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가 눈치를 보며 슬글슬금 지나간다. 시속 30km를 넘으면 ‘경고’를 받기 때문. 아이들이 노는 곳에는 아예 접근금지다. 도시철도(트램)가 지나는 주택가 골목엔 숲이 우거져 있고 벌거벗은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뛰어논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 옆으로 도심 속 실개천 ‘베히레’가 느긋하게 졸졸 흐른다. 세계인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친환경 도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했다.
프라이부르크는 이런저런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철강기업 포스코가 이 도시를 배경으로 만든 광고를 내보내 홍보효과를 톡톡히 봤다. 중세시대를 연상케 하는 건물과 도심 곳곳을 가로지르는 실개천 ‘베히레’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광고가 나오기 1년 전쯤인 2007년 1월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 도시를 방문해 화제가 됐다. ‘환경시장’을 표방해온 오 시장이 취임 후 첫 해외나들이 장소로 택한 곳이어서 더 관심을 모았다. 오 시장은 독일 녹색당 출신인 디터 살로몬 프라이부르크 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서울시민들이 교통 혼잡과 공기질, 수돗물 문제 등으로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환경도시인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하게 됐다. 프라이부르크의 환경정책 아이디어를 4년 임기 동안 서울시 정책에 반영시켜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겠다”고 밝혔다. 환경도시 프라이부르크는 그렇게 우리나라와 조금씩조금씩 가까워졌다.
20km의 실개천 ‘베히레’
프라이부르크에 도착한 기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무수히 많은 자전거와 도시철도(트램)였다. 어디를 가나 자전거가 도시 곳곳을 메우고 있고 전기로 움직여 환경오염이 전혀 없는 트램이 소리없이 달렸다. 말로만 듣던, 원통모양의 3층짜리 자전거 주차장 모빌레(mobile)도 중앙역 옆에 붙어있었다. 프라이부르크 시내에 만들어진 자전거 도로의 총연장 길이는 500㎞에 달한다.
도심 어디에서도 달리는 자동차를 볼 수 없었다. 자동차산업으로 유명한 독일 땅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차가 안 다니는 게 아니라 못 다니는 거란다. 차도가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어 차를 가지고 다닐 수 없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배가 고파 찾아간 빵집 주인이 해준 말이다. 대신 정확히 시간을 지키며 달리는 트램이 시민들의 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운행시간표를 보니 5분에 한 대꼴이다. 몇 시간 돌아다녔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트램은 대부분 주택가 한복판, 도심 한복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도록 설계되어 있어 타고 내리기도 편해 보였다. 현재 프라이부르크의 교통 분담률은 도보와 자전거, 트램을 합쳐 70%가 넘는다.
시내 도로는 대부분 돌로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도로 폭이 모두 좁고 구불구불했다. 중세시대의 어딘가를 걷는 듯한 기분이랄까. 차가 다니기에는 울퉁불퉁하고 불편하겠지만 사람이 걷기에는 푸근하고 좋았다. 물론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은 구두굽이 돌 틈에 끼는 불상사를 감수해야 할 듯싶었다.
‘태양의 도시’라는 별칭답게 건물들도 남달랐다. 새로 지은 건물에는 대부분 태양열 집전판이 달려 있었다. 기차역(프라이부르크 중앙역) 건물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었다. 오래된 듯 보이는 역사 오른쪽에 새로 지어진 유난히 높은 고층건물은 온몸에 태양열 집전판을 친친 감고 있었다. 해가 비치자 번쩍번쩍했다. 역 앞에 있는 꽃가게 주인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60%가량을 자체 생산하는 신비한 건물”이라고 자랑하듯 말해줬다. 신기해서 자꾸 눈길이 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쓰는 크고 작은 건물이 이 도시에만 10만채 정도 있단다.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특별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건물이었던 셈이다.
10분쯤 돌길을 천천히 걸어 시내로 들어가니 도시 곳곳을 굽이쳐 흐르는 실개천 베히레가 나왔다.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예쁘고 귀여웠다. 시내 중심가에는 골목골목마다 베히레가 흘렀는데 손 담그고 놀 수 있을 만큼 깨끗했다. 물은 경사진 도심을 따라 특별한 장치 없이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폭이 30~50㎝에 불과한 것부터 1~2m가 넘는 것까지 규모와 모양도 다양했다. 큰 길가에는 큰 베히레가, 작은 길에는 작은 베히레가 졸졸 흘렀다. 프라이부르크시를 관통하는 강인 ‘드라이잠’으로부터 인공수로를 이용해 끌어들인 물이 흐르는 이 베히레의 총 길이는 20㎞ 이상이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노출된 것만 10㎞가량이라고 시청에서 발행하는 관광책자에 나와 있다.
베히레가 얼마나 오래전에 만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추정해볼 자료는 남아 있다. 이미 1500년대에 만들어진 각종 자료와 그림에서 베히레를 확인할 수 있으니 그 역사를 짐작케 한다. 원래 베히레의 용도는 소방용 수로였다고 한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던 중세시대에 대형화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소방 수로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가정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빠른 속도로 처리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원래는 독일 곳곳에 이 베히레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독일에서 베히레가 남아 있는 도시는 프라이부르크가 유일하다. 베히레는 도시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 홍수조절 기능과 함께 도시디자인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시설이자 관광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 강아지가 목을 축이는 곳도 됐다. 베히레에 발이 빠지면 이곳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전설도 재밌게 들렸다.
프라이부르크는 독일에서도 유명한 오래된 대학도시다. 전통적으로 시민의 3분의 1 정도가 학생이었단다. 명문대학인 프라이부르크 대학 외에도 20여 개의 전문대학과 아카데미가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법학과 음악, 미술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유난히 많다.
작은 베히레를 보고 있는 관광객들(좌). 바닥에 새겨진 인테리어 디자인 가게의 간판.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독일내 대학 랭킹 6위(2008년 기준)에 오른 명문대학이다. 철학, 법학, 독문학 등 인문학으로 특히 유명하며 한국인 유학생도 300명이 넘는다. 프라이부르크에서 만난 한 한국인 유학생은 “독일에서 대학 랭킹이 발표된 이후 이 대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아마도 내년부터는 더 많은 한국 학생이 공부하러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도시였던 프라이부르크가 세계적인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한 데는 그만한 이유와 역사가 있었다. 사연을 듣다보니 시곗바늘은 1970년대 초반으로 돌아갔다.
당시 독일 정부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불과 30㎞ 떨어진 라인강변에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했다. 중공업 육성을 위한 전력이 필요해서였다. 포도재배 농가가 대부분이었던 프라이부르크 시민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물론 처음에는 포도재배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포도나무 살리기’ 운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운동은 확산됐다. 한해 두해 거치면서 시민들의 자각과 깊이 있는 고민이 시작됐다.
급기야 시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고민하고 준비하는 단계로까지 수준이 높아졌다. 그리고 1975년, 독일 정부가 원자력발전소 건립계획을 철회한 뒤에도 환경 문제, 에너지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 지역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환경 관련 기관들과 연구기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아예 이곳을 중심으로 연구와 운동을 시작했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뒤 프라이부르크 의회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 할 수 있는 에너지 수급에 관한 세 가지 원칙을 가결해 화제가 됐다. 건물의 보온 단열을 통한 에너지 절약, 태양에너지 등을 통한 재생에너지 개발, 열병합 발전과 같은 효율적인 신기술 개발이 주제였다. 이 원칙을 바탕으로 프라이부르크에서는 모든 주택에 단열 공사가 이뤄지게 됐고 에너지효율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주정부와 시정부 차원에서 본격화됐다. 프라이부르크시의 환경보호정책 담당 책임자인 디터 뵈너 박사는 “프라이부르크시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은 도시와 환경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그의 얘기.
“1992년부터 프라이부르크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건축방식을 채택했으며 태양열을 이용한 에너지 절감을 시 정책으로 취해왔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약 250kw(1년 기준)의 에너지를 사용했다면 프라이부르크에 최근 들어서는 건물은 1년에 약 15kw의 에너지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태양광연구소 ‘프라운 호퍼 ISE’(좌). 태양광 집전판이 설치되어 있는 중앙역 건물.
‘솔라 인포 센터’는 프라이부르크의 대표적인 태양광 산업단지다. 태양에너지와 관련된 제품을 연구, 개발하는 기업들이 한데 모여 교육과 연구를 같이 한다. 우리로 치면 구로디지털단지와 벤처타운인 테헤란로를 합쳐놓은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곳에는 현재 55개의 기업과 연구기관이 태양열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다. 기술을 상담하고 상품을 개발하는 태양광 사업의 인큐베이터 구실을 하는 셈이다. 프로젝트 도시로 추진 중인 우리나라의 세종시도 이 센터와 연구교류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태양열 연구의 메카답게 이 센터의 메인 빌딩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인상적인 구조의 건축물이어서 잠시 소개한다.
우선 이 건물에는 태양열과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각종 시설이 가득 차 있다. 건물 내에서 사용되는 전기의 20%가량을 태양열에서 얻고 있으며 난방을 위한 에너지는 건물 주변의 지열과 인근 건물에서 나오는 열기를 낮시간 중 모아두었다가 난방에너지로 재활용한다. 또 지하수를 끌어올려 냉방에너지를 얻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입주업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라는 점이다. 솔라 인포 센터의 매니저인 라덴버거씨에 따르면, 이 건물에 입주한 전세계 기업인과 학자들이 모여 설계단계부터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아 건물을 만들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지하수를 모아 냉방에너지로 사용하자는 등의 아이디어도 그렇게 나왔다. 12℃ 정도를 유지하는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데만 전기를 사용할 뿐 이 건물에는 에어컨이 없다. 이 센터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는 ‘돈을 벌되 지적으로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봉지구의 태양광 주택들(좌). 프라이부르크 도심지 풍경.
“사실 보봉지구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재생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모든 시스템이 주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죠. 재생에너지를 개발, 사용하고 이를 보존해온 것도 모두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가능했습니다. 지속가능한 에너지 개발을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죠.”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는 보봉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셰어링’을 들 수 있다. 말 그대로 차를 같이 사용한다는 뜻이다. 오전 시간에만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규제한 이후 차를 이웃주민들이 공동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 보봉지구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car sharing’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는 차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태양에너지 활용의 상징으로 불리는, 1994년 본격 설치된 헬리오트롭(helio+trop)도 보봉지구에 있다. 헬리오트롭은 태양을 쫓아 움직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주택의 이름으로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주택이 태양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며 에너지 집적을 효율화한다. 현재 헬리오트롭에서는 지붕에 설치된 2개 축의 태양에너지 시설을 통해 건물 자체 운용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량보다 5배 이상 많은 에너지를 생산해내고 있다. 헬리오트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태양에너지 연구소인 ‘프라운호퍼 ISE(Institut Solare Energiesysteme)’에서 개발됐다. 이 연구소의 본부도 프라이부르크에 자리하고 있는데 역시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첨단시설을 갖추고 있다.
1981년에 만들어진, 유럽에서 가장 큰 태양광 연구소인 ‘프라운호퍼 ISE’는 지난 5월 건국대와 공동연구소인 ‘건국대-프라운호퍼 차세대 태양전지연구소(KFnSC)’를 설립해 화제가 됐다. 프라운호퍼 ISE가 해외에 공동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MIT에 이어 건국대가 세계에서 두 번째다. 서울시는 이 연구소를 ‘세계 유수 연구소 유치 사업’으로 선정,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시는 앞으로 이 연구소에 5년간 총 125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차세대 태양전지 연구
프라이부르크에는 그 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상점의 간판도 눈요깃거리가 된다. 프라이부르크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건물을 휘감고 있는 울긋불긋한 간판이 없다. 대신 간판들이 모두 땅에 내려와 도시디자인의 한 부분을 이룬다. 거리를 걷다보면 상점 앞 인도 위에 하얀 돌, 빨간 돌을 촘촘히 박아 만든 간판을 만날 수 있다. 등산용품 가게 앞에는 산 그림이, 안경점 앞에는 안경 그림이, 책방 앞에는 책 그림이 그려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바닥간판이 수백년 전부터 이어져온 이곳만의 전통이라는 점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센스 있는 디자인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프라이부르크시의 디터 뵈너 박사는 “프라이부르크시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은 도시와 환경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이 중심인 도시를 만들자는 철학이다. 이미 프라이부르크는 ‘독일 사람들이 살고 싶은 도시 1위’에 꼽힌 곳이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하려고 노력하는 서울과 한국에도 행복한 상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