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삼층석탑 출처:http://skjun.net
‘순백의 탑’이라 불리며 경주 여덟 괴(怪 : 신자의 수도 경주에서 있었다는 아름다운 경치 여덟 곳을 이름. 전설적인 것도 포함됨) 중의 하나인 나원리 석탑에 도착한 시각이 저녁 무렵. 강 건너 경주 시내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질 무렵 노을에 비끼는 석탑의 낙조를 보기 위해 탑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불문곡직하고 나원리 석탑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나를 안내원으로 알고 당당히 요구한 것이다.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올망졸망 나의 입만 쳐다보는 80여 개의 눈동자를 차마 비켜갈 재간이 없어 승낙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전문용어까지 써가며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풀어냈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이들이 타고 온 버스로 경주시내로 들어와야 했다. 그 중 한 여학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라면하고 우동을 말씀하셨는데 혹시 지금의 라면과 우동이 탑에서 유래된 말인가요?”
곱상한 서울말씨였다. 순간 나는 이 여학생이 버스 안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좌중을 웃기려고 농담으로 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표정이 진지했다.
‘아, 이 일을 어쩔까?’
라면과 우동의 어원?
물론 나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듣기 어려웠겠지만 문화재 용어를 생전 처음 접하고 한문을 잘 모르는 젊은이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의 지붕돌에 빗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경사를 준 것을 ‘낙수면(落水面)’이라 하고 그 낙수면이 서로 만나는 경계지점을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라 하는데 이 젊은 세대들은 그만 ‘낙수면’을 라면이라 들었고, 자연 ‘우동’은 먹는 우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라면과 우동’의 곡절 있는 어원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만 것이다.
다시 한번 버스 안에서 탑의 용어에 대해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해주었는데 이번에는 한문의 뜻을 풀어서 말해주니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고 결국 모두가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는 역사가 남긴 일기장
석탑은 천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에서 변함없이 이 땅의 영욕(榮辱)을 지켜봐 왔다. 풍상(風霜)의 격랑을 헤쳐오며 우리네 삶의 역사를 대변한 것이다. 저들은 우리가 누구의 자식이며 또 누구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를 증명해주는 찬란한 생명의 기록인 셈이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사가 수천만번 이어붙여진 뒤 다시금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 바로 역사(歷史)다. 역사라는 장구한 시간개념 속에서 내재율의 의미로 굳이 삶의 방식을 표현하면 이는 문화라 불릴 것이다. 이런 변화무쌍한 문화를 유형의 물질로 대치하는 삶의 흔적이 바로 문화재이다.
내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앞뒤를 안 가리고 살아오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나도 모르게 삶에 대한 권태와 울분이 자리했나 보다. 맞벌이 부부의 피곤함과 두 아이에게 갇혀 사는 답답함에 대한 반발심이 팽배해지면서 우리는 가족여행을 생각해냈다. 그 모티브는 우연히도 탑이었다.
탑은 몇 백년, 몇 천년을 꿈쩍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왔고 다만 우리가 삶에 휘둘려 빙빙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잿빛 아파트의 도시문화가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들려줄 동화나 고향의 이야기를 만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끼 낀 탑의 기단석에 걸터앉아 두 아들에게 내가 대신 들려줄 동화는 없을까? 그 천년의 동화를 들려주기 위해 나는 탑을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서기 7세기, 삼국시대에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는 통일을 이루고 나자, 이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으로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왕과 왕족, 평민의 신분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되어 불교를 더욱 융성하게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신라의 서라벌 곳곳에 절이 세워지고 그 마당에 탑이 자리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경주 남산에 올라가 서라벌을 내려다보며 읊은 노래가 이를 전한다.
“절들은 별처럼 자리잡고탑들은 기러기 날 듯이 솟아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