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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한 병에 문화의 향기를 담는다

와인 한 병에 문화의 향기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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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포도주산업은 철저한 장인정신과 국가보증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 ‘와인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프랑스 포도주의 대명사 또는 레드와인의 고향으로 불리는 보르도를 방문, 세계 최상품의 와인을 만드는 비결을 알아봤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VIP담당 책임자인 마틴 꾸르티아드는 환한 얼굴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눈가와 입가에 가득한 주름으로 미뤄 족히 예순은 넘어 보이는 이 인상 좋은 금발의 여인은 활력이 넘쳤다. 샤토의 곳곳을 안내하는 동안 내내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입뿐만 아니라 눈으로 손짓으로 포도주 제조과정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나뭇잎 모양의 큰 귀고리가 인상적이었다.

무통 로쉴드는 제조과정이 점차 기계화되는 추세에 아랑곳없이 수확에서부터 발효와 숙성(저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처리하고 있다. 포도를 따는 작업부터 그렇다. 요즘은 기계로 포도를 따는 포도원이 늘고 있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만 포도를 딴다. 제조과정의 첫째 관문인 발효 과정에서도 이 샤토는 요즘 점차 늘고 있는 스테인레스 탱트 대신 전통 기구인 오크통(떡깔나무나 참나무 계통) 사용을 고집하고 있다. 숙성과정에서도 마찬가지. 그밖에 포도즙 찌꺼기를 거르는 작업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한다. 이 또한 요즘엔 기계로 처리하는 샤토들이 늘고 있다.

샤토란 본래 성(城)이나 대저택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와인과 관련해 쓰일 땐 포도원을 가리킨다. 프랑스 와인 관련법에 따르면 일정 면적 이상을 갖춘 포도원으로서 와인 생산 및 저장시설이 갖춰진 곳을 샤토라 일컫는다.

세계 최대 와인 생산국인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는 크게 6개 지역으로 나뉜다. 보르도 보르고뉴 론 루와르 알자스 상파뉴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일찍이 우수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해온 보르도는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지명이다.



보르도가 프랑스 포도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최고 품질의 레드 와인(적포도주)을 다량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국내에서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와인의 3분의1 가량이 바로 보르도산이다. 생산량 또한 압도적이다. 6개 지방 중 가장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는 화이트 와인(백포도주)의 명산지로 알려진 보르고뉴 지방 생산량의 2배 가까이 되는 수치다. 전세계로 가장 많이 수출되는 와인도, 점차 수입량이 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와인도 보르도 산이다.

보르도 포도주와 백년전쟁

파리 몽빠르나스역에서 고속열차인 TGV(떼제베)를 타고 3시간 가량 달리면 보르도시에 도착한다. 승용차로는 5∼6시간 걸리는 거리다. 프랑스 제6의 도시인 보르도시는 보르도 지방에 있는 40여 개 시 가운데 하나로 이 지역에서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 노릇을 하고 있다.

보르도 지방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게 두 개의 강이다. 각각 가론강과 도르도뉴강으로 불리는 두 강은 보르도 지역 한가운데를 흐르며 토양에 영향을 끼친다. 두 강은 최고급 와인 생산지로 이름 높은 마고 마을 근처에서 하나로 합쳐져 대서양으로 흘러가는데, 두 강과 대서양을 잇는 큰 강이 지롱드강이다.

보르도는 ‘하늘이 내린 포도주의 성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포도주는 한 해 동안 쏟아진 햇빛, 비와 바람의 양, 토양, 열매 따는 시기, 숙성기간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마법의 술’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 강을 품고 있는 이 지역의 토양과 지층구조, 기후 등은 포도 재배에 안성맞춤이다. 자갈 또는 모래가 많은 토양은 온기를 오랫동안 품고 있을 뿐 아니라 배수가 잘 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는 포도가 자라는 데 좋은 조건이다. 이런 자연환경에선 포도 외 다른 농작물이 발붙이기 힘들다. 2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포도가 집중적으로 재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152년 영국왕 헨리 2세는 보르도 지방의 왕녀 에레나와 결혼했다. 에레나는 결혼 지참금으로 보르도 땅을 가져갔다. 이것이 뒷날 백년전쟁의 불씨가 됐다.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모든 포도주가 영국으로 넘어가자 프랑스인들의 불만이 고조됐던 것.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은 잔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가 승리, 보르도 포도주는 다시 프랑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보르도는 한마디로 포도주로 먹고사는 지방이다. 프랑스는 지방자치제 국가인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이 철저히 구분돼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 바로 보르도다. 보르도가 포도주산업으로 얻는 수익은 얼마나 될까. 수치보다 더 실감나는 것은, 중앙정부가 가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보르도 자치단체로부터 돈을 빌린다는 사실이다.

농협 축협이 있듯이 보르도에는 CIVB, 우리말로 ‘보르도 와인 전문협회’쯤으로 번역되는 와인협회가 있다. 보르도의 포도주 산업을 총괄 관리·감독하는 기구다. 보르도 시내 한복판 자유시민혁명탑 주변에 보이는 큰 현대식 건물이 바로 와인협회가 들어선 건물이다. 와인협회 로랑 페레즈 사무총장에 따르면 협회는 적정한 가격과 품질 관리를 위해 포도주 생산량을 통제하고, 판매 촉진을 위한 시장조사를 하는 한편 회원들을 대표해 각종 홍보활동을 펼친다.

한 해 2억8000만병 수출

협회에 따르면 보르도에 있는 샤토는 약 5000개. 그러나 영세한 소규모 업체까지 합하면 80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도주 산업 인구를 살펴보면 1만2000명의 생산자에 400개 중개상, 그리고 6만명의 노동자가 포도주 생산 및 판매에 종사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포도밭의 총면적은 67만ha(약 3억3048만평)에 이른다. 연간 평균 생산량은 6억5000만ℓ인데 그중 2억1000만ℓ가 수출량이다. 포도주 한 병이 보통 750㎖인 점을 감안하면 한 해 평균 약 8억6700만 병의 포도주가 생산되고 2억8000만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셈이다.

로랑 페레즈 사무총장은 아시아 시장에 대해 “아시아 경제 위기 영향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수입량이 크게 떨어졌으나 최근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호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은 일본이며 홍콩 대만 한국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이 주요 소비국이다.

아시아, 특히 한국 시장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얘기는 포도주 공장을 운영하며 중개업 및 판매를 겸하고 있는 종합주류회사 앙드레 깡가드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 회사는 보르도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뀌브작시에 자리잡고 있다. 기자는 이 회사가 갖고 있는 포도주 제조공장을 약 2시간에 걸쳐 둘러보았다.

현 사장 조엘 깡까드는 할아버지 삼촌의 뒤를 이어 1980년부터 회사를 경영해왔는데 지난해 10월 2년 전부터 찾아든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외지인에게 팔았다. 일본인과 미국인이 투자에 참여, 상당량의 지분을 확보했다. 그에 따라 조엘 깡까드는 약간의 지분을 가진 채 월급 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 프랑스엔 요즘 이런 식으로 외국 자본에 넘어가는 포도주 제조회사나 중개상이 적지 않다고 한다.

소유권을 넘길 당시의 심정을 묻자 그는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

“가족들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회사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심정은 뭐랄까, 마치 뱃속에서 아이를 떼는 기분이었다.”

조엘 깡까드는 그러나 “회사의 성장을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 포도주 시장은 2년 전 IMF 위기로 크게 위축됐다가 최근 그 규모가 커지고 있는데, 이는 10년 전 일본 포도주 시장의 성장 속도와 비슷한 것이다.

이 회사의 아시아 수출담당 책임자 로랑 베리세르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아시아에서 포도주 수입량이 눈에 띄게 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다. 반면 기존의 큰 고객인 일본 시장은 프랑스 내수와 마찬가지로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로랑 베리세르는 “IMF 이후 한국 소비자들의 포도주 취향이 고급에서 저급으로 바뀌고 있다. 단 것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단 술일수록 피로감이 빨리 몰려오므로 건강에 좋지 않다”고 우려했다.

세계 최상급 그랑 크뤼 와인

보르도에서는 생산하는 와인의 품질에 따라 샤토의 등급이 매겨지는데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해 한 번 정해진 등급은 여간해 바뀌지 않는다. 가장 품질이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엔 그랑 크뤼(Grand Cru: 위대한 포도원)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랑 크뤼 샤토에서 만든 와인의 라벨엔 그랑 크뤼 클라세 또는 그랑 뱅 따위의 문구가 표기된다.

보르도 지방의 와인 산지는 크게 메독, 생테밀리옹, 소테른, 그라브, 포메롤 등 5개 지역으로 나눈다. 공식적으로 샤토 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1855년 이후 이제까지 그랑 크뤼 등급을 받은 포도원은 약 160개. 그중 가장 우수한 품질의 그랑 크뤼 샤토들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보르도 와인의 간판으로 알려진 메독 지역이다. 메독 지역엔 60개의 그랑 크뤼 샤토가 있다. 그랑 크뤼 샤토는 다시 5등급으로 나눈다. 그랑 크뤼 중에서도 1등급이라면 세계 최상품의 와인임에 틀림없다. 라벨에 프르미에(premier) 그랑 크뤼라는 문구가 붙는다.

온통 포도밭으로 뒤덮인 메독 지방에서 그랑 크뤼 1등급 샤토는 네 곳뿐이다. 포이약과 마고 두 도시에 있는데, 글머리에 소개한 무통 로쉴드는 포이약에 있는 그랑 크뤼 1등급 샤토 세 곳 가운데 하나다.

메독 지방은 대서양으로 흐르는 지롱드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길쭉한 지형을 갖고 있다. 가론강이 가로지르는 보르도 시내에서 메독의 포이약 마을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포도밭길이다. 2차선 도로 양 옆으로 푸르른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길과 농가를 빼놓곤 다 포도밭이다. ‘포도밭 지평선’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포도나무들의 키는 채 1m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탁한 흑청색의 포도들이 촘촘히 달려 있다.

보르도에서 자동차로 1시간 가량 달리자 길가에 샤토 무통 로쉴드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샤토 안으로 들어서자 수십여 명의 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단체로 안내원을 따라 다니며 샤토를 둘러보고 있었다. 기자는 VIP담당 책임자 마틴 꾸르티아드의 별도 안내를 받았다. 보르도 현지에서 구한 한국인 유학생이 통역을 맡았다.

무통 로쉴드는 80ha(약 24만평)의 포도밭을 갖고 있다. 샤토 오른쪽 끝에서 차를 타고 5분만 가면 지롱드강이 나타나고 왼쪽으로 25분 가량 달리면 바다, 곧 대서양이 눈앞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수확하는 포도의 주품종은 카비네 소비뇽.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이 품종은 보르도에서 가장 흔한 것으로 떫은 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풍부한데, 오래 숙성시킬수록 부드럽고 그윽한 맛을 내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와인 제조는 포도를 따는 일에서 시작된다. 웬만한 샤토들은 9월말쯤 포도 수확을 끝낸다. 이맘 때면 포도는 익을 대로 익어 까맣게 변한다. 마틴 꾸르티아드에 따르면 올해는 6, 7월에 햇빛량이 적었던 탓에 수확시기가 예년에 비해 조금 늦을 것 같다. 지금쯤 익어야 하는데 아직 덜 익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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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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