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國寺
오래 자란 은행나무 국물을 마신다땅에서 올린 잎사귀 흔들리고 있다흙에서 박은 줄기 솟구쳐 몸 맺고다시 솟구쳐 절 낳고난간 치며 번져가는 소리를 풀었다밤과 새벽 걸어와 모두 면을 먹는다차지게 다진 강력분나물과 잘게 썰려 비벼진 양념작…
2015052015년 04월 21일찬란한 봄날
나무들이 물고기처럼 숨을 쉬었다비가 그치지 않았다색색의 아이들이 교문을 나섰다병아리 몸짓의 인사말조차들리지 않았다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문구점간판이 물풀처럼 흔들렸다자동차가 길게 줄을 서서수만 년 전 비단잉어의 이동로를 따라느릿느…
2015042015년 03월 19일골공(骨空) 경전
새는 오래전에 비행법을 잊어버렸다창살 밖 햇살은 얼마나 눈이 시릴까겨울나무 사이로 난 길은 또 얼마나 정다울까숨 막히는 일상의 아침은 언제나 더디게 오고퍽퍽해진 깃털을 만지며 출항을 준비하는 가장몰가치와 몰염치로 채워진 뼈 속날지 …
2015032015년 02월 23일이월의 날씨
이월의 날씨가 책장을 만지작거린다넘길까 말까 도로 덮어버리는 겨울 날씨막 물을 퍼 올리던 나무가 두레박을 놓았다영등바람이 귀뺨을 때린다 얼얼하다실컷 때리고 나면 저도 지치겠지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봄 아씨나갈까 말까따놓은 문이라 열…
2015022015년 01월 21일아리랑
익어가는 달빛이 아플까차마 못 밟아가던 길 멈춰 선한 그루 나무흐르는 달빛에 흐느적거려해묵은 심사를 파아랗게 젖힌한 포기 물초한 가닥 피리소리휘휘 저어서감아올린 옛 꿈은 언제면 저 달 속에하아얀 들국화로눈이 시게 피어볼까-시집 ‘달…
2015012014년 12월 19일마흔다섯 살의 가출
네 가슴에서 별로 뜨지 못하는 내 말이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충혈된 눈으로 밤을 지키는 눈두레박을 내려 길어 올린 바람이죽은 이들의 뼈마디 속을 걸어간다수액을 짜면 그의 속살이 보이고전 우주를 움켜쥔 채풀섶에 매달려 있는 나…
2014122014년 11월 19일바닥
바닥이 차갑다바닥은 따뜻해야 한다불처럼 뜨거워서도 안 되고얼음처럼 얼어 있어도 안 된다피곤한 등을 대고 잠을 자거나 쉬고손을 짚고 발을 디뎌일어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바닥이 기둥이 되기 때문이다바닥은 어디에도 있다의자에도 있고길에도 …
2014112014년 10월 21일초가을 초저녁
나무에게 가서 산에 관해 떠들고돌에게 가서 허공에 관해 지껄이고개에게 가서 들판에 관해 소곤거리던초가을 초저녁이 여기에 지금 와 있다불룩하고 둥그스름하고 펑퍼짐한 초가을 초저녁에게나무가 산에서 물소리를 가져왔냐고 묻고돌이 허공에서 …
2014102014년 09월 18일나에겐 나만 남았네 _ 사랑의 북쪽
어느덧나에겐 나만 남았네나에겐 나만 남고 아무도 없네나에겐 나만 남고당신에겐 당신만 남은그런 날당신은 당신이 되고나는 내가 되고서로 서로 무죄일 것 같지만그렇게 남으면 나는 나도 아니고당신은 당신도 아니고당신도 나도 아무도 아니고단…
2014092014년 08월 20일항해일지 _ 아버지 Ⅰ
어린 시인, 아버지를 따라 섬에서 바다로 길을 찾아 떠났제라첫 항해는 목선을 타고 하늘 바다 사이 새떼들 날고, 평화는 바다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작은 무지개가 살랑거렸제라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어린 시인 콧노래 흥얼거리며 낚시질을…
2014082014년 07월 18일방충망
이곳은 월경금지! DMZ 철책 같은방충망에 방아를 찧듯 나방은거푸 머리를 들이받히면서도형광등 환한 불빛 유혹에 겨워방 안으로 기를 쓰고 날아들려고삶이란, 한여름 밤 불나방처럼 이렇듯눈부신 세상으로 비행을 꿈꾸는 것그러나 사방 둘러친…
2014072014년 06월 19일등산
산에 올라가자 산에 올라가자 벗들 임들우리 모두산에 올라가백의민족으로하얗게 하얗게산자락 뒤덮고마음껏 실컷 대성통곡하자산기슭에서 태어나산기슭에 묻힌내 조상들의 산을 내려와 다시 시작하자다시 말하자다시 꿈꾸고다시 일터를 가자엉엉 울어버…
2014062014년 05월 20일달과 황소
출렁이는 하늘황소가 운다꽃으로 피고 싶어 하는 구름들이 몰려다니고버려진 꿈들이 소란을 피우면흘러갈 곳을 잃은 달이 창밖에서 운다나비처럼창가에 붙어 서서 허수아비처럼귀 기울이면달을 짊어진 황소가 운다
2014052014년 04월 21일사월에 내리는 눈
얼마나 알량하면지척에서 놀던 봄이 오다 말고지레 놀라오그라진 살 속에 얼음덩어리 눈으로 내리겠느냐눈에 덴 가슴이 뜨겁다불구덩이보다 뜨겁다열리다 만 사랑이 눈을 감고 연기처럼 하롱인다바람이 젖은 백지장처럼담벼락에 붙는다사월에 오다가 …
2014042014년 03월 19일편지
어젯밤 부는 비바람에목련꽃 다 지겠네못다 핀 벚꽃들 다 지겠네 끝내 닿지 못한 소망처럼 꿈처럼 목련은 지고 그대가 보낸 시를 읽고한 잎 두 잎 지기 시작하는 목련꽃을바라보는 아침 그 떨어져 날리는 꽃잎이바로 그대의 마음이었나 그 …
2014032014년 02월 19일다시 철새들도 추억 속에 집을 짓는다
철새들이 철원을 찾는 마음 여전하다. 애꾸 중 궁예가 웅거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 강하의 조운은 어려우나 읍에서 북으로 칠십 리. 망망한초원 중 방방곡곡 놀 만한 철원에 대한 인상이 유전자 속에 각인된다.갈앗재 비낀볕에 캐터필러 …
2014022014년 01월 21일함부로 주지 말아라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아무것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말아라술한테 주고 잡담한테 주고 놀이한테 너무 많은 자기를 주지 않았나 돌아다보아라가장 나쁜 것은 슬픔한테 절망한테 자기를 맡기는 일이고더욱 좋지 않은 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
2014012013년 12월 18일方向
그냥 무료히 꺾인 날들무슨 일이 스쳐갔더라 새벽은 그냥 열리고 문을 나서면 허허들판어디더라 거기가 어디더라방향을 잡으나 그 방향은 아니고젊음은 파릇하게 스치나노년은 어둡고 스산하여헤매다보면 幻影뿐다시 낯선 허허벌판 어디더라 거기가 …
2013122013년 11월 19일11월, 아득히 먼
햇볕이 적금된 통장그 붉고 노란 단풍잎마다비밀번호를 적고 사인을 했다.허허한 겨울을 위해 마음의 지갑을 채운다.어둠의 폭포를 뚫고 밤새 풀어헤친귀뚜라미의 사설그 벽에 붙어서 북을 친다.장단 추임새에 만가(輓歌)도 들썩인다.아궁이에 …
2013112013년 10월 18일돌아가신 어머님의 몸을 닦으며
반듯이 누우신 어머님하, 어머님하. 납작이 엎어진 놋사발 두 개의 젖가슴이시여. 일만 사발의 젖물, 일만 사발의 정화수, 삼만 사발의 눈물하.
2013102013년 09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