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신약 ‘렉라자’ 병용요법 美 허가, 국내 첫 사례
2018년 얀센에 기술이전, 약 800억 원 마일스톤 전망
개방형 혁신 성공 사례…“세계 50대 제약사 도약할 것”
[Gettyimage]
한국은 신약 불모지로 꼽힌다. 100여 년의 국내 제약업계 역사에서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은 30여 개에 불과할 정도이고,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 시장에 진출한 약물은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특히 항암제 분야에서는 1999년 국산 1호 신약 SK케미칼의 ‘선플라이주’를 시작으로 동화약품 ‘밀리칸주’, 종근당 ‘캄토벨주’ 등이 잇달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았지만 모두 FDA의 문턱을 넘진 못했다.
유한양행이 개발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는 미국 존슨앤드존슨(J&J)의 자회사 얀센의 정맥주사(IV) 제형 항암제 ‘리브리반트’(성분명 아미반타맙)와의 병용요법으로 8월 20일 FDA 품목허가를 받았다. 국내 혁신신약으로는 9번째, 항암제로는 처음으로 FDA 허가를 받았다.
‘렉라자+리브리반트’ 폐암 환자 사망 위험 30%↓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가 8월 23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렉라자 FDA 승인 이후 유한양행의 경영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새로운 신약 개발 계획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해당 병용요법은 비소세포폐암 환자 중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EGFR·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가 있는 환자에게 1차 치료제로 처방한다. 항암제는 환자에게 처방되는 순서에 따라 1~3차 치료제로 나뉜다. 약물치료 전력이 없는 암환자에게 국산 항암제를 먼저 쓸 수 있게 된 것도 렉라자가 처음이다.
폐암은 조직형에 따라 크게 소세포성 폐암과 비소세포성 폐암으로 구분한다. 비소세포폐암은 전체 폐암 환자의 약 80% 이상을 차지한다. 환자의 30~40%는 EGFR 변이가 나타나는데 일부 환자들은 돌연변이에 의한 내성으로 기존 1~2세대 표적치료제 사용이 어려워지게 된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대표적 3세대 치료제로는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성분명 오시머티닙)가 있다. 타그리소는 2015년 FDA 허가를 받은 이후 EGFR 비소세포폐암 시장을 석권하고 있으며,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7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렉라자+리브리반트 병용요법 허가는 마리포사(MARIPOSA) 3상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이뤄졌다. 렉라자+리브리반트 병용요법은 질병 진행 또는 사망 위험을 오시머티닙 단독 요법 대비 30% 감소시켰다. 1차 평가지표인 무진행 생존 기간(PFS)과 반응 지속 기간(DOR) 역시 각각 23.7개월·25.8개월로, 오시머티닙(16.6개월·16.8개월) 보다 더 길었다.
이번 미 FDA 허가로 유한양행은 얀센으로부터 약 6000만 달러(한화 약 825억 원)의 마일스톤(단계적 기술료)을 수령하고, 최소 10% 이상의 제품 판매 로열티를 받게 된다. 허가 후 통상 3개월 안에 약가 산정 등을 거쳐 처방이 이뤄지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 안에 미국에서 출시되고 그에 따른 로열티도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J&J는 미국 시장에서의 렉라자+리브리반트 병용요법 매출 목표를 연간 50억 달러(약 6조7000억 원) 규모로 잡은 상태다. 얀센은 일본·유럽·중국 등 세계 주요 제약 시장에서도 상용화 절차에 돌입했다. 또 리브리반트를 근육에 투여하는 피하주사(SC) 제형으로 개발해 렉라자와 병용하는 요법으로 추가 허가 신청에 나서 별도의 마일스톤 발생도 기대되는 상황이다.
렉라자가 국산 신약으로는 처음으로 글로벌 블록버스터 의약품 반열에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업계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렉라자의 사례가 국내 신약 개발 기업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블록버스터는 단일 품목 하나로 연 매출 10억 달러(약 1조 원) 이상을 내는 의약품을 뜻한다. 블록버스터 의약품 존재 유무는 이른바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핵심 키로 꼽히지만 아직 우리나라 신약 가운데 글로벌 블록버스터 제품은 없는 상황이다. 렉라자가 첫 성공 사례를 만들어준다면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계에 긍정적 시그널을 주게 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렉라자’의 FDA 시판 허가를 축하하는 논평을 내고 “국내 개발한 항암 신약이 최초로 FDA 관문을 통과한 것은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역사적인 쾌거”라고 평가하며 “국제 기준으로 볼 때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혁신을 통해 신약 강국이자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시장인 미국 시장의 입성에 성공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체 항암치료제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폐암치료제 분야에서 렉라자가 효과 좋은 신약으로 평가받아 온 점을 감안할 때 한국 제약바이오산업 사상 첫 1조 원대 매출의 블록버스터 탄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전했다. 이어 협회는 “이번 FDA 승인을 계기로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개발한 국산 신약의 위상이 제고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시장 진출이 한층 가속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오픈이노베이션’ 성공 신화…무상 공급 통해 모범 보여
유한양행 설립자 고 유일한 박사. [동아DB]
회사는 이번 렉라자 성과를 통해 제약기업으로서 중요한 사회적 책임 중 하나인 신약 개발에도 좋은 본보기를 보여줬다. 통상 신약 개발에는 10년 이상의 긴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수반된다. 그마저 개발이 쉽지 않아 규모가 작은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엔 쉽지 않은 도전이다. 유한양행은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택했다. 그간 제약바이오기업들은 기술 유출 등의 우려로 폐쇄적 기조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유한양행은 국내 바이오벤처에서 개발한 유망 신약후보물질을 도입해 자체적으로 임상을 진행했고, 꾸준한 R&D 투자 등을 통해 상용화에 성공했다. 유한양행은 매년 전체 매출의 20% 이상을 R&D에 투자하고 있다. 현재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신약 파이프라인 33개 중 16개가 오픈이노베이션을 통해 도입한 물질이다.
유한양행은 “좋은 약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고 그 수익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일한 박사의 기업 이념을 계승해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는 데도 일조했다. 지난해 6월 렉라자가 국내에서 1차 치료제로 허가 받은 후 건강보험 등재 전까지 제한을 두지 않고 무상으로 의약품을 제공하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당시 회사가 추진한 조기 공급 프로그램(EAP)은 전문의약품이 시판 허가된 후 진료 현장에서 처방이 가능할 때까지 해당 약물을 무상 공급하는 프로그램이다. 국내에서 새로 나온 혁신 신약을 쓰기 위해선 건강보험 등재가 필수적이다. 급여 등재된 1차 항암제를 사용할 땐 약값의 5%만 부담하면 되지만, 비급여로 처방받을 땐 연간 수천만 원의 비용이 발생해 치료 접근성이 떨어진다. 국내에서 먼저 비급여 처방이 이뤄지던 타그리소도 1년 약값이 7000만 원에 달했다.
유한양행은 글로벌 제약사도 하지 못한 신약 무상 공급 프로그램을 선제적으로 시행했다. 렉라자는 1차 치료제로 처방하기를 희망하는 전국의 2, 3차 의료기관에서 무상으로 환자들에게 제공됐고, 작년 말까지 900여 명의 환자들이 혜택을 받았다. EAP 시행 당시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는 “약효를 알면서도 형편상 약물을 복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이라며 “치료에 대한 경제적 부담까지 떠안는 것을 막고자 사회 환원이란 중요한 이념을 바로 실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AP 시행은 렉라자의 건강보험 급여 등재 후 시장 안착 및 처방 확대로 이어지는 데도 영향을 줬다. 부작용이 없을 경우 약제를 바꾸는 상황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올해 예상 렉라자 처방액은 1000억 원이다.
“렉라자 이을 글로벌 블록버스터 직접 개발”
유한양행은 다시 한번 ‘최초’ 타이틀에 도전한다. 회사는 창립 100주년을 맞는 2026년 연 매출 4조 원을 달성해 ‘글로벌 50대 제약사’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50위 제약사들의 연 매출 실적은 약 4조~5조 원 정도다. 블록버스터 신약 하나만 나와도 상위 50위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지난해 유한양행의 연결 기준 매출액은 1조8590억 원이었고, 올해는 2조 원을 거뜬히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김열홍 유한양행 R&D 총괄사장은 8월23일 렉라자 미국 허가 기념 간담회 자리에서 “이번 렉라자 FDA 허가를 기점으로 제2·3의 글로벌 블록버스터를 직접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며 “블록버스터로부터 나오는 수익금을 통해 안정적으로 R&D에 투자하고 회사의 지속성 확보와 우리나라 제약산업 발전 기여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유한양행이 올 상반기 투자한 연구개발비는 전년 동기 대비 36% 증가한 1000억 원에 육박한다. 올해 연간 R&D 비용은 약 2500억 원으로 전망된다. 현재 임상 단계에 진입한 파이프라인은 총 8개. 올해 중 4개를 추가해 내년 총 12개의 임상 파이프라인을 확보할 방침이다.
차기 혁신 신약 후보군으로는 알레르기 치료제 ‘YH35324’, HER2 양성 고형암 치료제 ‘YH32367’, 고셔병 치료제 ‘YH35995’ 등이 있다. 이 중 알레르기 치료제 후보물질 ‘YH35324’는 렉라자를 이을 차기 성장동력으로 꼽고 있는 물질이다. 2020년 7월 지아이이노베이션으로부터 기술 도입해 임상 1b상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올해 2월 긍정적인 1a상 결과를 발표함에 따라 기술이전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1a상 결과에 따르면 YH35324는 알레르기 질환을 유도하는 면역글로불린(IgE) 수치가 상승된 환자에서 우수한 안전성 프로파일과 기존 치료제 대비 강력하면서 지속적인 억제 활성도를 보여줬다.
희귀질환인 고셔병 치료제 ‘YH35995’는 7월 임상 1상 계획을 승인받았다. 고형암 치료제는 임상 1/2상 시험 진행 중으로 내년 중 중간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유한양행에 이어 10번째로 FDA 허가를 받을 국산 신약 후보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렉라자보다 먼저 글로벌 블록버스터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HLB의 간암치료제 ‘리보세라닙’과 중국 항서제약의 ‘캄렐리주맙’ 병용요법은 5월 FDA의 보완요구서한(CRL)을 받으며 심사가 지연됐다. 국산 30호 신약인 HK이노엔의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은 올 하반기 FDA에 신약 허가를 신청해 내년 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이 독자 개발한 뇌전증 혁신 신약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는 미국 매출 확장을 통해 글로벌 블록버스터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세노바메이트는 약 20년간 R&D에 매진해 기술수출 없이 2020년 미국, 2021년 유럽 등에 출시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세노바메이트의 미국 매출은 지난해 1분기 539억 원에서 올해 909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8.5% 성장했고, 2분기는 1052억 원을 기록해 미국 직접 판매 매출만으로 첫 분기 1000억 원을 달성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약 66% 증가한 수치다. 오는 2029년까지 세노바메이트를 글로벌 블록버스터로 키우는 것이 SK바이오팜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