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봉황이 머문 자리에 사뿐히 앉다

  • 글: 김현미 기자 사진: 김성남 기자

    입력2003-11-28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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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길 양쪽이 사과밭 천지다. 가지가 휘어질 듯 주렁주렁 열린 사과들 사이로 빛 바랜 고옥은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린다.
    • 500m 안팎의 야트막한 산자락과 마을을 휘감아 도는 안동호, 임하호의 물줄기가 정취를 더한다.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국보 제121호 하회탈의 형상을 류시중씨가 장승에 새겼다. 하회마을은 주민의 75%가 풍산 류씨인 동성마을이다.

    탐스러운 사과는 늦가을 햇살이 아쉽기만 한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내버려두질 않는다. 갑자기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지자 사과 따는 아낙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안동사과는 전국 생산량의 10%를 차지할 만큼 물량이 많을 뿐 아니라 색상이 선명하고 당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과수원 주인들은 “올 여름 잦은 비로 빛깔과 맛이 예년만 못하다”고 혀를 차지만 알이 굵은 것으로 골라 쥐어준 사과를 한입 베어무니 갈증이 풀리고 속이 든든하다.

    안동은 그 자체가 고건축 박물관이다. 도산서원·병산서원·고산서원 등 현존하는 26개의 서원과 270여 개의 정자, 하회마을을 비롯한 퇴계종택·학봉종택·농암종택 등 유서 깊은 종가에 수많은 재실, 봉정사·개목사·광흥사·용수사 등 사찰과 신라시대 이래로 전해지는 전탑(塼塔)들이 묵묵히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서울을 출발해 중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다시 중앙고속도로를 내달려 3시간반 만에 안동에 도착하는 순간, 도대체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할까 어느새 길 잃은 외지인이 된다.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산약을 수확하고 있는 농부. 전국 생산량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안동 산약은 사과, 안동포에 이어 이 지방의 대표적 특산물로 자리잡았다.

    안동을 제대로 보려면 크게 4개의 권역(도산서원권, 시내권, 봉정사권, 하회마을권)을 둘러봐야 한다. 먼저 안동 시청을 중심으로 동북방향 35번 국도 퇴계로를 택했다. 이 길을 따라 30분쯤 가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오천유적지가 나온다. 1974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 위기에 처한 광산 김씨 고택들을 옮겨놓은 곳이다.

    그러나 개인이 세운 정자 가운데 영남 제일이라는 탁청정(濯淸亭· 1541년 건립) 앞에 서자 서글퍼지는 심정을 어쩔 수 없었다. 안동댐과 임하댐은 안동의 지도를 바꾸어버렸다. 옛길은 물 속에 잠기고 유적들은 제자리를 잃었다. 대신 주요 유적지 팻말마다 ‘원래 ○○에 있었으나 댐이 건설되면서 옮겨놓았다’는 문구만 덜렁 남아 있다. 도산서원과 마주하고 있는 시사단(1792년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려 과거를 보았던 장소) 역시 안동댐 건립으로 물이 차오르자 지금의 자리에 10m 가량 축대를 쌓아 보존했다. 당시 7000여 명의 응시자가 몰려들어 강 모래밭에서 과거를 치르던 장관이 눈에 선하다.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①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운다는 용계 은행나무. 수령 700년의 이 노목은 나무 둘레가 14.5m, 높이 37m에 이른다.<br>② 1000원짜리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도산서원. 마치 ‘숨은 그림찾기’를 하는 듯하다<br>③ 수은주가 떨어지면서 사과 따는 아낙의 손길도 분주하다.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천등산 가는 길 <br>마을 어귀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총총한 발걸음.

    안동 유교문화의 상징인 도산서원에 다다라 제일 먼저 재미있는 사연이 담긴 사액현판을 찾았다. 선조가 사액을 내릴 때 한석봉에게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했다. 선조는 미리 도산서원 현판이라고 하면 아무리 천하 명필 한석봉이라도 놀라 붓이 떨릴지도 모르니 무슨 글씨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원(院), 서(書), 산(山) 도(陶) 순으로 거꾸로 한 글자씩 불러주었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고 글씨를 쓰던 한석봉이 마지막 글자에서 ‘아,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구나’ 알아채는 바람에 붓이 떨려 그만 ‘도’자가 비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글자가 약간 기운 듯도 하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퇴계종택, 퇴계묘, 이육사 시비, 퇴계태실을 둘러보고 나서 35번 국도를 타고 곧장 가면 봉화군 청량산 도립공원이 나온다.

    하지만 안동에 와서 ‘하회마을’을 지나칠 수는 없는 법. 낙동강 물이 마을을 한 바퀴 감싸고 돌아 흐르는 독특한 지형 때문에 마을 이름이 물 하(河), 돌 회(回)가 됐다고 한다. 낙동강이 태극을 그리며 남후면과 풍천면을 휘감아 도는 모습을 일컬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이라 극찬하지만 정작 하회마을에서는 그 광경을 감상할 수 없고, 마을로 가다 화천서원 쪽으로 꺾어 부용대에 올라야 한다. 부용대 64m 높이 절벽 끝에 서면 굽이치는 강허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① 안동 남서방향 암산유원지 부근에 있는 암산굴. 주변은 측백나무 자생지로 유명하다.<br>② 고추양념을 얹어 먹음직하게 구운 간고등어 한 마리와 무국.<br>③ 제상에 오르는 각종 나물과 어물, 산적, 탕국을 곁들여 비벼먹는 헛제삿밥. 입가심은 안동식혜가 제격이다.

    이른 아침 불쑥 찾아온 손님을 백구가 컹컹거리며 맞는 하회마을.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방문으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잘 정리된 ‘민속촌’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이 마을은 23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생활 터전으로 주민의 75%가 풍산 류씨다. 마을 어귀에서 탈공방을 하고 있는 류시중씨는 “외지로 나갔던 사람들도 돌아오는 분위기여서 인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도 젊은 시절 대구에서 살다 1986년 고향으로 돌아와 김동표씨(하회탈박물관 설립자)에게 하회탈과 장승 제작법을 배웠다.

    ‘만송정 소나무에 눈 녹는 경치’(하회 16경 중 하나다)를 볼 수 없는 계절을 탓하며 방향을 바꿔 북쪽 천등산으로 향했다. 산자락에 자리한 봉정사(鳳停寺)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과 다포 양식의 웅장미를 보여주는 대웅전, 고금당, 화엄강당 등 신라·고려·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한 품에 안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앞에서 큰스님의 독경소리에 정신이 팔려 하산을 서두르다 보면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아름다운 무대인 영산암을 놓칠지도 모른다.

    동서남북으로 정신없이 안동을 가로지르다 다시 안동댐 부근에 이르렀다. 지난 4월 안동댐에 국내 최장의 나무다리 ‘월영교’가 완공되면서 KBS 드라마촬영장, 조각공원, 민속박물관, 안동댐 등 주변 관광지도 활기를 되찾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 헛제삿밥이나 간고등어와 같은 전통음식도 맛볼 수 있다. 헛제삿밥은 말 그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먹는 밥이다. 원래 안동 양반들이 밤참으로 먹던 음식이었는데 21년 전 ‘까치구멍집’(까치구멍이 있는 초가집을 가리키는 말) 손차행(86) 할머니가 손님용 상차림으로 내놓아 큰 인기를 끌면서 안동 명물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며느리 서영애(51)씨가 까치구멍집(054-821-1056)의 대를 잇고 있다.

    또 몇 년 전부터 간고등어가 새롭게 안동명물로 떠올랐다. 소금에 절인 고등어를 구워먹고 쪄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하랴 싶지만 잘 구운 고등어 한 마리와 고추장으로 묻힌 장떡, 날배추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밀가루를 묻히고 살짝 기름을 둘러 부친 김치전을 곁들이면 어느새 수몰된 고향집 생각에 울적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KBS드라마 촬영장으로 가는 길 언덕배기의 ‘왕건’(054-821-6440)에서 간고등어 정식과 함께 주인 김강남씨가 직접 만든 장떡과 배추전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예향(禮鄕) 안동의 깊은 맛을 보기에 2박3일의 여정은 너무 짧았다.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경북 안동

    영주 부석사에서 의상대사가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려보내 그 봉황이 앉은 자리에 봉정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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