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간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누구의 익사체일까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하얀 혓바닥으로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게들이 하늘을 본다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
2015092015년 08월 21일마흔아홉 살
나는 안개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흩어지는구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구나 커튼이 모른 척 딴짓을 하고 있구나 뭉쳐 다니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구나 안개와 나는 자주 길을 잃는구나 커튼이 불빛을 삼켜도 불빛이 집 한 채를 삼…
2015082015년 07월 23일수평선
함께 가는 수평선에서바다와 하늘도 만나는데왜 긴 눈언저리 너머당신과 나는 둘이 될까요처음부터 알았던가요그대와 내게 남겨진 생은점점 멀리 두는 데 익숙해진그 바다를 안은 하늘처럼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수평선으로 남겨지겠죠잠깐만 쉬고 갈…
2015072015년 06월 24일노래는 아무것도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영원이 아니어라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2015062015년 05월 21일寧國寺
오래 자란 은행나무 국물을 마신다땅에서 올린 잎사귀 흔들리고 있다흙에서 박은 줄기 솟구쳐 몸 맺고다시 솟구쳐 절 낳고난간 치며 번져가는 소리를 풀었다밤과 새벽 걸어와 모두 면을 먹는다차지게 다진 강력분나물과 잘게 썰려 비벼진 양념작…
2015052015년 04월 21일찬란한 봄날
나무들이 물고기처럼 숨을 쉬었다비가 그치지 않았다색색의 아이들이 교문을 나섰다병아리 몸짓의 인사말조차들리지 않았다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문구점간판이 물풀처럼 흔들렸다자동차가 길게 줄을 서서수만 년 전 비단잉어의 이동로를 따라느릿느…
2015042015년 03월 19일골공(骨空) 경전
새는 오래전에 비행법을 잊어버렸다창살 밖 햇살은 얼마나 눈이 시릴까겨울나무 사이로 난 길은 또 얼마나 정다울까숨 막히는 일상의 아침은 언제나 더디게 오고퍽퍽해진 깃털을 만지며 출항을 준비하는 가장몰가치와 몰염치로 채워진 뼈 속날지 …
2015032015년 02월 23일이월의 날씨
이월의 날씨가 책장을 만지작거린다넘길까 말까 도로 덮어버리는 겨울 날씨막 물을 퍼 올리던 나무가 두레박을 놓았다영등바람이 귀뺨을 때린다 얼얼하다실컷 때리고 나면 저도 지치겠지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봄 아씨나갈까 말까따놓은 문이라 열…
2015022015년 01월 21일아리랑
익어가는 달빛이 아플까차마 못 밟아가던 길 멈춰 선한 그루 나무흐르는 달빛에 흐느적거려해묵은 심사를 파아랗게 젖힌한 포기 물초한 가닥 피리소리휘휘 저어서감아올린 옛 꿈은 언제면 저 달 속에하아얀 들국화로눈이 시게 피어볼까-시집 ‘달…
2015012014년 12월 19일마흔다섯 살의 가출
네 가슴에서 별로 뜨지 못하는 내 말이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충혈된 눈으로 밤을 지키는 눈두레박을 내려 길어 올린 바람이죽은 이들의 뼈마디 속을 걸어간다수액을 짜면 그의 속살이 보이고전 우주를 움켜쥔 채풀섶에 매달려 있는 나…
2014122014년 11월 19일바닥
바닥이 차갑다바닥은 따뜻해야 한다불처럼 뜨거워서도 안 되고얼음처럼 얼어 있어도 안 된다피곤한 등을 대고 잠을 자거나 쉬고손을 짚고 발을 디뎌일어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바닥이 기둥이 되기 때문이다바닥은 어디에도 있다의자에도 있고길에도 …
2014112014년 10월 21일초가을 초저녁
나무에게 가서 산에 관해 떠들고돌에게 가서 허공에 관해 지껄이고개에게 가서 들판에 관해 소곤거리던초가을 초저녁이 여기에 지금 와 있다불룩하고 둥그스름하고 펑퍼짐한 초가을 초저녁에게나무가 산에서 물소리를 가져왔냐고 묻고돌이 허공에서 …
2014102014년 09월 18일나에겐 나만 남았네 _ 사랑의 북쪽
어느덧나에겐 나만 남았네나에겐 나만 남고 아무도 없네나에겐 나만 남고당신에겐 당신만 남은그런 날당신은 당신이 되고나는 내가 되고서로 서로 무죄일 것 같지만그렇게 남으면 나는 나도 아니고당신은 당신도 아니고당신도 나도 아무도 아니고단…
2014092014년 08월 20일항해일지 _ 아버지 Ⅰ
어린 시인, 아버지를 따라 섬에서 바다로 길을 찾아 떠났제라첫 항해는 목선을 타고 하늘 바다 사이 새떼들 날고, 평화는 바다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작은 무지개가 살랑거렸제라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어린 시인 콧노래 흥얼거리며 낚시질을…
2014082014년 07월 18일방충망
이곳은 월경금지! DMZ 철책 같은방충망에 방아를 찧듯 나방은거푸 머리를 들이받히면서도형광등 환한 불빛 유혹에 겨워방 안으로 기를 쓰고 날아들려고삶이란, 한여름 밤 불나방처럼 이렇듯눈부신 세상으로 비행을 꿈꾸는 것그러나 사방 둘러친…
2014072014년 06월 19일등산
산에 올라가자 산에 올라가자 벗들 임들우리 모두산에 올라가백의민족으로하얗게 하얗게산자락 뒤덮고마음껏 실컷 대성통곡하자산기슭에서 태어나산기슭에 묻힌내 조상들의 산을 내려와 다시 시작하자다시 말하자다시 꿈꾸고다시 일터를 가자엉엉 울어버…
2014062014년 05월 20일달과 황소
출렁이는 하늘황소가 운다꽃으로 피고 싶어 하는 구름들이 몰려다니고버려진 꿈들이 소란을 피우면흘러갈 곳을 잃은 달이 창밖에서 운다나비처럼창가에 붙어 서서 허수아비처럼귀 기울이면달을 짊어진 황소가 운다
2014052014년 04월 21일사월에 내리는 눈
얼마나 알량하면지척에서 놀던 봄이 오다 말고지레 놀라오그라진 살 속에 얼음덩어리 눈으로 내리겠느냐눈에 덴 가슴이 뜨겁다불구덩이보다 뜨겁다열리다 만 사랑이 눈을 감고 연기처럼 하롱인다바람이 젖은 백지장처럼담벼락에 붙는다사월에 오다가 …
2014042014년 03월 19일편지
어젯밤 부는 비바람에목련꽃 다 지겠네못다 핀 벚꽃들 다 지겠네 끝내 닿지 못한 소망처럼 꿈처럼 목련은 지고 그대가 보낸 시를 읽고한 잎 두 잎 지기 시작하는 목련꽃을바라보는 아침 그 떨어져 날리는 꽃잎이바로 그대의 마음이었나 그 …
2014032014년 02월 19일다시 철새들도 추억 속에 집을 짓는다
철새들이 철원을 찾는 마음 여전하다. 애꾸 중 궁예가 웅거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 강하의 조운은 어려우나 읍에서 북으로 칠십 리. 망망한초원 중 방방곡곡 놀 만한 철원에 대한 인상이 유전자 속에 각인된다.갈앗재 비낀볕에 캐터필러 …
2014022014년 0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