중국사업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리라고 내다본 것.

    중국시장은 시스템보다는 사람을 통해 움직인다. 그래서 SK는 SK의 기업문화와 사업모델을 체득한 인재를 육성, 중국에 뿌리내리는 방식으로 중국 진출을 꾀해왔다. 이를 ‘동충하초 전략’이라 일컫는데, ‘SK 좡위안방’도 동충하초의 ‘뿌리’ 가운데 하나다.

    1999년 7월부터 BTV측과 협의를 시작한 SK는 중국의 ‘만만디’ 관행을 감안하면 빨라야 2001년 중반에나 프로그램 제작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사회주의 체제의 방송국 관계자들이 자본주의 기업의 장학사업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일 리도 만무했다.

    그러나 SK가 상업성을 표방하지 않고 27년간이나 ‘장학퀴즈’를 후원해온 사실을 설득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불과 5개월 후인 2000년 1월1일에 첫 방송을 내보내라는 승인이 떨어진 것.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제목에 회사 이름을 붙여도 좋다는 파격적인 선물도 함께 전달됐다.

    중국판 장학퀴즈 ‘SK 좡위안방(壯元榜)’ 열풍

    ‘SK 좡위안방’은 단순 문답식 퀴즈를 지양, ‘행운 2인조’ ‘지력급유소’ ‘도전 영단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SK는 이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것 외에도 ‘SK 좡위안방배(盃) 고교생 영어경시대회’ ‘한중 SK 청소년 캠프’ 등의 부대행사를 통해 다양한 인재육성 방안을 실행하고 있다.

    2001년부터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매년 열고 있는 영어경시대회는 중국 교육계와 언론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1년 베이징시 교육위원회 및 BTV와 함께 개최한 제1회 대회 예선에는 무려 8만여 명이 몰려 ‘좡위안방’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한중 청소년 캠프는 한국의 ‘장학퀴즈’와 중국의 ‘SK 좡위안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두 나라를 오가며 양국의 문화와 전통을 배우는 프로그램. 지난해 이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은 중국에서 천안문광장 등 역사유적지를 탐방하고 서울의 명동 격인 베이징 왕푸징 거리에서 소비문화를 체험했으며 중국 경제전문가들과 한류 열풍이 중국 경제에 끼치는 영향 등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어 한국으로 와서는 경주의 유적지와 울산의 산업단지 등을 견학했다. 캠프를 마무리하면서 한중 합작 사업계획서를 작성, 양국 미래 경제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SK는 5년간 ‘SK 좡위안방’을 단독 후원하면서도 제품이나 사업광고는 일절 방송에 노출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SK 좡위안방’을 시청하는 학생, 학부모 대부분이 SK가 한국 기업이라는 것은 짐작해도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BTV측이 더 애가 타서 프로그램 앞뒤에 기업광고나 SK가 중국시장에 내놓을 휴대전화 단말기 광고를 붙이라고 성화다. “이러다간 SK가 일본 화장품 회사 SK-Ⅱ로 오인될 수 있다. 지금 당장 SK가 뭐 하는 회사인지 안 알려주면 SK-Ⅱ 화장품에만 득이 된다”며 가슴을 친다는 것.

    그래도 SK는 요지부동이다. SK 노찬규 브랜드 이미지 관리팀장은 “이 프로그램은 10년 이상을 내다본 장기 투자전략 차원에서 기획했고, SK 고유의 인재양성 이미지를 통한 중국과의 자연스러운 인적, 문화적 교류가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팔아서 얼마를 남기겠다고 제품광고를 하겠습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만 훼손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지금은 SK를 모르겠지만, 훗날 대학에 가고 사회에 진출해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누구보다 SK를 잘 알게 될 겁니다. 이들에겐 직접적인 사업·제품광고보다 이미지 광고가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13억 심금 울린 공익광고

    SK는 사업·제품광고 대신 프로그램 협찬 취지에 맞게끔 교육적 메시지를 담은 공익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인구팽창 억제를 위해 1973년부터 한 가정 한 자녀 낳기 정책을 실시한 이후 태어난 청소년들은 ‘소황제 세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과보호 받으며 자라 이기적, 의존적이고 낭비가 심한 경향이 있다. 이들의 인성교육에 도움이 되게끔 공산주의청년단과 베이징 주요 학교 교사들의 자문을 얻어 ‘함께하는 우리 세상’이라는 청소년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 패기, 신용, 선의의 경쟁, 책임과 권한 등 청소년이 갖춰야 할 자질이 그 주제다.

    예를 들어 공익광고 ‘패기’편에는 여자 체조선수 쌍란(桑蘭)이 나온다. 그는 유력한 올림픽 금메달 후보였으나 1998년 미국에서 열린 선수권대회에서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됐다. 쌍란은 광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 시절 내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지금 내 목표는 인생의 금메달을 따내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가 수많은 중국인의 심금을 울려 광고가 나간 첫날부터 방송국에 시청자들의 격려전화가 이어졌다고 한다.

    ‘신용’편의 ‘주인 없는 가게’ 시리즈도 호평을 받았다. 호젓한 숲속 카페에서 한 가족이 차를 마신 후 주인이 없는데도 계산을 하고 나온다. 다음 화면에선 과일가게에서 아이 엄마가 과일을 고른 후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없자 과일값을 바구니에 넣어두고 아이와 활짝 웃으며 가게를 나선다. 이어 “주인이 없어도 신용이 지켜지는 가게. 세상에 이런 가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용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힘입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이런 행위를 매우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처럼 실체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SK의 ‘그림자 마케팅’은 이미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중국 오피니언 리더들의 한국 기업 인지도를 조사한 결과, SK에 대한 인지도가 9.5%(삼성 98.3%, LG 85.3%, 현대 73.8%)에서 ‘SK 좡위안방’ 방영 이후 최근 들어 58.5%로 상승했다. 대학생들의 SK 인지도는 80%에 달했다. SK에 대한 업종 인지도도 정보통신이 40.2%, 에너지·화학 34.3%로 나타났다. 사업·제품광고를 하지 않는데도 SK가 어떤 일을 하는 기업인지 알고 있다는 얘기다. 2001년말 SK 중국법인의 첫 중국인 공채에서 무려 150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것도 ‘SK 좡위안방’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SK 좡위안방’ 출신인 베이징대 학생 궈지아즈양은 “내가 SK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한국 기업이면서도 중국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과 도전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SK의 이런 활동은 단지 SK라는 기업뿐 아니라 한·중 양국의 미래 협력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BTV의 ‘SK 좡위안방’ 담당PD 우윈(吳筠)씨는 “한류열풍에 젖어 한국 연예인에만 관심을 보이던 중국 청소년들이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2010년 중국 매출목표 5조원

    SK가 사업·제품 홍보를 하지 않는 것은 아직 중국사업을 본격화하지 않은 단계인데다, 지금까지 중국에 진출한 사업이 소비재가 아닌 중간재·생산재 위주이기 때문이다. SK가 현재 중국에서 벌이는 사업은 중추신경계 신약 개발, 폴리머 수입·마케팅, 윤활유 수입·마케팅, 무선 인터넷(합자기업), 인터넷 포털 등 손에 꼽을 정도. SK의 주력사업인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 부문은 여전히 미진하다. 그 동안은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고 사업전략 수립의 기반을 다지는 데 역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중국시장 진출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SK(주)는 지난 10월28일 베이징에서 중국사업을 총괄하는 지주회사인 ‘SK중국투자유한공사(SK차이나홀딩)’를 설립하고 2010년까지 20여 개 현지법인을 보유한 매출 5조원대의 에너지·화학그룹을 육성하기로 했다. 매출 5조원은 지난해 SK(주) 전체 매출의 37%에 해당한다.

    특히 중국 매출 중 현지법인 매출 비중을 지난해 2%에서 2010년 6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것은 SK의 중국사업 전략이 수출 중심에서 ‘현지화를 통한 안정’으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판매법인이나 생산법인을 진출시켜 현지에서 창출되는 이윤을 회수해오는 여느 기업의 사업전략과는 차이가 있다. SK차이나는 한국 SK와 기업문화 및 비즈니스 모델은 공유하되 현지에서 만들어져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철저한 ‘중국기업 SK’를 지향한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SK는 ‘에너지·화학 및 정보통신사업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네트워크 기업화’를 새로운 50년의 과제로 삼았다. 단순히 세계 각지에 소규모 지점이나 법인을 만들어 연결시키는 개념이 아니라 거점이 필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의 SK그룹과 같은 규모의 기업을 설립해 발전시켜나간다는 전략이다.

    SK차이나는 그러한 글로벌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이다. ‘SK 좡위안방’으로 구축된 인적 네트워크가 중국대륙에서 과연 어떤 모습의 기업 네트워크를 만들어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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