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3000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훌쩍 뛰어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수십, 수백억원을 삽시간에 벌어 당당한 사업가 행세를 하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주 최(崔)부잣집을 생각하게 된다.
최부잣집은 유장한 부자, 즉 졸부가 아닌 명부(名富)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집안이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집으로 조선팔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일 성싶다.
3대 부자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 반드시 집안 나름의 경륜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품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오후, 경주 교동(校洞) 69번지에 주소를 둔 최부잣집에 도착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교동 69번지는 특별한 장소다. 원래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 오른쪽 옆으로는 신라 신문왕 2년부터 자리잡은 계림향교(鷄林鄕校)가 있고, 뒤편으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어려 있는 계림(鷄林)이 자리잡고 있다. 또 왼쪽 뒤편으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5개의 커다란 봉분이 작은 동산처럼 누워 있고, 거기서 좀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재매정(財買井)이 있다.
이렇게 최부잣집은 주위가 온통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집터 자체가 박물관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최부잣집의 가훈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내려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를 차근차근 곱씹어보면 최부잣집의 향기가 배어 있다.
‘첫째,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한마디로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양반 신분증’이고나 할까.
최씨 집안은 진사는 유지해도 그 이상을 넘어서는 벼슬은 꺼렸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는 영국 속담처럼, 조선시대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한번 당쟁에 걸려들어 역적으로 지목되면 남자는 사약을 받거나 아니면 유배형을 당했고, 그 집안 여자들은 졸지에 남의 집 종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이다. 아마도 최씨 집안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멸문지화에 접근하는 모험으로 여겼던 것 같다.
최부잣집의 둘째 원칙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다.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이다. 돈이라는 것은 한번 모이면 가속도가 붙는 ‘이상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 불가 원칙에 따라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당시의 소작료는 대체로 수확량의 7∼8할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최부잣집은 남들같이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을 받으면 재산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그 소작료를 낮추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5할이나 그 이하로도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기들은 혜택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도 좋아진다는 상생(相生)의 현장이 구현된 것이다. 사촌이 논 사면 내 배 아프다는 속담과는 전혀 다른, 진정으로 아름답고 통쾌한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둘째와 같은 맥락의 가훈이 넷째 ‘흉년에 논 사지 말라’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흰 죽 한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란 말도 있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쌀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로서는 이때야말로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것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자가 흉년에 논 사면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다. 헐값에 논을 넘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두 수 앞만 내다보면 그 원한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은 불문가지다. 최씨 가문은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를 가졌던 듯하다.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과 예를 강조하다 보니 사회분위기가 자칫 경직될 수 있었다. 그 경직성을 부분적이나마 해소해주는, 융통성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과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던 사회에서는 여행을 하는 나그네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의 사랑채에서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머물다 가는 일이 흔했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고급 룸펜이 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이 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들도 있어서 주인집 사람들의 사주와 관상을 보아주기도 하고, ‘정감록’이란 참서로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주인양반은 온갖 종류의 과객을 접촉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여행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이들 과객집단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최부잣집에서는 이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자.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석 정도. 이 가운데 1천석은 집안에서 쓰고, 1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을 과객접대용으로 썼다고 하니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최부잣집에서는 과객을 접대하는 데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 상객(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매끼 ‘과매기’ 1마리를 제공하고, 중객(中客)에게는 반마리, 하객(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과매기는 전라도나 충청도에는 없는 경상도 특유의 음식으로 포항, 울산 지역에서 나는 마른 청어를 가리킨다. 현재는 마른 청어 대신에 마른 꽁치를 과매기라고 부르는데, 주로 날씨가 추운 겨울에 제 맛이 난다.
최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00명까지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에서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설 때는 최부잣집 주변에 있는 초가집(노비들이 사는 집)으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노비집으로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과객에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과매기 1마리와 쌀을 주어서 보냈다.
과객이 최부잣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집으로 가면, 그 노비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대가로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받았다. 최부잣집에서 50∼60리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내야 했지만, 인근의 노비들은 과객 대접한다는 공로로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