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철 밤하늘은 사자, 기린, 살쾡이가 어슬렁거리는 아프리카 초원이 된다. 사자의 꼬리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데, 왕을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왕비 때문이다. 이건 신화나 전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다.
故 조경철 박사 묘소.
과학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스타가 바로 조경철 박사일 것이다. 그는 천문우주 교양서를 100권 이상 썼고, 대중 강연을 수도 없이 했다. ‘과학의 달’ 4월을 맞아 독자들이 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한다. 학교와 연구소에서 묵묵히 연구에 전념하는 과학자들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나는 조 박사를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 유통가’였다고 말하고 싶다.
봄날 ‘소풍’ 다녀간 조경철 박사
나는 조 박사와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천문 현상을 관찰했다. 1995년 10월이었다. 태국의 나콘사완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했다. 당시 67세였던 조 박사는 밤을 꼬박 새우며 촬영 준비를 했고, 20여 명의 한국 관측팀 중 가장 멋진 개기일식 사진을 찍었다. 그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의 고향인 평양에서 2035년 9월에 있을 개기일식을 관측하러 갈 때 자신이 갈 수 없는 처지라면, 자신의 무덤을 파서 뼛조각이라도 가져가달라는 것이었다.
머리털자리 은하단.
자, 이제는 봄철의 밤하늘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 봄에는 황사와 안개 때문에 맑은 하늘을 보기가 쉽지 않다. 1년 중 별 보기가 가장 힘든 계절이 바로 봄이다.
봄철 밤하늘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 은하 너머 먼 우주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지구에서 볼 때 봄철 별자리가 모여 있는 하늘 부분은 우리 은하의 북극 방향으로, 은하 평면에 비해 별이 많지 않다. 하지만 여기엔 우리가 볼 수 있는 외부 은하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다. 그중 은하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지역을 ‘성운의 집’이라고 한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은하와 성운을 구별하지 못해 ‘은하의 집’이라 하지 않고 ‘성운의 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는 수많은 은하 중 하나인 ‘우리 은하’ 속에 살고 있다.
우주에는 우리 은하처럼 1000억 개 이상의 별을 가진 은하가 1000억 개 정도 된다. 1000억의 1000억 배에 달하는 많은 별 중 하나인 태양, 그 태양 아래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많은 별 중 어딘가에서 또 다른 문명체가 우리를 향해 망원경을 돌리고 있진 않을까.
우리는 이처럼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 공간 속 지구라는 아주 작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137억 년의 우주 역사 중 100년도 못되는 짧은 순간을 살아간다. 그런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할 수 있는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불교에서는 ‘겁(劫)의 인연’이란 말을 쓴다. 겁이란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약 14.4km(1유순, 즉 소달구지로 하루 걸리는 길의 거리)인 바윗돌이 100년에 한 번씩 선녀의 날개옷에 스쳐서 다 닳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가리킨다. 우주의 광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매일 사소하게 스치는 작은 만남도 겁의 인연에 의한 것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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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내린 황금사자
얼어붙었던 대지가 숨 쉬기 시작할 무렵, 밤하늘도 서서히 봄을 준비한다. 겨우내 벌어졌던 화려한 1등성들의 향연이 끝나가고, 작고 아기자기한 별들이 새순처럼 동쪽 하늘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새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별자리는 백수의 왕, 사자자리다.
봄철의 저녁 하늘에 사자가 나타나면 하늘은 잠시 아프리카 초원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북쪽 하늘엔 덩치 큰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가 기지개를 켜며 봄의 들판으로 걸어 나오고, 바로 그 옆엔 곰의 포효에 놀란 기린이 어둔 하늘로 몸을 감추고 있다. 사자자리 위에선 갓 태어난 작은 사자가 어미 사자에게 재롱을 피우고, 그 옆에선 살쾡이가 사자 몰래 먹이를 찾는다. 사자자리 아래 어둔 하늘에선 바다뱀이 보이고, 까마귀 한 마리가 바다뱀의 몸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동쪽 하늘엔 뿔피리 부는 목동도 보인다.
사자자리의 앞부분은 물음표(?)를 돌려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풀을 베는 낫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서양에서는 낫(Sickle)이라고 한다. 낫의 손잡이별에서 동쪽(왼쪽)을 보면 땅을 파거나 흙을 정리하는 데 쓰는 곡괭이도 찾을 수 있다. 낫과 곡괭이를 닮은 이 별들이 사자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별들이다. 사실 사자자리는 그냥 보아도 사자가 연상될 정도로 아주 잘 만들어진 별자리다. 한번 감상해보기 바란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국자별 북두칠성이 사자자리를 찾는 가장 중요한 길잡이다. 국자의 손잡이가 시작되는 델타(δ)별과 감마(γ)별을 연결해 계속 나아가면 사자자리의 감마(γ)별인 알기에바(Algieba)를 지나 1등성인 알파(α)별 레굴루스(Regulus)에 이른다. 사자의 머리 부분인 낫을 찾을 수 있다면 뒤에 따라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꼬리 부분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울 것이다. 또 사자자리의 꼬리에 해당하는 베타(β)별 데네볼라(Denebola·2등성)는 목동자리의 α별 아르크투루스(Arcturus), 처녀자리의 α별 스피카(Spica)와 함께 ‘봄철의 대삼각형’으로 알려진 정삼각형을 만들고 있다.
이 별자리는 꼬리털이 잘린 황금사자로 알려졌다. ‘처녀 앞에서 꼬리를 내린 황금사자’로 기억한다면, 그 위치를 기억하고 모습을 그려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종(端宗)별’로 불린 까닭
사자 갈기에 해당하는 γ별 알기에바는 오렌지색의 2.6등성과 연두색의 3.8등성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이중성이다. 이 별 부근은 유명한 사자자리 유성우(Leonids)의 복사점으로, 매년 11월 중순에 이 별자리를 중심으로 많은 유성을 볼 수 있다. 이 유성우는 약 33년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템펠터틀(Tempel-Tuttle) 혜성이 모혜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1966년 11월 17일 밤 미국에서 관측된 바에 따르면, 1분에 약 2000개의 유성이 떨어졌다고 하니, 굉장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다음 1999년에는 기대만큼 유성이 떨어지진 않았으나, 2년 후인 2001년 11월 18일 새벽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시간당 1만 개에 가까운 유성이 떨어지는 장관이 연출됐다. 나는 경기도 덕평에서 많은 사람과 이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하도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목이 다 쉬었던 기억이 있다. 지구가 혜성 궤도와 만나는 정도에 따라 혜성의 방문 시점에서 1~2년 후에 유성우의 극대기가 올 수 있다. 2032년경으로 예상되는 템펠터틀 혜성의 다음 방문 때는 독자 여러분도 꼭 멋진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자자리의 으뜸별 레굴루스는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하늘의 수호자(Guardians of Heaven)로 알려진 4개의 황제별(Four Royal Stars)의 우두머리였다. 이 4개의 별은 기본 방위 동서남북을 차지하는데, 레굴루스는 남쪽에 해당한다. 남쪽물고기자리의 포말하우트(Fomallhaut), 황소자리의 알데바란(Aldebaran), 그리고 전갈자리의 안타레스(Antares)가 각각 북·동·서쪽 황제별이다.
레굴루스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고대 문명 속에서 ‘붉은 불꽃’ 혹은 ‘화염’으로 불렸다. 이 별 때문에 여름 더위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봄철 별자리에 속하는 사자자리의 으뜸별이 어떻게 남쪽을 지배하고, 여름 더위와 관련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정답은 세차운동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짓던 시절, 하늘의 북극성은 용자리의 으뜸별 투반이었고 사자자리는 하지(6월 하순) 무렵에 태양이 위치하는 겨울 별자리에 속했다. 따라서 황도 바로 위에 위치한 레굴루스 근처에 태양이 오면 여름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태양의 열기에 레굴루스의 별빛이 더해져서 무더위가 시작된다고 믿은 것이다. 후에 하늘의 북극이 옮겨지고 사자자리가 봄철의 별자리가 되면서 레굴루스가 가졌던 불꽃의 이미지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로 옮겨간다. 지금은 하지 무렵에 태양 근처에서 가장 밝은 별이 바로 시리우스이기 때문이다.
사자자리 유성우.
사자자리는 황도 12궁 중 제 5궁에 속하는 별자리다. 춘분점을 기준으로 120도에서 150도까지의 황도 영역이 5궁에 해당한다. 태양은 매년 7월 22일 오후부터 8월 22일 오전까지 이 영역을 지나기에, 이때 태어난 사람들의 탄생 별자리가 사자자리다. 수천 년 전 하지에 태양이 이곳에 이르면 대단히 더워졌기 때문에, 백수의 왕 사자가 여기에 놓이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현재는 세차운동으로 실제 태양이 이 별자리를 지나는 것은 매년 8월 7일경부터 9월 14일경까지다.
헤라클레스의 승리
사자자리에 얽힌 신화도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다. 아주 먼 옛날 하늘이 온통 혼란 속에 빠져 별들이 자리를 떠나고 혜성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적이 있었다. 이때 달에서 불타는 유성 하나가 황금사자의 모습으로 그리스의 네메아(Nemea) 골짜기에 떨어졌다. 유성이 변한 이 사자는 지구의 사자보다 몸집이 훨씬 컸고 성질 또한 포악해 네메아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사자는 갈수록 포악해졌고 몸집도 점점 커져갔다. 네메아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사자를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에우리스테우스(Eurystheus) 왕은 당대의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사자를 처치하라고 명령했다. 네메아 골짜기에 나타난 헤라클레스는 활과 창, 방망이를 들고 황금사자와 싸웠지만, 이런 무기로는 결코 사자를 무찌를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무기를 버리고 사자와 뒤엉켜 생사를 가르는 대격투를 벌인다. 그리고 신의 아들답게 사자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결국 사자는 헤라클레스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목 졸려 죽고 말았다.
네메아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헤라클레스는 승리의 대가로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는 사자의 가죽을 얻게 되었다. 헤라클레스가 입고 있는 사자가죽이 바로 이것이다. 신의 왕 제우스는 아들 헤라클레스의 승리를 치하하고 그의 영웅적인 행동을 영원히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사자를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었다. 못된 사자가 하늘의 별자리로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이,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사자자리의 뒤를 이어 봄철 밤하늘엔 기역(ㄱ)자 모양의 어두운 별자리가 나타난다. 이 별자리는 모두 4등성 이하의 어두운 별들로만 구성돼 도시에선 알아보기 힘들지만, 시골에선 한무리의 별이 안개 낀 것같이 은근하게 빛나는 걸 볼 수 있다. 쌍안경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다면 이런 느낌은 더욱 커진다. 고대 천문학자들은 이 별자리를 사자자리의 ‘꼬리’로 취급했다. 이 별자리는 현존하는 별자리 중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실존 인물의 이름이 붙어 있다. ‘베레니케의 머리털자리(Coma Berenices)’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줄여서 머리털자리라고만 한다.
머리털자리에는 아름다운 이집트 왕비와 관련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제 있었던 역사 속의 일이다.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시리아 정복을 위한 원정길에 올랐다.
이때 그의 왕비였던 베레니케 2세는 제피리움(Zephyrium)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남편의 무사함과 승리를 빌면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면 그 대가로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신의 제단에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왕이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베레니케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신전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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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머리카락은 왕이 돌아온 날 밤 신전에서 사라져버렸고,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없어진 데 화가 난 왕은 신전의 사제를 벌했다. 이때 왕궁 천문학자인 코논이 왕에게 “왕비의 머리카락이 너무 아름다워 아프로디테 신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늘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마침 사자자리 뒷부분 하늘에 엉킨 그물 같은 작은 별들이 탐스러운 왕비의 머리다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별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왕과 왕비는 몹시 기뻐하며 사제와 코논에게 상을 후하게 내렸다. 코논의 재치가 무고한 사람을 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밤하늘의 사자는 탐스러운 꼬리를 잃고 지금처럼 밋밋한 꼬리를 갖게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