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꿈은 짧고 굵게 사는 것. 만약 5년 동안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 죽으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주위의 ‘싸가지 없다’는 말에 대해선 “그런거 안 키운다. 난 의뭉 떠는 거 딱 밥맛이다. 싸가지 없다는 말 들어도 내 소신대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천수의 말은 거침이 없다. 월드컵 미국전에서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패한 것에 대해서 “내가 찼으면 틀림없이 넣었다”거나 “이탈리아전에서 이탈리아 아이 머리를 깠는 데 굉장히 통쾌했다”고 눈도 깜짝 않고 말한다. 또 “국내엔 존경하는 선수가 없다”며 요한 크루이프를 으뜸으로 친다. 한때 대표팀에 들지 못했을 땐 이민을 생각한 적도 있다. 그때 그는 “내가 고종수나 이동국형보다 낫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지도자 욕심은 하나도 없다. 툭하면 목 잘리는 것 보고 ‘절대 안하겠다’고 결심했단다.
그는 말한다. “난 의외로 순진하고 단순하다. 마음 속에 감춰두는 것도 없다. 난 앞으로 10년 이상 축구를 해야 한다. 그 10년 동안 가식적인 말과 행동을 일관되게 유지할 자신이 없다”고.
요즘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다. “아니 미국이 힘세다고 우리를 깔보다니… ” 이천수는 여중생 두 명이 압사한 얘기를 듣고 하도 열받아 그의 매니저에게 ‘미군장갑차 한 대에 얼마나 가느냐’고 물었다. 그거 한 대 사서 확 불태워 버리려고….
중학교 때 축구 시작한 송종국

[사색파] 송종국
그러나 송종국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포르투갈전 후반에 주장 홍명보가 선수들에게 “미국이 폴란드에게 지고 있다”고 알려주자 즉각 “아이, 끝까지 긴장해야 되는데 그런 얘긴 왜 해요”라고 항의를 했을 정도로 속이 깊다.
송종국도 이천수 못지않게 어렵게 살았다. 충북 단양 산골이 고향. 버스가 하루에 한 번밖에 들어오지 않는 산꼭대기 마지막 집에 살았다. 서울로 와서는 명일동 지하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생활했다. 그는 어렸을 적 늘 맛있는 게 넘쳐나는 슈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축구도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배워온 다른 아이들은 튼튼한 기본기 위에서 곧잘 여러가지 기술을 구사했지만 송종국은 그렇질 못했다. 그러나 송종국은 일단 잘못된 부분을 지적받으면 그게 한 달이 걸리든 십 년이 걸리든 하나하나 조금씩 조금씩 반드시 고치고야 마는 아이였다.
송종국은 대학교 1학년부터 3학년 중반까지 10번 패스를 하면 8번은 상대팀에게 공을 내줄 정도로 패스 미스가 잦았다. 게다가 스피드 변화가 없어 별명도 ‘슬로우’. 때론 빠르게 때론 천천히 순간 스피드가 있어야 하는데 송종국은 늘 같은 슬로 템포로 뛰었다. 당시 김호곤 감독에게 욕먹는 건 늘 송종국이었고 맞는 것도 또 송종국이었다. 오죽하면 김감독에게 맨날 같이 혼나던 친구가 송종국에게 “내가 너 때문에 버틴다. 너 이렇게 매일같이 맞고 욕 먹고 해도 잘 버티는데… ”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송종국은 그런 스트레스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묵묵히 마음속에 묻어두고 혼자 삭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꼬박 3년 동안 남몰래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게임에 나갈 때마다 “오늘은 스피드 변화를 시도하자, 스피드 변화를 시도하자” 하면서 오로지 그 생각만 하고 뛰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오늘은 집중하자, 집중하자” 하면서 뛰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3년 후 그는 그런 나쁜 습관들을 모두 고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