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위의 바람과 구름
눈을 감은 그의 가슴 위엔흰 국화 몇 송이가죽은 나뭇가지의 그림자날아가던 새가 떨어뜨린 붉은 발자국이졸음처럼 흙이 쏟아진다인부들은 부지런히 삽질을 한다철 이른 민들레 몇 송이가 뿌리째 관 위로 떨어진다검은 한복을 입은 여자는 눈을 …
2007032007년 03월 12일길의 아들에게
넘어질 듯 뒤뚱뒤뚱안 넘어지고 되똥되똥걸음마 배우는 내 아들아발 디딘 곳 다 도착지이며그 다음 걸음은 다 출발점이란다한 번 갔던 길 가고 또 가면그 길에서는 잡풀이 올라오지 않아계속 길일 것이다많이 걷게 될 것이다 아들아걷다보면 성…
2007022007년 02월 07일단풍
무덤에 서 있는한 그루 나무.바람과 서리에속을 다 내주고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추석에 돌보지 못하고다 저문 가을 내려와고향 밭둑,아버지 무덤에 선다.모두들 고향을 떠났지만사시사철무덤을 지키고 선나무 한 그루.저녁 햇살에 빛나며,무덤…
2007012007년 01월 08일12월 달력을 바라보며
한 해를 돌아볼 겨를 없이 11월 달력을 넘겼다.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무슨 일 어떻게 하며 한 해를 보냈던가?돌아보니 뽀얗게 내리는 눈발에하얗게 덮여버린 들판처럼모두 파묻혀 아무 색도 찾을 길 없다.기쁘고 즐거워 가슴 따뜻했던 붉…
2006122006년 12월 08일가을편지
가을 바람 심술궂은 걸억새만 아는 게 아니다.가을 하늘 맑고 푸른 걸산국화만 아는 게 아니다.가을 바람 심술궂어억새가 산국화에 기댄다.가을 하늘 맑고 푸르러산국화가 억새에 기댄다.기대서는숨결을 주고받는다.따뜻하다.가을볕이.오랜만에참…
2006112006년 11월 06일그때 그 키스
그날 저녁 너는 내 입술에기습적인 키스를 베풀어주었지남자가 여자에게 덤벼드는 키스가 아니라여자가 남자에게 덤벼드는 키스라서나는 온몸이 경련에 휩싸이며정신이 아찔해지는 엑스터시를 느꼈지그때 그 키스그리고 우리의 화급(火急)한 사랑그날…
2006102006년 10월 13일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쪼그리고 앉아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생글생글 웃는 아이비밀을 갖고 가저 곳서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언제였던가,간질간질하던 때가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소녀처…
2006092006년 09월 14일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자장면을 사먹고 길을 걷는다오늘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에게 숨기지 못하고네가 내 오른뺨을 칠 때마다 왼뺨마저 내어주지 못하고또 배는 고파 허겁지겁 자장면을 사먹고 밤의 길을 걷는다내가 걸어온 길과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너덜너덜 …
2006082006년 08월 14일백합
네 뜨거운 핏속에백합향기 가득하여나, 즐거이네 백합향기에 취해세상을 떠나네.
2006072006년 07월 21일어린이날
시골집 다락방에 남아 있는 앉은뱅이 책상 하나, 서랍 속에 꼭꼭 접어 넣어둔 네모칸 공책 종이 한 장, 꺼내 두근두근 펴 보니 내 이름 석자, 아버지하고 나하고 처음 써 보았던 한글, ㅈ을 ㅅ으로 잘못 쓴 첫 글자 다시 썼구나 고무…
2006062006년 06월 15일봄에 낯선 산과 어우르다
우리나라 어디든 낯선 곳에 가더라도눈 들어 바라보면 어디서 본 듯한 산들이 있어가슴 설레고 발걸음 항상 가볍습니다처음 본 산들은 낯선 사람처럼 마음을 닫다가도그 산에 들어가기만 하면몇 마디 주고받는 말에 임의로워져서곧 나와 한몸이 …
2006052006년 05월 02일귀
바람소리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물소리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귀는 얼마나 많이 들어버렸는가사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세상소리 더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귀는 얼마나 많이 잘못 들어버렸는가
2006042006년 03월 29일밤참
기름 치고 밥을 비벼먹습니다동치미 국물은 없고그냥 따듯한 물 마시며그런데 잠 일찍 깬 쥐가춥고 배고팠던지천장을 울리며 덜덜덜 달려옵니다아니 아니 시집 못 간 처녀 쥐가아래층 총각 혼자 밥 먹는다고나무 조각 물고 와뜨득 뜨드득 소리를…
2006032006년 03월 07일귀에 걸린 입
안온한 그 어머니의그 품속, 유년기를나이 먹는 재미로 산 듯겁 없는 그 흰소리그대로관객 없는 무대 위.스카라무슈 이 희화.소명을 거스른 오도(誤導),가슴 죈 강물 앞에두려움의 띠를 매고경건히 머리 숙이면보이리,뿌린 씨앗 웃자라그 실…
2006022006년 02월 02일꽃의 날개
1.만일 꽃이라면꽃씨라면단숨에 날아바다를안으리.소금기 밴 어시장(魚市場)에 앉아우우우흐느끼리.갈매기 떼지어 날 적에나도 따라길을 뜨리.2.두어 모금 술에 취(醉)해찾아든선창(船艙)이거든별빛도속삭임도말끔히 담아 두리저녁이 물러갈 쯤이…
2006012006년 01월 13일이빨 한 쪽
지난 여름 금강산에 묻은 내 이빨은지금 어떤 싹을 틔우고 있을까서서히 금강석이 되어가고 있을까그때 지구촌 곳곳에서 온 시인들과“평화”를 주제로 함께 시를 낭송하며북녘 땅을 처음 밟았을 때금강산 자락에 묻고 온 내 이빨 한 쪽기러기 …
2005122005년 11월 30일비둘기
아주 잘 생긴 장갑 한 짝떨어져 있다집었더니목 없는 비둘기였다무엇을 잡으려는데,감쪽같이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손가락 쫙 벌리다 멈춘 비둘기 꼬리세상 떠나며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저런 손자국 같은 것인가?
2005112005년 10월 26일부석사(浮石寺)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가면오랫동안 세속에 젖은 비루한 삶도영혼이 밤하늘의 별처럼순결해진다.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적막하고느린 가을 햇살은 맹렬하게주변의 사과나무에 내려온통 붉은 물감으로 수채화를 그리는데,부석사 올라가는 은행나무 …
2005102005년 09월 30일오래된 선풍기
얼마 전부터 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고양이 울음소리인가도 싶다누가 끙끙 앓는 소리 같기도 하다알고 보니 선풍기 삐걱대는 소리다결혼하면서 장만하여아이들보다 나이 많은 선풍기천천히 돌면 힘이 덜 들 터인데치매라도 걸렸는지덜덜거리며 …
2005092005년 08월 25일뾰족구두
그건 모험이야그 나이에 이젠 굽 낮은평화가 좋지 않느냐고나는 충고하지만아내는 요지부동 뾰족구두다좀 위태위태하지만몇 센티만 높아도 얼마나 더 커 보이는데오늘도 딱-딱-딱-딱-평화보다 모험을 택한 아내가조금 낮추더라도 평화롭기를 바라는…
2005082005년 07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