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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붉은 별 바렌츠해에 지다

동토의 붉은 별 바렌츠해에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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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의 참사를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다만 사건의 주요 흐름과 시간은 공개된 사건일지를 기초로 서술되었으며 등장인물 역시 실제 탑승자 명단에서 인용했다.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 미국 및 영국 잠수함과의 공방전이 묘사된 부분은 러시아 해군이 주장하는 충돌설을 기반으로 구성한 픽션이며, 잠수함 내부의 폭발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일단 제시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원인불명으로 남겨두었음을 밝힌다.》
”수고했네, 세르게이. 당직을 인수받겠다.”

사령실로 들어선 함장 겐나디 랴친(G. P. Liachin) 대령이 활기찬 얼굴로 부함장을 치하했다. 세르게이 두드코(S. V. Dudko) 중령으로부터 절도 있게 경례를 받은 랴친 대령은 즉시 당직 인수절차를 지시했다.

“부함장 세르게이 두드코 중령, 함장님께 지휘권을 인계합니다.”

“14시부로 함장이 지휘권을 인수한다.”

영관급 장교답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가 교차했다. 기울다 못해 완전히 쓰러져 가는 구소련의 영광을 당분간 절대 재현하지 못하겠지만, 러시아가 이렇게 핵잠수함을 계속 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너무 기뻤다. 조국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러시아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외국에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바로 핵잠수함이었다.



“신입 수병들 근무태세는 어떤가? 당직 이수과정이 3회나 있었군.”

함정근무일지를 넘겨받은 랴친 대령이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해당 부서마다 지휘자가 있지만 인간이 쉬지 않고 근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급자들도 그 지휘임무를 맡을 수 있도록 훈련받으며, 당직 수행자격이라는 특별한 절차를 통과해야만 부서장 임무를 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전투함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당직이다. 전투나 위기상황 발생시의 총원전투배치가 아닌 경우에 함정의 지휘는 모두 당직체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탑승요원 중 20퍼센트가 첫 항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적응이 매우 뛰어난 편입니다. 두 명이 당직 이수과정을 통과했습니다.”

“대단하군.”

부함장 두드코의 보고를 받은 함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최고 수준의 순항미사일 공격형 잠수함 쿠르스크, 탑승한 승무원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두드코 중령은 곧 있을 어뢰 발사 훈련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령실 요원들의 함정 통제상황도 좋았고 조금 전에 실시된 공격수행훈련을 무장반 요원들이 썩 잘 마쳤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의 팀워크를 보면서 부함장은 젊은 승무원들이 지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빈사상태에 빠진 러시아 해군을 밝은 미래로 이끌어갈 소중한 자원이었다.

잠시 후, 사령실로 바그리안체프(V. T. Bagriantsev) 대령과 그의 참모진이 들어섰다. 쿠르스크가 속한 제7 잠수함 전대의 지휘관인 바그리안체프가 온 것은 조금 뒤에 실시될 어뢰사격훈련을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함장 랴친 대령이 그들을 절도 있게 맞았다. 미국 항공모함과 같은 대형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건조된 쿠르스크 같은 순항미사일 잠수함들은 단독작전을 하지 않고 반드시 동료 잠수함을 동반하고 공격에 나선다. 만약 대규모 작전일 경우 정찰잠수함과 공격형 잠수함 수 척, 그리고 다른 순항미사일 잠수함도 함께 배속되며, 여기에 다시 순양함과 구축함등 대규모 수상전투함 전단까지 가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 해군에 소속된 초음속 폭격기인 백파이어까지 합동공격에 참가한다. 이번 훈련은 이런 대규모 작전상황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쿠르스크가 제7 전대의 기함이기 때문에 전대장과 참모들도 탑승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훈련은 쿠르스크의 단독항해로만 짜여 있었다. 전성기에 러시아 해군이 실시했던 대규모 훈련을 떠올리던 두드코 중령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두드코 중령은 전대장과 참모들에게 가상 작전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작도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순간 함장석 바로 위에 붙어 있는 인터폰으로 긴박한 보고가 울려 퍼졌다.

-사령실, 소나실입니다. 방위 0-3-0에 수중음을 접촉했습니다. 잠수함으로 추정됩니다.

“알았다. 식별부호 1을 부여한다. 추적을 시작한다.”

랴친 대령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이곳 해역에 출몰하는 미 해군의 공격원잠과 접촉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두드코 중령은 정체불명의 잠수함 접촉에 움찔했지만 함장의 차분한 대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실, 소나실입니다. 표적 1의 추정거리는 1만 미터입니다. 방위 3-2-0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최대속도로 가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향 패턴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급으로 추정됩니다.

“젠장, 여긴 우리 러시아의 안마당입니다. 놈들이 이곳까지 맘대로 유린할 수는 없습니다.”

소나실의 두 번째 보고가 이어지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장교는 7전대의 작전참모였다. 그리고 그 불만에는 내심 이곳 해역에 또 다른 우군 잠수함이 없다는 것과, 러시아 수상함정들이 초계활동을 펼치지 않은 것에 대한 힐난이 섞여 있었다.

무르만스크와 세베로도빈스크, 그리고 비디아예보 등 바렌츠 해에 위치한 러시아 해군의 주요 기지들은 북쪽의 콜라 반도로부터 둥글게 감싸는 형태로 수중고정소나망(SOSUS)이 운용되고 있었다. 만약 적이 이곳을 침범할 경우, 가장 먼저 수중고정소나망이 탐지하고 곧이어 육상기지에 배치된 대잠초계기나 대잠헬기들이 출격해서 적 잠수함을 저지하게 된다.

“현 상황은 귀항 후, 상부에 심각하게 보고해야 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적 잠수함이 출몰했는데도 우리가 경고받지 못한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7전대 작전참모의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해저바닥에 부설된 SOSUS는 저인망 어선들의 그물에 종종 훼손된다. 그것을 복구하고 유지하는 비용을 이제 러시아 해군은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두드코 중령은 작전참모의 힐난을 수긍하지만 작전항해를 자주 해보면 그런 일도 이제 일상사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7전대장 바그리안체프 대령과 함장 랴친 대령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질주와 표류, 전형적인 양키군. 저건, 놈들이 자기네 잠수함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지. 무능한 녀석이라면 저렇게 도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인지 랴친 대령이 씩 웃으며 부함장에게 말했다. 두드코 중령도 미소로 함장의 판단에 동의했다.

미국 잠수함은 상대방을 먼저 포착할 경우 미리 예정지점으로 질주(sprint)한 다음, 소나 효율이 좋은 수심과 위치를 선택하여 그곳에서 기관을 정지하고 조용히 해류를 따라 표류(drift)하는 전술을 자주 쓴다. 상대가 접근해올 때까지 숨죽이고 매복해 있는 것이다.

“한 놈이 더 있을 거야. 자기들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겠지. 교활한 양키들!”

이번엔 7전대장 바그리안체프 대령이 응수했다. 잠수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전대장님, 이것은 좋은 실전 훈련입니다. 작전구역 변경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놈들을 따돌린 다음 뒷덜미를 잡겠습니다. 이곳 해역에서 다시는 얼쩡거리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강력하게 경고해주겠습니다.”

함장 랴친 대령이 전대장에게 요청했다. 그는 양키 잠수함을 처리하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바그리안체프 대령은 잠시 주저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그 역시 피가 끓는 바다 사나이였다.

“좋소. 작전구역 변경요청을 받아들이겠소. 단, 다음 안전보고 간격까지에 한해서요. 그때는 추적을 멈추고 사령부로 보고해야 하오.”

작전중인 잠수함은 지정된 시간에 사령부와 정기적인 통신을 실시해야 한다. 이른바 안전보고간격(Subcheck Interval)이라고 하는 통신보고를 하지 않으면 비디아예보(Vidiayevo)에 위치한 잠수함 사령부에서는 수중의 잠수함과 통하는 장거리 초장파(ELF) 통신망을 가동하여 잠수함에게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서방측 해군의 경우, 통상적으로 통신확인을 명령한 후 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잠수함 수색작전이 시작되고, 만약 4시간이 경과할 때까지도 통신응답이 없으면 잠수함 실종(Sub Miss)을 선포한다. 그것은 사실 잠수함 침몰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잠수함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전보고간격만은 절대 지켜야 했다.

“물론입니다. 전대장님.”

전대장의 흔쾌한 응답에 랴친 대령이 어깨를 펴며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제 실로 오랜만의 숨바꼭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잠수함들과의 추격전이 시작되자 두드코 중령은 잠시 긴장했다.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침로를 변경한다. 좌현 15도! 방위 2-9-0을 향한다. 기관 전속!”

“침로 변경! 좌현 15도! 방위 2-9-0!”

“증속합니다. 기관 전속!”

랴친 대령의 명령에 잠항관과 기관장이 힘차게 복창했다. 1만 8,000톤의 거함 쿠르스크에 장착된 스크루 두 개가 맹렬히 회전하며 거친 바렌츠 해에 물거품을 일으켰다. 미국 원잠이 고속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역시 이쪽에서 최대속도로 움직이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잠수함이 수중에서 30노트 정도의 고속으로 움직이면 소나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스크루가 고속으로 회전하면 캐비테이션(Cavitation)이라는 항주 잡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정된 지점에서 미국 원잠이 허탕을 치는 동안 함장은 뒤를 잡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또 다른 미국 잠수함이 있다면? 그러나 두드코 중령은 함장을 믿고 있었다. 랴친 대령은 러시아 잠수함 승무원들에게 은신처라 불리는 지점을 알고 있었다. 복잡한 해류 변화,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온도층으로 음파가 난반사하는 곳이다. 로스엔젤리스의 성능 좋은 소나도 이곳에서는 쿠르스크를 앞서지 못한다. 랴친 대령은 만약 적이 둘이라면 두 녀석 모두에게 똑같이 모욕을 줄 생각인 것 같았다.

8월 12일 21:20 세베로모르스크 (Severomorsk), 러시아 북해함대사령부

“참모장, 무슨 일인가?”

집무실로 들어선 비아체슬라프 포포프 대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포포프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비디아예보에서 긴급 연락입니다. 작전중인 잠수함 한 척으로부터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만약 10분 이내에 응답이 없으면….”

참모장 미하일 모차크 중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모차크 중장이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제기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단 말인가!”

포포프 대장이 힘없이 모자를 벗으며 중얼거린 다음 참모장에게 확인했다.

“쿠르스크(Kursk)함이겠지?”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쿠르스크입니다.”

모차크 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북해함대는 러시아 최고의 주력함대다. 구소련의 전성기 때는 핵추진 잠수함만 70여 척, 디젤잠수함 10여 척을 보유했고 그중 15퍼센트에 이르는 잠수함들이 항상 대양으로 출동해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북해함대 소속 잠수함 숫자는 1/3 가깝게 줄어들었고 그중 작전중인 잠수함은 그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이제 공격형 원잠은 기껏해야 한두 척이 바다에 나가 있을 뿐이었다. 북해함대 사령관 포포프 제독은 이제 바다에서 작전중인 잠수함을 직접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쿠르스크가 마지막으로 통신을 보내온 위치는 어디인가?”

포포프 대장이 집무실 벽에 걸린 커다란 해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고도 훤하게 해저지형을 짚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북위 69도 40분, 동경 37도 35분입니다. 오늘 오전, 그 해역에서 어뢰사격훈련을 실시하겠다는 마지막 보고가 있었습니다.”

“으음…”

해도를 확인한 포포프 대장 입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났다. 수심이 100여 미터에 불과한 해역이어서 잠수함의 통신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면 초장파(ELF)를 수신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곳이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 함정을 출동시킨다.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헬리콥터가 대기중입니다. 하지만 세베로도빈스크(Severodovinsk) 기지에 정박중인 구조선박이 출항 준비를 갖추려면 한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됩니다.”

“이런 망할! 모든 게 느리군.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고개를 홱 돌리며 포포프 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모차크 중장을 질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참모장을 탓할 문제도 아니었다. 바로 그것이 현재 러시아 해군의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게 현재의 러시아 해군이었다.

모차크 중장이 예하 부대로 이어지는 직통전화를 집어들고 소리를 질러가며 명령을 내리는 동안 포포프 제독의 시선이 다시 해도로 옮겨졌다. 차라리 사고라면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다른 경우라면? 잠수함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할 경우에는 통신체계 외에도 여러 가지 비상송신체계를 이용해서 사고 사실을 기지에 통보할 수 있다. 구조송신 부표(Buoy)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잠수함은 수중에 머무를 경우 통신전파를 물 밖으로 발신할 수가 없다. 이 경우 전파가 물 속에서 산란이나 난반사를 일으키며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수함은 통신용 부표를 탑재하고 있는데, 이 부표에는 잠수함의 현재 위치와 사고 직전의 최종상황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잠수함에서 이 부표가 사출되면 스스로 물 위로 떠오른 다음 자동으로 구난 신호를 사령부로 보내게 된다.

‘구조신호도 없었다면 혹시 선상반란? 망명?’

포포프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양키들의 베스트셀러 중에 소련 핵잠수함이 미국으로 망명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소설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시대배경이 그때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쿠르스크에 탑승한 부하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이 그렇게 쉽게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포포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서 사고해역으로 날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포포프가 다시 참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모장! 표트르 벨리키 전단의 준비상태는? 별도로 프리깃 전대 1개를 추가 편성하라.”

“사령관님, 현 상황에서는 전투함정보다 구조함이 우선입니다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구축함 전대는 이곳에 배치한다.”

참모장 모차크 중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령관이 가리킨 해점을 확인했다. 예상 실종위치의 외곽해역이었다. 순간 놀란 모차크 중장이 사령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령관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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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관·김경진·신재호·전쟁소설 데프콘, 동해 및 남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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