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F쏘나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롭게 살아 있는 에지는 손을 대면 베일 것 같은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국민 중형차’로 우뚝 선 쏘나타에는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 사회가 그대로 투영돼 있다. ‘쏘나타 사회학’을 조명해본다.
1990년대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 조회시간. 담임교사의 이 같은 훈시에 일부 학생들이 들릴 듯 말 듯 킥킥거린다. 자기 학급 누군가가 ‘S’자를 내보이면서 “난 이제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무조건 간다”고 자랑한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수험생들 사이에서 현대자동차 ‘쏘나타’의 트렁크에 부착된 ‘Sonata’ 엠블럼에서 ‘S’자를 떼어다 보관하면 ‘인 서울(in Seoul)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출처 모를 얘기가 돌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수입차 보기가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 보기만큼 어렵던 시절.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의 엠블럼에서 ‘S’자를 떼어내 보관하면 서울대학교에 간다는 말도 있었다.
쏘나타의 ‘S’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 벤츠의 ‘S’는 서울대학교.
당시 수험생은 지금 30대가 됐다. PGA 골프선수나 연봉 수십억원씩 받는 프로운동선수, 로펌의 변호사와 같은 소위 ‘엄청 잘나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당시 수험생의 상당수는 대학에 진학하고 기업에 취직하거나 혹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 상당수는 쏘나타를 몰고 출퇴근을 하거나 지금도 어디론가 길을 달리고 있을 터.
초등학교 시절에 TV화면에서 쏘나타 광고를 보고 자라 고3 시절에는 엠블럼 ‘S’를 수집하고 다녔으며 이제는 성인이 돼 쏘나타를 몰고 다니는 이들은 현재 한국 경제와 사회의 허리를 구성하는 당당한 버팀목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5년 처음 선보인 쏘나타 1세대.
현대자동차의 ‘쏘나타’는 한국 사회에서 단순히 한 차종의 이름이 아니다. 대한민국 부유층의 상징이 전통적으로 ‘그랜저’였듯, 쏘나타는 대한민국 중산층을 대표하는 차종이었다.
쏘나타는 1985년 10월 처음 등장했다. 지금의 아반떼보다 실내가 좁은 당시 중형차량 ‘스텔라’에 사이드 몰딩과 앞범퍼, 라디에이터그릴, 뒷범퍼, 유리창 몰딩 등 붙일 수 있는 모든 부위에 크롬몰딩을 접착해 그야말로 ‘번쩍번쩍’하게 겉모습을 바꾸고 일부 편의사양을 더해 ‘소나타’라고 이름 붙여 내놨다.
당시 현재자동차는 중형차 시장에서 대우자동차에 현격하게 밀리는 처지였다. ‘국산차는 수출용과 내수용의 철판 두께가 다르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던 시절. ‘대우자동차는 독일 오펠사의 제품을 그대로 들여다 팔기 때문에 튼튼하다’는 입소문에 더해 객관적으로 우위에 있던 품질을 앞세운 ‘로얄 시리즈’로 중형차 시장은 대우자동차가 장악하고 있었다.
2세대 쏘나타. 서울올림픽을 석 달 앞두고 등장했다.
2만6000대. 올해 7월 시판한 르노삼성자동차의 뉴SM3가 두 달 만에 2만5000대가 계약된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초라한 수치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자동차시장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세대 ‘소나타’는 현대자동차로서는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은 ‘자식’이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내세울 것 없는 품질로 당시 ‘소나타’는 ‘소나 타는 자동차’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조롱의 대상이 됐다.
현대자동차는 부랴부랴 차 이름을 ‘소나타’에서 ‘쏘나타’로 바꾸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다. 해프닝으로 바뀐 이름 ‘쏘나타’가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 그 자체가 되리라는 것을.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서곡
쏘나타다운 쏘나타가 나온 것은 서울올림픽 개막을 석 달여 앞둔 1988년 6월이다. 현대자동차의 신화 ‘포니’를 디자인했던 디자이너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맡아 다소 보수적이지만 수입차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외형을 갖추고 나왔다.
당시 국내 최고급 모델은 역시 현대자동차의 ‘그랜저’였다. 이 차는 미쓰비시의 ‘데보네어’를 기반으로 제작해 차체 길이는 길지만 실내는 넓지 않았다. 순수 자체 개발 모델인 쏘나타는 라인업상의 질서를 무시하고 그랜저보다 큰 차체와 넓은 실내로 소비자를 유혹했다.
미쓰비시의 ‘시리우스’ 엔진과 쏘나타 차체의 철저한 방음대책, 미국 스타일의 푹신한 승차감, 한국 운전자들은 쏘나타를 통해 자동차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하게 됐다. 당시 쏘나타를 타본 소비자들이 느낀 ‘쇼킹하게 편안하고 조용한 승차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형차 승차감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도 한국 운전자들이 중형차를 고르는 기준으로 안락함과 푹신함, 조용함을 꼽는 것은 알게 모르게 1988년형 쏘나타를 접한 운전자들로부터 입소문을 타고 내려오는 측면이 없지 않다.
쏘나타의 성공 요인 중 또 하나는 앞바퀴 굴림 방식이다. 당시 소형차 및 스텔라는 물론이고 대우 로얄시리즈 등 중형차들은 ‘앞 엔진 뒷바퀴 굴림(FR)’ 방식이어서 동력축이 지나가는 뒷좌석 가운뎃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쏘나타2(위)와 쏘나타3 신문광고(아래).
쏘나타는 때도 잘 맞춰 태어났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경제가 연간 두 자릿수의 무서운 성장을 시작했다. ‘중산층’이 사회 주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경제학에서 정의한 사전적 의미의 중산층이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잘사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못사는 사람도 초고속 경제성장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평가했다.
‘나는 중산층, 고로 쏘나타 정도는 타 야 한다’는 ‘근거 없는 중산층’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쏘나타는 대박이 터졌다. ‘스텔라 쏘나타’를 넘어선 이 차는 이후 5년간 60여만대가 판매되면서 현대자동차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쏘나타는 한국의 쏘나타였다. 미국 등 해외 시장에서는 여전히 싸구려 취급을 면하지 못했다.
쏘나타의 경쟁자들
‘뉴쏘나타’는 1991년에 나왔다. 헤드램프 디자인을 좀 더 둥글게 만들고, 리어콤비네이션 램프도 폭을 키운 페이스리프트 모델이었다. 이때부터 현대자동차의 페이스리프트 기술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나왔다. 앞 뒤 모양만 바꿨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차로 보이게 하는 테크닉.
소비자 사이에서는 “현대자동차가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미리 만들어놓고 그보다 좀 뒤떨어지는 디자인으로 하나 더 만들어 이걸 먼저 파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고개를 들었다. 이 차는 당시 최고급 사양이던 후륜 디스크브레이크와 ABS 등을 갖추고‘제2의 쏘나타 신화’를 썼다.
쏘나타의 인기는 노력 없는 대가가 아니었다. 아무리 새 차가 나왔다고는 하나 대우자동차의 로얄시리즈는 여전히 쏘나타에 힘겨운 적수였다. 기아자동차도 일본 마쓰다사의 글로벌 모델 626시리즈를 들여와 만든 ‘콩코드’로 쏘나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우자동차도 쏘나타에 맞설 모델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의 ‘에스페로’로 맞불을 놓았다.
하지만 큰 차체와 정숙성, ‘신비(神秘)의 세단’ ‘그랜저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등 중산층의 의식에 깊숙이 파고드는 쏘나타의 마케팅 앞에 에스페로와 콩코드는 1위 자리를 빼앗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 국내 생산 자동차의 급수를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에쿠스’-‘제네시스’ ‘오피러스’-‘그랜저’ ‘SM7’-‘쏘나타’ ‘토스카’ ‘SM5’-‘아반떼’ ‘라세티 프리미어’ ‘SM3’-‘베르나’ ‘프라이드’ ‘젠트라’-‘모닝’ ‘마티즈 크리에이티브’ 순이 될 것이다.
이 순서에서 보면 쏘나타는 위에서 4번째에 위치해 있으나 당시의 지위는 사뭇 달랐다. ‘그랜저’-‘쏘나타’ ‘로얄’ ‘콩코드’-‘엘란트라’ ‘에스페로’-‘엑센트’의 순서였다.
지금 ‘제네시스’타는 사람이 당시에 ‘쏘나타’를 탔던 것. 그 시절 쏘나타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학교 다닐 때 ‘S’자를 떼고 다니던 지금의 30대들이야 미리부터 이해하고 있는 서열이지만 김연아, 박태환 세대만 해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날렵한 물고기처럼 생긴 1993년형 쏘나타는 한국 경제에서 ‘마지막 풍요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두툼하고 아늑했던 2세대 쏘나타가 단종되고 1993년 5월 풀 모델 체인지된 쏘나타2는 1990년 개발된 준중형차 ‘엘란트라’와 디자인에서 궤를 같이했다.
내수 100만대 돌파
생선 몸통을 연상시키는 곡선이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차체, 동글납작한 헤드램프와 라디에이터 그릴로 당시 국내 자동차 디자인을 선도했다. 기존 쏘나타보다 차량의 무게중심을 낮추고 폭을 넓혀 안락감을 더했으며, 에어백 등 안전장치를 강화해 제품의 가치를 높였다.
쏘나타2의 흠잡을 데 없는 디자인은 경쟁사를 자극했다. 쏘나타2가 나오자 대우자동차는 ‘왜 요즘 중형차 디자인은 프린스를 닮았을까요’라는 카피로 광고를 내고 공개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쏘나타는 당시 대우 프린스와 디자인 콘셉트는 비슷했으나 뭔가 2% 부족한 면을 채운 모습을 하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아차의 콩코드 후속모델 ‘크레도스’도 둥글둥글한 쏘나타2의 분위기를 이어받았다.
1996년 2월에는 쏘나타2를 페이스리프트한 쏘나타3가 나왔다. 전투기의 공기흡입구를 형상화한 그릴과 지금도 많은 자동차에 채택된 리어램프 디자인으로 쏘나타2의 인기를 계승했다. 쏘나타 브랜드로 내수 100만대 고지를 찍은 차가 바로 쏘나타3. 하지만 이 차는 당시 다소 ‘불미스러운’ 논쟁에 휩싸인다.
일부 여성단체와 관련 기관이 쏘나타3의 헤드램프 디자인이 남근(男根)을 형상화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실제로 디자이너가 남근을 형상화했는지 여부는 끝내 밝히지 못한 채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쏘나타2와 3은 특히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명작’으로 통한다. 태어난 지 10년 넘은 모델이지만 지금도 도로에서는 이들 차량이 주행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만큼 품질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한국 사람들이 이 차에 향수를 갖는 것은 1998년 외환위기 때까지 생산된 모델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외환위기 직전까지, 길거리에 쏘나타가 넘쳐나던 시절을 가장 풍요롭고 걱정 없던 시절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쏘나타2, 3에 이르러서 쏘나타는 ‘국민 중형차’라는 칭호를 받았다. 과거 ‘중산층 차’라는, 다소 범접하기 어려운 자동차에서 드디어 대중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중산층의 자동차였던 쏘나타가 국민차가 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 돈이 많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당시 웬만한 대기업 직원은 기본급 보너스 외에 성과급 등 각종 명목으로 적지 않은 추가 수입이 있었다.
250만대째 쏘나타인 EF쏘나타 생산을 현대차 임직원들이 자축하고 있다.
대학생들도 한 달에 한두 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과목당 20만~100만원씩을 챙기던 시절이었다. 특히 명문대생들 사이에서는 “졸업 안 하고 이대로 학교 다니면서 과외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나왔다. 필자가 알던 한 선배도 당시 월 500만원의 수입을 올리며 중형차를 끌고 다녔다. 유지비 걱정도 없었다. 휘발유가 L당 500원선이었으니.
취업도 참 쉬웠다. 웬만한 대학 4학년들은 직장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직장이 그들을 찾아다녔다. 기업들은 ‘캠퍼스 리쿠르팅’이라는 이름으로 해당 대학 출신들을 학교로 보내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4학년 1학기쯤 되면 3, 4개 기업의 합격증을 앞에 놓고 어느 직장을 택할지 고민했다.
일단 기업에 입사하면 연공서열에 따른 승진이 보장돼 있었고 입사자들에게 해외여행 특전을 제공하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는 ‘실업률이 너무 낮아 기업들이 구인난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하지만 풍요 속에서 쏘나타2와 쏘나타3를 몰고 다니던 사람들은 몰랐다. 그게 터지기 일보직전 풍선의 모습이었음을. 훅 불어내기 전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거품이었다는 사실을.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1997년 12월3일 자정께 생방송된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고 발표 한 뒤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쏘나타도 운명을 같이했다.
‘까칠한 시기에 태어난 에지 있는 디자인’
1998년 3월 4세대 쏘나타인 EF쏘나타가 탄생했다. “한국 기업 90%가 쓰러진다”는 소문으로 투자는 급속히 위축됐다. 1997년 11월 한때 400선 밑으로 무너진 코스피 지수는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해 부도위기에 몰린 기아자동차는 현금 확보를 위해 크레도스, 세피아 등 신형 차량을 30% 할인판매하는 등 자동차시장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EF쏘나타가 태어났다. EF쏘나타의 디자인은 돈이 있어도 돈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살벌한 사회 분위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더욱 낮아진 차체와 넓어진 폭,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움이 살아 있는 에지(edge) 디자인. 너무 튀었다.
한때 ‘국민 중형차’였던 쏘나타가 하루아침에 ‘돈 자랑’의 상징이 됐다. 쏘나타의 위축과 달리 같은 해 시판된 SM5는 빠르게 거리를 뒤덮었다. 삼성자동차의 SM5는 임직원 판매에 힘입어 하나둘 수요가 늘더니 어느새 쏘나타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판매량이 증가했다.
디자인 측면에서 SM5는 EF쏘나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미 구형이 된 닛산의 차체를 가져다 조립해 판매하는 수준이었던 SM5 초기모델은 그러나 길거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보수적으로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지내길 원했던 중산층에게 어필했다.
SM5 열풍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벤처 붐과 경기회복 분위기에 불씨가 살아나면서 쏘나타 수요도 되살아났다. 한풀이하듯, 돈이 생기자마자 사람들은 현대차 영업소로 달려가 그동안 눈으로만 보던 쏘나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한때 ‘디자인이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던 EF쏘나타의 디자인은 다시 업계 표준 자리로 되돌아왔다.
쏘나타의 ‘변종’
19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 합병한 현대자동차는 두 회사의 차량을 같은 플랫폼으로 만들기로 하고 첫 번째 플랫폼 공유 차종으로 쏘나타를 찍었다. 쏘나타의 뼈대는 기아차로 넘겨져 외환위기 당시 할인 판매로 값어치가 떨어진 크레도스 후속모델 개발에 이용됐다.
2002년 기아자동차는 쏘나타 플랫폼의 크레도스 후속모델 ‘옵티마’를 내놓고 쏘나타보다 다소 싼값에 판매했다. 쏘나타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실상 쏘나타와 같은 차량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비싼 쏘나타를 선호했다.
똑같은 차량이지만 쏘나타는 되고 옵티마가 안된 이유로 전문가들은 메이커의 이미지를 꼽는다. 현대차에 합병돼 안정을 되찾았지만 소비자의 머릿속에 기아차는 기아차였다. 격동의 외환위기 시절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기아차의 이미지가 왠지 구입을 꺼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쏘나타가 태어나기 전 현대자동차의 모델명은 포니, 그라나다, 엑셀 등 같은 급이라도 생산하는 차량마다 이름이 달랐다. 수십 년간 이름을 지켜온 도요타의 캠리, 코롤라, 크라운, BMW 3시리즈 5시리즈와 같은 네이밍은 당시 한국 업체로서는 부담이었다.
품질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차명을 계승했다가는 소비자가 구형에 대한 ‘나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가 포니, 그랜저 다음으로 이름을 계승한 차가 바로 ‘쏘나타’다. 현대자동차가 스스로 품질에 자신이 있었고, 매번 최고의 제품을 내놓고도 후속 모델 또한 최고의 제품이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네이밍이다.
디자인을 위주로 해왔지만 사실 쏘나타의 진정한 가치는 파워트레인이다. 미쓰비시의 엔진을 사용해온 쏘나타3까지는 일본 기술이 품질을 보증했다. EF쏘나타에 와서 독자 개발한 델타엔진과 서스펜션은 일본 기술에 의존한다는 부담을 벗어던지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정몽구 회장이 파워트레인 개발자들을 우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EF쏘나타는 2001년 8월 뉴EF쏘나타로 페이스리프트하면서 쏘나타3와 유사한 헤드램프 디자인으로 인해 다시 한번 ‘남근 논쟁’에 휩싸였지만 변함없는 성능과 수준 높은 디자인으로 국내 중형차 1위 자리를 더욱 확고히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쏘나타의 위상은 어디까지나 국내용이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NF쏘나타.
현대자동차가 2004년 내놓은 NF쏘나타는 기존 쏘나타와 차원이 다른 작품이다. 1000여 명의 연구진이 4년여에 걸쳐 개발한 이 차량은 개발 초기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했다. 도요타 캠리를 정조준하면서 ‘그동안의 현대자동차는 잊어달라’며 해외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세계 각국의 자동차 전문지와 전문 리뷰어들로부터 “현대차가 달라졌다”는 찬사를 받았다.
과거 그랜저 XG급으로 커진 차체와 안락한 실내공간, 중형차로서는 운전하기 편한 넓고 짧은 디자인, 차체 구석구석까지 고급 부품을 사용한 섬세한 마무리로 국내에서도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해외의 호평은 어디까지나 “현대차치고는 좋다”는 뜻이었다. 대부분 해외 언론들은 “이 가격에 이런 차를 살 수 있다니 놀랍다”고 칭찬하면서도 가격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현대차나 한국 메이커에 대한 이런 평을 듣는 한국인으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NF쏘나타까지 5세대를 거쳐왔지만 해외에서 ‘휸대(Hyundai) 쏘나타’는 여전히 가격 대비 성능을 보고 사서 타는 차였다. 그러나 NF쏘나타에 이르러 쏘나타는 이전 4세대까지의 모델과는 사뭇 달랐다. 싼 맛에 사서 쏘나타를 타던 해외 소비자들은 ‘어, 이거, 예전의 현대차가 아닌데?’라며 의아해 하기 시작한 것. NF쏘나타는 이 차를 타본 외국 소비자들에게 ‘다음에 현대차가 나오면 그 차도 눈여겨봐야지’라는 은근한 기대감을 심어 넣었다.
그리고 터진 대박. NF쏘나타 시판 4년 만에 현대자동차는 야심작 ‘제네시스’를 내놨다. NF쏘나타를 보며 의외라던 해외 언론과 소비자들은 제네시스를 보고 “이럴 줄 알았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쏟아냈다. 제네시스는 가격이 아닌 품질로 ‘2009년 미국 최고의 차’에 선정됐다.
‘2009 미국 최고의 차 선정’이 마치 미국 자동차 업계의 사소한 행사를 현대자동차가 과장해 홍보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미국 자동차 업계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도 미국 유력 자동차 잡지들은 현대 제네시스를 다룰 때마다 ‘2009 미국 최고의…’를 언급할 정도로 25년 전 ‘쏘나타’로 시작된 현대차의 기술발전은 누부시다.
변화하는 쏘나타의 지위와 YF쏘나타
쏘나타로 시작된 기술의 진보는 제네시스로 일단락됐다. 현대차의 기술진보는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쏘나타는 이제 과거의 영화를 다시 찾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동차는 이미지 상품. 이런 측면에서 에쿠스-제네시스-그랜저-쏘나타-아반떼-베르나의 현대차 라인업에서 하위 3번째에 속하는 쏘나타의 지위는 이제 과거만 못하다. 과거 쏘나타의 지위는 그랜저가, 그랜저의 지위는 제네시스가 대체했다. 이제 쏘나타는 과거 아반떼의 위치로 자리바꿈했다는 시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YF쏘나타의 디자인은 이런 주장에 힘을 더한다. C필러에서 트렁크로 날카롭게 떨어지는 쿠페형 디자인과 도전적으로 웅크린 앞모양, 에지가 날카롭게 살아있는 캐릭터 라인은 과거 쏘나타의 주 고객이었던 전통적 중산층이 소화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쏘나타를 탔던 30, 40대는 이제 50, 60대가 돼서 뒷좌석이나 오너용 국산, 수입 럭셔리 세단 운전석으로 옮겨 앉고 있다. 경차나 소형차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후반~30대 X세대는 이제 가정을 꾸리고 우아한 패밀리카를 찾는 동시에 외환위기 이전 화려했던 20대를 떠올리며 나 홀로 개성 있는 드라이빙을 꿈꾸지 않겠는가.
중산층의 ‘중형차’에서 중산층용 ‘패밀리 스포츠카’로 진화한 YF쏘나타. 미래 쏘나타에 한국 사회의 어떤 모습이 투영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