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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광해군은 聖君, 중립외교의 화신?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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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과 인구 변동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경복궁. 약 700칸의 전각이 있었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인접한 곳의 민가를 헐고 경복궁보다 10배 큰 인경궁 공사를 시작했다. 광해군대 궁궐 공사의 규모와 악영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는 통계자료를 소홀히 다룬 데 있다.

실록에 실린 통계자료를 하나 더 소개한다. ‘현종실록’ 권20에 실린 인구 통계다. “한성부에서 호구(戶口)의 수를 올렸는데 식년(式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통계는 한성부에서 총괄하고, 3년에 한 번 호구를 조사했음을 알 수 있다. 1672년(현종13) 10월 30일의 기사인데, 1670년(경술), 1671년(신해) 두 해에 걸친 조선시대 최대의 기근을 거친 뒤였다. 두 해의 기근으로 100만 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중 5부(京中 五部)는 원래 호수가 2만4800호인데, 남자는 9만8713명이고 여자는 9만3441명이다. / 경기는 호수가 10만7186호인데, 인구는 46만9331명이다. / 관동은 호수가 4만6145호인데, 인구는 21만7400명이다. / 해서는 호수가 9만6049호인데, 인구는 38만6685명이다. / 관북은 호수가 6만8493호인데, 인구는 29만614명이다. / 호서는 호수가 17만8444호인데, 인구은 65만2800명이다. / 영남은 호수가 26만5800호인데, 인구은 96만60명이다. / 호남은 호수가 23만6963호인데, 인구는 84만9944명이다. / 관서는 호수가 15만4264호인데, 인구는 68만2371명이다. / 경외 도합은 호수가 117만6917호인데, 인구는 469만5611명으로, 남자가 254만1552명이고, 여자는 215만4059명이다. / 제주는 호수가 8490호인데, 인구는 남자가 1만2557명이고, 여자가 1만7021명이다.

끝에 사관은 “대체로 우리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데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다. 신해년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잇따랐다. 그런데 이것은 호적에 들어 있는 숫자만 의거해서 기록한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 조선 정부의 처지에서 파악한 호구에 여자가 들어갈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역(役)’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울해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 지금 여성이 인구 파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조세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그냥 사실을 아는 사람과 역사가를 구분하는 것은 일반화”라고 했다. 일반화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법칙이다.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그런데 사실 일반화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름 붙이기라고 부를 수 있는 분류 개념. 예를 들어 전체주의, 봉건제 △일반적인 법칙이나 규칙성 △특정 지정학적 구역이나 시대에서 얻은 조건을 지칭한 일반적 진술. 예를 들면 “동아시아 민중봉기는 농민과 지식인이 결합한 인민주의적 성격을 띤다” 같은 것 △어떤 조류나 경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술. “1970년대보다 1980년대에는 젊은이들이 장발을 덜 선호했다” 같은 것 △ 통계적 규칙성 △ 어떤 역사적 인물에 대해 그의 동기, 행위를 감안해 붙이는 성격 부여 △ 사건에 대한 특정한 설명이나 해석 △ 가치가 들어간 평가 △ 역사 자료의 선택이나 증거 인증을 위한 절차 규칙

물론 이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 통계적 규칙성은 다른 모든 분야의 ‘일반화’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범주다. 통계적 일반화는 추론 과정을 통해 개별 사실에서 연역되는 설명이자 진술이다.

조선 19세기 위기론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역사비평’ 101호. 수량경제사는 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기여한 점도 있지만, 통계에 기대어 시대상을 잘못 그려낸 점도 적지 않았다. 조선 ‘19세기 위기론’이 그것인데, 소장학자들이 수량경제사의 오류를 정리한 논문을 모아놓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조선에는 17세기 이후 소농(小農) 사회가 성립하였고, 근대를 예비하는 관료제, 토지 사유, 시장경제 등의 요소가 농축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소농 사회는 18세기의 안정을 거쳐, 19세기에는 인구의 감소, 시장 수의 감소, 토지 생산성의 하락, 미곡의 국가적 재분배로서의 환곡제 해체, 사회적 안전판인 동네(里) 공동체와 친족 공동체의 분열과 동요로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한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특질’, 한국개발연구원, 2000,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이영훈 교수는 19세기 위기의 첫 번째 증거로 인구의 감소를 말하고 있다. ‘맬서스의 위기’, 즉 생활수준의 하락에 따른 인구의 감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맬서스의 위기는 여러 시대와 문명에서 널리 보이는 현상이다. 인구 감소가 유독 조선사회에서만 재앙적 충격을 안겨 체제가 자멸할 정도였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더 적극적인 근거로는 18~19세기 조선의 인구가 연평균 0.62%의 속도로 증가했으며, 더구나 0.35% 증가한 18세기에 비해 19세기에는 0.83%나 증가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동안 인구 증가-감소를 연구할 때 활용한 족보가 사료로서 더 검토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족보는 생활수준이 높았던 양반들의 것이 많고, 20세 이상까지 살아남은 남성 중심의 기록이다.

‘19세기 위기론’의 핵심 근거 중 하나는 19세기 들어 토지 생산성이 4분의 1까지 급격히 하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의 하락 증거도, 두락당 총생산액이 아니라 두락당 지대 수취량을 근거로 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수확고를 분석한 최근 정진영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의 생산성은 18세기와 유사하다. 185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말까지 수확고는 1857년 50두를 시작으로 1880년대 전반에 저점을 찍은 뒤 1920년대까지 30두를 전후로 등락을 거듭하며 1921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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