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울 것 없는 ‘지하경제와의 전쟁’
- 5년간 2조 역외탈세 적발, 실제 징수율 42%
- 지하경제 개념 모호…가짜 석유 잡느라 대기업 탈세 외면?
- “선박왕 권혁 탈세 추징은 100% 잘못”(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
지난 4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1일, 국세청은 새 정부의 정책에 발맞춰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가 생각하는 지하경제의 개념, 양성화 정책의 방향은 지난 4월 4일 국세청이 내놓은 관련 보도자료에 잘 나와 있다. 국세청은 ‘국내 역외탈세 대재산가, 사채업자 수백 명에 대한 세무조사 착수’ 사실을 알리면서 지하경제 조사의 주요대상을 4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대재산가 △고소득 자영업자 △민생침해 사범 △역외탈세. 국세청은 이를 위해 지방국세청 조사국 인력을 400명 증원하고 조사팀 70개를 보강했다고 밝혔다. 특별조사국으로 불려온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아예 법인 분야의 ‘지하경제 추적조사 전담조직’으로 재편했다.
지하경제 양성화의 밑그림이 나온 뒤 박근혜 정부가 가장 먼저 칼을 빼든 지하경제 분야는 가짜 석유였다. 박 정부는 “가짜 석유 시장 규모가 수조 원에 달한다”며 인수위 시절부터 여기에 집착해왔다. 가짜 석유를 단속하는 공무원에게 특별사법경찰권을 부여하며 대대적인 단속을 약속했다.
가짜 석유에 이어 나온 건 주가조작 근절이다. 박 대통령은 3월 11일 새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이를 처음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개인투자자를 절망으로 몰아넣고 막대한 부당이득을 챙기는 각종 주가조작에 대해 상법 위반사항과 자금 출처, 투자수익금의 출처, 투자 경위 등을 철저히 밝혀 제도화하고 투명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부는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 근절 종합대책’(4월 18일)을 발표했다. 금융위원회는 주가조작 조사인력에 특별사법경찰권을 부여하기로 했고, 검찰은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동참했다.
그러나 상당수 경제전문가는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드라이브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말하는 ‘지하경제’의 개념과 범위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많다. 대기업, 자영업자의 세금 탈루나 체납은 그렇다 쳐도 가짜 석유는 지나치게 ‘마이너’한 분야가 아니냐는 것이다. 한 대학교수의 말이다.
“마약이나 성매매부터 대기업 탈세나 횡령까지 따지고 보면 지하경제 아닌 게 없다. 정부는 이것들을 모두 닥치는 대로 발본색원한다는 식인데, 솔직히 실효성이 의문스럽다. 특히 가짜 석유 같은 것에 집착하면서 대기업 탈세 같은 것은 뒷전으로 밀리는 느낌도 있다. 국세청장이 전경련 같은 단체를 찾아가 해명하는 일도 있지 않았나. 방향이 좀 잘못됐다는 생각이다.”
정부는 계량화된 수치까지 제시하며 지하경제 양성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4월 1일 정부 세종청사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2013 업무추진계획 사전 브리핑에서 “국내총생산(GDP)의 20%로 추정되는 지하경제 규모를 향후 10~15%까지 축소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늘상 해오던 지하경제 양성화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GDP의 6~7%라는 분석부터 30%가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지하경제 연구의 권위자로 자주 인용되는 오스트리아 출신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의 방법론을 한국 실정에 맞게 변용한 뒤 구해본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17.1%였다. 물론 지하경제의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수치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稅收) 확대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조세연구원장을 지낸 황성현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하경제 양성화로 인한 세수 증대 효과가 미미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하경제 양성화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탈세를 잡아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세수 규모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다. 하루아침에 돈을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지하경제 양성화는 이미 국세청이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새로울 게 없다. 세무조사가 확대되면 경제주체들은 거기에 맞춰 반응한다. 자칫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황 교수는 또 “지하경제 양성화로 연간 6조 원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정부가 17조 원이 넘는 추경예산을 편성하면서 그중 12조 원을 세입 결손 충당에 쓴다고 밝혔다. 정부 스스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있다. 세수 증대가 어렵다는 걸 정부가 자인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지하경제로 분류되는 고소득 자영업자나 대기업 탈세에 대한 조사는 어제오늘부터 해온 게 아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도 정부는 국세청을 동원해 변호사, 의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인 바 있다. 이들의 소득을 파악하기 위한 위원회까지 꾸렸다. 2003년에는 17만 명의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다. 대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진행됐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세청 세무조사가 세금추징을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된다면 기업의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복되는 이런 현상은 지양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견은 박근혜 정부와 가까운 인사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불리는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5월 9일 한 강연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5년간 30조 원의 세수를 마련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목표에 비해 5조~10조 원 정도는 모자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원장은 “추징액이 아닌 실제 납부금액을 기준으로 따지면 목표달성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세무조사 주요 대상인 자영업자의 현금성 거래, 불법거래, 해외 유출분 등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해왔기 때문에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 증대 효과는 기존의 2배를 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국세청을 통해 연간 확보되는 세금 규모는 200조 원 정도다. 그중 대부분은 정해진 세율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거둬진다. 세무조사 등 강제적인 방법으로 충당되는 세금은 2조~3조 원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통한 세수 확보는 예전부터 계속 해오던 것인 만큼 새로울 것 없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연간 6조 원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한다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얘기다.
역외탈세 추적에 올인한 국세청
역외탈세는 지난 수년간 국세청이 가장 공을 들인 분야다. ‘박근혜 국세청’도 이 부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역외탈세 추적은 필요성부터 실효성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2011년 4월, 국세청은 시도상선 권혁 회장에 대한 역외탈세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국세청이 결정한 추징액은 무려 4101억 원. 역대 역외탈세 사건 중 최대 규모였다. 권 회장은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4년, 벌금 2340억 원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세금탈루 기업인이 구속된 첫 사례다. 현재는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 2월 12일, 권혁 시도상선 회장이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그나마 구속이라도 시켰으니 권 회장 사건은 국세청이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경우에 해당한다. 권 회장 사건과 거의 동시에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하고 추징에 나섰던 완구왕 박종완, 구리왕 차용규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국세청으로부터 1600억원가량의 세금추징을 통보받은 차 씨는 2012년 1월 조세심판원에 과세전적부심사를 청구해 승소했다. 과세전적부심사는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마친 뒤 세금을 고지하기 전에 납세자에게 과세 내용을 미리 알리고, 납세자가 억울하다고 판단하면 이의를 제기하도록 하는 납세자 구제절차. 조세심판원은 차 씨 사건을 심판하면서 “차 씨를 한국 거주자로 볼 수 없어 세금 부과는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국세청은 조세심판원의 결정이 나온 직후 차 씨에 대한 세금부과를 사실상 포기했다.
박종완 씨 사건도 결과는 비슷했다. 2012년 2월, 법원은 400억 원대의 세금을 포탈하고 10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국세청은 박 씨에게 2140억 원의 세금추징을 통보한 바 있다. 재판부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영주권자였던 그가 당시 해외에서 벌어들인 원천소득에 대해 종합소득세를 낼 의무는 없다”고 밝혔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이현동 전 국세청장이 ‘1조 원 세수 확보’를 자신하며 세무조사를 벌였던 사건들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 아주 흡족해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6개월이 넘게 진행된 조사에서 국세청이 추징한 세금은 골프장 회원권 2장이 전부였던 것이다.
역외탈세 실제 추징률 30~40%
지난 3월 국세청이 민주당 최재성 의원실에 보낸 자료에 따르면 국세청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0건의 역외탈세 사례를 적발해 1조9158억 원의 추징세액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건에서 실제 세금 추징이 이뤄졌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 의원실 관계자는 “역외탈세 조사를 통해 실제 확보한 세금에 대한 자료요청을 국세청에 여러 차례 했지만 국세청은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 많고 기업의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국세청이 민주당 정성호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세청은 2010~2011년 역외탈세 추징액 1조4656억 원 중 6199억 원(42%)을 징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한 세무전문가는 “국세청 역외탈세 조사의 실제 세금 추징 비율은 대략 30%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 징수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징수율이 낮은 건 역외탈세 사건의 경우 대부분 수년에 걸쳐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실제 징수액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세청은 실제 징수액 통계를 공개해달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국세청의 역외탈세 조사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많은 전문가는 실제 세수 확보가 가능한 부분에 조사를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내 거주자냐 아니냐는 논란만 불러오는 해외 기반 기업이나 개인(한상(韓商) 등)에 대한 세무조사보다는 대기업 탈세 등 추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지속된 국세청의 역외탈세 추적 과정에서 재벌기업 관련 회사가 조사를 받은 사례가 한 차례도 없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 인터뷰
“세금 잘 걷으려면 세금 ‘햇볕정책’ 필요”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은 이명박 정부 5년간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한상률·이현동 전 국세청장과 갈등을 빚었고, 지난해에는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정리한 책 ‘잃어버린 퍼즐’을 펴내 눈길을 끌었다. 이래저래 ‘트러블 메이커’ 이미지를 갖게 됐지만 그는 26년 넘게 국세청에 재직하며 다양한 조사기획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1국장, 국제조세관리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역외탈세 등 국제조사 업무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6년간 청와대에서 민정과 정책 업무를 맡았다. 안 전 국장은 최근 국세청이 추진하고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 역외탈세 조사 등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실효성 없는 과세와 경기침체 가능성을 특히 걱정했다.
▼ 정부가 추진하는 지하경제 양성화의 문제점이 뭔가.
“탈세를 잡아내고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것은 국세청의 당연한 업무다. 하지만 지하경제 양성화가 세수 확보라는 가시적 결과에만 목적을 두다보니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의 경제활동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건실한 중소기업에 융단폭격을 가한다는 원성이 높다. 최근 국세청 과세에 대한 불복 청구율이 30%가 넘는다고 한다. 아주 높은 수치다. 이 정도라면 국세청의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예를 들면 ‘확정 전 사전압류’ 같은 것이다. 이 제도는 국세청이 추징세액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제도 중 하나다. 세금추징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세무조사가 끝나기 전이라도 국세청이 피조사 대상자의 재산을 압류하는 제도다. 그런데 이 제도는 자칫 기업의 숨통을 끊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또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운용돼야 한다. 이 제도는 사실상 기업 활동 자체를 멈춰놓고 세무조사를 하는 방식인데, 이는 수혈을 하지 않으면서 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요즘 확정 전 사전압류 제도가 남발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국세청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모든 기준이 실적에만 맞춰지다보니 조사를 담당하는 국세청 직원들이 기업의 경영활동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 세무조사 대상자 선정의 투명성 확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 하듯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남발되고 있다. 어떤 기준과 이유로 세무조사를 하는지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특별세무조사가 특히 그렇다. 또한 고소득 자영업자, 대자산가, 민생경제 침해사범 등이 늘 조사의 타깃이 되곤 하는데 기준이 좀 명확했으면 좋겠다. 의사, 변호사라고 해서 모두 고소득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시대는 지났다.”
“기업에 세적(稅籍) 만들어줘야”
▼ 세무조사 방법에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지금까지 국세청은 기업이나 개인이 신고한 내용을 토대로 탈세를 찾는 데 주력해왔다. 기본적으로 소득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식이다. 그러나 이제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기업이나 개인의 재산형성과 소비지출 규모를 파악해 역으로 소득을 추정해내는 식의 정보수집 방법이 필요하다. 소득은 없는데 소비지출이 많은 사람, 해외거래가 많은 개인과 기업의 소득 원천을 찾아내 과세해야 한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탈세 규모가 엄청날 것이다.”
▼ 지난 몇 년간 국세청의 최대 관심사는 역외탈세 조사였다. 어떻게 평가하나.
“역외탈세 조사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시도상선 권혁 사건이다. 국내 거주자가 아닌 사람에 대한 조사였다는 점도 문제였고, 해외에서 재산을 형성한 한상(韓商)에 대한 조사라는 점도 논란거리다. 국세청은 권 회장이 국내 거주자이기 때문에 소득세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과세 근거로는 상당히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무리한 과세다. 그리고 권 회장은 우리나라에 아무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설사 추징세액이 결정된다고 해도 세금을 받아낼 방법이 없다. 실효성이 없는 이런 조사에 국세청이 왜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 권혁 사건의 핵심은 그가 국내 거주자냐, 아니냐인데.
“국내 거주자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거주 일수다. 그런데 그 기준으로 보면 권 회장은 국내 거주자가 아니다. 그래서 국세청이 ‘실제 생활의 근거지’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 것 같다. 조세사건에서 거주지 문제를 따질 때는 사업장의 위치, 자금 조달처와 거래선을 봐야 하는데, 그 기준으로도 권 회장은 국내 거주자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지난해 소송비용 문제로 국세청이 권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는데, 그때 국세청은 권 회장이 해외 거주자라면서 모순된 주장을 폈다.”
▼ 역외탈세는 주로 어떻게 이뤄지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외국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놓고 해외투자를 가장해 돈을 빼가는 경우, 한국에서 사업을 하진 않지만 국내 거주자라 세금을 내야 하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에는 조사에 신중해야 한다. 과세의 실효성도 문제지만, 해외에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며 기업을 성장시켜 산업발전에 기여하는 기업인들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국내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
▼ 보다 효과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나라 사람이 해외에 세운 기업이 약 20만 개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기업이 제대로 소득을 신고하는지는 거의 파악되지 앉고 있다. 기업에 세적(稅籍)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국내에 신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세적을 만들면 최소한 해외로 나간 돈의 규모는 알 수가 있다. 내가 2007년 국제조세관리관 재직 시절 추진했던 일인데, 아직도 시행이 안 되고 있다. 이것만 제대로 된다면 부작용 없이 세금을 징수할 방법이 생긴다. 한국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과의 전산망 공조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조사인력보다 시스템을
▼ 어떻게 하면 해외로 나간 돈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나.
“해외에서 성공한 사람들 중 돈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금출처에 따른 증여세 등의 문제로 자금 유입이 어렵다. 어떻게 만든 재산인지 일일이 소명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 그래서 환치기 같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가져오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들어온 돈은 모두 지하경제로 흘러든다. 이런 걸 풀어주는 법안을 한시적이나마 만들 필요가 있다. 해외에 나간 우리나라 사람들의 돈이 장애 없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세금에 대한 햇볕정책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경제 활성화, 지하경제 양성화, 복지재원 확보에 도움이 된다.”
▼ 부처 간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아 생기는 부작용도 많다.
“환치기 수법 같은 것은 국세청이 독단적으로 잡아내기 어렵다. 검찰 수사에서는 이런 부분을 확인하지만, 검찰은 이런 부분이 확인돼도 국세청에 통보하지 않는다. 이런 자료가 국세청에 자동 통보되도록, 그래서 세금징수로 이어지도록 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 국세청 자료는 검찰로 가는데, 검찰 자료는 국세청으로 오지 않는다. 금감원, 증권거래소도 마찬가지다. 조사인력을 늘리는 것보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더 시급하다.”
▼ 금융 분야 탈세에 대해 국세청이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사실 금융 분야 탈세 문제는 국세청 업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국세청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 형사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금융상품의 이익구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금감원이나 증권거래소 등에서 확인되는 금융 관련 탈세에 대해 자료수집이 부족한 실정이다. 주가조작, 기업사냥꾼, M·A 관련 탈세, 환치기나 외환관리법 위반의 경우 조세 문제가 꼭 발생한다.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국세청 직원들에게 탈루금융기법에 대한 실제 사례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 국세청이 앞으로 주목해야 할 지하경제나 탈세 분야가 또 있다면.
“재산가들 중에는 재단법인 등을 만들어 세금을 탈루하는 사례가 많다. 순수한 기부 목적의 재단법인 설립이 아닌, 상속·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재단법인을 만드는 경우다. 그러나 국세청은 지금까지 이런 분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재단도 이런 의혹을 받지 않았나. 많은 경우 자녀에게 재산을 증여하기 위한 편법으로 악용되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변칙 상속·증여를 위한 재단법인 설립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사회공헌기금 관리 재단을 만들어 정부가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기부금을 누적 관리해 정기적으로 공개하고, 기부금을 규모에 따라 마일리지로 전환해 관리하다가 기부자에게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양형에도 참작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 기부금 중 일정 비율의 금액은 기부자가 지정하는 사람에게 세금 없이 증여토록 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