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상근 전 명지대 총장(가운데)이 통일원 장관으로 재직중이던 1976년 유영구 이사장(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은 유 이사장의 동생 병진씨.
‘아버지의 못난 아들’
이렇게 가족사적인 사연을 장황하게 쓰는 것은 오십고개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아직도 아버지 삶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심에서다. 쉬운 말로 나는 아버지 덕을 무척 본 사람이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있게 한 부모님을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이로 꼽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한 인간이 성년이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모님의 양육을 제대로 못 받는 불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다행히 나는 운명의 도움으로 과분한 부모님의 양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어른이 된 뒤에도 한평생 아버지가 이룩한 육영사업을 뒤따라가고 있으니 참으로 ‘아버지의 못난 아들’일 뿐이다. 앞으로라도 ‘잘난 아들’이 되려면 아버지와 운명, 그리고 사회에서 받은 막중한 빚을 제대로 갚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가장은 나름대로 크고 작은 삶을 이끌어간다. 처음에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공동체 기능을 떠맡아 ‘나’와 ‘우리’뿐만 아니라 ‘남’까지 떠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아버지 역시 육영사업을 하다 보니 정말로 많은 ‘남’을 내 자식처럼 떠맡게 됐다.
사람이 하는 일이 사회성을 띠게 될 때 창업(創業)이라고 한다. 창업에는 그 규모와 내실에 따라 크고 작은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 크게는 나라와 기업, 작게는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창업이란 삶의 진지한 표출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이룩한 위대한 창조의 드라마가 자칫 성공 신화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처럼 창업자 역시 당대에 몰락하거나 또는 크게 병드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당신이 이룩한 신화에 자만하지 않고 뒷사람을 위해 작지만 탄탄한 육영사업을 남겨놓고 가셨다. 나의 소명은 이 귀한 ‘육영’이란 나무를 물 주고 거름 주어서 더욱 크고 튼튼한 나무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으로 나뉜다. 창업이 매우 어려운 일임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수성 또한 이에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변화의 속도가 비교적 더딘 시절에는 넘겨받은 금화를 그대로 지키기만 해도 수성이 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금화를 더 큰 것으로 불려야만 한다. 현대적 의미의 ‘수성’은 고전적 ‘수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배만 남겨주었을 뿐 항해술은 가르쳐주지 않아
아버지는 나에게 배와 해도(海圖)를 남겨주셨지만 배를 모는 항해술은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명지’라는 작은 배를 내 자신의 책임과 기술로 항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을 일컬어 ‘사무사(思無邪=참된 마음)’라고 했다. 아버지의 한평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무릇 사랑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가정을 포함한 인간 세상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사랑의 표현방법도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마음과 표현을 두루 갖춘 것이었다. 이를테면 총론과 각론을 갖춘 사랑, 그리고 나와 남을 함께 아우른 열린 사랑이었다.
1986년 1월21일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셨다. 이때까지 우리 집안은 중국 작가 라오서(老舍)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4대가 함께 사는 이른바 ‘사세동당(四世同堂)’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그리고 아들(증손주 겸 손주). 4대가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런데 이 다복한 ‘사세동당’에 문제가 생겼다. 맏며느리인 집사람이 줄줄이 딸만 낳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